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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에서의 초월적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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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너킥 작성일24-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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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존경받는 일생의 업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기억되는 삶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혼으로 살았던 삶일 것이다. 혼은 실제로는 생각조절자와 인간 마음이 창조하는 초월적 실체이지만 그러한 생각조절자의 신성에 대한 계시나 종교적 신앙이 없어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무의식 차원에 실존하는 초월적 실체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삶이 끝나면 아무리 위대하고 영광된 일생의 성취도 실질적으로 사라지고 오직 이름으로 기억될 뿐이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이 단지 자손에게만 기억된다면 아마도 2세대만 지나면 삶 자체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기억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삶의 업적은 후손에게 뿌리나 정체성을 내세우는 자신을 위한 용도로만 기억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언제까지나 삶 자체에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름은 모든 사람이 널리 인정하는 영웅이나 위인들에 불과하다. 따라서 매우 제한된 사람에게만 기억되는 부모나 선조로서의 일생의 성취와 이름은 참된 의미의 혼이 담겨있다고 볼 수는 없다. 혼이 담긴 삶이 아니라면, 그 이름은 다분히 이기적인 의도에서 의미 없이 잠시 나타나는 상징으로 있을 뿐이다. 혼이 담긴 삶은 기억되기 위한 삶이 아니라, 기억될 수밖에 없는 삶이다.


혼은 반드시 신성한 에너지와 연관되어야만 가능하다. 그것은 진지하게 열심히 사는 것으로 시작된다. 현실에서의 이기적 욕심으로 동기가 부여되고 성취되는 삶은 신성한 에너지와 결코 연결될 수 없다. 어떤 위대한 삶이 욕심에서 시작된다면 그러한 삶에는 시간과 유한을 초월하고 언제까지나 기억되는 초월적 의미가 발견될 수 없다. 그리고 혼은 초월적 의미나 위대한 목적을 위해 노력하고 성취하는 삶에서 잉태된다. 혼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결과이다. 결과적으로 유한을 초월하는 가치가 없다면 보잘것없이 사라지는 삶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한을 초월하여 기억되고 존중받는 의미와 목적을 지금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목적이 전혀 없다면 혼은 결코 잉태될 수 없다. 삶의 목적은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목적 자체에 초점을 두고 평가하고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진지하게 노력하고, 삶 자체를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모든 위대한 삶이 동일하다. 삶의 목적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진지하게 열심히 자신의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위대한, 곧 유한을 초월하는 삶의 최소한의 특징이다.


어떤 개인의 목적이나 가치의 내용이나 결과에 대한 판단은 창조자이신 하느님의 일이다. 목적을 떠나서, 우리의 삶이 혼을 창조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과 그리고 그에 따라 열심히 사는 모습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신성을 끌어오거나 다스릴 수는 없다. 혼을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신성한 고지로 올라가는 것이 유일하다.  

 

그 고지를 향해 위쪽으로 안쪽으로 다가가는 것이 우리가 발견하는 일상에서의 참되고 위대한 삶, 곧 혼을 위한 목적이 있는 삶이다. 스스로 "나는 지금 이름으로 언제까지나 기억될 어떤 의미있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가?" 질문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무작정 열심히 살아야만 한다.

 

3:5.12

7. 충성─가장 높은 의무에 대한 헌신─이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사람은 배반과 이탈의 가능들의 한 가운데에서 견디어내야 한다. 의무에 헌신하는 용기는 불이행의 위험이 암시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열심히 사는 것은 충성스럽게 사는 것이다. 최고의 의무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충성이고, 충성은 유한을 초월하는 수많은 가치를 내포하는 삶을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준다. 그러한 삶의 성취는 믿음과 헌신으로 이루어진 관계를 형성하면서 가능해진다.  

 

현실에는 충성심을 버리도록 자극하는 수많은 유혹이 있고, 배신으로 이끄는 달콤함도 끊이질 않는다. 지금 당장 손쉽게 성취할 수 있는 기쁨과 쾌락에 맞서서, 개인의 고귀한 의무를 인식하면서 난관과 도전에 성실히 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쁨이 난무하는 현실 속에서, 아직은 기쁨과 거리가 먼 삶을 묵묵히 헤쳐가는 것은 의지와 헌신에서 나오는 충성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충성에 대한 도전과 시험과 시련은 충성이 시작될 때부터 따라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충성의 대가는 당장의 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귀한 신념과 가치는 탐욕의 결과가 아니라 의무의 이행에서 비롯된다. 충성에 대한 의무가 없이는 초월적 가치에 다가갈 수 없다. 참된 충성에 따라오는 의무는 초월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며 신성한 의미로 다가가도록 이끈다.


