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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보다 앞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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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현 작성일1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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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이나 도덕경이나 성경 같은 진리의 책을 읽고 깨달으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지고, 현실을 이해하는 시각도 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킬 책을 계속 공부하게 되는 것이지요.

 

진리의 책을 읽으면 수양도 깊어지고 덕성도 갖추게 되어, 저절로 자비와 겸손 같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유란시아 책이 새로운 계시이니, 틀림없이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책을 읽습니다. 읽기가 쉽지 않은데도 기대가 크기 때문에 무언가를 깨우치려고 계속 읽게 됩니다.

 

다른 진리의 책도 읽으면 사람이 달라지니까, 유란시아 책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어떤 실천을 강조하는 분도 많습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진리는 단지 지식으로만 받아들이고 깨달은 것이라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사람이 지켜야할 옳은 얘기를 듣고 그것을 깨우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에 악이 범람한다고 말 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진리를 알고 깨우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실천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서, 단지 깨달음에 머무는 것으로는 나 자신의 발전은 물론이고 사랑과 정의가 넘치는 세상으로 발전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행동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140:10.1

                       

그 날 밤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므로 예수는 사도들에게 집안에서 가르치셨는데, 그들이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할지를 가르치기 위해 장시간 이야기를 하였다. 제자들은 정의로움─구원─을 얻는 방법으로써 어떤 특정한 행위를 요구하는 종교만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왕국에서는 그 일을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가 의롭게 되어야만 한다.”고 거듭해서 말씀하였다. 그리고 여러 번 반복하여,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게 되라.”고 하였다. 갈피를 못 잡고 있던 자신의 사도들에게 주(主)가 말씀하는 동안 내내 설명하였던 요지는, 자기가 세상에 가지고 온 구원은 오직 믿는다는 것과 단순하고도 진실한 신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였다: “요한은 옛 생활방식을 참회하는 회개의 세례를 설교했다. 그러나 너희는 하느님과 친교를 맺는 세례를 선포하려는 것이다. 그러한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만 회개를 권고하지만, 그러나 이미 왕국으로 들어갈 진실한 입구를 구하는 이들에게는, 문을 활짝 열어 하느님의 자녀들의 즐거운 친교 안으로 그들을 들여보내라.” 그러나 갈릴리 어부 출신인 그들로서는, 왕국에 있어서는, 신앙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세상 일상생활 속에서 정의로움을 행하는 것보다 앞서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는 깨달음에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진리의 깨달음으로 정말로 우리 자신의 내면이 바꾸었는지를 진지하게 살펴봐야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행동과 실천이 나 자신의 내면이 변화되어 나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나타난 행동만 가지고는, 진정으로 진리를 받아들인 것인지 아니면, 지적인 깨달음에서 나온 일시적인 행동인지 나 자신도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정의로운 행동 보다 믿음으로 의롭게 바뀌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기에 앞서, 나 자신이 지녔던 편견과 고집과 비판적인 의식이 포용과 사랑과 진취적인 의식으로 변화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살피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그 어떤 깨달음도 행동이 없으면 소용이 없지만, 유란시아 독자에게는 의욕적인 행동도. 지식의 변화가 아닌 내면 의식의 변화에서 나오는 것이라서, 의미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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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트바님의 댓글

사트바 작성일

불경을 공부하는 사람도 스스로의 내면을 변화시키려고 탐진치 삼독을 태우고, 청정한 마음으로 탈태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교회에 나오라는 친구에게, 왜 나가냐고 물었더니,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범사에 감사하게 되고, 그 어떤 고난과 슬픔 속에서도 하느님의 나라와 의를 찾을 수 있는 기쁨 속에서 세상이 달라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얻는 가장 큰 변화이자,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절대자의 뜻을 헤아리고 영원한 세계를 알려고 팔정도를 통하여 마음을 닦는 불자들도 가끔 미망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일부 기독교인들이 보이는 자기환상은 깨달음이 아니라, 무슨 도취에 빠진 모습입니다. 절대자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는 분이 그런 자기희열에 신앙을 이용한다는 것 같아서 속으로는 실망했었지요.

자신 기쁨을 위해서, 마음에 행복감을 맛보려고, 위대한 하느님의 진리를 자기 입 맛대로 해석하며, 희열에 빠진다면, 종교적 진리를 악용하는 것이지요.

교인들이 다 그런 건 전혀 아니겠지만, 지금도 하느님의 은총을 노래하면서, 어떤 환경이건 믿음으로 늘 행복하다고 외치는 분들이 많습니다. 현실을 환상으로 보려고 애씁니다.

마음을 그렇게 사용할 생각이라면, 유란시아 책을 읽어도 역시 "믿음으로 하느님을 확신하고 행복과 진리를 느끼겠다"는 용도로 사용하겠지요. 믿는다는 각오만 다지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믿음으로 구원된다"는 말씀도, 여전히 자기최면을 위한 주문으로 사용하려고 하겠지요. 별로 변하지는 않을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새삼 가슴을 울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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