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함 (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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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함 (善)

 

 

a07e516e1b2bc1a995716ddca5e25c00_1574589 신성은 창조체에게 진리와 아름다움 그리고 선함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성 속에서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사명활동으로서 상호 관련되어 지며; 미(未)개인적 차원들에서는 공의(公義), 힘 그리고 통치권으로 드러난다. [0:1.17]

 

최극 아름다움을 식별함은 실체의 발견 그리고 집대성이다: 영원한 진리 안에 있는 신성한 선(善)을 식별함, 그것은 궁극의 아름다움이다. 인간 예술의 매력조차도 그 합일성의 조화 속에 있다. [2:7.8]

 

진리에 관한 개념은 개인성과는 별도로 다루어질 수 있고, 미(美)에 관한 개념은 개인성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신성한 선(善)의 개념은 오직 개인성에 대한 관계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오직 개인만이 사랑할 수 있고 사랑 받을 수 있다. 미와 진리조차도 그것이 사랑의 아버지, 개인적인 하느님의 속성들이 아니라면 생존 소망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다. [1:7.3]

 

이상주의─신성한 것에 다가가는 개념─가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사람은 상대적 선함과 아름다움의 환경, 더 나은 것들에 도달하고자 하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적 환경 속에서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3:5.11]

 

위대함에 대한 측정은 구체(球體)마다 다르다. 위대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위대함의 본질특성은 전적으로 선(善)의 내용에 의해 결정되므로, 심지어는 너희의 현재 인간적 정황에 있어서도, 만일 너희가 은혜를 통하여 선하게 될 수 있다면, 너희는 그것에 의해 위대하게 되어가고 있다. 너희가 확고하게 더 바라볼수록, 그리고 너희가 더욱 끈덕지게 추구할수록, 신성한 선(善)의 개념은 위대함에 있어서, 진정한 생존적 성격의 참된 고결함에 있어서 너희로 하여금 더욱 분명하게 자라게 할 것이다. [28:6.22]

 

아름다움, 리듬, 그리고 조화는 지적으로 연합된 것이고 영적으로 동족이다. 진실, 사실, 그리고 관계는 지적으로 분리될 수 없고 아름다움의 철학적 개념과 연합되어 있다. 선함, 정의로움, 그리고 공의(公義)는 철학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살아있는 진리 그리고 신성한 아름다움과 영적으로 함께 묶여 있다. [44:7.2]

 

선(善)은 신성한 완전의 다양한 차원들의 상대적 가치들에 대한 정신적 인식이다. 선(善)에 대한 인식은 도덕 지위의 마음, 선(善)과 악(惡) 사이를 분간하는 능력을 가진 어떤 개인적 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선함, 위대함의 소유는 실제적 신성 달성의 척도이다. [56:10.12]

 

우주적 아름다움은 물질적 창조 안에서 낙원천국 섬의 반영을 감지하는 것인 반면, 영원한 진리는 필사 종족들에게 자신들을 증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 자신들의 진리의 영을 부어준 낙원천국 아들들의 특별한 사명활동들이다. 신성한 선(善)은 무한 영의 갖가지 개인성들의 사랑스러운 사명활동에서 더욱 충분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 세 본질특성들의 전체 총계인 사랑은 사람이 그의 영 아버지로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56:10.17]

 

진리는 과학과 철학의 기본이며, 종교의 지적 근거를 제시한다. 아름다움은 모든 인간 체험의 예술과 음악 그리고 의미 있는 리듬들을 후원한다. 선(善)은 윤리와 도덕 그리고 종교─체험적 완전성-추구자─의 감각을 포옹한다. [56:10.10]

 

“진실한 섬김의 모든 선한 일들은 최극자에게서 나온다. 만물은 일생을 위대한 근원에게 의지한다. 위대한 최극자는 자기가 베푸신 것들에 대해 보답을 원치 않으신다. 그는 힘에서 최극이지만, 우리의 눈에서 보이지 않으며 여전히 계신다. 그는 자신의 창조체들을 완전하게 하면서 그의 속성들을 계속 변화시키신다. 하늘의 이치는 느리고 그의 계획 속에서 오래 기다리지만, 그의 성취는 확실하시다. 최극자는 우주를 뒤덮으시고 그 모든 것을 지탱한다. 그의 넘치는 영향력과 이끄시는 힘이 얼마나 위대하고 강한 지! 진정한 선(善)은 물과 같아서 모든 것에 축복을 내리고 아무 것도 해치지 않는다. 그래서 진정한 선은 물과 같이 비록 다른 사람들이 피하는 자리라 해도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가며, 그리고 그것은 최극자와 동족이 되기 때문이다. 최극자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본성에서 그들을 키우시며 영에서 그들을 완전하게 한다. 최극자가 창조체에게 강요하지 않으면서 그를 기르시고 보호하시고 완전케 하시는 것은, 얼마나 신비한 일인지 모른다. 그는 자아-주장 없이 인도하시고 지도하시며, 지배하지 않고 진보를 돌보시고 있다. [131:8.3]

 

