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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에서 영감을 받은 독자분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도덕

페이지 정보

작성자 불새 작성일2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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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리를 깨닫고 이를 현실에서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부딪치는 문제는 얽히고설킨 복잡한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유란시아 책에서 밝혀진 계시와 같은 신성하고 참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일 것이다.


이처럼 신성한 진리와 현실적인 적용에서의 괴리에 대한 고민은 예수님의 직계 제자에게도 마찬가지의 문제였다. 책 147 편에서는 이러한 삶의 실천에 관하여 나다니엘이 예수님에게 직접 질문한 내용과 예수님의 대답을 설명하고 있다.


사실 나다니엘이 알고자 했던 질문은 사악한 자들의 악행을 미리 대처하는 지혜와 교훈이었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이때까지 예수가 사도들에게 말했었던 것 중에서 이보다 더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적은 그 어떤 것도 없었다"라고 설명하듯이 전혀 새롭고 근원적인 새로운 진리였다. 결국 나다니엘이 정신을 차리고 예수님의 대답을 알아듣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나다니엘의 질문을 정리하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악을 선으로 갚으라."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라는 예수님의 적극적인 사랑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나의 약혼녀를 꼬드기려는 죄를 가슴에 품고 사악하게 바라보는 음탕한 자"를 형제와 다름없는 절친한 친구로 진정한 사랑과 선으로 대하면서, ​내 약혼녀에게 소개할 수 있느냐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였다.

이 질문을 들은 예수님은 오히려 나다니엘의 태도를 꾸짖듯이 지적하면서 대답하셨다.


147:4.2
예수는 나다니엘의 질문을 들으시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나다니엘아, 나다니엘아! 도대체 어떤 사고 방식이 너의 가슴 안에서 진행되고 있느냐? 너는 영에게서 태어나있는 자로서 내 가르침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냐? 너는 지혜와 영적 납득의 사람으로서 진리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냐? 다른 사람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대하라고 내가 너희에게 훈계했을 때, 나는 높은 이상의 사람들에게 말했던 것이지, 나의 가르침을 악한-행위의 용기를-장려하는 허가증으로 왜곡하도록 유혹당할 자들에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제자에게 실망하며 꾸중하듯이 지적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동안 아버지의 왕국이 있고 아버지의 사랑이 넘치고 있다는 신성한 진리를 가르치면서, 그러한 새로운 복음에서 현실을 새롭게 이해하고 바라보고 판단하라고 누누이 강조하면서 가르쳐왔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현실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수단으로, 진리를 응용하려는, 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에 너무나 실망하신 것으로 보인다.


진리로 새 세상이 열려야 하는데, 전통적 현실이라는 낡은 포도주 부대에 새 진리를 담아 삶에 적응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면, 예수님의 안타까움에서는 호통을 치면서 지적하는 마음이 이해가 간다. 예수님의 실망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쩌면 유란시아 책을 읽는 사람에게도 나다니엘에게 준 질책을 똑같이 내릴 것이다.


예수님은 새 진리로 삶을 정의하면서 가르찬 것은 현실주의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높은 이상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강조하면서 저마다의 규칙을 가지고 살아가는 6가지 삶의 차원을 가르쳤다.


[144:4.4}에서 [144:4.9} 문단에 나와있는 6차원의 삶의 규칙은 심오한 개념이 들어 있겠지만, 이해하기 쉽게 요약하면 1번부터 4번 까지는 인간이 누구나 삶의 여정에 따라서 이리저리 겪으면서 성장해 나아가는 삶의 차원일 것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44:4.4-144:4.7 요약)

1. 육신의 차원. 순전히 이기적인 즐거움만 추구하는 일상의 삶
2. 느낌의 차원. 동정심과 연민으로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삶
3. 마음의 차원. 고결한 이성과 체험적 지혜로 행동하는 심오한 인간-존중의 고결성과 이상주의를 실천하는 삶.
4. 형제 사랑의 차원. 동료룰 위해 이타적으로 헌신하는 높은 삶.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사람이 형제임을 아는 삶

 

이상 4개 차원의 삶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진화 종교의 가르침으로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삶의 성장 모습이다. 철학과 인문학이 널리 발달한 현대의 지성인에게는 나름대로 이해가 가고 또 실제로 삶의 규칙으로 충분하고 만족할만한 성취를 달성하며 살아가는 삶의 차원일 수 있다. 그러나 5번째 차원과 6번째는 다르다.


147:4.8
5. 도덕적 차원. 그러고 나서 너희가 해석에서의 참된 철학적 차원을 달성할 때, 사물의 옳음과 그릇됨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실제 통찰력을 가질 때, 인간 관계에서의 영원한 어울림을 감지할 때, 너희는 어떤 높은-마음을 갖춘, 이상주의적인, 지혜로운 그리고 편견 없는 제삼자가 그러한 하나의 명령을 너희 일생 상황에 대한 조절에서의 너희 개인적 문제들로 적용되는 것으로, 그렇게 바라보고 해석하리라 너희가 상상하는 대로, 그렇게 해석의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할 것이다.


