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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의 특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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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경곤 작성일17-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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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종교는 인간이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절대자 신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불완전과 현실에서 마주하는 한계를 탈출하려는 소망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그렇게 여기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지요. 그러한 종교적 선언이 비록 하느님을 찾는 시작점이 될 수 있지만, 하느님에게 다가가는 길에서는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그런 존재로 여기는 생각의 바탕에는, 창조자가 인간을 불량품으로 만들었다거나, 아니면 완전무결하게 창조하였지만 스스로 잘못해서 버림을 받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믿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이든지, 이러한 믿음은 창조자와 현재의 나 자신은 일단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추구하건, 우선 창조자의 관심을 끌어야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고, 이것이 무언가를 특별히 해야한다는 복종 의식이나 의무감을 지니게 합니다.

 

모든 종교가 비슷하기는 하지만, 특히 기독교는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이 좀 더 심한 편이라서, 하느님 앞에서는 더욱 더 낮게 엎드리고, 언제나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라 고백해야만 하지요. 만약 이게 진실이 아니라면, 이런 강압적인 분위기나 조건은 거의 정신적으로 병들게 하는 것이라서, 요즘 같아서는 경우에 따라, 지탄받을만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믿음이 수 천년동안 이어왔던 이유는, 그러한 옛 시대는 인간을 제대로 파악할 사실도 확신도 없었던 세월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런 사정이 있으니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과 창조의 본질에 도전하면서, 생명현상과 의식현상을 조금씩 파악하고 만물이 생존하는 법칙에 가까이 다가가는 오늘날에는 사정이 많이 다릅니다. 요즘 시대에 인간은 별거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그냥 너그럽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거나, 의미 없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이 사회에 많으면, 사회는 발전의 동력이 저절로 약화됩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동안 종교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본연의 진리를 발견했다 주장했지만, 논리적이고 추상적인 확신이 제대로 받아들여진 적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일회성 사상 정도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시대는 인간의 불완전을 매일 강조하는 오래된 전통 종교와, 반대로 인간의 자유를 외치는 단발성 외침들만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천 년된 옛 종교를 그대로 따르거나, 현자들의 학문적 자유를 믿으면서 심화된 진리를 계속 찾아 나서고 있지요.

 

그러나 뭔가 특별한 사람들은, 인간은 죄인도 아니고 일시적 자유만을 즐기는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전혀 새로운 길이나 올바른 방향이 제시되어야만 하는데, 그런 것을 진리라 부를 수 있을 것이지요. 이 진리는 인간이 창안하거나 인간의 능력으로 얻는 결론일 수는 없겠지요. 그동안, 누구도 알 수 없었던 것을 누군가가 새로 드러내고 있다면, 그것이 계시입니다.

 

만약 수호하는 천사나 좋은 일만 하는 도깨비가 있다면, 저마다 필요한만큼 계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꿈이건 환상이건, 초월적 현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류 전체를 위한 계시가 필요하다면, 마찬가지로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새로운 길을 드러내 보여줄 것입니다.

 

모든 인류를 위한 계시라면, 사람을 차별하지는 않겠지만, 오로지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에게만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전통 종교나 현자들의 길을 답습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신성한 계시라도, 흥미로운 이야기로만 들릴 뿐, 아무런 강력한 에너지도 받을 수 없지요. 계시는 새로운 길을 알려주고, 그 길로 나가도록 하는 신성한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유란시아는 새로운 종교적 도전에 나서는 사람들을 위한 책입니다. 그러한 도전은 지금까지 아무도 알려주지도 말할 수도 없었던, 우주를 감싸는 참된 진리, 물질과 정신세계의 아름다움을 하나로 이해할 수 있는 진리, 그리고 모든 것이 끝없이 존재하고 있는 어떤 신성한 목적을 알려고 나서는 것이지요.

 

이러한 도전에 나서는 사람들은, 과학과 의식이 확장되는 현대적 삶을 이끌 참된 철학을 스스로 구축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도전을 통하여 먼 미래를 위한 지혜와 통찰력을 갖출 것이고, 끊임없이 진취적으로 나아가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도전은 저절로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하느님 사랑으로 만들어진 우주 안에서, 신성한 실체들을 발견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2:7.10이 시대의 종교적 도전은, 조화우주적 진리와 우주적 아름다움, 그리고 신성한 선(善)의 확대되고 절묘하게 집대성된 현대적 개념들에서 나오는, 새롭고도 매력적인 살아있는 삶의 철학을 과감하게 구축하게 될, 그러한 영적 통찰력을 가진 선견지명이 있고 진취적으로-내다보는 남녀들을 향한 것이다. 그러한 도덕의 새롭고도 정의로운 시각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선한 모든 것을 끌어당기고 그리고 인간의 혼 속에서 가장 좋은 것이 되는 그것에 도전하는 것이다. 진리(眞)와 아름다움(美)과 선(善)함은 신성한 실체들이며, 사람이 영적 삶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영원자의 이 최극 본질특성들은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서 점점 더 합동되고 통합될 것이다.

 

인간은 모두 하찮은 존재라는 진리는, 치열하게 경쟁하는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상처 입는 마음을 위로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위로의 믿음은, 고통이 있어야만 체험하는 일시적인 믿음입니다. 그것은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새롭게 활성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의지가 없다면, 매일 매일 점점 더 우주로 확대되고 근원으로 결집되어가는, 그러한 미래의 삶에 필요한 새로운 힘과 에너지를 만날 일이 없고, 만나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전통 종교가 주는 무기력한 믿음 안에서 개개인의 무한한 가능성을 스스로 부인하지 말아야 하고, 현자들이 주는 자유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자만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시공간 안에서 불완전한 존재로 만들었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필연적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깨달음으로 단박에 뛰어넘으려는 것은, 10년을 살아본 어린아이가 100년의 일생을 깨달음으로 대신하는 것과 같아서, 거짓으로 살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길"을 알려주기 위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말한 '천국'은 인간의 기대와는 달리 수천 년을 기다린다 해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와 있는 '천국'이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거절하고 있는 천국입니다. 예수님이 말한 천국에서는 위로만 얻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힘이 저절로 넘치는 곳입니다. 

댓글목록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책을 읽으면 누구나 가치를 알지만, 발견한 가치로 자신이 부자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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