선(善)은 도덕적인 자아실현과 영적 개인성의 달성─내주 하는 조절자를 발견하고 더불어 정체화 하는 것─이라는 증가하는 해방의 새로운 차원들을 향하여 항상 성장한다. 체험이란, 그것이 아름다움(美)에 대한 깊은 이해를 높이고, 도덕적 의지를 강화시키고, 진리에 대한 식별력을 증대시키고, 자기 동료들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힘을 확대하고, 영적 이상을 고양(高揚)시키고, 시간에서의 최극의 인간 동기를 내주하는 조절자의 영원한 계획과 통합할 때. 선(善)하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소망이 커지도록 직접적으로 인도하고, 그로써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를 더욱 닮아가려는 신성한 열정을 육성시킨다. [132:2.5]

 

선(善)은 살아있고, 상대적이며, 항상 진보하고, 변함없는 하나의 개인적 체험이며, 진리(眞)와 아름다움(美)을 식별하는 것과 영속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선은 영적 차원의 긍정적 진리-가치를 인지함으로서 그 안에서 발견되며, 그것은 인간의 체험 안에서, 부정적 복사본─잠재 악의 그림자─과 대비되지 않으면 안 된다. [132:2.7]

 

선(善)은 항상 존경할 것을 강요하지만, 은혜가 결여되면 애정을 쫓아낸다. 선(善)은 인자할 때에만 일반적으로 매혹적이다. 선(善)은 오직 매혹적일 때에만 효력이 있다. [171:7.2]

 

마음이 물질로부터 “창발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만약에 우주가 단지 기능구조이고 마음이 물질과 구별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관찰된 어떤 현상에 대해서 다른 두개의 해석들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진리(眞)와 아름다움(美) 그리고 선(善)에 대한 개념들은 물리학이나 화학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다. 기계는 진리, 옳은 것에 대한 굶주림, 그리고 선의 소중함에 대해 알 수도 없고, 전혀 알지도 못한다. [195:6.11]

 

진화하는 마음은 법과 도덕과 윤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증여된 영, 내주 하는 조절자는 진화하는 인간 마음에게 입법자, 진실 되고, 아름답고, 선한 모든 것의 아버지-근원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러한 계몽된 사람은 종교를 가진다.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길고도 모험적인 추구를 시작하도록 영적으로 장비가 갖추어져 있다. [196:3.26]

 

우리는 계속해서 하느님의 이 신비에 직면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의 무한한 선, 끝없는 자비, 비할 데 없는 지혜, 숭고한 성격의 끝없는 진리의 장관(壯觀)이 더욱 더 펼쳐지고 있음에 당혹하고 있다. [1:4.4]

 

하느님의 시원적 완전성은 어떤 가정되는 정의(正義)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의 신성한 본성인 선천적 선(善)의 완전성에 들어 있다. 그는 최종적이고 완벽하고 완전하다. 그의 의로운 성격의 아름다움과 완전성에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 그리고 공간의 세계들에서 살아있는 실재들의 전체 기획이 아버지의 낙원천국 완전성을 공유하는 체험인 높은 운명을 향해 모든 의지창조체들을 들어 올리는 신성한 목적에 집중되어있다. 하느님은 자아-중심이지도 않고 자아-억제이지도 않으며; 그는 광대한 우주들의 우주의 모든 자아-의식 창조체들에게 자신을 증여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다. [2:2.5]

 

자비는 선(善)과 사랑의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산물이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선(善)한 본성은 그의 우주 자녀들의 모든 집단의 각 구성원에게 자비의 현명한 사명활동을 억제할 수 없다. 영원한 공의와 신성한 자비는 인간 체험 속에서 소위 공정함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을 함께 구성한다. [2:4.4]

 

결국, 하느님의 선함에 대한 가장 큰 증거와 그를 사랑해야 되는 최극 이유는 아버지의 내주하는 선물─너희 두 존재가 영원히 하나가 될 그때를 그토록 인내하며 기다리는 조절자─이다. 비록 너희가 하느님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만일 너희가 내주하는 영의 인도를 따르면, 한 걸음 한 걸음, 한 생애 한 생애, 우주에 우주를 거쳐서 그리고 한 시대 한 시대, 너희가 우주 아버지의 낙원천국 개인성의 현존 앞에 마침내 서게 될 때까지, 틀림없이 인도될 것이다. [2:5.5]

 

나는 그토록 위대하고 동시에 그의 하급 창조체들을 들어 올리는 사명활동에 그토록 애정을 담아 헌신하는 그분을 경배하는 일이 쉽고도 기쁜 일임을 발견한다. 나는 창조에서 그리고 그것들의 조정에서 그토록 능력이 있는데도, 선함에 그토록 완전한 그리고 또한 우리에게 끊임없이 드리우는 사랑함-친절함에 그토록 신실하신 분을 당연히 사랑한다. 나는 그가 그토록 위대하고 능력이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가 그렇게 선하고 자비롭다면, 똑같이 하느님을 사랑하리라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의 놀라운 속성들을 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본성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 [2:5.7]

 

나는 그토록 위대하고 동시에 그의 하급 창조체들을 들어 올리는 사명활동에 그토록 애정을 담아 헌신하는 그분을 경배하는 일이 쉽고도 기쁜 일임을 발견한다. 나는 창조에서 그리고 그것들의 조정에서 그토록 능력이 있는데도, 선함에 그토록 완전한 그리고 또한 우리에게 끊임없이 드리우는 사랑함-친절함에 그토록 신실하신 분을 당연히 사랑한다. 나는 그가 그토록 위대하고 능력이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가 그렇게 선하고 자비롭다면, 똑같이 하느님을 사랑하리라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의 놀라운 속성들을 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본성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 [2:5.7]

 

