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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자성(自性)과 개인성(個人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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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트바 작성일1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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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를 탐구하는 지혜의 순례자라면 동서양의 철학애 관심을 두게 마련입니다. 깊게  연구하시는 분도 있고 단편적으로 핵심을 살펴보는 분도 많습니다. 그러다 하나에 몰입하기도 하지요. 내가 없으면 우주 만물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자아 탐구의 핵심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에 대한 물음이 되는 것이지요.

 

존재의 근원인 나를 나타내는 말에는, 자아, 에고, 실존 등등 여러 개념으로 다양한 말들이 사용되고 있지만, 유란시아 책에서는 개인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책을 처음 읽을 때는 평소에 알고 있던 자성(自性)이 개인성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이해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설명될 수 없는 우주 아버지의 배타적 증여라는 이야기가 점점 이끌리고 있습니다. 개인성 개념이나 의미적 해석은, 어쩌면 계시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이런 면에서는 자성은 개인성 개념과 전혀 다릅니다.

 

사실 자성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유일무이한 근원적 자기만의 특성을 뜻합니다. 깨달음의 근원이자 우주 만물의 궁극적인 본연의 어떤 것을 성(性)으로 이해하고, 만물의 이(理)와 세계관의 기(氣)가 발원되는 성리학의 성성(性)과 함께 해석해 보면, 참된 자성은 나라는 존재가 시작되는 근원적 본성이 됨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공(空)을 이룬 운명의 본성까지 포함하게 되지요. 그래서 좋거나 나쁘거나 올바르거나 그릇되거나 완성이나 미완성과 같은 어떤 수식어도 자성에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런 용어 해석이나 단순한 개념에서는, 자성은 개인성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시공간 세계에서 자성은, 탄생부터 운명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양식과 조건에 따라, 온갖 색과 향으로 그 독특한 모습을 표현하며 존재하지만, 시공간을 초월하는 자성으로 정진하면서, 체성 안에서 일시적으로 작용하며 족쇄가 되었던 이(理)와 기(氣)의 현상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라서. 성즉리나 심즉리의 이(理)와 기(氣), 아니면 법성을 벗어나거나 넘어서는 것이 깨달음의 목표가 되곤 합니다. 그것을 달성하면 공(空)의 자성을 이루었다고 말하지요.

 

어찌 되었건 이때의 공(空)은 비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점에서 시작된 창조적 존재가 무한하게 확정되어, 더 이상 남아있는 실체적 특징이 없기까지, 원생부터 궁극까지 자성과 체성 안에서 표현되었던 모든 성격, 성질, 성품, 성능, 기운, 기질, 모습, 현상 그리고 그것을 일으켰던 마음까지도 다 벗어버릴 수 있을 때의 경지이지요.

 

어느 분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진한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공(空)을 참된 자성의 경지라고 말하기도 하고요. 이 개념은, 궁극 운명의 달성에서 본다면 자칫 개인성과 개념에서 유사하게 이해됩니다. 개인성도 시공간의 모든 마음, 지혜, 성격, 본성, 특징과 상관없이 시작과 끝이 하나로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니, 참된 공의 자성과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물론 본질은 아주 다르지만요.

 

불교에서 변함없는 본래의 자성을 강조하려고, 진공묘유(眞空妙有), 영원의 공공, 궁극의 공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성취하는 고집멸도의 깨달음과 수행 과정에서, 아상(我相)을 극복해야 할 장애로 지목하는데, 깨달음의 길목부터 자성 안에서 움직이는 마음의 역동성을, 자성과 떼어내도록 요구하고 있느니, 궁극의 공을 이루려는 자성은 주체가 사라진 거대한 하나에 들어가 그와 더불어 더 이상의 분별심이 없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이 무(無)를 이룬 공(空)의 참 진리는, 궁극이라는 경지도 자성에 한정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자성의 원인과 벗어버린 이후의 결과에 대한 공(空)은, 개념적으로 존재할 수도 없고, 접근할 수도 없습니다.

