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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에서 영감을 받은 독자분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의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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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트바 작성일22-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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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오한 세계로 들어가서 초월적 능력을 가지려고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일체개고의 현실계를 연기의 법으로 보고 고집멸도의 진리로 궁극의 깨달음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 실체적 깨달음이 영원히 벗어나는 열반이자 해탈이고 일련의 과정을 견성성불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견성성불은 수행의 목표이자 열매이기도 합니다. 견성이란 종지는 쉽게 말하면 마음의 본성을 보는 것이니 자신의 마음을 똑바로 불 수만 있으면 서서히 성취할 수도 있고 어느 순간에 찰나적으로 갑자기 이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마음을 꿰뚫어 그 본성을 보는 직지인심은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어렵다는 것은 마음이란 것이 도무지 가만있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감각에 따라 반응하거나 생각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따라 움직이는 않도록 실제로는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 선천적 모순을 해결하려고 쉬지 않고 명상이나 수행을 하고, 진속불이의 경지에서 공을 만나는 반야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쉽다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공간을 막론하고 생각이나 마음이나 현상이나 그 어떤 형상이나 실체나 그 유무의 이전에 이미 그것의 연기가 비롯된 본성이 여전히 원래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없어진 적이 있을 수가 없는 데, 없어졌으니 찾아야 한다고 괴로워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시작된 것이니, 이제 없어졌다고 찾지 말고, 원래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된다는 것이지요.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갈 사람은 없지만, 쉬운 길을 아무리 가도 본성을 보았다는 사람도 없고 초월 세계가 쉽다는 생각 자체가 우주 질서에 맞지도 않는다는 도리와 상식으로 겸손하게 또는 어쩔 수 없이 어려운 길이 옳다고 믿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서로 올바른 방편이라고 갈등했다가, 그럴듯한 방편이 본성을 가린다고 생각했지요.  

 

결국 견성성불은 방편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실존하는 본래면목을 받아들이는 믿음에서 시작하여, 일관된 용맹정진을 거쳐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이지요. 그렇게 모든 비 자아와 자아 너머에서 원래 있기도-없기도 하는 진면목이야말로, 불가사의하고 신비한 초월적 능력과 실존의 근원인 것이지요.  

 

이러한 진리는 깨달음을 구하는 여정에서 누구나 한 번쯤 만나는 종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체험을 해 보신 분들이 유란시아 책을 만나서 자칫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진면목과 진아, 자아에 대한 개념입니다. 진면목을 유란시아 책의 절대적 모습인 개인성으로 그리고 진아를 완전한 영적 실체를 성취한 신성과 융합된 개인성으로 이해하는 경우에는 아주 조심해야 하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유란시아 책의 개인성은 원래부터 존재하는 개념에서의 진면목이 아닙니다. 개념적으로나 실존적으로나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 부분의 차이점을 직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유란시아 책의 계시에서 아무런 신성한 열매를 얻을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이 차이점은 심각합니다. 종교적으로 혹은 개념적으로 서로 다른 진리 때문이 아니라, 어느 하나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어떤 경우에도 사실적 실체와 결합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리로 불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진리의 실체가 개념이 되는 것이지, 진리의 개념이 실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그 원천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영적 실체이며, 이것이 시간과 공간의 조건 하에서 물리적 실체로 그 의미와 가치를 드러내면서 진리의 개념이 갖추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18:3.3]
진리는 동요될 수 없는 것이다,─모든 일시의 과도기적 파란으로부터 언제까지나 면제되는 것이다, 하지만 결코 다시는 죽거나 형식을 갖추는 것이 아니며 항상 활기에 넘치고 잘 맞으며 순응하는 것이다.─눈부신 빛을 비취도록 살아있다. 그러나 진리가 사실과 연결될 때에는, 시간과 공간이 그 의미와 그리고 서로 관련된 그 가치들을 조건 짓게 한다. 사실과 결합된 진리의 그러한 실체들은 개념이 되며 그리고는 그에 따라 상대적 조화우주 실체들의 권역에 귀속된다.

 

물리적 세계에서의 체험적 지식과 지혜에 따라 뚜렷한 개념으로, 제행유상의 의지적 실체가 존재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초월적 세계와 이어질 수 있는 진리입니다. 전통 불교와 우파니샤드를 모두 수용하여 안아트만과 아트만이 공존하는 것을 진아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잠재적인 절대적 존재로 가정하려는 표현일 따름이며, 여전히 사람이 만들어낸 절대자 개념입니다.  

 

초월적 세계를 인간이 힘으로 다가가려는 시도는 위대한 도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반드시 성취된다는 초월적 세계가 진정으로 초자연 세계를 말하는 것인지 초이성이 아니라도 판단할 수 있겠지요.  그러한 확신은 실제로 절대자를 본 적도 들은 적도 그 앞에 선 적도 없는 사람이 설명하는 절대자입니다. 참고로 유란시아 계시자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7.9]
나는 하느님의 본성과 속성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이 글을 후원하도록 위임받았는데, 왜냐하면 거주하는 어떤 세계든지 그러한 목적을 위해 가능한 정보의 최고 근원을 내가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일곱 초우주들 모두에서 신성한 조언자로 일해 왔었고, 오랫동안 모든 사물들의 중심인 파라다이스에 거주해 왔다. 나는 우주 아버지의 즉각적인 개인적 현존 안에서 머무는 최극의 기쁨을 여러 번 누려왔다. 나는 도전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아버지의 본성과 속성에 대한 실체와 진리를 묘사한다; 나는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댓글목록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유란시아 책에서 불교를 설명하는 부분을 보면 미래 시대에서의 불교가 변화할 것인지 큰 기대를 하는 글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 소개되는 글이나 영상들을 보면 현재 한국 불교에서는 그러한 가능성을 찾기 힘듭니다.

기독교나 다른 종교와 여러 진리를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모습은 상당히 긍정적입니다만, 불교의 근본 교리는 변화될 여지가 아직은 없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오히려 세속화되는 불교에서 앞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유란시아 진리가 반영되기를 기다려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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