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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진실과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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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너킥 작성일2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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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가장 큰 축제인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정한 것에서 시작되는데, 언제부터 예수님의 탄생일을 그렇게 정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예수님은 탄생일은 유란시아 책을 제외한다면 성경은 물론이고 어떤 기록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12월 25일은 예수님의 탄생일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12월 25일 인지는 아무도 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하늘의 축복을 상징하는 행사로서 태양신을 섬기는 이교도들의 축제가 아주 오랫동안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가 서기 274년경 신전의 공식 행사가 되고 국가 축제로 선포되면서 더욱 광범위한 여러 민족의 축제로 자리 잡자 서기 350년 교황 율리오 1세가 태양 탄생일을 예수 탄생일로 공식 선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신학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12월 25일은 진짜로 예수님의 탄생한 날이 아니고, 단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라고 그럴듯한 해석을 하기도 하지만, 그 근거가 이교도의 축제일이라는 사실만큼은 숨길 수가 없을 것이다. 예수님 탄생이라는 엄청난 기념일을 가장 행복하고 기쁜 분위기에서 축하하고 싶다는 염원은 자연스러운 갈망이라서 교황의 선언이나 그들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정서는 전혀 탓할 일은 아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곧 시작되는 새해를 즐겁고 활기차게 맞이하도록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하였다는 특별한 의미를 연말에서 새해로 넘어가는 시기에 다시 한번 떠 올릴 수 있는 것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8월 21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마지막 증여의 삶을 특별하게 유란시아를 선택하였다는 역사적 사건을 연말연시에 떠 올리고 축하하는 것은 사람들의 정서에도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12월 25일이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라는 생각은 진실로 위장된 거짓을 감추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버려야만 한다. 탄생일이 아니고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그의 탄생에 감사하고 하늘의 축복을 기념하는 축제로 생각과 마음을 바꿔야만 한다.

예수님의 탄생일이 아닌데도 동방박사가 별을 따라 찾아와 경배한 탄생의 드라마를 아련한 그리움과 고마움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리 잘못된 일도 아니다. 비난을 하거나 경시할 이유도 전혀 없다. 그런데 12월 25일에 일어나는 행사 중에서 엄중하게 지적하고 마땅히 비난해야만 하는 사실이 단 하나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이 인간의 원죄를 영원히 소멸시켜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사건으로, 다시 말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그러한 신성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하여, 탄생하신 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선언이다. 그러한 선언만큼은 경멸과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원죄에 대한 교리는 신성한 사랑을 인지할 지능이 없었던 참으로 어리석고 무지한 원시인에게 필요한 교리였고, 이미 예수님이 살았던 2천 년 전에도 원시적이고 열악한 종교로 추락되고 있었다. 그러한 원죄 개념을 타파한 예수님을 원죄 교리에서의 구원자라고 선언하는 것은 참으로 끔찍하게 예수님을 모독하는 짓이다.

121:6.5

필로의 모순점들 중에서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들은, 그리스의 신비철학과 로마의 금욕주의 교리를 형식에 매인 히브리 신학에 병합하려는 노력으로 인하여 발생되었는데, 이 점을 인식한 바울은 그리스도교가 형성되기 이전의 그의 기초 신학에서 이러한 문제를 현명하게 제거했다. 필로는 유대 신학 안에 오랫동안 잠재해 오고 있던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개념을 완벽하게 회복시켜줄 수 있는 길로 바울을 인도했다. 바울이 알렉산드리아의 이 부유하고 교육받은 유대인 필로와 보조를 맞추지 못했거나 또는 그의 가르침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속죄에 관한 교리였는데; 필로는 오직 피를 흘림으로써만 용서를 받는다는 교리로부터 해방을 가르쳤던 것이다. 또한 그는 생각 조절자의 실체와 현존에 대해 바울이 알고 있던 것보다는 조금 더 분명하게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의 원죄(原罪) 이론, 유전적인 죄와 타고난 악 그리고 그것들로부터의 속죄에 관한 교리는, 부분적으로 미트라 숭배에서 기원된 것이었으며, 히브리 신학이나 필로의 철학 또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원죄와 속죄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들 중에서 어떤 형태들은 바울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

 


신성한 사랑이 무엇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이미 인간이라면 거의 모든 사람이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사랑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다르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다는 얘기도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한다.

그런 사람에게, 사랑이란 남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의미를 산산이 파괴하는 비인간적인 사람이다. 전쟁에 나가서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고결한 희생이지 사랑은 아니다. 사랑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과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상대방의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없이 단지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참된 사랑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상대방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받아들이는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사랑이었고 그래서 그의 사랑을 신성한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신성한 사랑은 물론이고 인간의 사랑마저도 물질적 육체나 마음의 희생이 아니라 영의 열매로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 사랑은 상대를 받아들이고 그의 참된 행복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다. 사람의 원시적이고 물질적인 기쁨과 만족을 위하여 헌신하는 그런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사랑했던 그의 사랑을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강조하신 글에서 참된 진리 위에서 펼쳐지는 신성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도 한다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연말에 우리의 사랑도 다시 한번 새롭게 영의 열매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191:5.3

