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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에서 영감을 받은 독자분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유한한 일상의 성공과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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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너킥 작성일23-11-30

본문

우리가 한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는 그 누구도 가볍게 볼 수 없을 것이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물론이고, 그 밖에도 우리 모두는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과 존중과 관심 속에서 귀중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는 점에서 한 개인의 삶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님이 보내주신 진리의 영 안에서, 그리고 절대자이신 우주 아버지의 신성의 한 단편이 내주하고 있는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삶은 인간 모두가 이해하고 인정하는 그러한 의미와 가치를 훨씬 초월하는 무언가가 내재되어 있다. 유란시아 책에서는 개인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하느님의 자녀로 탄생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각자의 개인성은 아직은 비록 잠재적이기는 하지만, 우주 아버지가 직접 증여하신 것이고 결국에는 완전을 성취하여 실재적인 하느님의 자녀로 파라다이스에 도착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개인성의 가장 큰 특징이자 특권은 자유 의지라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 태생적인 운명도 개인의 자유 의지 앞에서는 따를 수밖에 없다.

 

1:0.3

영원에 거하는 우주 아버지로부터 최극의 명령이 내려졌다, “내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들도 완전 하라.” 파라다이스의 메신저들은 사랑과 자비로써 이 간곡하고도 신성한 권유를 여러 세대에 걸쳐 아래쪽으로 그리고 여러 우주를 거쳐 바깥쪽으로, 심지어는 유란시아의 인간 종족들과 같은 하등의 동물-기원 창조체에게까지 전해 왔다.
1:0.4
신성의 완전성을 달성하기 위해 분투하라는 이 장엄하고도 우주적인 명령은 완전성의 하느님의 모든 투쟁하는 창조체 창조의 첫 번째 의무이자 최고의 열망이 되어야 한다. 신성한 완전성을 달성하는 이 가능성은 모든 사람의 영원한 영적 진보의 최종적이고도 확실한 운명이다.


우리의 삶의 가장 큰 의미와 가치는 완전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물질 세상이나 초물질 세상에서나 모든 면에서 완전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물질 세상에서 완전을 이루어야만 한다. 현실 삶에서 완전을 이루는 것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성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취는 성공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그 성취나 성공은 정지된 것이 아니다. 정지될 수가 없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여전히 성공이어야만 완전한 성취이다.  

 

참된 완성은 늘 기쁨과 행복과 만족이 따라오지만, 결코 자체에 만족하거나 탐닉하거나 머무르는 성질이 나타날 수가 없다. 더 높은 차원의 완성을 향해 늘 역동적이고 도전적이고 끊임없이 다가가고 있어야만 비로소 낮은 차원에서의 참된 완성이라고 불릴 수 있다. 물질 차원에서는 보이지 않는, 더 높은 차원의 완전한 영적 실체를 참된 실체라고 말한다.  

 

이 참된 실체를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지칭하면서 현실적 감각을 뛰어넘는 새로운 차원의 진정한 실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러한 참된 실체에서 투영되는 그림자가 감각과 지각으로 인식하고 성취하는 현실로 비유했다.  

 

참된 실체에 대비되는 그림자를 설명하는 플라톤의 동굴이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일려 진 가장 오래된 우화일 것이다. 이데아와 현실 세계를 설명하는 이 비유는 유란시아 책에서 말하는 상변하는 물리적 실체와 불변의 참된 영적 실체의 비유로도 이해될 수 있다.

 

동굴 밖의 참된 실체를 동굴 안에서 보이는 그림자로 파악해 보려는 것은 불가능한다. 사람들은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손과 발이 묶인 죄수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림자를 분석하면서 일생을 보내다가 삶을 마감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한 동굴 이야기는 사람들이 갇힌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몸을 사슬로 묶은 채로 동굴 속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림자는 아무리 오랜 세월을 그리고 아무리 많은 모습을 보고 있어도 그의 생각에서 내린 결론은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다. 아무리 양이 많아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 물리 세계의 진리이다. 아무리 마음속에서 감동이 끝없이 넘쳐고 그 분량이 하늘에 닿을 만큼 앃인다해도, 감동은 변하지 않다. 물질이 2차원이라면 감동을 창조하는 마음은 3차원의 실체이다. 물질이나 마음이자 모두 시간 속에서 퇴색되고 변화되고 끝내는 소멸하는 동굴 속의 그림자이다.  

 

영적 실체는 그림자의 근원을 찾아서 동굴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없이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그림자로 얻을 수 있는 물질과 마음의 풍요로움과 기쁨과 행복과 감동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망설임과 벗어나지 않으려는 현실적 만족이 스스로의 동굴이자 사슬이다. 그 안에서는 어떤 설명이나 상상이나 어떤 지혜나 진리도 바깥세상의 풀 한 포기도 알아낼 수 없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인지하는 이성을 물질계에 대비되는 동굴 밖으로 나아가는 도구로 보았지만, 칸트는 형이하학이나 형이상학이나 여전히 형이라는 물리적 세계에 연관을 두고 있으니 그것은 한낱 양의 증가이지, 본질의 변화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참된 실체를 순수 이성이 선험적인 세계와 연결되는 원인으로 보았지만, 그 실체를 인간 의식과 언어로 정의할 방법을 시도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이라서, 다가가는 길이 명징하다고 마무리하는 것에서 멈추었다, 그는 오히려 과학과 수학에서 증거를 발견했다.

