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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8 편
벳세다에서의 전도자들 훈련
148:0.1
(1657-2)
기원후 28년 5월 3일에서 10월 3일까지 예수와 사도 일행은 벳세다에 있는 세베대의 집에 거주하였다. 이 건조한 기간 동안의 다섯 달 내내 세베대의 주거지 인근 해변을 따라 거대한 야영지가 유지되어 있었고, 그것은 성장하고 있는 예수의 가족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점점 크게 확장되어왔다. 이 해변 야영지는 진리 추구자, 치유를 받으려는 후보자, 그리고 호기심 헌신자들이 차지했으며, 한 이 야영지에는 언제까지나-변하는 500 명에서 1,500 명까지의 인원이 있었다. 이 천막 도시는 알패오 쌍둥이 형제에 의해 협조를 받았고, 다윗 세베대의 감독 아래에 있었다. 그 야영지는 일반적인 관리-행정은 물론이고, 질서와 위생에 있어서도 하나의 본보기였다. 서로 다른 유형의 병자들은 각각 격리되었고, 엘만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리아인 의사 신자의 감독 아래에 있었다.
148:0.2
(1657-2)
이 기간을 통하여 두루, 사도들은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는 고기를 잡으러 나갔고, 그들이 잡은 고기는 해변 야영지로 인한 소비를 위하여 다윗에게 팔았다. 그렇게 해서 받아들인 기금은 그 집단의 회계로 넘어갔다. 열두 사도들은 매달 일주일은 나가서 그들의 가족이나 친구들과 보내도록 허락되었다.
148:0.3
(1657-3)
안드레가 사도 활동에 관한 일반적인 담당을 계속 맡았고, 베드로는 전적으로 전도자들의 학교를 담당하였다. 매일 오전에는 사도들이 전도자 집단들을 가르치면서 모두가 자신들의 몫을 하였고, 오후에는 선생들과 학생들 모두 일반 사람들을 가르쳤다. 일주일에 닷새 동안 저녁식사 후에 사도들은 전도자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질문 교실을 지휘했다. 일주일에 한 번 예수가 이 질문 시간을 주관하였으며, 아직 해답을 갖지 못한 그 이전에 있었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해주었다.
148:0.4
(1657-4)
다섯 달 동안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 야영지에 다녀갔다. 로마제국의 전 지역과 유프라테스 강의 동쪽 지역으로부터, 관심을 가진 개인들이 빈번히 참석하였다. 이때가 주(主)의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오랫동안 정착되고 그리고 잘-조직되었던 기간이었다. 예수의 직계 가족은 나사렛이나 가나에서 이 시기의 대부분을 보냈다.
148:0.5
(1657-5)
야영지는 사도 일행이 그러했던 것처럼, 공동의 관심 사항의 공동체로서 지휘되지 않았다. 다윗 세베대는 어느 누구도 돌려보내지 않으면서도, 자아-지탱하는 하나의 기업이 되어가도록 이 큰 천막 도시를 관리했다. 이 언제까지나-변하고 있는 야영지는 베드로의 전도자 훈련 학교의 빼놓을 수 없는 특색이었다.
1. 선지자들의 새로운 학교
148:1.1
(1657-6)
예수는 전도자들의 학교에 입학하려는 신청자들을 통과시키는 위원회에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안드레를 임명하였다. 선지자들의 이 새로운 학교는 학생들 가운데에서 로마 세계의 그리고 동쪽으로는 멀리 인도까지의 모든 종족과 국민들이 대표되어 있었다. 이 학교는 배우기와 실행하기의 계획에 바탕을 두고 지휘되었다. 학생들이 오전 시간 동안에 배운 그것을, 그들은 오후 동안에 해변가에서 회중에 가르쳤다. 저녁 식사 후에는 그들이 허물없이 오전에서의 배운 것과 오후에서의 가르침에 대해 격의 없이 토론하였다.
