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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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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실의강 작성일17-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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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사회와 사회적 윤리가 사랑의 자연적 결과라는 글을 보면서, 요즘 악을 몰아내려고 거리 투쟁에 나서는 분들이 문득 생각이 납니다. 이 분들이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사회 정의를 구현하려는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악을 몰아내는 일에 많은 국민이 동참해야만, 우리 사회는 정의가 자리 잡고, 악의 기승을 잠재울 수 있다고, 열광적으로 선동하는 분들이 또 다시 거리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리 투쟁이 없어도, 진실과 거짓을 엄격하게 구별하고, 정해진 법과 질서와 원칙에 따라서 처리한다면, 불의와 악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는 악을 몰아내고 악한 세력이 사라지는 사회가 아니라, 정의롭게 살아가는 분위기가 넘쳐나는 그런 사회입니다. 악이 사라진다고 정의가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과 원칙을 거부하고 소문과 선동으로 질서를 무시하고 자신의 잣대로 결백한 사람을 파렴치한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정의롭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여당과 야당으로 지지 세력이 나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 때문에 서로 원칙을 무시하고 법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사회의 정의를 파괴하는 짓이지요. 정치적 선호도는 갈릴 수 있지만, 진실을 거짓으로 바꾸고, 거짓을 진실로 위장하는 일은 정치와는 전혀 별개 입니다.


요즘은 무엇이 정의로운 것인지 전혀 모르거나 잊어버린 분들이, 정의구현을 빙자하여 진실을 거짓으로 바꾸고, 거짓을 진실로 위장하고 있지요. 법보다 감정과 여론몰이로 심판하는 해괴한 병든 모습이 마치 정상적인 현상으로 여기려고 합니다. 자기 최면에 걸린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건강하고 활기찬 시민의식이 오염되고 병든 시민의식으로 바뀌는 현상은 마치 전염병에 유행처럼 휩쓸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 건강한 분들은 상관이 없지만, 참과 거짓을 구별 못하는 의식이 허약한 사람들은, 갑작스런 사회적 전염병이 매우 치명적이고 때로는 영적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심신이 약한 사람들에게 선동과 같은 전염병은  저항력을 키우는 필요악이 아니라, 생명을 빼앗는 치명적인 질병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현상에 동참하고 휩쓸리는 사람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다수의 국민들이 자신들과 같다고 착각합니다. 더구나 이렇게 균형 감각이 무너진 정치적 편향을 가진 사람들이 마치 자신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이런 사람들이 한국 국민에 있다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한 느낌입니다.


정의는 사람이 나아가야 할 바른 길과 행동인데, 앞에 나서서 흥분하는 분들이 올바른 도리에 관해 말하는 경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뭔가를 폭로하고, 선전하고, 확실치 않은 일을 부풀리면서, 파괴할 대상을 증오하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악을 추방하자고 진지하게 외쳐도 모자랄 판인데, 태연하게 웃으면서 까리까리 행사를 즐기는 모습이 보이고, 때로는 노래와 춤으로 흥과 열정을 돋우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이 인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에 어느 끔찍스런 공개 처형을 놀이마당으로 즐기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인성이 파괴된 사이코패스라 볼 수 있겠지요. 그런 분위기에 어울리면, 틀림없이 심성은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병들 것입니다.


파괴와 복수의 에너지는 잘못된 열정이지요. 파괴를 위한 비난과 분노보다는, 올바른 길을 찾으려고 힘을 모으는, 그러한 사랑과 창조를 위한 열정이나 에너지를 찾아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요즘처럼 그런 모습이 볼 수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면, 사회는 공멸될 수 있습니다.


이 글 역시, 또 다른 비난과 질책을 재탕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분노와 그 파괴의 에너지가 넘치면 절망스런 사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현실을 무심히 방관한다면, 언젠가는 병든 사회가 될 것이고, 사랑과 진리를 실천하기가 점점 어려워질 수 있겠지요.


책에서는 사회 집단의 에너지는 개인 영적 성장에 직접적이고 막대한 영향을 끼치며, 집단의 사회적 환경 때문에, 모두가 공멸되는 과정과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벗어나 홀로 성취하는 것은 아무리 위대해도 이기적인 것이라서, 그러한 개인의 성취는 빛을 발하기 힘듭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신성한 정의를 베풀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부당하게 행하는 상대를 심하게 비난하거나 한숨을 쉬면서 그 자리를 피해서 벗어나려는 것으로는, 정의를 이룰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정의로운 사람은 불의를 찾아내거나 파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의로운 사람은 모든 사람이 기꺼운 마음으로 사랑과 진리를 솔선수범하며 실천할 수 있도록, 그런 참되고 올바른 길을 밝혀내고 제시하고 호소하는 사람입니다.

 

하면 안된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새롭고도 참된 것을 역설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반역자를 처벌하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충신을 드높이고 그 숭고함을 따르는 것이 정의입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정의를 찾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온 세계는 힘차게 전진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요.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위대한 정의이고, 용서 또한 위대한 정의입니다.