147:4.9
6. 영적 차원. 그리고 그 다음에 마지막이면서 모두에서의 가장 위대한 것으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어떻게 대하리라고 생각하는 그대로 모든 사람을 대하라는 신성한 명령을, 이 일생의 규칙에서 인지할 것을 우리에게 재촉하는, 그러한 영적 통찰력과 영적 해석의 차원을 우리가 달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 관계에 대한 우주의 이상(理想)이다. 그리고 이것이, 너희의 최극 욕망이 언제까지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일 때 모든 그러한 문제를 대하는, 너희의 태도이다. 그러므로 내가 비슷한 상황 안에서 모든 사람에 대하여 행하리라고 너희가 알고 있는 그것을, 너희가 모든 사람에 대하여 행해야만 할 것을 내가 하려는 것이다.”


5번째를 예수님은 도덕적 차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강조한 형제사랑과 하느님의 아버지신분과 사람의 형제신분으로 살아가는 삶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예수님이 계시한 도덕은 세상을 이상향으로 만드는 지혜의 정점으로 바탕을 둔 그러한 일반적인 도덕의 개념이 아니다.  사물의 옳음과 그릇됨이 인간의 시각이 아닌, 최소한도 영원한 어울림으로 감지될 수 인간관계가 정의되는 그러한 도덕이다. 사안별로 파악하는 도덕이 아니라, 일생 전체를 정의하고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명령으로 판단되는 도덕이다,


우리에게 있는 생각조절자가 인간의 도덕적 판단 능력이 발동한 이후에 내주 한다는 설명을 감안한다면, 예수님이 계시한 도덕이 어떤 차원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도덕적 차원은 6번째인 영적 차원을 위한 발판이 되는 그 도덕이어야 한다.

6번째인 영적 차원의 삶은 말 그대로 예수님이 새 진리로 깨우쳐준 새로운 삶의 기준이다. 이것의 핵심은 인간에게 주어진 신성한 명령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영적 통찰력과 인간관계를 통하여 완성하는 삶이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최극의 욕망으로 모든 현실을 마주하려는 삶이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개인성이 신성한 자녀가 되는 운명을 성취하라는 것이다.


5번째를 도덕적 통찰력이라고 한다면, 그 도덕은 우주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와 우주의 영원한 진보를 철저하게 이해한 의식에서 나올 수 있는 우주적 통찰력일 것이다. 한편 6번째 영적 통찰력은 내주 하는 우주아버지의 단편과의 신성한 교류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는 통찰력일 것이다. 떠라서 도덕적 차원의 삶과 영적 차원의 삶은 진리의 영의 통로를 거치지 않고는 삶의 규칙으로 세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영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실제로 의식 안에 들어 있지 않으면 개인의 소유로 전환되지 않는다.


도덕은 인류가 바라는 이상향, 곧 유토피아를 목적으로 하는 도덕이 아니다. 인류의 상상에서 나오는 이상향의 도덕은 마음 차원의 삶에서 나오는 도덕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아는 형제 사랑의 삶에서 나타나는 도덕보다도 못하다.


유란시아 책에서 밝히는 2천 년 전의 예수님의 도덕이나, 지금 이 시대에 새로운 계시로 제시되는 도덕은 그러한 인간의 정점에 머무르는 도덕이 아니다. 전혀 새로운 차원의 도덕적 의식이다. 유란시아 독자가 그러한 도덕적 의식으로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서 함께 살아가고 있을 때, 계시는 인간 의식 안에서 비로소 싹이 트기 시작할 것이다.  

댓글목록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예수님이 도덕적 차원에서 말하신 사물의 옳음과 그릇됨은 평소 우리가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이미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근원인 진리의 영이 부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최우선적으로는 육신의 차원에서 참과 거짓을 판단하고 그다음 몸이 건강하면 느낌이나 마음으로 참과 거짓을 구분하게 됩니다.  만약 사람들이 4번째 차원인 이타적인 자세로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시대가 된다면 그때는 아마도 전쟁이 사라진 시대일 것입니다.

형제사랑의 차원도 지금의 현실에서 달성하기가 상당히 어려운데, 편견을 버려야 한다는 5번째 도덕적 차원에서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은 얼마나 높은 차원인지, 얼마나 의식이 깨어있어야 할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 사도들이 6번째인 영적 차원의 삶의 규칙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를 원하셨겠지만, 당대는 물론이고 새로운 계시가 주어진 지금 이 시대에서도 우주 아버지의 사랑을 생생하게 체험하지 않고는 우주적 이상이라고 말하는 그러한 원칙으로 참과 거짓을 구분하면서 선을 이루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어떤 이는 진리의 영이 자신을 대신한다고 했으니, 예수를 믿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해요. 진리를 아예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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