“하느님의 선함의 풍부함이 잘못을 범한 사람을 뉘우침으로 인도한다. “ “모든 선한 재능과 모든 완전한 재능은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온다.” “하느님은 선하시며; 그는 사람들의 혼이 쉴 영원한 피난처이다.” “주님 하느님은 자비롭고 인자하시다. 그는 오래-참으시고 선(善)과 진리가 풍부하시다.” “주님의 선함을 맛보고 알라! 그를 신뢰하는 자는 복이 있다.” “주님은 인자하시고 연민이 가득하시다. 그는 구원의 하느님이시다.” “그는 절망에 빠진 자를 고치시고 혼의 상처를 싸매신다. 그는 사람의 모든-힘을 지닌 은인이시다.” [2:6.3]

 

개인성의 세계와 대면할 때, 하느님은 사랑하는 개인임이 발견되며; 영적 세계와 대면할 때에는, 그는 개인적 사랑이며; 종교적 체험에 있어서는 그는 둘 모두에 해당한다. 사랑은 하느님의 자발적 의지를 그렇게 확인해 준다. 하느님의 선함은 신성한 자유의지성─사랑하고, 자비를 보이고, 인내를 나타내고, 용서를 베푸는 보편적 성향─의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다. [2:6.9]

 

하느님은 절대적 자아-결단의 존재이며; 자아-부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의 우주 반응에 제한이 없고, 그의 자유의지 행위들은 오직 그의 영원한 본성을 선천적으로 특징짓는 신성한 특성본질들과 완전한 속성들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최종적 선(善)의 존재로서 더 나아가 창조적 무한함의 한 자유로운 의지로서 우주에 관계하신다. [4:4.3]

 

과학에 있어서, 하느님은 첫째 원인이며; 종교에 있어서는, 보편적이고 사랑하는 아버지이며; 철학에 있어서는,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며, 존재를 위하여 다른 존재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과 그리고 모든 다른 존재들에게, 실재(實在)라는 실체를 자비롭게 수여한다. 그러나 과학의 첫째 원인 그리고 철학의 자존(自存) 합일체가 종교의 하느님, 자비와 선이 가득하고 땅 위에 있는 그의 자녀들의 영원한 생존이 임하도록 보장하는 하느님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계시가 필요하다. [4:4.7]

 

신성한 선(善)에 있어서, 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아무런 차이점을 식별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그의 우주자녀들을 아버지로서 사랑하시며, 영원 아들은 모든 창조체들을 아버지로서 그리고 또 형제로서 바라본다. [6:2.8]

 

뿐만 아니라 그는 내부 하보나 순환회로와 낙원의 가장자리 사이에 끼어 있는 수면(睡眠) 상태를 지나가지도 않았다. 개인성의 의식이 중지되는 일은 절대 존재인 그에게 전혀 불가능한 일인데, 왜냐하면 그분 안에 모든 계통의 영적 중력이 중심을 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증여기간 동안, 영적 광명의 중앙 낙원 거점은 빛을 잃지 않았고, 우주 영 중력에 대한 아들의 장악이 줄지 않았다. [7:5.6]

 

위대함은 신성과 동의어이다. 하느님은 최극으로 위대하고 선하시다. 위대함과 선함은 간단하게 갈라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느님 안에서 영원히 하나를 이룬다. 이 진리는 위대함의 비밀과 선(善)의 혼의 반향적 상호의존에 의해 글자 그대로 그리고 현저하게 설명되는데, 어느 한 편도 다른 편 없이 기능할 수 없다. 신성의 다른 본질특성들을 반향함에 있어서, 초우주 2품천사들은 홀로 활동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지만, 위대함과 선함의 반향적 측정치들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어떤 세계에서든지, 어떤 우주에서든지, 위대함에 대한 그리고 선함에 대한 이 반영자들은 함께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들이 초점화구현하는 각 존재에 대한 2원적(二元的) 그리고 상호 의존적 보고서를 항상 제시한다. 위대함은 선함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는 측정될 수 없는 반면, 선함은 그것의 선천적이고 신성한 위대함을 나타내지 않고는 묘사될 수 없다. [28:6.21]

 

믿음은 그것이 삶에 동기를 부여하고 삶의 양식을 실현할 때 신앙의 차원을 달성해 왔다. 가르침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믿음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신앙은 확신도 아니고 신념도 아니다. 마음의 상태는 그것이 실제적으로 삶의 양식을 지배할 때에만 신앙 차원을 달성한다. 신앙은 참된 개인적 종교 체험의 살아있는 속성이다. 사람은 참된 것(眞)을 믿고 아름다움(美)을 동경하며 선한 것(善)을 숭상할 수 있지만, 그것들을 경배하지는 않는다; 구원하는 신앙에서의 그러한 태도는, 이들 개인화되고 그리고 더욱 더 무한하게 되는 그 모든 것이신 오직 홀로이신 하느님에게 중심을 두고 있다. [101:8.1]

 

믿음은 그것이 삶에 동기를 부여하고 삶의 양식을 실현할 때 신앙의 차원을 달성해 왔다. 가르침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믿음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신앙은 확신도 아니고 신념도 아니다. 마음의 상태는 그것이 실제적으로 삶의 양식을 지배할 때에만 신앙 차원을 달성한다. 신앙은 참된 개인적 종교 체험의 살아있는 속성이다. 사람은 참된 것(眞)을 믿고 아름다움(美)을 동경하며 선한 것(善)을 숭상할 수 있지만, 그것들을 경배하지는 않는다; 구원하는 신앙에서의 그러한 태도는, 이들 개인화되고 그리고 더욱 더 무한하게 되는 그 모든 것이신 오직 홀로이신 하느님에게 중심을 두고 있다. [101:8.11]