 

151:3.3

예수는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면서 꾸며낸 이야기나 우화를 사용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는 비유, 특히 자연에 대한 비유를 자유롭게 사용하라고 추천했다. 그는 진리를 가르치는 하나의 수단으로 자연 세계와 영적 세계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유사성을 활용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연적인 것을 “영적 실체들의 비-실제적이고 빠르게 지나가는 그림자”로 자주 암시했다.

 

실제로 누구에게도 분명한 자연 세계의 모든 모습은, 그것이 사물이건 의식이건 영적 성취이건  그것은 자연 세계를 초월하는 모론시아 세계 혹은 영 세게의 참된 실체와 대비되는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나 그 그림자에서 그림자의 근원을 찾아내려고 현실의 만족과 성취의 달콤함에서 과감하게 몸을 돌려 밖으로 탈출할 의지만 있다면, 그 지점에서 새로운 도약의 관문이 열리고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잠재된 실체를 만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 힘은 현실에서의 완전과 참된 진리에서의 동기부여와 참된 실체에서의 사랑에서 쏟아져 나올 것이다.

 

110:3.4

너희 중에 매우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시간과 생각을 삶의 사소한 일들에 소모하면서, 반면에 영속하는 의미의 더욱 본질적인 실체, 너희와 너희의 조절자들 사이에 더욱 조화되는 활동 동의를 개발하는 데에 관련된 바로 그 성취들을, 너희가 거의 전적으로 간과하고 있음을 나는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인간 실존의 가장 큰 목표는 내주하는 조절자의 신성에 조율하는 것이다; 필사자 삶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너희 마음 안에서 기다리고 일하는 신성한 영의 영원한 표적들에 대한 참된 그리고 납득하는 성스러운-봉헌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운명을 실현하기 위한 헌신적이고 단호한 노력은 명랑하며 기쁨이 넘치는 삶, 그리고 성공적이며 명예를 받을 만한 이 땅에서의 삶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생각 조절자와 협력하는 것은 자아-고문, 짐짓 흉내 내는 경건함, 또는 위선적이고 허세부리는 자아-비하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다; 이상적인 삶은 두려움에 찬 염려에서의 실존이 아니라 사랑으로 봉사하는 생활이다.

 

사람들은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어 도약하려면, 유한한 현실에서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미련을 버리고 새롭고 가벼운 자세로 날아올라야만 탈출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란시아 계시는 현실이 탈출의 기반이 되고 있는 한, 현실이 부정되는 한, 그것은 새로운 차원으로의 도약을 위한 탈출이 아니고 단지 더 넓고 색다른 유한의 동굴로 빈 몸으로 들어가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진정한 도약은 현실의 성취와 완성을 발판 삼아야만 신성이 이끄는 사랑에 닿을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계속되는 성취는 계속되는 도약의 발판이다. 겉보기에는 탈출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모든 것이 집약된 특이점에서의 도약이자 상승이다.

댓글목록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계시를 모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참된 실체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현실 세계에서의 참된 실체를 찾아 맴도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철학과 종교가 더 이상 아무런 힘이나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 수 밖에 없다면 시대적 계시가 유일한 탈출구를 열어줄 것으로 이해됩니다.

사람은 미완성 동물이어서 언제나 실수와 실패도 있게 마련입니다. 성공을 이루면 이룬 것에서, 실패를 하면 그 과정에서 무엇인가를 배워 나가야만 하는데, 성취의 결과에만 집착하면 미완성과 불완전은 그림자가 아니라 악이라는 실체로 변모되어 스스로를 괴롭히게 됩니다. 결국에는 탈출의 과정을 삶의 투쟁의 본질처럼 받아들이면서 괴로움과 상실감에 발버둥치다가 삶의 의미와 가치를 헛되이 여기게 되는 것이지요.

현실의 만족에 탐닉하다보면, 참된 실체에 대한 흥미도 관심도 서서히 사라진다고 합니다. 디지털 세계가 발전하여 인공지능이 행복을 창안해주고 기쁨을 전달하는 시대로 접어들면 언젠가는 데이터를 가공하여 실체처럼 만들어주는 그림자 세계가 시작될 것입니다. 긴장하지 않으면 서서히 어둠 속에서 거짓된 행복에 취할 수 있습니다.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실상과 가상이 구분되면 질서가 자라고 모두 실체가 되면 문명이 발달해요. 그림자는 실상도 가상도 아니에요.

네오님의 댓글

네오 작성일

우주 아버지의 개인성 증여와 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란시아서가 우리에게 계시한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일 것입니다. 매 순간마다 실체와 그림자 사이에서 서있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은 예수님이 보내주신 진리의 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겠지요.

참된 힘은 신성한 에너지에서 나오고 거짓된 힘은 탐욕과 어리석음에 묶여있는 물리적 에너지에서 나옵니다. 순수하고 신성한 에너지마저도 물리적 에너지로 변질시키고 악용하는 악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 아버지의 신성의 단편이 우리 뭄 안에 내주하고 있다는 진리를 생생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림자만 난무하는 동굴 안에 어쩔 수 없이 붙잡혀 있다 해도, 내면의 빛으로 더 이상 그림자에 미혹되거나 소멸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림자에 반응하지 않거나 어둠을 초월하며 살아가는 삶은 참된 실체를 발견하지 못한다 해도 그 노력 만으로도 이미 삶의 의미와 가치는 신성한 에너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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