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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에서 영감을 받은 독자분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관심에서 시작되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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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새 작성일22-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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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의 키워드 중의 하나는 사랑이다. 이 세상에서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세상 모든 사람을 앞뒤 가리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도 없지만,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없다. 결국 사랑은, 비록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모든 사람이 실천하고 있다.

그럼에도 유란시아 책은 사랑이 진리를 실천하는 핵심이자 최고의 삶이라고 새삼스럽게 계시하고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계시로 깨어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반증일 것이다.

지금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실천하고 있는, 그런 사랑은 인류를 영원한 삶으로 이끌 수 없으며, 오직 유란시아 책에서 새롭게 깨우쳐주는 그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시급하게 필요한 시점이라는 의미이다.

사랑은 그 시작이나 결과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사랑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사랑은 상대에게 관심을 집중하고 공감하고 같이 행복을 느껴가는 일이다. 그것이 물건이건 사물이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고, 진정한 의미의 사랑도 사람에 대한 특별한 관심에서 시작될 것이다.

관심의 시작은 친구나 이성처럼 평소 자신이 좋아하고 바라던, 참되고 아름다운 모습에 공감하는 것도 있고 자녀나 어린아이처럼 무작정 보호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의 시작은 지극히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굳이 유란시아 책을 통하여 우리를 새삼 일깨워줄 필요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자연적으로는 도저히 관심이 생기지 않는 경우를 계시로서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에서 시작된 사랑이 참된 사랑의 시작이며 결국 개인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열매를 맺는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사랑할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유란시아 책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니다. 반대로 악이나 죄처럼 반드시 멀리해야 하고 또한 실체도 아닌 상대를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 아니다.

이러한 자연적, 본능적으로 관심이 가거나 아니면 반드시 피하거나 거부해야 할 대상을 제외하면, 사랑의 시작이 되는 관심은 그 범위가 한층 좁혀진다. 일단은 웬만해서는 발견하지 못하는 참되고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동기에서 그 관심이 시작되는 것을 꼽을 수 있다. 곧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평범하거나 초라한 상대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는 것이 그 시작일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무르익기 이전에 나타나는, 연민이나 동정도 특별한 관심의 시작이다. 그러나 연민과 동정이 사랑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극히 조심할 필요마저 있다. 니체가 그리스도교를 신랄하게 비판한 안티크리스도라는 책을 보면, 그는 남에게 동정심과 연민을 가지는 그리스도교인을 악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

니체는 진리를 안다는 종교인이 그런 연민과 동정심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상대방의 삶을 볼품없는 초라한 삶이라고 깔보는 것이고, 종교적 진리가 선언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자신의 잣대로 낮게 평가하고 심판하는 것이라서, 그런 짓은 제정신으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혹평한다.

그는 생각이 있다면, 누구나 이런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데도 그리스도인은 이상할 정도로 그런 사실에 고개를 돌리는 데, 그것은 연민을 느끼고 동정하는 즐거움을 주는 종교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라고 조롱한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야릇한 자기 성취의 즐거움에 주기 때문에 그런 무의식적인 자기만족에 깊이 중독되면 헤어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래서 니체의 말에 따르면, 종교인들의 머릿속에는 진리가 거꾸로 서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외치는 참과 거짓을 정반대로 해석해야만 비로소 참된 진리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 그는 진리란 원래 이 세상을 위해 이 세상을 설명하고 이 세상에서 실천해야 하는 것인데, 그들은 하나같이 저 세상을 위해서 떠들면서 그것을 진리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니체가 한 말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지만, 요즘 그의 말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이유를 보면 심각하게 되돌아볼 여지가 있다. 유란시아 책에서 계시되는 참다운 진리와 사랑의 실천도, 어떤 면에서는 니체가 지적한 자기 성취와 만족의 이기적 사랑을 예리하게 정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란시아 책에는 인간이 참된 행복을 성취하는 사랑의 시작과 비결과 결실이 책 전편에 걸쳐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예수님이 사도들과 함께 두 번째로 예수살렘을 방문했을 때, 새롭고 참된 사랑의 실천이 어떤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답한 글이, 간결하면서도 결론적으로 사랑을 가르치신 것이다. 