 

최극자 하느님은 낙원천국 삼위일체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의 기능적 활동들이 그의 진화하는 전능의 힘을 실제적으로 통합하는 그 초우주 창조주들 전체이거나 또는 어느 하나가 아니다. 최극자 하느님은 삼위일체에서 기원된 반면, 오직 칠중 하느님의 처음 세 차원의 합동된 기능들을 통해서만 힘의 개인성으로서 진화 창조체들에게 현시할 수 있게 된다. 전능 최극자는 현재 최극 창조주 개인성들의 활동들을 통하여 시간- 공간에서 사실화 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영원 안에서 공동행위자가 우주 아버지와 영원 아들의 뜻에 따라 존재로 번쩍 셍겨나는 것과 같다. 칠중 하느님의 처음 세 차원들의 이 존재들은 전능 최극자가 가진 힘의 바로 그 본성이자 근원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의 행정적인 행동들을 항상 동반하고 유지한다. [116:2.7]

 

사랑하고 사랑받는 절묘하고 초월적인 체험은, 너무 순수하게 주관적이라고 해서, 단순히 심리적 환상은 아니다. 필사 존재들과 연합되어 있는 어떤 진실로 신성하고 객관적인 실체, 생각조절자는 배타적인 주관적 현상으로서 명백하게 인간 관찰에 대하여 기능하고 있다. 가장 높은 객관적 실체, 하느님과 사람의 접촉은 오직 그를 알고, 그를 경배하고, 그와의 아들관계를 깨닫는 순수한 주관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196:3.21]

 

이성이 일단 옳고 그름을 깨닫게 되면, 그것이 지혜를 드러내며; 지혜가 옳고 그름, 진리와 실수 사이에서 선택하면 그것이 영의 인도를 실증한다. 그리하여 마음과 혼과 영의 작용은 계속 가깝게 결합하며 기능적으로 상호 연합을 이룬다. 이성은 실제적인 지식을 취급하고; 지혜는 철학과 계시를 취급한다; 신앙은 살아있는 영적 체험을 취급한다.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아름다움을 달성하고 영적인 사랑에 의하여 선(善)에 이른다. [103:9.10]

 

때로는, 마음이 밝게 빛을 받도록 하는 것, 너희들 안에서 계속 이야기하는 신성한 음성을 듣는 것, 그로서 네가, 네 안에 계속 내주하는 잠재적 개인성의 지혜, 진리, 선(善), 그리고 아름다움을 부분적으로 의식되기도 하는 것이 가능하다. [109:5.2]

 

사람의 진화하는 모론시아 혼이 하느님-의식의 가치-실현으로 진리(眞), 아름다움(美), 그리고 선(善)으로 충만 되는 한, 그러한 결과의 존재는 파괴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사람의 진화하는 혼속에 영원한 가치의 생존이 없다면, 필사자 실재는 의미가 없으며, 삶 자체는 하나의 비극적인 환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까지나 진실이다: 너희가 시간 속에서 시작한 것은─그것이 만약 완결할만한 가치가 있다면, 확실하게 영원 속에서 완결할 것이다. [111:3.7]

 

세속주의는 인류에게 결코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인간 사회에서 하느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잘 주목해라! 교회의 전체주의에 대하여 반기를 든 세속자의 은혜로운 수익들을 성급하게 포기하지 마라. 서방 문명은 세속자의 반기의 결과로, 오늘날 많은 해방과 만족을 누리고 있다. 세속주의의 엄청난 오류는 이것 이었다; 종교의 권위에 의해서 생활의 거의 전부가 지배되는 것에 대항하여 반기를 들면서, 그리고 그러한 교회의 횡포로부터 자유를 획득한 후에, 세속주의자들은 하느님 자신에게 대항하는 반기를 들도록, 때로는 잠잠하게 그리고 때로는 공개적으로 조성하며 계속 나아간 것이었다. [195:8.6]

 

이 시대의 종교적 도전은, 조화우주의 진리와 우주 아름다움 그리고 신성한 선(善)의 확대되고 절묘하게 집대성된 현대 개념들로부터 살아 나오는, 새롭고도 매력적인 생활철학을 과감히 구축하게 될, 그러한 영적 통찰력을 가진 선견지명이 있고 진취적인 남녀들을 향한 것이다. 그러한 도덕의 새롭고도 정의로운 시각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선한 모든 것을 끌어당기고 그리고 인간의 혼속에 있는 가장 좋은 그것에 도전하는 것이다. 진리(眞)와 아름다움(美)과 선(善)함은 신성한 실체들이며, 사람이 영적 삶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영원자의 이 최극 본질특성들은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서 점점 더 합동되고 통합될 것이다. [2:7.10]

 

