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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에서 영감을 받은 독자분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성적 이해와 감성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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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디오니스 작성일22-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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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대하는 반응과 사람의 성격을 이야기할 때 이성적 혹은 감성적 타입이라고 종종 말합니다. 혈액이나 별자리 같은 것으로 성격을 말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과학이 발달된 요즘은 유전자를 가지고 추정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성격을 예단할 수는 없습니다.

심리학이나 교육 분야에서는 가끔 적성에 맞는 것을 분석할 때 성격 테스트를 하고는 있습니다. 애니어그램도 있고 MBTI라는 것도 있고 빅 5라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데이터를 기반으로 궁합도 보고 적절한 대상을 찾는 데 활용하지요. 특히 미지의 세계에 궁금증이 많은 젊은 층이 흥미를 가지고 관심을 가지지요.

궁합이나 애니어그램보다 통계 데이터를 활용하는 것이 그나마 설득력이 있다고 말하지만 성격은 환경이나 직업이나 개인 훈련이나 수양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으니 원래 정해져 있다는 성격 분류나 테스트는 가히 믿을만한 것은 아닙니다. 엄격히 말하면 미신이지요.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의 심리에는 태어날 때부터 무언가 정해져 있다고 믿고 싶은 요소가 있다고 하는데, 성격이나 운명도 그런 잠재의식에서 발전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달리 생각하면 그런 생각은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결정적인 도피처가 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을 때 그런 도피처를 찾아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이지요.

변하지 않는 타고난 성격을 분류하고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동양과 서양이 많이 다릅니다. 서양인들은 특정한 재능이나 장점을 활용하려는 목적이라고 본다면, 동양에서는 자신을 어필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요소로 활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상대적으로 비교할 때, 서양이 이성적이라면 동양은 다분히 감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개인의 성격 차이 이전에, 동양과 서양이 이성적 감성적으로 그 특징이 다르다는 점을 먼저 파악해야만 하는 데, 이러한 커다란 집단의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만약 동양인이 상대적으로 감성이 풍부하고 서양인이 이성이 풍부하다면, 개개인의 성격 차이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에서도 다를 수밖에 없고 나아가 사물을 판단하거나 삶을 살아가는 데에서도 차이가 있겠지요.

이러한 차이는 유란시아 책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에서도 동양과 서양이 다를 수 있고 성격 테스트를 받아들이는 데에서도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유란시아 책에서는 진화 세계에서 유색 인종이 출현하는 사건을 자세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각 인종의 특징과 본성을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서로 보완적이며 진화의 필연적인 과정임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빛과 생명의 시대에 이르면 그러한 종족의 차이가 없어지고 하나의 민족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전까지는 하느님의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모습도 인종마다 다르고 당시의 개인 성격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요.

195:3.3
그리스도교는 로마에서 금욕주의 스토아학파 철학자의 활력적인 가르침들과 신비주의 예배종파들의 구원의 약속 사이에 커다란 서로 간의 논쟁이 있던 시기에 호감과 혜택을 얻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그들의 언어에 “사심-없음”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는 영적으로 굶주린 민족에게, 상쾌한 위로와 해방시키는 힘으로 다가왔다.

유란시아 책에서 사심-없음이라는 말은 삶의 실천에서 가장 중요한 자세임을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여 일상생활에서 무언가를 결정하고 판단하고 실천하는 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지식과 지혜로 진리를 찾고 삶의 실천으로 삼으려는 많은 사람들이 철학이나 전통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나 지금이나 그리스도교에서 대표되는 진리는 예수님의 구원의 약속일 것입니다.

그런데 철학자들이나 진화 종교를 신봉하는 민족을 영적으로 굶주린 민족에게 "사심-없음"을 표현하는 말이 없었다는 설명은 그러한 개념이 없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의 철학은 활력을 주는 진리였고 종교는 구원을 약속하는 진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진리나 사회적 환경이나 문명이 사심-없음이라는 의식이나 개념을 가질 수 없었고 그러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영적으로 굶주린 민족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그들에게 상쾌한 위로와 해방시키는 힘을 주었다는 말은 사심-없음이라는 개념이 없던 민족이라는 말과 쉽게 연관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이전의 시대에도, 진리를 모르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조차도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나 국가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마저 기꺼이 바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 그러한 단어나 의식이 없을 수는 없지요. 이 문장에서 말하는 사심-없음은 세상을 위하여 자기 목숨이나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사심-없음의 개념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화된 예수님의 진리가 상쾌한 위로가 되었다는 말은 진리를 감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해방시키는 힘이 되었다는 말은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성과 지성이 동시에 움직이기 때문에 이를 구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만, 동양과 서양의 차이에서 감성과 이성을 말할 수 있다면 이러한 구분은 미묘한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의 정도에 따라서 삶의 변화에서 진리가 끼치는 영향이 크게 달라질 수 있겠지요.

지금도 예수님의 진리를 서양이나 동양의 특징에 따라 혹은 개인 성격의 비중에 따라, 상쾌한 위로나 해방시키는 힘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진리나 유란시아의 계시된 진리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모든 진리의 이해와 실천이 어느 한쪽에 상대적으로 좀 더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만 진보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사심-없음을 표현하는 개념이 확고하게 의식에 자리 잡고 있을 때,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예수님의 진리로 새롭게 탄생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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