 

유란시아 책의 설명으로 이해하면, 분별심의 근원이자 궁극의 하나인 자성, 비교할 대상이 존재할 수 없는 시공간의 초월적 자성을 최극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극을 넘는 궁극의 개념이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시공간에서 진정한 공(空)은, 최극을 막 넘어서는 경지로 해석됩니다. 유란시아 책의 궁극은 최극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이라서, 궁극의 공(空)은 의미가 없는 언어적 말이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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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념이 한 단어로 표현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사람이 무한과 얼마나 먼가를 보여줄 뿐이다. 무한은 한 편에서는 통합의 상태인 반면, 또 다른 한 편에서는 끝이나 제한이 없는 다양성이다. 무한은, 유한한 지능체들에 의해 관찰된, 창조체 철학과 유한 형이상학의 최대 역설이다. 사람의 영적 본성이 무한한 ​아버지께 경배하는 체험에까지 도달하더라도, 사람의 지적 이해 능력은 최극존재의 최대 개념에 의해서 고갈된다. 최극자를 넘어서면, 개념들은 점점 더 이름일 뿐이다; 실체에 대한 참된 명칭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며; 점점 더 초(超)유한에 대하여 유한하게 납득하는 창조체의 구체적 투사 활동이 된다.

 

무(無)를 이룬 공(空)을 성취하려는 인간의 도전은, 그 자체가 자성이 지닌 선천적인 에너지이자 본성입니다. 마침내 거대한 하나를 깨닫는 경지에 도달해도 그 합일에 대한 분별심을 버리지 않으면 참된 깨달음이라 말할 수 없지요. 결국 시공간에서의 궁극의 합일, 곧 최극을 해체해야만 참된 깨달음으로 나아갈 시작점이 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최극에 이르렀던 어떤 개념도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무력해지는 것이지요.

 

유란시아 책에서는 이에 대해, 근원에서의 합일, 진화에서의 합일, 그리고 운명에서의 합일이, 단지 무한한 합일과 상관된다는 깨달음이 유한 세계의 한계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 더 나아갈 수 있다고 계시하고 있습니다. 실재로 그것이 어떤 것인지 깨닫는 것은 각자의 몫이겠지만요.  

 

유란시아 책은 비록 우리에게는 이론적인 가정이기는 하지만, 궁극의 공을 넘어 다시 모든 근거가 사라지는 그 지점에서, 절대 차원에 대한 개념을 시작할 수 있도록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기원자. 실재자. 잠재자에 대한 초월적 개념이자 지혜이지요. 시공간에서의 참된 자성과 개인성의 원인과 운명을 밝히는 그리고 무한한 우주가 존재하는 진리인 것이지요. 그리고 "하느님의 뜻은 결국 이루어지며, 개별적인 것에 대해서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전체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 때문에,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진리를 우리의 능력으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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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극존재의 진리, 아름다움 그리고 선(善)에 대한 최종적인 통찰은, 진리, 아름다움 그리고 선(善)이라는 개념 차원들을 넘어서 있는 궁극적 신성의 아(亞)절대적 본질특성들로 발전하는 창조체에게만 보일 수 있다.

 

댓글목록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깊은 내막은 모르겠습니다만, 백과사전에 자성(自性)은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하지도, 영향받지도 않는 특성이라고 합니다. 위상이 높아지고 학식과 소양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것이어서, 개인성이 같은 의미로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자성은 자아를 대표하는 특성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는데, 자아는 전적으로 외부와의 관계와 영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서 개인성과 비슷하다는 의미는 사라집니다. 자성과 자아는 어떤 관계일지요.

사트바님의 댓글

사트바댓글의 댓글 작성일

자성은 자아의 특성이 아닙니다. 자아의 특성은 성격이나 성품이나 성질과 같은 것으로 지식이나 이해의 바탕에서 시작되어 결론에 이르는 본원이겠지요. 그것은 단지 자성이 표현되는 시공간에서의 현상만을 말하기에 발생적 근원에는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자아나 자아의 특성들은 연륜이나 환경이나 의식에 따라서 좋았다, 나빴다 변하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현상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바뀌고 요동치는 자아의 모습에, 갈등과 혼란을 겪기 때문에 진리를 찾는 것이지요.

인간의 지적 능력을 과신하면서, 자아 특성을 설명하는 원리를 진리로 여기면서, 그러한 특성과 현상을 정복하려고 평생 동안 수행하는 경우가 아주 많지요. 자성은 자아를 나타내는 원리나 특성이 아닙니다. 자아와 관계없는 그 이전의 원인이자 법입니다. 그것을 깨우치도록 이끄는 것이 참된 진리이고요.