인간 삶의 영 지배 의식은 영으로 인도되는 그러한 필사자의 삶 반응에서 영의 특징들의 증가되는 출현으로 수반된다. “왜냐하면 영의 열매들은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선(善), 신앙, 온유함, 그리고 절제이기 때문이다.” 영으로 인도되고 신성하게 조명을 받는 그러한 필사자들은, 그들이 아직 고생의 초라한 길을 걷고 인간적 성실에서 그들의 세상 과제의 임무들을 수행하는 반면, 영원한 삶의 빛들이 다른 세계의 멀리 떨어진 해안에서 희미하게 깜박일 때 그것들을 이미 식별하기 시작하였다; 영감을 주고 위안을 주는 진리, “하느님의 왕국은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고 성령 안에서의 정의(正義)와 평강과 기쁨에 있다”는 것의 실체를 그들은 이미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모든 시험에 두루 그리고 모든 고단함의 현존에서, 영으로 태어난 혼들은 하느님의 사랑이 신성한 영의 현존에 의해 모든 가슴속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모든 두려움을 초월하는 그 희망에 의해서 지탱된다. [34:6.13]

 

참된 철학, 천상의 예술성에 대한 묘사, 또는 신성한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묘사하려는 필사자 시도의 우주적 개념들은 만일 그러한 시도를 하는 창조체 진보가 통합되지 않는 한 결코 참되게 만족될 수 없다. 진화하는 창조체 안에서의 신성한 충동에 대한 이 표현들은 지적으로 참이고 감정적으로 아름답고 영적으로 선할 수 있지만; 이 진리의 실체성들과 아름다움의 의미들 그리고 선함의 가치들이 예술가, 과학자, 또는 철학자의 삶의 체험 안에서 통합되지 않는다면 표현의 참된 혼은 없다. [44:7.3]

 

빛과 생명 속에 정착된 세계들은 진리와 아름다움 그리고 선(善)에 대한 이해와 매우 충분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이 본질특성 가치들이 시간과 공간의 영역들에 대한 신(神)의 계시를 포옹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진리의 의미들은 필사자 사람의 지적 그리고 영적 본성들에게 어떤 병합된 호소를 한다. 우주적 아름다움은 조화우주 창조의 조화로운 관계들과 박자들을 포옹 한다; 이것은 더욱 분명한 지적 호소가 되고 그리고 물질적 우주의, 통합되고 동조적 이해를 향하여 이끈다. 신성한 선(善)은 유한 마음에게 무한한 가치들의 계시를 대표하는데, 그것은 그 안에서 인간적 이해에서의 영적 차원의 바로 그 문턱까지 감지되고 높아진다. [56:10.9]

 

유한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진리와 아름다움 그리고 선함은 신성 실체의 전체 계시를 포옹한다. 신(神)의 이 사랑-이해가 하느님을-아는 필사자들의 삶 속에서 영적인 표현을 찾을 때, 이것들은 신성의 열매들: 지적 평화, 사회적 진보, 도덕적 만족, 영적 기쁨, 그리고 조화우주 지혜를 맺는다. 빛과 생명의 일곱 번째 단계에 있는 어떤 세계의 진보된 필사자들은 사랑이 우주 안에서 가장 위대한 것임을 이미 배웠다─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안다. [56:10.20]

 

참된 형제신분의 출현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짐을 기쁘게 감당하는 상태에 어느 사회 계층이 도달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황금률을 실천하기를 실제적으로 원한다. 그러나 허약한 자들 또는 사악한 자들이,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善)에 대한 봉사에 헌신함으로써 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불공정하게 그리고 터무니없이 역이용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한, 그러한 이상적인 사회는 실현될 수 없다. 그러한 경우에는 오직 한 가지 과정만이 실제적으로 일어나는데; 그 “황금률들”은, 평화를 선호하는 그들의 성향을 부당하게 이용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진보된 문명을 파괴시키고자 할 수도 있는 미개한 이웃들에 대항하여 적절한 방어를 유지하는 한편, 그들의 이상(理想)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진보적인 사회를 건설하게 만들 수 있다. [71:4.4]

 

하느님은 진리에 대한 증대된 계시와 아름다움에 대한 증진된 인식 그리고 선함에 대한 확대된 개념을 사람에게 제공하심으로써 그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기도는 주관적인 행동이지만, 인간 체험의 영적인 차원에 있는 강력한 객관적 실체들과 접촉을 이루며; 인간으로 하여금 초인간적인 가치들에 도달하게 하는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것은 영적 성장을 위한 가장 유력한 자극제이다. [91:8.11]

 

또한 노자는 악에 대하여 선으로 보답한다는 교리를 가장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선(善)이 선을 낳지만, 정말로 선한 사람에게는 악한 것도 선을 낳는다.” [94:6.4]

 

크세노파네스는 한분 하느님을 가르쳤지만, 그의 신(神) 개념은 너무 범신적이어서 필사 사람에게 어떤 개인적 아버지가 될 수 없었다. 아낙사고라스는 최초의 마음인 첫째원인을 이해한 것을 제외한다면 하나의 기계론자에 불과하였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후계자들인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덕목이 지식이고; 선함이 건강한 혼이라고 가르쳤으며; 불법에 대해 가책을 느끼기보다는 그것을 당하는 것이 낫다고,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고 가르쳤고, 하느님들은 현명하고 선하다고 가르쳤다. 그들이 주장하는 기본적인 덕행은: 지혜, 용기, 절제, 그리고 공의였다. [98:2.6]

 

어떤 종류의 격변이 문명의 사회적 성장과 경제적 성장 속에 일어나더라도, 종교는 만일 그것이 그 속에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善)에 대한 주권이 우세한 어떤 체험을 개별존재 속에 조성하는 한, 참되고 가치가 있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것이 최극 실체의 참된 영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과 경배를 통하여 사람 사이의 동료관계 그리고 하느님과의 아들관계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 [99:4.4]

