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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에서 영감을 받은 독자분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자아-망아-무아-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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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트바 작성일23-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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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를 의식하고 집착하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아를, 망령되다는 의미의 한자어 망을 써서 망아라고 부릅니다. 탐진치의 삼독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로 삶을 고통 속에서 즐거움을 쫒으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자아를 표현하는 말이지요.

한편, 무아는 불교 진리를 대표하는 사상 중의 하나인데, 불교 이전의 인도 사상에 있는 절대적 자아인 아트만의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유란시아 책을 보면 진아를 의미하는 아트만은, 고대 인도의 베다 사상에서 이어져 내려온 각 부족들의 수많은 절대자 개념을 리그-베다에서 통합하면서 나중에 등장한 브라만교의 핵심 사상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리그-베다가 말하는 아트만은 우주의 절대적 자아이기 때문에, 개념 자체는 절대계에서 벗어나는 시공간계의 언어로 정의될 수가 없는 개념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삼라만상이 존재하는 현상계에 투영된 절대의 그림자를, 숨으로 정의하다 보니, 결국에는 숨 쉬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 하나에서 유래되어 세상에 존재한다는 생각이 확장되어 힌두교의 윤회론으로 퇴행되면서, 사람들이 스스로 절대계와의 인연을 끊어 버렸습니다.

이런 모순 때문에, 부처님은 현상계에 머무는 아트만과 아상에 대한 교리를 철저히 반대하여 고집멸도에서의 연기와 무아를 진리로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 사람들은 진아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불성으로 연기에 매달리면서 집성제의 길을 나서고 팔정도로 멸성제의 강을 건너고 반야의 통찰로 도성제의 경계를 넘어 해탈과 열반에 이르려고 합니다.

자아, 무아, 진아까지 자신을 의미하는 한자어 "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최초 인간의 탄생부터 수없이 많은 세월을 지난 모든 종교와 철학을 지나 미래의 초문명 시대에 이르기까지, "아"의 근원과 존재의 이유와 운명이 시공간계를 초월하는 절대계와 연관 지어 해석하려는 시도는 사라질 수 없을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동물과 인간의 자아의식은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습니다. 가장 쉽게 나타나는 특징이 자유 의지입니다. 인간이 동물의 반응적 존재에서 진화하여 의식적 존재로 살아갈 때, 싹트기 시작하는 의식의 중심이 바로 자아입니다. 이러한 동물적 상태를 무아라고 한다면 자아는 무아에서 탄생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란시아 책에서는 자아에 대한 의식을 마음의 진화 단계로 탄생하였음을 설명합니다. 동물 차원은 마음 기능이 지식을 활용하고 협동하는 것이 한계이지만, 인간은 초물리적 실체를 이해하고 질서를 예측하는 지혜가 가능하고 신성을 받아들이고 반응할 수 있는 자아의식이 가능해집니다. 그렇게 자아의식이 형성될 수 있는 존재가 절대자로부터 유일무이한 우주적 존재자로 증여되는 개인성입니다. 그러나 개인성의 자아의식, 인간의 자아-의식은 근원에서 정해지거나 증여되는 것이 아닙니다.


16:9.4
인간의 자아-의식은, 의식적인 자아보다는 자아들의 실체를 인지하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그러한 자각이 상호적 임을 의미한다; 곧 그것이 아는 것만큼 알려지는 것이 자아이다. 이것은 사람의 사회적 일생에서는 순수하게 인간적 행동-방식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안에서 함께 살고 있는 하느님의 현존의 실체에 대해 너희가 확실하게 되어갈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절대적으로는 동료 존재의 실체에 대해 확실하게 되어갈 수가 없다. 사회적 의식은 하느님에 대한-의식처럼 그렇게 양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적인 개발이며 그리고 사람의 부여된-자질을 구성하는 것─과학, 도덕 그리고 종교─에서의 지식, 상징, 그리고 공헌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화우주 선물들이, 사회화되어, 문명을 구성하는 것이다.


인간 자아, 즉 자아-의식을 기준으로 이해할 때, 무아는 자아가 없는 동물적 무아를 가리킬 수도 있고, 현상계에서의 자아-의식의 모든 고통이나 집착에서 벗어나서 청정한 상태의 무아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아-의식에서의 이러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자아를 잊어버리는 망아의 과정을 지나가야만 가능합니다. 이때의 망은 헛되고 허망하다는 망이 아니라, 잊어버리고 망각한다는 의미의 망입니다.

자아-의식에서 자아를 잊는 것은 시공간계의 존재로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모든 자아-의식은 자아-실현의 결과로써 자신을 주장하는 자아이기 때문에, 현재까지의 삶의 모든 보람, 기쁨, 의미. 가치. 행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자아실현의 결과는 삶의 온전한 체험이자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가장 소중한 개인성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자아-실현, 곧 개인성의 본질은 절대자와 연결되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망아를 거쳐서 무아에 이르는 것은 신성한 절대자와의 직접적인 연결이 없이는 존재의 실현을 잊어버리고 중지하는 것과 같습니댜. 만약 존재의 의미와 가치와 본질을 중지하면 그러한 무아는 동물적 자아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아"라는 개념이 있는 한, 진아를 목표로 하는 무아는 헛된 시도입니다.