코너킥님의 댓글

코너킥 작성일

존재의 운명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라서, 어느 시대나 계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시대마다 받아들일 만한 한계가 있다 보니, 진리도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것을 밝혀줄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유란시아 내용을 100년 전의 사람들에게 전해주었다면, 이 내용을 새로운 계시로 여길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듭니다.

지금 시대는,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초물질 현상과 초월 세계가 실체임을 입증하거나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기대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상상이고 어떤 실체적 이해가 불가능한 과거라면, 1부와 2부의 계시 내용은 사실적 진리가 아니라, 흥미로운 우주 신화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자성이 그런 과거 진리의 핵심이고 어쩔 수 없었던 시대적 한계였다면, 틀림없이 개인성과도 깊은 관련성을 갖고 확장될 수 있습니다. 개인성에서는 무엇보다도 우주 아버지와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개인적 관계가 핵심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성에 대한 진리가 절대자와 인간 존재가 일대일로 가지는 그런 초월적이고 직접적인 개인적 관계를 제시하지 않고 있었다면, 인간의 운명을 새롭게 밝히는 유란시아 책의 진리로 참된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자성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결정적 역할을 하겠지요.

연우님의 댓글

연우 작성일

감탄하면서 보았습니다. 인간의 자성을 둘러싸고 유란시아의 최극- 궁극- 절대로 이어지는 개념과 절묘하게 잘 연결이 되었습니다. 사트바님 글은 참으로 깊이가 있고 심오해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또 읽게 됩니다. 참 공부를 많이 하신 분 같습니다. 부럽습니다.
유란시아 독자 들 중에서는 기독교/천주교적인 배경에서 바로 넘어오시는 분들이 많아 불교를 비롯한 동양철학에 대해서는 상당히 그 이해가 부족하고 아는 지식이 거의 없어 무지한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그리고 유란시아라는 최고의 진리를 만나고 나서는 그 모든 것을 하수로 보는 우를 범하기도 합니다.

인류에게 새로운 빛의 시대의 여명을 열 계시가 물론 제일 중요하고 가장 최선단에서 모든 것들을 이끌어야 하는 역할은 맞지만 유란시아 이외의 다른 공부들을 배척하고 배격하며 무시하는 행동들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탐탁치 않으며 그런 경미한 행동들이 다양한 배경에서 오시는 독자들의 유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할까 그게 두렵습니다.

언제 시간이 되면 같이 만나서 차 한잔 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듣고 싶네요. 한 가지 질문을 좀 드려볼까 합니다.

마침내 거대한 하나를 깨닫는 경지에 도달해도 그 합일에 대한 분별심을 버리지 않으면 참된 깨달음이라 말할 수 없지요. 결국 시공간에서의 궁극의 합일, 곧 최극을 해체해야만 참된 깨달음으로 나아갈 시작점이 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최극에 이르렀던 어떤 개념도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무력해지는 것이지요. - 이 말은 본질을 깨닫고 터득해도 그 본질을 깨닫고 터득했다는 상에 잡혀버리게 되면 그것이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깨달은 자아라는 상을 만들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불교의 말과 비슷한 맥락으로 유란시아의 최극-궁극 개념을 이해해도 좋겠습니까? 만물의 공성.. 그래서 본래무일물의 경지를 철저히 각성하여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없고 모든 것이 본질, 본연이 펼쳐내는 모습이며 그 본질조차도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비유비무로 보는 게 제가 생각하는 불교의 모습 같은데, 그렇게 본질을 어떤 언어적 개념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서 계속해서 이어지는 다양한 우주의 차원과 모습이 아직 미현된 상태로 존재하고 그것이 실체로 구현되는 것이 근원의 섭리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래서 현재 우주 시대의 모든 초우주의 생명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차원인 최극에 도달했어도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그 합일이후에 더 큰 합일이 기다리고 있음을 각성하고 깨달아야 한다. 그런 말씀인가요? 뭔가 이해가 될 듯 하면서도 좀 아리송하네요.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사트바님의 댓글

사트바댓글의 댓글 작성일

많은 경전이 선정과 정각으로 이끌지만, 이 책은 사념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실천적 수행으로 안내하고 있어서, 짧은 생각이지만 글을 적어보곤 합니다. 좋게 봐주시니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는 생각에 안심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고노드에 말한 내용에, 기독교는 하나님을 잘 알고는 있지만, 영원의 바로 앞까지 다다를 수 있는 깨달음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기억이 납니다. 불교의 진리를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바로 앞에서 좌초'되어 있는 한계이기는 하지만, 그곳까지 다다르는 수행과 실천은 선조들의 유산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나 성취에 이르기 직전에 올바른 방향으로 수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계시인 셈이지요.

