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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에서 영감을 받은 독자분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거친 세상에서 진리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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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디오니스 작성일22-02-25

본문

진리는 참된 것을 말합니다.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변함없이 올바르고 순수하다고 인정되는 사실을 말하지요. 쉬울 수도 있지만 어렵게 생각하면 막상 무엇을 진리라고 이해할 지 막막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진리는 기본적으로는 참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올바르고 순수하고 진지하게 사는 삶을 참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진리의 삶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진리는 그러한 참된 것에 더해지는 무언가가 있지요. 참된 삶에 중심을 이루는 확고한 이치나 도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진리는 태도나 현상이 아니라 어떤 사실적이고 개념적인 실체입니다.

 

일상의 일이나 생활이 철학이나 종교를 다루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상의 업무나 쇼핑이나 모임 같은 여러 사회활동을 하면서 진리를 생각하거나 연관시키는 경우는 없지요. 그러다 보니 진리는 삶의 현실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물리적 현실을 벗어난 좀 더 높은 의식의 세계에서 탐색하고 발견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보통은 진리는 철학이나 종교와 연관되는 것으로 한정하고, 바쁜 현실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것으로, 굳이 가깝게 생각할 이유도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지요.

 

현실이나 삶에 대한 총체적 의문을 품다가 그 해결의 실마리가 될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이 초월적 가치이자 목표가 될 때 그 진리는 철학적 또는 종교적 신앙이 되면서 의식의 깊은 곳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렇게 자리를 잡은 신앙의 핵에는 현실을 초월하면서도 현실을 해석하고 영향을 주는 신성한 실체로서의 진리가 의식 안에 있는 것이지요. 삶의 모든 활동들이 의식 세계와 연관되어 있으니, 진리는 우리도 모르게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일상 생활에 반영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진리는 철학이나 종교적 신앙을 통하여 의식 안에 자리 잡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란시아 책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생각이 잘못이라고 밝힙니다. 나아가 그러한 진리는 죽어있는 진리라고 설명하면서, 신성한 진리와 다른 것이라고 구분하고 있습니다.

 

180:5.2
신성한 진리는 영으로-식별되는 것이며 살아있는 실체이다. 진리는 신성의 실현과 그리고 하느님과 교제하고 있음을 의식하는 그러한 높은 영적 차원에서만 존재한다. 너희는 진리를 알 수 있고, 진리를 실천할 수 있다; 너희는 혼 속에서 진리가 자라는 것을 체험할 수도 있고 마음속에서 그 깨우침이 주는 해방을 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너희는 진리를 인간 행위의 공식, 규범, 교리 또는 지적 원형틀 안에 가두어 둘 수는 없다. 너희가 신성한 진리를 인간적 정형화로 담아내려고 할 때, 그것은 급속히 죽는다. 감금된 진리를 죽은 뒤에 검시하여 구조하려는 것은, 정말이지, 결국에는 기껏해야 지능화하는 작용으로 영광스럽게 된 어떤 유별난 형태의 지혜의 실현만이 결국 생겨날 수 있을 뿐이다. 정적인 진리는 죽어있는 진리이다, 그리고 죽은 진리는 오직 이론으로 유지될 수 있다. 살아있고 살아나게 하는 진리는 역동적이며, 그리고 오직 그것만이 인간 마음속에서 체험적 실존을 향유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오해는 진리가 "신성한 것"이고 "영으로-식별되는 것"이라는 설명을,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근원이 우주 아버지에게 있으니, 진리나 신성도 모두 하느님 세계에서 유래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진리의 근원은 하느님의 세계에 속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펼쳐져 있고 드러나고 발견되는 바탕이 되는 세계는, 하느님의 세상에 아닌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계시에서 밝혀주고 있는 모든 진리는 근원이 어디인지 상관없이 전적으로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일상에서 발견되어야만 하는 것이지요. 사람은 하느님 세계나 또는 그곳에 존재하는 어떤 실체도 의식은 물론 상상조차 할 능력이 없습니다.  

 

진리는 역동적인 현실 안에서 발견되고, 알려지고, 실천되는 것임을 유란시아 책이 거듭 강조합니다. 의식이나 개념 안에서 현실을 판단하는 진리는, 철학이나 신학이나 학문적 규범으로 표현되고 강조되고 선포되는 진리이며, 의식에 정체되어 있으므로 죽어있는 진리라고 말합니다. 죽은 진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이지요.  

 

진리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자신의 이기적 영적 만족을 위하여 하느님과 신성을 스스로 상상하며 현실을 떠나, 환상 속에서 기뻐하는 것은 오히려 현실 안에 담겨있는 진미선의 선택을 방해하고 스스로 거부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파괴하는 독입니다.