“내가 너희에게 다시 말해 주겠다: 아버지가 나를 이 세상으로 보낸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내가 아버지를 계시한 것처럼, 그렇게 너희도 신성한 사랑을 계시하라, 단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매일매일의 삶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혼을 사랑하라고 너희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사랑하라고 보낸다. 너희는 너희가 신앙을 두루 통하여, 하느님의 선물로, 영원한 생명을 이미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너희는 단지 하늘의 기쁨을 선포하는 것뿐만 아니라, 너희의 매일매일의 체험 안에서 신성한 생명의 이들 영적 실체들을 전시해야만 한다. 너희가 신앙을 가질 때, 높은 곳에서 힘, 진리의 영이 너희 위에 왔을 때, 너희는 이곳 닫혀있는 문 뒤에서 너희의 빛을 숨기지 않아야 할 것이다: 너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온 인류가 알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너희가 지금은 두려움을 두루 통하여, 반발하고 싶고 찬성하고 싶지 않은 체험의 사실에서 달아나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진리의 영으로 세례를 받을 때에는, 너희는 하느님의 왕국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새로운 체험을 하려고 용감하고 기쁘게 나아갈 것이다. 너희가 전통주의의 권한에서의 거짓된 안전으로부터, 살아있는 체험의 최극 실체들에 있는 사실, 진리 그리고 신앙의 권한에서의 새로운 질서로 넘어가는 과도기 변환의 충격으로부터 회복하는 동안, 너희는 이곳에서 그리고 갈릴리에서 잠깐 동안 머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너희의 사명은 내가 너희들 가운데에서 하느님을-계시하는 일생을 살았다는 그 사실 위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너희와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진리 위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너희가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아갈 일생─심지어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봉사한 것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실재적이고 살아있는 체험─으로 구성될 것이다. 신앙이 너희 빛을 세상에 계시하게 하라; 진리의 계시가, 전통으로 인하여 멀어버린 눈을 뜨게 하라; 너희의 사랑넘치는 봉사가, 무지로 인하여 초래된 편견을 효과적으로 파괴하도록 하라. 납득하는 공감 어린 동정심과 사심-없는 헌신으로 너희 동료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너희는 아버지의 사랑의 구원하는 지식으로 그렇게 그들을 이끌어 줄 것이다. 유대인들은 선(善)을 찬미한다;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美)을 드높인다; 힌두교인들은 전념 어린 헌신을 설교한다; 먼 곳의 금욕주의자들은 존경을 가르친다; 로마인들은 충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내 제자들에게 일생, 심지어 육신으로 있는 너희 형제들을 위한 사랑넘치는 봉사의 일생을 요구한다. ."

 

댓글목록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신성은 고사하고 보통의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도 거의 없어요. 현자도 성직자도 지혜의 영이 한계에요.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따끔하지만 토파즈님의 옳으신 지적은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유란시아 책을 읽는 사람도 자칫 계시로 전해진 새로운 깨우침을 다른 종교를 비난하거나 자기 자신을 높이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기적 본성의 함정에 빠지는 위험을 늘 조심해야만 하겠지요.

어느 생물학자의 선언을 굳게 믿으면서 이기적 유전자는 자연선택의 생명 현상계의 핵심 진리라고 굳게 믿는 사람에게 이기심을 버리고 신성한 사랑을 받으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실제로 이해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진리의 영이 예수님의 가장 큰 선물이라는 생생한 내막을 모르고 죄에서의 구원이 진실을 참된 진리라는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모든 사람에게 부어준 진리의 영이 인간 마음에 연결되는 통로는 막혀있는 채로 일생을 살아가게 되겠지요.

고도의 과학 문명이 인간 지식과 지혜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니, 물질 세상에서의 초월적 유토피아를 모색하는 분들은 인간 마음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영역인 지혜의 영이 활발하게 기능하는 영역에서 그 이상의 영역이 필요 없을 수도 있습니다.

성탄절이 새로운 의미와 모습으로 다시 탄생되기 전에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왜곡된 채로 이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안에서님의 댓글

그안에서 작성일

인용해 주신 191편 글을 읽으면서 진리를 깨우치는 것과 우리의 일상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너희는 너희가 신앙을 두루 통하여, 하느님의 선물로, 영원한 생명을 이미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너희는 단지 하늘의 기쁨을 선포하는 것뿐만 아니라, 너희의 매일매일의 체험 안에서 신성한 생명의 이들 영적 실체들을 전시해야만 한다. 너희가 신앙을 가질 때, 높은 곳에서 힘, 진리의 영이 너희 위에 왔을 때, 너희는 이곳 닫혀있는 문 뒤에서 너희의 빛을 숨기지 않아야 할 것이다: 너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온 인류가 알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너희가 지금은 두려움을 두루 통하여, 반발하고 싶고 찬성하고 싶지 않은 체험의 사실에서 달아나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진리의 영으로 세례를 받을 때에는, 너희는 하느님의 왕국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새로운 체험을 하려고 용감하고 기쁘게 나아갈 것이다. 』

본문 글에 따라면 만약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체험에서 그 신성한 생명에서의 영적 실체를 드러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평범한 일반 사람은 물론이고 사도들마저도 두려움 때문에 신성한 체험에 반발하거나 달아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심리학자들의 아무리 세상에서 널리 칭송받고 인정받는 용감하고 위대한 영웅이라고 해도, 그 겉모습과는 달리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진지하게 마주 보는 용기는 비정상적으로 나약한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용기는 두려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두렵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훈련을 통하여 혹은 안전한 사회에서 성장하여 두려움에 대한 감각이 사라진다면 용기 넘치는 삶의 체험은 마주할 기회가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다면 용기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찬성하고 싶고 즐거운 체험만이 늘 우리를 기다린다면, "찬성하고 싶지 않은 체험"을 직시하는 용기는 결코 발휘될 수 없습니다. 우리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 감추어져 있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그것에 반발하고 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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