"악한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도 사랑해야 합니까?" 하는 ​나다니엘의 질문에 예수님은 사랑의 실천에 적용할 수 있는 6 단계를 이렇게 말하셨다.

 

147:4.4
 

1. 육신의 차원

순수하게 이기적이고 호색적인 그러한 해석은 너의 질문에서 가정한 것으로 잘 예증될 것이다.

2. 느낌의 차원

이 경지는 육신의 그것보다는 한 차원 높은 것이며, 동정심과 연민이 이러한 삶의 규칙에 대한 각자의 해석을 강화할 것임을 암시한다.

3. 마음의 차원

마음에서의 이성(理性)과 체험에서의 지능이 이제 행동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삶의 규칙이, 심오한 자아-존중의 고결성으로 체현된 최고의 이상주의와 조화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고, 선한 판단이 명령한다.

4. 형제같은 사랑의 차원

자신의 동료들의 복지에 사심-없이 헌신하는 차원이 여전히 더욱 높게 발견된다. 하느님의 아버지신분을 의식하고, 그 결과로 사람의 형제신분을 인지함으로써 성장하여 나오는, 전심을 다하는 사회적 봉사의 이 더욱 높은 경지에서는, 이 기본적인 일생의 규칙의 새롭고 훨씬 더 아름다운 해석이 발견된다.

5. 도덕적 차원

그러고 나서 너희가 해석에서의 참된 철학적 차원을 달성할 때, 사물의 옳음그릇됨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실제 통찰력을 가질 때, 인간 관계에서의 영원한 어울림을 감지할 때, 너희는 어떤 높은-마음을 갖춘, 이상주의적인, 지혜로운 그리고 편견 없는 제삼자가 그러한 하나의 명령을 너희 일생 상황에 대한 조절에서의 너희 개인적 문제들로 적용되는 것으로, 그렇게 바라보고 해석하리라 너희가 상상하는 대로, 그렇게 해석의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할 것이다.

6. 영적 차원

그리고 그 다음에 마지막이면서 모두에서의 가장 위대한 것으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어떻게 대하리라고 생각하는 그대로 모든 사람을 대하라는 신성한 명령을, 이 일생의 규칙에서 인지할 것을 우리에게 재촉하는, 그러한 영적 통찰력과 영적 해석의 차원을 우리가 달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 관계에 대한 우주의 이상(理想)이다. 그리고 이것이, 너희의 최극 욕망이 언제까지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일 때 모든 그러한 문제를 대하는, 너희의 태도이다. 그러므로 내가 비슷한 상황 안에서 모든 사람에 대하여 행하리라고 너희가 알고 있는 그것을, 너희가 모든 사람에 대하여 행해야만 할 것을 내가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6 단계의 사랑의 차원을 설명한다. 그리고 유란시아 책에서 그리고 예수님이 끊임없이 깨우쳐 주려고 애쓴 사랑이 바로 형제로서의 사랑이다. 이 말은 계시 없이 성취될 수 있는 사랑의 한계가 마음의 차원이지만, 그러나 생존이 보장되는 사랑의 차원은 형제 사랑과 도덕적 차원의 사랑 그리고 영적 차원에서의 사랑임을 말하신 것이다.

사람이 관심에서 시작된다면 그 관심이 마음이 한계인지 아니면 형제 의식이나 도덕적 의식에서 발휘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야만 한다. 우리는 자칫 니체가 지적한 육신의 차원, 느낌의 차원, 마음의 차원에서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느님의 진리를 내세우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댓글목록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이웃을 형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늘 기억하고 있을 만큼 유란시아와 성경 진리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말씀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네요. 인간의 능력이 느낌과 마음의 해석을 벗어나기가 힘들기 때문에 최소한 형제 같은 사랑만이라로 하기를 호소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도덕적 의식이 생각 조절자를 받아들이고 정의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형제 같은 사랑은 육체적 지적 본능을 극복한다는 시작일 뿐, 그것이 목표가 아니겠지요. 영적 의식이 신성한 생각 조절자와의 교제하는 의식이라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실제로 인식할 수 있는 차원이 최종 목표일 것입니다.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연민이나 동정은 자기가 기준이 되는 주관적 감상이고. 사랑은 객체가 중심이 되는 감정이에요. 많이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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