148:1.2
(1658-1)
사도 선생들의 각자는 왕국 복음에 관한 그 자신의 견해를 가르쳤다. 그들은 똑같이 가르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신학적 교리들의 표준화나 독단적인 형식화가 없었다. 그들 모두가 같은 진리를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각 사도는 주(主)의 가르침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 해석을 제시하였다. 예수는 왕국의 일들에서 이처럼 개인적 체험의 다양성을 제시하는 것을 지지했으며, 일주일에 한 번씩 그의 질문 시간에, 그러한 많은 그리고 다양한 복음에 대한 견해들을 어김없이 조화시키고 협동시켰다. 가르치는 문제에 있어서 이렇게 커다란 정도의 개인적 해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몬 베드로는 전도자 학교의 신학을 지배하는 경향이 있었다. 베드로 다음으로는 야고보 세베대가 개인적 영향을 가장 크게 발휘하였다.
148:1.3
(1658-2)
이 5개월 동안 해변에서 훈련을 받은 100명이 넘는 전도자들이 바탕이 되어 그것으로부터 (아브너 그리고 요한의 사도들을 제외하고) 나중의 70명의 복음 선생들과 설교자들이 배출되었다. 전도자들의 학교는 열두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같은 정도로 모든 것을 공동으로 가지지는 않았다.
148:1.4
(1658-3)
이 전도자들은, 복음을 가르쳤고 전도를 했었지만, 나중에 예수가 70명의 왕국 메신저들로 성직-수여와 임명하기 전까지는,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다. 이 장소에서 해질 무렵에 치유를 받았던 큰 무리들 중의 단지 7명만이 이들 전도자 학생들 가운데서 발견되었다. 가버나움의 저명인사의 아들은 베드로의 학교에서 복음 봉사를 위해 훈련받은 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2. 벳세다 병원
148:2.1
(1658-4)
해변의 야영지와 관련하여, 시리아인 의사인 엘만은 25명의 젊은 여인들과 12 명의 남자들로 이루어진 관계적-연합 무리단과 함께 왕국의 첫 병원이라고 여겨져야 할 기구를 넉 달 동안 조직하고 지휘하였다. 천막 도시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이 병원에서 그들은 기도의 영적 실천-관행과 신앙을 격려하는 것은 물론이고,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물질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병든 자들을 돌보았다. 예수는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이 야영지의 병든 자들을 방문하였고, 고난당하는 자들 각자와 개인적 접촉을 가졌다. 우리가 아는 한, 괴로워하고 병약했던 몸을 가지고 들어왔다가 건강 상태가 호전되거나 치료되어 떠났던 1,000명의 개인들 가운데서, 초자연적으로 치유된 이른바 기적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혜택을 입은 개별존재들의 대다수는 예수가 자신들을 치유했다고 선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148:2.2
(1658-5)
예수엘만의 환자들을 위하여 한 그의 사명활동과 관련되어 효과를 보았던, 많은 치료들은 정말로 기적이 작용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두려움을 몰아내고 걱정을 없애는 것을 사명활동으로 하는, 강하고 긍정적이고 그리고 자선을 베푸는 개인성의 즉각적이고 영감 어린 영항 아래에서, 기대에 넘쳐있고 신앙에-지배되어 있는 개인들의 체험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그러한 마음과 영의 변환이었을 뿐이었다는 지침을 받았다.
148:2.3
(1658-6)
엘만과 그의 연관-동료들은 “악한 영들에게 사로잡힘”에 관련된 진리를 이들 병자들에게 가르치려고 애썼지만,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 당시에는 물리적 질병과 정신적인 혼란은 괴로움을 당하는 자의 마음이나 몸 안에 소위 더러운 영이라 불리는 것이 거주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거의 보편적이었다.