자성으로 본연의 성품을 깨달아 진여에 이르러도, 무아의 경계가 깨달음의 도착지가 아니라는 것이 계시가 주는 탈출구입니다. 그 시공간 마지막의 최극을 출발점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말씀하신 비유비무는 불교 깨달음의 정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만, 불교에서의 공의 자성은, 이제 탈출구를 발견해야만 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책의 설명에 따르면. 오히려 자성의 시작이 무아였으니, 영겁의 세월 동안 우주 공간에 유아의 모든 것을 내어보아 공을 이루는, 그러한 체험적 공의 자성이 되어야만, 비로소 궁극의 개인성이라는 무한한 진리로 발을 디딜 가능성이 있습니다. 책에서 궁극에 관하여 계시하지 못하는 이유도, 아마 최극 개념에서 고갈되는 시공간의 한계성 때문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이 고노드에게 "안전한 철학의 배에서 좌초한 채로 평안에 머물고 있다"고 지적하셨지요, 유란시야 계시는, 열정 넘치는 사랑의 탐험선에서 다시 도전에 나서라는 권하고 있습니다. 개인성에 대한 진리를 모른다면, 깨달음이나, 혹은 최극을 넘는 어떤 의식의 확장도, 시공간으로 회향하는 것이며, 무명을 멸한 존재성에서의 해탈이자 열반일 뿐입니다. 철학적 평안 속에서 영원한 침묵으로 들어가기를 선택하는 것이지요.

필사자는 시작된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궁극이란 개념으로 길을 보여주고 있는, 어떤 시작이 없는 체험을 인정할 자질을 부여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체험의 주체로서, 불생불멸의 자성을 포함하는, 궁극의 개인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궁극의 개념은 필사자에게 제시하기가 불가능한 것이지만요. 이런 관점이 자성을 뛰어넘어 개인성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우님의 댓글

연우댓글의 댓글 작성일

우와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안개가 끼어 온통 앞이 뿌예져서 안 보이다가 안개가 걷히고 다시 잘 보이게 된 듯 선명합니다. 유란시아 독자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이 정도로 명쾌하게 이해된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사트바님 말씀을 정리하면 만물의 궁극적인 본성, 즉 진여자성, 이것을 뭐 공성이라고 하겠지요. 이것을 증득하고 해오하여 모든 연기에서 자유로운 해탈에 이르기 위한 것이 곧 불교의 수련이고, 그렇게 해서 그 본성을 자각한다 해도, 그래서 부처님 처럼 오고 가는 곳이 없이 모든 인과관계에 자유롭고 청정해졌다 해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 좀 더 높게 본다 해도 시공간의 마지막 도달 단계이자 한계인 최극으로 봐야 한다 그렇게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말씀하신 것을 참고하여 제가 이해한 걸 또 말씀드리면 자성의 시작이 무아였다고 해도 그 무아를 경험하고 있는 '나'라고 하는 주체는 이 시공간의 제약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주체/객체로 나뉘어진 대상을 관조하여 바라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닙니다. 어쨌든 그렇게 수행을 해서 본질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비유비뮤, neti neti,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는, 생도 사도 없고, 전생도 윤회도 없으며, 천국도 지옥도 없는, 아니 분리라는 것을 떠난 본질이라는 것이 늘 언제나 이 시공간 속에 함께 있음을.. 즉 모든 현상들 속에 그것이 능 항존함을 철저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 부처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선사와 조사들의 가르침의 핵심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임제가 깨닫고서 덕산의 법도 별거 아니라는 말을 한 것 같네요.

