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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에서 영감을 받은 독자분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오늘과 다른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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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새 작성일2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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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이 유신론을 배척하는 이유는 많겠지만, 가장 공통적인 것의 하나가 현실과 벗어나서 존재하는 먼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실제 현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종교에서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고집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경기가 침체되어 인플레이션이 증가하고, 법과 질서는 무시되어 은밀한 범죄가 공공연히 만연되고,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사생결단으로 반인륜적인 행위마저 주저 없이 저지르고, 탐욕에 물든 사악한 자들이 세계를 정복하려고 교묘한 방법으로 국가를 동원하여 적대적 민족감정을 부추기는 등, 심각한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신을 믿거나 안 믿거나 상관없이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모두의 행복을 위해 이러한 현실을 타파하려고 싸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함께 힘을 합하여 올바르게 세워야 할 일이다. 그런데 현실이 어찌되건, 일단 함께 구원을 찾아 나서자고 외친다면 온전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영원하고 무한한 기쁨과 행복의 먼 미래의 파라다이스를 삶의 진정한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종교는, 참된 세상을 이루려는 정의로운 투쟁을 무력하고 만든다. 나아가 그러한 주장들은 새로운 미래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면서 눈을 반짝이며 어른들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우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삶을 오염시키고 정반대되는 주장들이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현실이 어떠하던 오직 하느님을 믿으라고 어린 자녀를 가르치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하느님이 사랑하니까 힘을 잃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순종하는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두려움도 같이 가르치면 어린아이의 혼란은 성인이 되어도 쉽게 정리되지 않을 것이다.

종교에서의 진리와 교리가 그처럼 먼 미래를 중심에 두고 일상의 삶에서 그 소망을 잊지 않고 의식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면, 종교는 거부되어도 마땅하다. 이러한 종교의 폐단을 심각하게 걱정하는 무신론자가 하느님을 배척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당연하고 정의로운 삶을 위한 선택일 수 있다. 더구나 하느님을 믿는 유신론자의 많은 사람들이, 무신론자가 걱정하는 그러한 종교를 믿고 있으니 더욱 안타까운 실정이다.


작금의 종교가 제시하는 진리와 교리가 진정으로 오늘의 현실이 내일 새롭게 변화되는 길을 열어주고 있는지 의문이다. 오히려 힘든 현실일수록 받아들여 이해하거나 망각하거나 도피하도록 이끈다면, 그것은 진리가 사라졌거나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는 가짜일 것이다.

어떤 진리이건 진리는 실재하는 삶을 무의미하게 받아들이도록 정의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진미선을 발견하는 기능이 없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닐 것이다. 아무리 험악하고 악한 현실에서도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실체를 분간할 수 있는 빛이 진리이다.

철학이 신학과 거리를 두는 이유도 아마도 신학이 일방적으로 비현실 세계를 중심에 두도록 재촉하고 한편으로는 복종을 강요하며 간섭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행태를 종교의 특징이라고 변명한다면, 그것은 종교를 생업으로 하거나 종교를 삶의 의미와 보람으로 삼고 싶은 비현실주의적 주장이다.

중심을 현실이 아니라 내세나 먼 미래의 유토피아로 삼으려는 종교에서는, 오늘과 달라지는 내일을 기대할 수 없다. 포기하던지 아니면 망각해야만 하는 참혹한 현실과 부딪쳤을 때, 종교가 제시하는 비현실 세계로 일시적으로 도주하며 위안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현실은 도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도망해야만 할 정도로 심각한 현실 문제였다면 잊혀지지도 않는다.


종교적 진리는 현실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도 존재해서도 안된다. 반드시 현실적 체험을 바탕으로 현실이 더 나은 내일로 준비되도록 이끌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불완전이 내일 조금 더 완전해지도록 인간과 초인간의 모든 힘이 함께 발휘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인간 체험을 벗어나는, 생각과 의식에서만 머무르는 진리는, 하느님의 진리가 아니다.

 

1:2.4

하느님의 실재는 과학적 실험이나 논리적 추론의 순수 이성에 의해서는 결코 증명될 수 없다. 하느님은 오직 인간 체험의 영역 안에서만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실체에 대한 참 개념은 논리에서 적합하고, 철학에서 타당하며, 종교에서 필수적이고 그리고 개인성 생존에 대한 그 어떤 소망에서도 필수 불가결하다.


참된 종교는 교리는 물론 진리도 현실에서의 탈출이나 회피를 해결책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강요는 물론 현실에서 눈을 돌리도록 유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더욱 냉정하게 바라보고 고난과 역경을 정직하게 마주하도록, 그리고 그것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도록 이끈다.

육신을 벗어난 먼 미래에서의 완전함의 달성에는 오늘과 내일의 완전함이 빠짐없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종교는 현실을 벗어난, 신비하고 신성한 초월적 현상이나 힘을 발견하고 그러한 것에 감동하는 것이 아니다. 완전함은 이미 우리 주변에 있었고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의 체험에 바탕을 둔다.