 

종교의 사회화에는 참된 목적이 있다. 종교에 대한 충성심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善)을 향한 이끌림을 확대하여 보여주고; 최극 가치의 인력을 자라게 하고; 사심 없는 동료관계에서의 봉사를 강화하고; 가족생활의 잠재성을 찬미하고; 종교 교육을 증진시키고; 지혜로운 조언과 영적 안내를 제공하고; 집단경배를 장려하는 것이 집단적 종교 활동의 목적이다.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종교는 인간 친구관계를 북돋우고, 도덕을 보존하며, 이웃의 복지를 증진시키고, 그리고 그들 각각에게 영원한 구원의 메시지가 들어있는 본질적 복음이 퍼져 나가도록 조성한다. [99:6.2]

 

영성(靈性)은 사람의 하느님에 대한 가까움을 가키는 지표임과 동시에 곧바로 동료 존재에 대하여 쓸모 있음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영성은 사물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하고 의미들 속에서 진리를 깨닫게 하며 가치들 속에서 선함을 발견하게 하는 능력을 증진시킨다. 영적인 발달은 그것을 위한 수용력에 의해 결정되며 사랑에서의 이기적인 본질특성을 배제하는 것에 직접적으로 비례한다. [100:2.4]

 

사람의 혼은 종교적 신앙을 통하여 스스로를 계시하며, 필사자 개인성이 어떤 괴로움을 주는 지적인 그리고 시련이 되는 사회적 상황에 반응하도록 유도하는 그러한 특징적인 방법으로서, 그 창발하는 자연본성의 잠재적 신성을 실증한다. 참된 영적 신앙 (참된 도덕적 의식)은 다음 안에서 계시된다: [101:3.4]

 

종교적인 욕망은 신성한 실체를 탐구하는 굶주림이다. 종교적인 체험은 발견한 하느님을 가지고 있음에 대한 의식(意識)의 실현이다. 그리고 어떤 인간 존재가 하느님을 발견하였을 때, 발견에서의 승리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지치지 않는 움직임 안에서, 그가 하느님을 발견하였음을 드려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동료들을 회복시키고 고상하게 하려고 자신의 혼 안에서 영원한 선함이 넘쳐흐르게 허용하려고, 보다 덜 계몽된 자기 동료들과의 사랑 넘치는 봉사-접촉을 찾고자 재촉하게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진정한 종교는 증가되는 사회봉사를 가져온다. [102:3.4]

 

선(善)과 아름다움(美) 그리고 진리(眞)에 대한 진지한 추구는 하느님께로 인도한다. 그리고 모든 과학적 발견은 우주 속에 자유와 균일성이 둘 모두 실재하고 있음을 실증한다. 발견자는 발견할 자유가 있었다. 발견된 사물은 실제이고 명백히 균일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물로서 알려질 수 없었을 것이다. [195:6.17]

 

영원과 무한의, 진리(眞)의, 아름다움(美), 그리고 선에 대한 낙원천국 가치들은 시간과 공간 우주 현상의 사실들 속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가치들을 감지하고 분간하기 위해서는, 영으로-태어난 필사자 안에 있는 신앙의 눈이 필요하다. [195:7.4]

 

현대 시대는 사실들과 모순되고, 그리고 진리(眞), 아름다움(美). 그리고 선(善)의 최고 개념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종교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것이다. 현대의 왜곡되고 손상된 그리스도교에 대한 참되고 근본적인 기초들─예수의 참된 일생과 가르침들─을 다시 발견할 시간의 종이 울리고 있다. [195:9.5]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선(善)에 기초하였으며;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에 기초하였으며; 두 종교가 모두 진리를 추구하였다. 예수는 사랑의 하느님을 계시하였고, 사랑은 진리, 아름다움 그리고 선(善)의 모든 것을 망라한다. [5:4.6]

 

성전의 의식들 대부분이 그의 심미적이고 상징적인 감각에 매우 감동적인 인상을 주기는 하였지만, 그가 날카롭게 던지는 여러 가지 질문들에 대하여 대답하기 위해 그의 부모가 제시하고자 하였던, 이러한 의식들의 실제적인 의미에 대한 설명에 그는 늘 실망하였다. 예수는 진노의 하느님 또는 전능자의 노여움에 대한 믿음이 내포된 이러한 경배와 종교적인 헌신에 대한 설명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성전 방문이 끝난 후 이 문제에 대해 계속 토론하는 중에, 예수의 아버지가 그에게 유대인의 전통적인 믿음을 받아들이라고 완곡하게 타일렀을 때, 예수는 갑자기 자기 부모들에게 돌아서서 호소하는 듯이 아버지의 눈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그럴 수는 없습니다.─이 세상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자녀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렇게 대하실 수는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것보다, 아버지가 저를 더 사랑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쩌다 어리석은 일을 한다 할지라도 아버지가 저에게 분노하시거나 화를 내시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나의 육신의 아버지도 그렇게 신성한 것에 대한 인간 반영을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얼마나 더 선하시며 자비가 흘러넘치시겠습니까? 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이 세상의 아버지보다 나를 덜 사랑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125:0.6]

 