자아의 본질, 곧 존재의 본질과 의미를 찾으려는 도전은 원시 종교에서부터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의 가장 근원적인 도전입니다. 가장 치열하게 이 문제를 파고들었던 근대 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는 존재자로서의 자아를 정의하기 위하여 애쓰다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논리로 마무리했습니다.

스스로 주장하고 정의할 수 있는 자아는 존재할 수 없다는 유란시아 책의 진리를 알리가 없는 데카르트가, 자아-실현의 주체인 자아가 그 유일성을 존재하는 세계에서 이해하고 정의되는 본체로 시도한 것은 원래부터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반하여 하이데거는 반대 방식으로 자아를 정의하는데, 존재하는 객체의 관점에서 주체인 존재자를 정의하려고 했습니다. 변화하는 객체를 기준으로 해석하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연구되는 실존주의나 현상학의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만, 객체를 해석하는 주체로서의 통합성을 존재자로 정의한 한계 때문에, 유한한 존재론이 중심이 되다 보니, 그가 말하는 초월성에서 절대자와 연결되는 통로가 발견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자아-실현에서의 무한한 통로는 유한 차원을 넘어서는 통로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자아가 완성되는 것은 자아-의식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에 관한 헌재까지의 대부분의 진리와 도전은 현존하는 자아, 그 자체의 실체성을 정의하고 완성시키려고 합니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자아를 완성하는 것은 객체를 받아들이는 의식의 완성이고 그 의식의 방향이 신성한 차원으로 향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자아라는 말이나, 망아라는 말이나, 무아라는 개념이나 혹은 진아라는 개념에서 "아"라는 실체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 세상과 반응하여 받아들이는 객체로서 이해하고 그와 하나가 되는 것이 자아-의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것이 참된 자아실현입니다.

어떤 깨달음에서도 "아"는 반드시 중심으로 실존하는 개인성의 사실적 본체이지만, 자아 완성, 곧 개인성의 완성에서는 아를 잊어버리고 아를 초월하고 참되고 신성한 실체에 반응하고 접촉하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참된 자아실현의 여정일 것입니다.

댓글목록

로터스님의 댓글

로터스 작성일

불교에서는 무아가 진아와 같은 의미인 것 같고 마음공부 하는 분들에게는 진아가 불교의 무아와 같은 의미인 것 같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참나라는 말도 실제로는 개개인의 자아가 아니라 아트만과 이어지는 무아의 개념이 아닐까 이해되고요.

성자들이나 선승들의 어록을 보면 "진아를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실체가 아니고 일시적 헛된 망상이고, 또 진아는 시간과 공간이나 우주의 시작 이전과 끝남 이후에 원래 그대로 그냥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단편적으로 짐작하면 불교나 힌두교나 전통 종교에서 말하는 무아와 진아는 유란시아 책에서 말하는, 개인성과 직결되는 자아와는 다른 것 같습니다. 전문가가 아니라서 오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성이 시공간을 초월한 실체이고 우주적 진리라는 유란시아 개념은 절대적 위상이라는 관점에서 무아나 진아가 설명하는 내용과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 절대성만 본다면 개인성 개념의 부분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절대적 본질이 있는 실체성이나 절대적 현존이 있는 실존성을 불교에서는 거부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자아 개념에서 망아와 무아의 단계를 어떻게 시작하고 계속 나아갈지 방법을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자아가 우주 아버지의 증여라는 유란시아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자아의 망각이 진정한 자아의 새로운 무아 개념으로 표현될 수 있겠지요.

사트바님의 댓글

사트바댓글의 댓글 작성일

불교를 향해 기대되는 미래를 촉구하는 듯한 94편 12장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이 기록이 쓰인 당시에, 아시아의 대부분은 불교에 희망을 걸고 있다. 확대된 조화우주적 실체의 진리를 다시 받아들일 것인가?.... 오래된 이 신앙이, 자기가 그토록 오랫동안 찾으려고 애써온 하느님과 절대자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 상쾌한 자극에 다시 한번 반응을 나타낼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이 문장에서 말하는 조화우주적 실체의 의미를 계시의 메시지로 보고 있습니다. "아"라는 개념을 오온의 주체로서 여길 때, 불교는 희망이 없습니다. 잘못된 의식에서의 아상이지요.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주체에서 새로운 실체로 다시 시작할 때, 자아-망아-무아-진아의 개념은 불교를 되살아날 수 있겠지요. 성취하는 주체이기보다는 우주 실체에 반응하는 주체로 확장하는 것이 망아와 무아의 본래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빈나리님의 댓글

빈나리 작성일

자아의식은 심리학과 철학에서 다양하게 탐구하는 정신세계의 본질이고 앞으로도 풀리지 않는 신비인데 유란시아 계시를 통하여 잘 밝혀지면 좋겠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팔정도는 멸성제가 아니라 도성제의 수행 방법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팔정도와 반야가 순서가 바뀐 것 같기도 합니다.

사트바님의 댓글

사트바댓글의 댓글 작성일

불교가 주제가 아니라서 부담됩니다만, 개인적 이해를 부언해 봅니다. 도성제의 도와 팔정도의 도는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팔정도의 계-정-혜는 각각 상대적인 개념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 상대성을 멸하기 위해 팔정도는 멸성제를 위한 수행이 됩니다. 고집멸도의 도는 말 그대로 마지막의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옳고 바름의 상대성의 마지막 경계를 벗어난 그 너머에 있는 깨달음을 말합니다. 그것이 반야의 "바라승아제모지사바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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