 

101:1.4

그래서 종교는 시각이나 느낌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신앙이나 통찰력에 의해서 존속하고 번창한다. 그것은 새로운 사실에 대한 발견이나 독특한 체험의 습득 속에 존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인류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들 속에 있는 새롭고도 영적인 의미들의 발견 속에 존재한다. 최고의 종교적 체험은 믿음과 전통과 권위에서의 우선적 활동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며, 뿐만 아니라 종교는 숭고한 느낌과 순수하게 신비적 감정의 소산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 마음속에 거주하는 영 영향들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하나의 심오하게 깊고 실제적인 체험이며, 그러한 체험을 정신에 관한 용어로 정의를 내려질 수 있다면, 그것은 그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실체를, 그렇게 순수하게 개인적 체험의 실체로서, 체험하는 체험이다.


오늘의 고통과 슬픔과 불완전을 내일 새롭게 만들기 위하여 도전하면서, 승리의 확신으로 난관을 정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새로운 힘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 그것이 종교적 진리이다. 진리와 확신의 근원이 되는 신앙이 삶의 투쟁에 필요한 모든 힘을 무한정으로 부어주고 있다. 우리는 신성하고 무한한 에너지를 직접 받고 있다. 그리고 신성한 힘들은 우리의 의지와 생각에 맞추어서 현실 안에서 실체로 드러나고 사실로 체험된다.

그러나 누구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의식이 깨어나도, 아무리 하느님의 신성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해도, 인간은 선천적으로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다. 가장 결정적인 약점이,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동물적 태생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점을 극복하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주어진 삶의 승리를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끊임없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가며 현실 속에서 나아가고 있다.

치명적인 약점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의지와 생각과 삶의 투쟁을 지켜보면서, 우리와 함께하는 수호천사가 자신이 내려왔던 높은 차원의 우주에서 우리와 함께 했던 자신의 노력과 우리의 치열한 삶을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111:7.4

유란시아의 상급 인간 종족들은 복잡하게 섞여 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기원을 갖는 여러 종족과 혈통으로 혼합되어 있다. 이러한 혼합적인 본성은 감시자들이 일생동안 효과적으로 일하는 데에 지나칠 정도로 그 어려움을 주고 있으며, 죽음 이후에 조절자와 수호 세라핌천사 둘 모두의 문제들에도 확실히 어려움을 더한다. 얼마 전에 나는 구원자별에 있게 되었고 그리고 한 운명 수호자가 그녀의 필사 주체에 대한 사명활동에서의 어려움에 정상참작을 바라며 제시하고 있는 공식 진술서를 들었다. 이 세라핌천사는 말했다:


나의 어려움의 대부분은 나의 주체의 두 가지 본성들 사이에서의 끊임없는 다툼 때문이었다; 열망에서의 추진력은 동물적 게으름에 의하여 반대되고; 우월한 민족의 이상은 열등 종족의 본능으로 인하여 가로막히고; 위대한 마음의 높은 목적들은 원시적 전승의 추진력에 의하여 적대시되고; 멀리-내다보는 감시자의 먼-거리 관점은 시간의 창조체가 지닌 근시안으로 인하여 반대로 작용되고; 상승하는 존재의 진보적인 계획들은 물질적 본성의 욕구와 갈망으로 인하여 변경되고; 우주 지능의 섬광들은 진화하는 종족의 화학-에너지 명령으로 인하여 취소되고; 천사들의 추진력은 동물의 감정으로 인하여 저지되고; 지성의 훈련은 본능의 성향으로 인하여 물거품이 되고; 개별존재의 체험은 종족의 누적된 성향으로 인하여 저지되고; 최선의 목표들은 최악의 대세로 인하여 그늘에 가려지고; 천재의 비상(飛翔)은 평범의 중력으로 인하여 주저앉고; 착한 것의 진보는 나쁜 것의 타성으로 인하여 늦어지고; 아름다운 것의 예술은 악의 현존으로 인하여 더러워지고; 건강의 부력은 질병의 무기력으로 인하여 중화되고; 신앙의 샘은 두려움의 독으로 인하여 오염되고; 기쁨의 샘물은 슬픔의 물로 쓰디쓰게 되고; 예상의 기쁨은 실현된 것의 쓰라림으로 인하여 환멸을 느끼며; 삶의 즐거움이 죽음의 슬픔으로 인해 언제나 위협받으니. 그러한 행성에서 그러한 삶이니! 그런데도 생각 조절자의 언제까지나-현존하는 도움과 추진력 때문에, 이 혼은 행복과 성공에서의 적정한 등급을 성취하였으며, 이제 맨션계의 심판실로 상승해 왔다.”  

 

댓글목록

사트바님의 댓글

사트바 작성일

누구나 한계에 부딪치면 피하거나 위로를 찾게 됩니다. 그럴 때 낙담하지 않으려면 일단은 현자들의 지혜나 종교가 주는 메시지가 있어야 합니다. 유란시아 책도 많은 내용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위로를 주고 있지요. 힘을 부어주고 새로운 길을 찾도록 하는 것이 다르지만요.

오래된 종교들이 지금 일어나는 시대적 상황을 모르기에 새로운 동기를 일으키지는 못하지만, 올바르게 깨우쳐준다면 위로만으로도 사람들은 스스로 회복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에 사람들을 붙잡아 두려고 위로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입니다. 자신들만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자유를 준다고 호언하는 말에 사람들이 또다시 숙박당하는 것이지요.

절묘하게 아름답고 영특하게 뛰어나고 섬광처럼 지혜로우니 웬만한 사람들은 그 은밀한 위로에 붙잡혀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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