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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에서 영감을 받은 독자분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절대 차원과 현실의 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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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로터스 작성일22-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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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의 서문에는 절대와 상대에 관하여 정의하는 글이 있습니다. 간략하게 말하면, 일단 절대라는 말이 들어가면 그것은 단지 시간과 공간의 초월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이 없음을 의미한다고 정의합니다. 절대적이라는 말에서 영원하고 무한하다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이지요.

유한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시간이 없고 공간이 없다는 절대의 의미를 실감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영원하고 무한한 실체가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절대적 차원에서 비롯되고 투사되고 있다는 개념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비록 개념적이나마 초-시간 초-공간적 실체가 있음을 정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개념적 정의에서 모든 종교적 철학적 의식과 깨달음과 진리를 이야기하고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이지요.

유란시아 책에서는 이렇게 유한한 인간이 영원 무한의 실체에 개념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이유를 인간의 마음과 생각이 초-유한 차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의식 안에서 철학적 혹은 종교적 극단에 비록 물리적으로 확인되는 실체는 아니지만 초-물질적 실체 곧 무한하고 영원한 속성을 지니는 어떤 실체를 인식하고 체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체험이 깨달음이며 종교의 창시자들이 성취한 생생한 사실적 실체로 세상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진리일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일반적인 생각이나 개념이나 의식이나 상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종교의 창시자들이 그러한 생생한 실체적 깨달음에서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면, 보통 사람들도 그러한 진리를 바탕으로 어떤 철학적 종교적 극단에 이를 수 있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초-물질적 차원에 실제로 존재하는 무한하고 영원한 실체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모든 사람에게 있고 누구나 그러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절대적 차원은 우리가 살아가는 유한한 차원을 넘어서는 아주 높은 것이기는 하지만, 단절된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세계에서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깨달음의 극단에서 얼핏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초-유한적 실체를 확인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유란시아 책에서 이러한 절대 차원의 실체성을 깨달은 종교를 브라만교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절대적 실체성과 본성과 속성인 절대자에 접근하지 못하여 일상의 삶에서 반영되지 못한 것을 치명적인 실수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깨달음의 극단에 이른 종교는 사실상 브라만교와 브라만교의 진리를 잘 알고 있는 불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94:3.2
브라만의 개념에서 당대의 마음들은 모든 것에-스며있는 어떤 절대자에 대한 관념을 정말로 파악했다. 왜냐하면 이 가정(假定)이 한 때 그리고 동시에 창조적인 에너지와 조화우주적인 반응으로 정체화되었기 때문이다. 브라만은 모든 정의(定義)를 초월하는 것, 모든 유한적인 본질특성들에 대한 연속적인 부정에 의해서만 깨달아질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확실히 절대적인 존재, 심지어 무한한 존재에 대한 믿음이었지만, 이 개념은 대개 개인성 속성들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개별적인 종교인들에 의하여 체험될 수 없었다.

 

불교 신자들이 화두로 삼는 여러 글 중에서 방화착(放下着)이라는 예화가 있습니다. 서예가들이 애호하는 글귀이기도 하지요. 이 말의 뜻은 길을 가던 스님이 절벽 중간에 있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는 장님을 발견하고 "지금 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그냥 손에서 놓아 버리라"라고 조언한 이야기입니다.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불교의 진리를 함축하고 있는 예화이지요

장님이라서 자신이 매달려 있는 절벽의 땅바닥이 실제로는 한치도 안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죽기 살기로 발버둥 치며 살려달라 외치는 삶을 비유하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한 치 앞에 있는 진리를 모른 채 현실의 욕심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눈뜬장님으로 외치며 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방하착을 방하락(放下落)으로 고치면 정반대의 얘기가 될 수 있습니다. 장님의 외침이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근본 목적이자 존재의 이유인, 상승 곧 위로 오르는 것, 실패에서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면 손을 놓으라는 조언은 오히려 활기찬 삶을 포기하라는 조언이자 존재함을 망각하라는 위로의 불교 진리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손을 놓는 순간 살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살아난들 계속 손을 놓기만 하는데, 이승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겠지요.

절대의 개념은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바탕 위에서 더욱 높고 무한하고 영원한 차원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입니다. 절대 차원과 현실은 끈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끈은 놓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단단히 붙잡고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댓글목록

네오님의 댓글

네오 작성일

오래전에 방하착에 대한 예기를 듣고 가까운 곳에 진리가 있는데도 먼 곳에 있는 진리를 찾아 헤매는 어리석은 중생을 깨우치는 불교 진리로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단편인 생각 조절자가 있음에도 하늘 먼 곳에 있을 하느님을 갈망한다는 유란시아 책의 가르침과도 연관되는 것 같고요.

그러나 진리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집착에서 벗어나는 단순한 포기를 의미하는 가르침이라면 정말로 삶의 참된 가치를 스스로 부인하는 ㄴ것이겠지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경전의 말이 오로지 물질에만 몰입하는 어리석은 삶을 말하지만, 그것이 물질 세상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님을 모르는 분도 많이 있습니다. 아마도 영적 진리를 알고자 하는 갈망이 없다면 모든 진리는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진리에만 머무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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