148:2.4
(1659-1)
병자와 괴로워하는 자와의 모든 접촉에서, 치료의 기법의 문제나, 알려지지 않은 질병의 원인들을 계시하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예수유란시아 육신화의 모험을 착수하기 전에 자신의 파라다이스 형제인 임마누엘로부터 받았던 지침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병든 자를 돌보던 사람들은, 예수가 병들고 고통받는 자들의 신앙과 자신감에 영감을 주는 그 방법을 지켜봄으로써 많은 도움이 되는 교훈을 배웠다.
148:2.5
(1659-2)
그 야영지는 학질 병이 늘어나는 계절이 다가오기 얼마 전에 해산되었다.
3. 아버지의 일
148:3.1
(1659-3)
이 기간을 두루 통하여, 예수가 야영지에서 대중 예배봉사를 지휘한 것은 12번이 채 안되었으며, 가버나움 회당에서는 그들이 새로 훈련받은 전도자들과 함께 그들의 두 번째 갈릴리 대중 전도 여행을 떠나기 전, 두 번째 안식일에 오직 한번 이야기를 하였다.
148:3.2
(1659-4)
전도자들의 벳세다 훈련 야영지 기간만큼 주(主)가 그렇게 많이 혼자 지낸 적은, 그가 세례를 받은 이후로 없었다. 사도들 중의 어느 누구라도, 예수에게 어찌하여 그가 그들로부터 그렇게 자주 자리를 비우는지 감히 물을 때마다, 그는 변함없이 자기가 “아버지의 일에 관하여” 보살피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148:3.3
(1659-5)
자리를 비운 이들 기간 동안에, 예수는 오직 두 사도들만 동반하였다. 그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100명이 넘는 숫자의 새로운 전도자 후보자들을 훈련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을 일시적으로 자신의 개인적 동행자로서의 배정에서 해제하여 주었다. 주(主)아버지의 일에 관련하여 언덕으로 가려는 욕망이 일어날 때, 그는 해방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사도들 중에서 아무나 두 사람을 함께 가자고 부르곤 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열두 사도들 각자는 예수와 가까운 관계적-연합과 그리고 친밀한 접촉을 가질 기회를 누렸다.
148:3.4
(1659-6)
이 기록의 목적으로 계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언덕에서 단독으로 있던 이들 많은 기간 동안에, 주(主)가 우주 관련사들을 맡고 있는 자신의 우두머리 지도자들의 많은 이와 직접적이고 그리고 집행적인 관계적-연합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도록 인도되어 왔다. 그가 세례를 받았던 무렵 이후로는 내내, 우리 우주의 이 육신화된 주권자는 우주 관리-행정에서의 어떤 특정한 위상의 지도에 점점 더 많이 그리고 의식하면서 활동적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견지하고 있는 의견은, 그가 땅에서의 관련사에 참여하는 일이 점점 감소하였던 이들 주간 동안, 그의 즉각적인 연관-동료들에게 계시되지 않는 어떤 방식으로, 광대한 우주의 운행을 책임지고 있는 저들 높은 영 지능존재들을 지도하는 일에 그가 종사되어 있었고, 그리고 인간 예수는 그러한 활동을 자신의 편에서 “그의 아버지의 일에 관한 것”을 보살핀다는 용어로 정의하기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148:3.5
(1659-7)
여러 번, 예수가 여러 시간을 혼자 있었을 때, 그러나 그의 사도들의 둘이 가까이에 있었을 때, 그들은 그가 말하는 어떤 말도 듣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그의 모습이 빠르게 그리고 다채롭게 변화를 겪는 것을 관찰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주(主)와 교통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천상의 존재들의 눈에 보이는 그 어떤 현시활동도 관찰하지는 못했고, 그러한 것은 나중에 어떤 기회에서 그들 중에 몇몇이 목격하였다.