충성에는 언제나 위험이 암시되어 있다. 헌신은 기본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위험과 시련을 감수하면서 의무에 충성을 유지하는 것이 용기이다. 그래서 충성에는 필연적으로 용기가 요구된다. 용기 없이 저절로 실천하는 충성은 충성이 아니라 노예로서 의지를 포기하는 굴종이다. 그것은 살기 위한 본능적 욕구에서 나오는 무의미한 삶이다. 의무에 대한 헌신과 용기로 개인의 목표를 달성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하여 초월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참된 충성이다.


결론적으로, 충성은 의무에 대한 헌신과 그에 따른 용기의 결합이다. 여기에는 또한 개인의 의무를 다하고, 세계와의 관계에서 진정한 신뢰와 헌신을 바치는 불멸의 가치에 대한 생생한 의식이 필요하다. 충성은 우리가 개인의 가치와 신념을 지키고,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실질적 삶의 모습이다.  

 

평범한 일상에서의 초월적 성취
 

댓글목록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대다수의 사람이 아마도 봉건시대의 왕이나 군주에게 바치는 헌신을 충성이라고 알고 있으리라고 봅니다. 평등과 자유가 당연한 권리와 규범으로 의식하고 있는 현시대에서는 충성은 옛 시대의 유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기를 벗어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개인의 권리를 포기해야 할 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충성이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란시아 책에서 말하는 충성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고귀한 존재나 실체와 관련된 헌신입니다. 개인적으로 종종 되새기는 유란시아 글이 "오늘을 충성으로 살라─성장하라─그러면 내일은 저절로 따라오게 될 것이다. 올챙이가 개구리로 되는 가장 빠른 길은, 매 순간마다 올챙이로서 충성스럽게 사는 것이다."는 100편의 글입니다.

인간으로 존재하면서 존재의 근원자에게 충성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래서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성장의 모습인 것이지요. 저절로 성장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야 성장한다는 말에서 매 순간의 삶은 특권이지만 한편으로는 의무일 것입니다. 열심히 사는 순간보다 대충 살아가는 순간이 훨씬 많은 것이 문제이지요.

빈나리님의 댓글

빈나리 작성일



충성을 나타내는 한자, 忠은 마음에 중심을 두고 흔들리지 않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인공 지능으로 어려움이 쉽게 해결되고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점점 더 풍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으니 고전적 의미로 해석되는 충성이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점점 생동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유란시아 책에서 말하는 충성은 신성한 차원에 대한 변함없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3편 글은 우주 아버지의 속성이고, 충성은 우주 아버지의 최극 통치에서 창조체 삶의 불가피성의 하나로 설명합니다.

우주 아버지의 신성한 계획에는 창조체의 탄생이 포함되고 전지전능으로 우주를 다스리는 최극 통치 안에서 신성한 계획에 부응하는 것이 충성이고 그것은 진미선을 달성하는 완전한 자유 의지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충성으로 달성하는 완전과 태생적인 완전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설명에서 충성은 우리를 위한 우주 아버지의 사랑의 한 모습일 것입니다.

[3:5.17]
하보나의 창조체들은 선천적으로 용감하지만, 그들은 인간 감각에서는 용감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친절하고 동정심이 있지만, 인간적인 방법으로 도저히 이타심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즐거운 미래를 기대하는 자들이지만, 불확실한 진화 구체에 속한, 믿음 지닌 필사자들의 아름다운 방법으로 희망에 부풀지는 않는다. 그들은 우주의 안정성에 있어서 신앙을 갖고 있지만, 필사 사람으로 하여금 동물 지위로부터 파라다이스의 입구까지 의지하여 상승하는 구원의 신앙에 대하여는 전혀 이방인이다.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지만, 그것의 혼-구원 본질특성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들은 이상주의자들이지만, 그들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들은 활기 넘치는 선택으로 그렇게 되어가는 그 황홀경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지하다. 그들은 충성되지만, 불이행의 유혹에 부딪쳐서, 전심으로 그리고 총명하게 의무에 헌신하는 전율은 결코 체험한 적이 없다. 그들은 사심-없지만, 호전적인 자아를 당당하게 정복함으로써 얻는, 그런 차원의 체험을 결코 얻은 적이 없다. 그들은 기쁨을 즐기지만, 그러나 잠재된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는 기쁨의 그 달콤함은 이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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