 

죽은 진리를 과감히 내던져 버리고, 살아있는 진리를 발견하여 간직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진리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것이지요. 실천이라는 움직임이 없다면, 아무리 살아있는 진리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활력을 잃을 것이고 결국에는 의식에만 존재하는 죽어가는 진리로 되어갈 것입니다.

 

진리가 현실에서 발견되고 활기차게 그리고 역동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신성한 실체라면, 우리는 실천해야 할 마음의 힘, 생각의 힘, 육체의 힘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 힘이 어떻게 얻을 수 있을지 유란시아 책이 밝혀주고 있지요.  

 

194:3.19
진리의 영이 오는 것은 인간의 가슴을 정화시키고, 받아들이는 자들을 인도하여 오직 하느님의 뜻과 사람들의 복지를 이루려는 일생에서의 단일 목적을 형성하도록 한다. 이기심인 자아-본위인 물질적 영은 자아-없음의 이 새로운 영적 증여 안으로 삼켜져 사라졌다. 오순절은, 그때나 지금이나, 역사에서의 예수가 살아있는 체험의 신성한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신호한다. 넘치도록 퍼부어진 이 영에서의 기쁨은, 그것이 인간 일생 안에서 의식적으로 체험될 때에는, 그것은 건강을 위한 강장제, 마음을 위한 자극, 그리고 혼을 위한 어김없는 무진장한 에너지이다.

 

이 문장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명백하게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진실과 거짓, 선함과 악함, 아름다움과 추함 속에서 참된 것을 가려내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모든 사람은 진리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지나친 자기 욕심이나 편견을 잠시 억제하고, 공정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현실을 마주하고, 그리고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이 참된 것, 진실한 것을 선택하고자 시도하면, 누구나 가능합니다.  

 

우리 자신이 지닌 그러한 능력을 활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치나 도리에 맞는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몸이 원하는 것, 마음이 원하는 것을 일단 선택한다는 점에서. 진리를 선택하는 이러한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다만 실제로 진리를 분별하고 선택하도록 이끄는 힘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진리의 영의 힘이라는 점에서 의외로 쉬울 수도 있습니다. 각자의 의지가 이 모든 것을 시작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인 데, 그 의지가 웬만한 신앙, 살아있는 신앙이 없이는 잘 안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의지는 결심이 아닙니다. 결심이 신앙은 아닙니다. 신앙이 진리는 아닙니다.

 

참된 것, 곧 진리를 선택해도 그것이 실천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위의 문장에는 우리에게 있는 진리의 영이 의지에서 나온 선택과 함께 진리의 기쁨으로 넘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한 기쁨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의식 안에서 체험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의 참된 것을 몸과 마음과 영이 모두 기뻐하고, 기쁨의 체험으로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참된 사실이 실천의 기쁨을 통하여 체험 안에서 의식될 때, 진리는 비로소 몸의 건강을 위한 강장제가 되고, 마음을 자극하여 힘을 솟게 하고 혼을 생성하는 무진장한 에너지가 됩니다.  

 

진리는 거친 세상에서의 고통을 잊게 하고 휴식을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니라, 난관과 장애와 불행을 정복하는 무진장한 에너지의 원천으로 주어진 것이지요. 거친 세상은 고난의 무대이지만, 무진장한 에너지를 담고 있는 역동적인 무대이기도 합니다.

댓글목록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모든 물질적 철학적 영적 진리는 아름답고 동시에 선하다는 2편의 글이 생각이 납니다. 진리의 기쁨이라는 말은 아름다움과 선함이 함께 동반되는 참된 것을 생각하면 조금은 수긍이 될 것 같습니다.

진리가 우리의 몸과 마음과 혼에 에너지가 된다는 말씀도 그렇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모두 진리가 인간의 잠재 능력을 깨워 준다는 의미 같습니다.

잠재력에 대한 근원을 잘 몰라서 자신을 비롯하여 세상과 타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경계하면서 살아갑니다. 종교인들의 경전 해석과 철학자들의 지혜와 치유의 책이 긍정적인 자세로 살아가도록 깨우쳐주지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이 한계이지요. 진리와 신성의 연관성을 모르게 때문인지, 비슷비슷한 이야기들만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진리의 에너지가 체험이 되는 길이 열리면 좋겠습니다.

네오님의 댓글

네오 작성일

가장 큰 진리는 우주 아버지의 뜻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을 몸소 실천하는 것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진리를 알리는 삶을 사신다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 삶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웃을 형제처럼 사랑하라는 말에 담긴 진리가 실천하기가 쉬우면서도 깊은 진리일 것입니다. 진리가 힘의 원천이라면,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우리에게 힘을 찾아주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진리의 영은 지혜가 나타난 이후 증여되고 그다음에 신성과 접촉돼요. 체험적 지혜가 진리 힘의 시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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