다만, 그것이 단순히 공의 자성을 깨닫고 그것이 현상과 더불어 항존하며 불멸한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철저히 깨닫고 그 이후 더 이상의 진전이 없을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간직한 것이 계시가 아닌 수행종교의 한계이자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고노드에게 말한대로 평안 속에 머물고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좌초한 것이라고 하겠지요. 문제는 좌초한 것인지도 모른 채 거기서 열락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오류들을 바로 잡고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계시가 필요한 것이고 그 계시를 통해 우주 아버지가 우리에게 값없이 수여한 개인성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겠네요. 그 개인성의 진리는 곳 우주 아버지가 이 우주만유룰 왜 창조한 것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이며 그 이유 속에 시공간의 완성인 최극과 그것을 넘어서는 궁극, 또 그것을 넘어서는 절대 차원에서의 우주의 완성이라는 거대한 섭리가 바로 이 조그맞고 비천한 행성에 살면서 온갖 오욕칠정을 다 경험하고 있는 미욱한 필사자에게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사실을 정말 마음과 의식으로 그리고 온 몸으로 인지할 때 좌초된 배에서의 거짓 평안에서 깨어나 그 배를 수리하여 제대로 된 해도를 가지고 다시 목적지로 향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한 가지, 더 질문이 있는데 사트바님은 공의 자성과 개인성이 같지 않고 다르다고 보신 건가요? 체험작 공의 자성이 되어야만 궁극의 개인성이라는 무한한 진리로 발을 디딜 가능성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불교가 힌두교, 요가 등에서 찾고자 하는 공의 자성 조차 개인성을 이루는 한 부분이라고 보신 것인지요? 공의 자성에 대해 공부를 했는데 워낙 꼬여놓은 설명이 많아 좀 알다가 모를 듯 합니다.

사트바님 글을 보면서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설명을 해주면 동양철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유란시아가 어떻게 다른지를 잘 설명하고 일깨워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트바님의 댓글

사트바댓글의 댓글 작성일

자성은 개인성 일부라기 보다는 방향이 다른 시공간의 절정이라고 봅니다. 무시무종의 지고한 평안에서, 새로운 사랑의 근원으로 방향을 돌려야, 계시가 말하는 참된 피안으로 상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게시될 수 없는 사랑의 근원 개념을, 중앙우주에서는 첫째 근원으로 부르고, 시공간에서는 우주 중심으로 부르고 있다고 하지요.

중심은 존재와 체험의 두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구극에서 자성의 공한 것을 보는 것이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바라밀다행인데, 반야바라밀이 오온의 자성이 공하다는 깨달음에서 수행된다는 진리와, 존재와 체험의 하강과 상승은 이치가 같은 것으로 봅니다.

달성 차원에서 구극은 중심이지만, 베푸는 차원에서는 다 쏟아 부어버린 공의 경지 입니다. 유란시야 최극은 실체적 존재로는 모든 것이 절정을 이룬 것이고, 다른 의미로 말하면, 제상의 모든 것을 다 비워내어 더 비울 것이 없는 시공간의 지경을 이릅니다. 즉 절정의 지경은 어떤 시공간이건, 실체의 제상이 그곳에 내던지어 있는 것이지요.

공의 자성을 이룬 실체의 상을 여래의 상이라고 볼 수 없다는, 범소유상 개시허망의 금강경 진리는, 비우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삼라만상의 존재를 정의하는 깨우침이기도 합니다.

자성-성품-마음-제상이라는 연기의 얽힘을 풀어내어 공의 자성을 보겠지만, 계시된 최극의 개인적 경지에서 설명한다면, 더 이상 증여할 것이 없이 모든 것을 증여한 것이며, 실체적인 첫째 근원과의 개인성 관계만 제외하곤 모두 비워낸 것입니다.

존재적으로는 최극이 우주 중심으로 우뚝 서 있겠지만, 체험적으로는 원인 없이 존재하는 궁극이라는 관계로 나아가는 길목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개인적 관계는 개인성에게 해당되는 유일한 것이기에, 이것을 자성에서 개인성으로의 개념적 전환으로 이해하고 싶은 것이지요.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리된 글은 때로는 진지하여 서로에게 실천의 자극이 될 수도 있지만, 이어지는 논단의 마지막은 해체로 인해 공허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급적 계시에서 벗어난 담론은 삼가려고 합니다. 양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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