댓글목록

흐르는강님의 댓글

흐르는강 작성일

좀 다른 얘기입니다만, 탄핵정국으로 몰아가면서,. 여전히 한편으로 세월호를 들먹이는 사람들이 섞여 있는 것을 보면, 탈출구가 없는 함정에 갇혀 끊임없이 절규하는 야생 동물이 문득 생각이 납니다. 

보통 사람도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 구하려 달려 갑니다. 더구나 그것이 직업인 사람이라면, 자기 목숨을 던져서라도 구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그 대가로 평소에 월급을 받고 여러 권리와 혜택을 받는 것이지요.

직업적으로 생명을 구하고 안전을 지킬 사람들이 결정적 순간에 자기 목숨이 아까워, 어린 생명들이 눈 앞에서 죽어가도록 구경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마음을 가진 보통 사람에게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좌절을 일으키는 일입니다. 세월호는 비인간적인 그들 때문에, 국민 모두의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승객을 구하고 인명을 구하는 것이 직업이니, 당연히 구조되리라 안심하며, 조마조마 지켜보던 국민들에게, 인면수심의 사람들이 저지른 범죄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고, 인간의 비열함을 일깨우는 엄청난 상처로 남았습니다.

세월호 추모는 짐승보다도 비열한 구조대와 선원들을 떠올리면서, 인간의 비열함과 나 자신의 무력함을 속죄하고, 이 땅에 다시는 인간본연의 의무를 저버리고 자기 목숨을 챙기는, 인면수심의 인간이 나타나지 않도록 각오를 다지고 인성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것이 세월호 참사를 가슴 속에서 담고 있는, 남아있는 자들의 도리일 것입니다.

끈질기게 세월호를 상기시키는 일부 집단을 보면,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할 그 인면수심의 비열함을 아무도 말하지도, 속죄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추모나 회개가 없으면, 오직 자신을 감추려는 비난과 욕설과 함성만 남아 있습니다. 오히려 무슨 권리라도 있는듯이 엄청난 보상과 대가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억울한 어린 생명들을 다시 악용하는 그런 비열한 행동을 계속 할 수 없습니다.

어린 생명들이 죽건 말건 내 목숨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인지, 그런 수치스럽고 비인간적인 행태를 문제 삼으려 하지 않으니, 이런 분들에게 근본적인 인간 본연의 도리와 진실을 지적하면,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는 분위기 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마음 속에는, 짐승보다 비열한 비인간적 속성이 남아 있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전혀 직시하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런 분들이 주축이 되어 불의를 타도하자고 외친다면, 그 결과는 끔찍할 것입니다.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손해가 되면 악이고 이익이 되면 내용에 상관없이 선으로 단언하는 사람이 있어요. 생각조절자가 떠난 모습이예요.

디오니스님의 댓글

디오니스 작성일

요즘 거의 모든 미디어가 경쟁적으로 열중하는 부정, 부패, 비리와 같은 악을 보면, 진실에 대비되는 악이 아니라, 돈이나 권력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운 것을 미워하고 분노하며 악으로 단정하는 모습입니다. 사리사욕은 정도의 자이가 있을뿐 악이라고 정의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정말로 악한 것은 진실을 숨기고 가리다가, 들어나면 즉시 파괴하려고 하는 짓이지요. 진실이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그러한 의도적인 악을 사악이라고 하는데, 사회나 개인에게 아주 치명적인 것이지요. 사악은 스스로 저버린 것이라서, 진리의 영으로 치유될 수 없다고 하는데, 그런 분위기에 어울리고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숨겨진 본성에 자리잡은 사악에 서서히 물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악에 대해서도 용서가 없으셨고, 단호했습니다.

진실이 밝혀지기 전에, 일방적으로 악이라 단정하며 여론을 부추기고 악으로 믿도록 편향된 시각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행위 자체가, 질서와 원칙을 지키고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대원칙을 파괴하는 일이지요. 만약 고의적으로 정의를 파괴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악한 일이 될 것입니다.

길손님의 댓글

길손 작성일

깨우친 사람들과 깨우친 세계에서는 통찰력의 획일성, 곧 진리를 향하는 자세에서의 획일성만 요구될 뿐, 진리를 체험하고 실천하는 모습에서는 다를 수 밖에 없고 달라야만 한다고 합니다.

어떤 현상이나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그 방향을 진리로 향하고 있다면, 아무리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해도, 잘못이라고 선을 그으면 안됩니다. 영적 성장의 길에서는, 철학적 사회적 지적 심리적 획일성을 요구하면 안된다고 전하는 유란시아 책의 가르침을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꼴라쥬님의 댓글

꼴라쥬 작성일

대부분의 갈등이 어떤 사실에 대한 시각의 차이이거나 해석에서 충돌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 충돌하는 진실 공방은 그런 차이가 아니라, 모든 시작이나 근거가 되는 사실 자체가 아예 정반대 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진실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본다고 합니다만, 진리를 찾고 실천하는 독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지요. 진리를 깨우치고 알려는 사람이 선동에 휩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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