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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에서 영감을 받은 독자분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유한의 한계와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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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빈나리 작성일23-07-26

본문

사람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유한 안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고 무한의 실체는 파악할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유한과 반대되는 무한의 개념이 있을 수  있다고 추론할 수는 있습니다. 유란시아 책에서는 유한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 존재를 특별히 필사자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죽음을 통과한다면 우리가 부딪치는 물질적 유한은 벗어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렇다고 무한이 될 수는 없겠지요.

 

사람은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생각이 언제나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생각 그 자체는 무한성에 접근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접근이 무한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무한이 필연적으로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유한을 초월하는 어떤 상상의 세계를 무한이라고 부릅니다.

 

실감할 수 없고 상상만 할 수 있는 무한은 어쩌면 사실이 아닌 환상일 것입니다. 아무도 무한의 모습을 그리거나 개념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자기 생각을 언제나 끝없이 더 확장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유한의 확장이지 무한에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무한히 많거나  무한하게 크거나 무한하게 멀거나 무한히 길거나 혹은 높거나 어떤 본성을 사람이 상상해도 여전히 유한한 세계에서의 본성으로 남습니다. 무한이 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무한은 모든 유한을 다 더하고 합하고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은 오히려 모든 유한이 무한하게 쏟아져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한에서 무한이 있음을 가정하지만,  무한에서 본다면 무한을 현시하는 방법이 유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유한성 안에  무한성과 관계되는 무언가가 있어야만 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알 능력은 없겠지만 내가 모른다고 세상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무한성이 현시되는 유한에서, 시간의 변화, 곧  그 끝없이 전개되는 역동성을 정지한다면, 무한의 잠재성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달리 보면 우리가 무한이 실존하고 있음을 확신하는 근거가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105:1.5

유한한 마음에는 단순히 시작이 있어야만 하며, 그리고 비록 실체에 실제적인 시작이 결코 없었을지라도, 여전히 실체가 을 향하여 현시하는 어떤 근원적 관계들이 있다. 실체-이전(以前), 근본적인, 영원 상태는 다음과 같은 어떤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어떤 무한한 먼 거리에서, 가정(假定)의, 과거-영원 순간에, 스스로 이신 이는 사물이자 비(非)사물로, 원인이자 결과로, 의지이자 반응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정적인 영원 순간에는 모든 무한 전체에 그 어떤 차별화도 없었다. 무한성은 무한자에 의해 채워지고; 무한자는 무한성을 포함한다. 이것이 영원에 대해 가정한 정적 순간이다; 실재들은 그들의 잠재 안에 아직 억제된 상태였고, 잠재는 스스로 이신 이의 무한성 안에서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추측하는 상태에서도 우리는 자아-의지의 가능성의 실존을 가정해야만 한다.  

 

모든 것이 유한하지만 누구나 과학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무한이 실존하고 있음을 알고 없습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삶이 계속 반복되는 것 같으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다른 모습으로 삶은 무한하게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한하게 변화되는 삶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 무한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유한을 통일하면 단지 더 큰 유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유한과는 무언가 다른 속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한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해도 무한에서 유래되었다는 무한의 속성과는 관련이 있겠지요. 유한이 스스로 영원토록 유한을 탄생기키는 일은 논리적으로 블가능합니다. 원인 없이 일어나는 일은 스스로 이신이라는 철학적 근원자 이외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유한을 통합할 수 있는 길이 어쩌면 진리의 길이 안내하는 계시입니다.  

 

101:2.1

종교의 사실은 합리적인 보통의 인간 존재들의 종교적 체험 안에 전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오직 이 의미에서, 그 안에서 종교가 과학적인 것, 또는 심지어 심리학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계시가 계시라는 증명은 바로 이와 똑같은 인간 체험에서의 사실이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 다양하게 갈라진 자연 과학과 종교 신학을, 하나의 일관되고 논리적인 우주 철학, 하나의 조화-협동되고 단절되지 않은 과학과 종교 모두에 대한 해석으로 합성하고, 그리하여 무한자가 어떻게 물질 안에, 마음과 함께, 그리고 영 위에, 자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나가는지 알려고 갈망하는 저들 질문하는 필사자 마음에서의 인간 체험에 대답이 되는 마음의 조화와 영의 만족을 창출한다.

유한의 세계는 언제까지나 펼쳐지면서 유한의 세계에서는 언제까지나 무한을 향해 질주하는 것은 우주의 법칙입니다. 사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논리적으로는 언젠가는 무한에 도착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진리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무한은 절대와 다르다고 합니다. 유란시아 책에서는 절대자들이 무한자의 품으로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102:7.8

분별불가적인 유일한 실체, 절대는 감히 일관되게 독단적으로 될 수 있다. 독단적으로 되려는 자들이, 만약 일관성이 있다면, 머지않아 에너지에서의 절대자, 진리에서의 우주자, 그리고 사랑에서의 무한자의 품 안으로 몰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유한하고 상대적인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수많은 현상이나 사실이나 실체나 가치에서 그 각각의 절대적 개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물질과 마음과 영의 차원에 연관되는 절대자들이 있습니다. 실전적 절대자들도 있고 체험적 절대자들도 있습니다. 모두 무한자의 품 안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무한자의 품 안에 들어가는 우주의 여정은 유한한 세계에서 시작되고, 무한의 속성은 유한한 존재가 유한의 통합으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유한이 그렇게 무한의 잠재라면 이러한 잠재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실재들은 결국 사랑일 것입니다.​

댓글목록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무한자는 정의될 수 없는 개념이라고 하니 유한과 무한은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무한의 속성 중의 하나가 사랑이고 정이로움의 멜로디는 무한자가 알 수 있다고 설명하는 글을 감안하면 우주가 존재하고 필사자의 생명이 출현하는 것 모두가 결국에는 무한자의 계획 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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