예수가 마지막으로 가디아를 만났을 때, 그들은 선(善)과 악(惡)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팔레스타인 청년은 세상에 선과 악이 병행하여 존재하는 부당성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하느님이 무한히 선하시다면, 어째서 우리로 하여금 악으로 인한 슬픔을 겪게 내버려두시는지요? 결국 악은 누가 만들어낸 것입니까?”라고 말하였다.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이 선과 악 둘 모두를 창조했다는 것을 여전히 믿고 있었지만, 예수는 그 같은 실수를 결코 가르치지 않았다. 그 질문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의 형제여,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므로; 그는 선하실 수밖에 없으며; 그의 선함은 너무나 크고 실제여서, 악으로 인한 사소하고도 비실제적인 것들을 포함할 수 없다. 하느님은 너무나 긍정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부정적인 악이 남아있을 소지가 절대적으로 없다. 악은, 선에 저항하고 아름다움을 거부하며 진리에 불충하는 무리들의 성숙되지 못한 선택이며 경솔한 과실이다. 악은 단지 미숙함을 오용한 것이거나, 혹은 무지로 인한 파괴적이고 왜곡된 작용일 뿐이다. 악은 어리석게 빛을 거부한 결과로 수반되는 필연적인 어두움이다. 악은 어둡고 거짓된 것이며, 의식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고의적으로 시인될 때 죄가 된다. [130:1.5]

 

예수와 함께 키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한 젊은이가, 그들이 조선소에서 일을 하는 동안 예수가 이따금씩 하는 말에, 하루는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땅에 있는 자녀들의 행복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예수가 넌지시 비췄을 때, 그 젊은 그리스인 아낙산드는, “만약 그 하느님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왜 잔인하고 불공평한 이 십장(什長)을 없애버리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예수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자, 그는 깜짝 놀랐다: “네가 친절을 베푸는 방법을 알고 있고 공의를 존중하기 때문에, 아마도 그 하느님들은 네가 이 부정(不正)한 사람을 다음과 같은 더 좋은 길로 인도할 수 있도록 네 곁에 두시는 지도 모른다. 아마 너는 이 형제로 하여금 다른 모든 사람들과 더욱 화합할 수 있게 만드는 소금일 것인데; 만약 네가 아직 그 맛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면 그 말이 맞을 것이다. 현재의 상황은, 이 사람이 너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주는 악한 방법으로 너를 다스리려고 하고 있다. 너는 왜, 선의 힘으로 악에 대한 너의 지배력을 주장함으로써 너희의 그 둘 사이에서의 주(主의)가 되려고 하지 않느냐? 나는 네가 네 안에 있는 선에게 공정하고 활기찬 기회를 주기만 한다면, 그것이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을 극복할 수 있음을 예견할 수 있다. 필사자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실수와 악에 대항해서 승리하는 영적 에너지와, 신성한 진리와 손을 잡고 일하는 기쁨보다, 더 신나는 모험은 아무 것도 없다. 영적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영적 빛의 살아있는 통로가 되어준다는 것은 놀랍고도 그리고 변환이 일어나는 체험이다. 만약 네가 이 사람보다 진리에 대한 축복을 더 많이 받았다면, 그의 부족함은 너에게 도전이 될 것이다. 너는, 수영을 못하는 친구가 바다에 빠져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도 그대로 바닷가에 서 있을 겁쟁이는 분명히 아니다! 육체가 물속에 빠지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이 사람의 혼이 어둠 속에서 발버둥치는 것은, 얼마나 더 중요한 일이겠느냐!” [130:2.4]

 

이 무렵에 가니드는, 자신의 선생이 자기 동료들에게 이러한 유별난 개인적 사명활동에서 어떻게 자신의 여가 시간을 보냈는지를 알기 시작하였으며, 그 젊은 인도인은 예수가 이러한 끊임없는 활동을 하는 동기를 알아보려고 하였다. 그는, “당신은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일에 왜 그토록 끊임없이 전념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가니드야, 하느님을 아는 사람에게는 어떤 사람도 낯선 사람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찾는 체험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형제임을 발견하게 되는데, 새로 발견한 형제를 만나는 즐거움에 빠지는 것이 그렇게도 이상하게 보이는가?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사귀고, 그들의 문제를 알게 되고,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 삶에 있어서의 최극 체험이 된다.” [130:2.6]

 

계시된 진리, 개인적으로 발견된 진리는, 인간 혼의 최극의 기쁨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마음과 내재하는 영이 공동으로 창조한 것이다. 진리(眞)를 식별하고 아름다움(美)을 사랑하는 이 혼의 영원한 구원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하느님을 찾으며 그를 닮아가려는 단 한 가지의 목적만을 개발하도록 이 필사자를 인도하는 선(善)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에 의하여 확인된다. 진정한 지식과 진리 사이에는 아무 충돌이 없다. 지식과 인간 신념들, 편견으로 채색되고, 두려움에 의해 변형되고, 물질적 발견이나 영적 진보의 새로운 사실들에 대처하는 것을 두려워함으로써 지배를 당하는 신념들 사이에서는 아마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132:3.4]

 

로마의 병정에게는, 함께 티버 강변을 걸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손뿐만 아니라 가슴도 용감해야 한다. 대담하게 공의를 행하고 자비를 보이기에 충분할 만큼 성장해야 한다. 네가 상관들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너의 낮은 본성으로 하여금 더 높은 본성에 복종하게 해야 한다. 선을 존중하고 진리를 고양(高揚)시키기 바란다. 추한 것들 대신에 아름다운 것들을 선택하라. 너의 동료들을 사랑하고 온 가슴을 다하여 하느님을 찾아라. 왜냐하면 하느님은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132:4.6]

 

예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아셨고 사도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셨다. 그는 사도들에게 제자들과 신도들을 일정한 틀에 짜 맞추지 말라고 끊임없이 훈계하였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고 분리된 한 개별존재로서 각각의 혼이 각자 자신의 길을 헤쳐 나가는 것이 허용되기를 원하였다. 베드로의 많은 질문 중의 하나에 대답하면서 주(主)가 이렇게 말씀하였다: “나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여, 새롭고도 더욱 나은 일생위에서 갓난아이처럼 새로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원한다.” 예수는 진정한 선행은 무의식중에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자선을 행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항상 강조하였다. [140:8.26]

 

주(主)는 그 당시 또는 다른 세대의 비(非)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해결책도 제공하지 않았다. 예수는 영원한 실체에 이르는 영적 통찰력을 개발하고 삶의 기원으로 시작되도록 자극하기를 원하였으며; 인류의 잠재적이고 영원한 영적 요구에만 전적으로 관심을 두셨다. 그는 하느님과 똑같은 선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랑─진, 선, 미─을 신성한 이상이며 영원한 실체로 찬양하였다. [140:8.31]

 

“너희가 자녀 관계를 획득하는 것은 신앙에 기반을 두며 두려움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너희의 기쁨은 신성한 말씀을 신뢰하는데서 나오며 따라서 너희는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의 실체를 의심하도록 이끌리지 않아야 한다. 사람으로 하여금 참되고 진정한 회개를 하도록 인도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선함이다. 자아를 정복하는 너희의 비결은 내재하고 있는, 사랑으로 늘 일하는, 영에 대한 너희의 신앙에 단단히 엮여있다. 구원에 이르는 이러한 신앙도 너희들 스스로 안에 가진 것이 아니며; 그것도 역시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만약 너희가 이러한 살아있는 신앙의 자녀들이라면, 너희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노예가 아니고 오히려 너희 자신에 대하여 승리한 주인들, 하느님의 해방된 자녀들이다. [143:2.7]

 

자신의 말을 마치시면서, 예수가 이렇게 말씀하였다: “너희는 구원을 돈으로 살 수 없으며, 올바름을 벌어들일 수 없다. 구원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올바름은 왕국에서 아들관계의 영으로-태어난 생명이 맺는 자연스러운 열매이다. 너희가 올바른 일생을 살았기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가 이미 구원되었고, 아들관계를 하느님 선물로 인식했고, 그리고 왕국의 봉사를 이 세상 일생에서의 최극 기쁨으로 하고 있기에 너희가 올바른 일생을 사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선함의 계시인 이 복음을 믿을 때, 그들은 자발적으로 죄라고 알려진 모든 것을 회개하도록 인도될 것이다. 아들관계를 인식함은 죄에 대한 욕망과 양립할 수 없다. 왕국을 믿는 자들은 올바름을 열망하고 신성한 완전을 갈망한다.” [150:5.5]

 

그들이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다른 사람들은 모닥불 옆에 남아있는 동안, 예수는 베드로와 요한을 손짓으로 부르시고 그를 따라 함께 해변을 거닐자고 하였다. 함께 걸으면서 예수는 요한에게 “요한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다. 그리고 요한이 “예, 주(主)여, 진심으로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자 주(主)가 이렇게 말씀하였다: “요한아, 그렇다면, 참지 못하는 네 성격을 버리고,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임을 증명하는 일에 네 일생을 바쳐라.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추구하도록 재촉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영적 선(善)의 원조(元祖)이며, 참되고(眞) 아름다운(美) 것의 본질요소이다.” [192:2.1]

 

인간 일생의 과정 속에서 발생되는 많은 일들은, 이곳이 진리가 우세하고 정의(正義)가 승리하는 우주라는 관념과 조화되기 어렵고 납득하기 힘들다. 중상, 거짓말들, 부(否)정직, 그리고 부당함의─죄─가 우세하는 것으로 자주 보인다. 결국에는 신앙이 악과 죄와 불법을 이기게 될까? 그렇게 된다. 그리고 예수의 일생과 죽음이 선(善)의 진리와, 영으로 인도 받는 창조체의 신앙이 항상 정당화된다는 영원한 증명이다. 그들은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께 “하느님이 와서 그를 구원하시는지 보자.”라고 말하며 조롱하였다. 십자가형의 그날은 암울하였지만, 부활의 아침에는 영광되게 빛났다; 오순절 날에는 더욱 빛났으며 더욱 기뻤다. 염세적인 절망의 종교들은 일생의 무거운 짐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다; 끝없는 수면과 휴식 속에서 종식을 갈망한다. 이것들은 원시적인 두려움과 공포의 종교이다. 예수의 종교는 분투하고 있는 인간성에 대하여 선포되는 신앙의 새 복음이다. 새로운 이 종교는 신앙과 희망과 사랑 위에 세워진다. [194:3.2]

 

종교에서, 현대 과학이 실험 기법을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체험의 방법을 옹호하고 따르셨다. 우리는 영적 통찰력의 인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 진리의 추구, 의무에 충실함, 그리고 신성한 선에 대한 경배를 통하여 이 혼의 통찰력에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가치 중에서, 사랑이 진정한 통찰력으로 인도하는 참된 안내자이다. [195: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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