4. 악, 죄 그리고 사악한 불의
148:4.1
(1659-8)
매주 이틀 저녁은 세베대의 집 정원의 좀 외지고 아늑한 구석에서, 자신과 이야기 나누기를 갈망하는 개별존재들과 특별한 대화를 가지는 것이 예수의 버릇이었다. 이러한 사적으로 하는 저녁 대화의 하나에서 어느 날 도마주(主)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였다: “왕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왜 사람이 영에서 태어나는 것이 필요합니까? 악한 자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려면, 다시 태어남이 필요합니까? (主)여, 악이란 무엇입니까?” 예수가 이러한 질문들을 들으시고 그는 도마에게 말하였다:
148:4.2
(1660-1)
악한 자, 더 정확하게 말해서 사악하게 불의한 자를 혼동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 너희가 악한 자라고 부르는 그는 자아-사랑에 빠진 아들, 나의 아버지와 그의 충성스러운 아들들의 통치에 대항하여, 알면서 의도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높은 행정-관리자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이들 죄 많은 반역자들을 정복했다. 아버지와 그의 우주에 대한 이들 서로 다른 태도를, 너희의 마음속에서 명확하게 하라. 아버지의 뜻에 관계되는 이들 법들을 결코 잊지 말라:
148:4.3
(1660-2)
“악은 신성한 법, 하느님의 뜻을 무의식적이거나 또는 의도하지 않고 위반하는 것이다. 악은 또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는 것에 대한 불완전성의 척도이다.
148:4.4
(1660-3)
“죄는 신성한 법, 아버지의 뜻을 의식적으로, 알면서, 그리고 의도적으로 위반하는 것을 말한다. 죄는 신성하게 인도받고 영적으로 지도받는 것에 대한 반항의 척도이다.
148:4.5
(1660-4)
“사악한 불의는 의지를 가지고, 완고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신성한 법, 하느님의 뜻을 위반하는 것이다. 사악한 불의는 개인성의 생존에서의 아버지의 사랑하는 계획과 구원에서의 아들의 자비로운 사명활동에 대한 지속적인 거절의 척도이다.
148:4.6
(1660-5)
“자연 본성에 의하여, 영으로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필사 사람은 선천적인 악한 경향에 종속되지만, 습성의 그러한 자연 본성적 불완전성은 죄도 아니고 사악한 불의도 아니다. 필사 사람은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의 완전성에 이르는 자신의 기나긴 상승을 이제 막 시작하고 있다. 자연 본성적 자질에서 불완전하고 또는 부분적인 것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정말로 악에 종속되지만, 그가 알면서 그리고 의도적으로 죄의 길과 사악한 불의의 일생을 선택하지 않는 한, 그는 어떤 의미에서도 악한 자의 자녀가 아니다. 악은 이 세상의 자연 본성적 질서 안에 선천적이지만, 죄는 영적 빛에서 짙은 어두움으로 빠진 자들에 의해 이 세상으로 가져오게 된 의식적인 반란의 태도이다.
148:4.7
(1660-6)
도마야, 너는 그리스인의 신조들과 페르시아인의 잘못들로 인하여 혼동되고 있다. 너는 인류가 완전한 아담과 함께 땅에서 시작하였다가, 그 후 죄를 통해서 급속도로 현재의 통탄할만한 처지로 퇴보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악과 죄의 관계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너는 어떻게 아담의 아들인 카인의 땅으로 들어가고, 거기에서 그 자신의 아내를 얻었는가를 드러내는 기록의 의미를 어찌하여 이해하기를 거절하느냐? 그리고 또한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 중에서 그들 자신의 아내를 찾는 것을 묘사하는 기록의 의미를 해석하기를 어찌하여 거절하느냐?
148:4.8
(1660-7)
“사람들은, 정말로 자연 본성으로 인하여 악하지만, 그러나 필연적으로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 태어남─영의 세례─은 악으로부터의 해방에 필수적이며,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이 중의 어떤 것도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의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잠재적 악의 이 선천적 현존이, 사람이 무언가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어떤 외래인, 외국인, 혹은 의붓자식으로서, 그는 무언가의 방법으로 아버지의 합법적인 입양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또한 아니다. 모든 그러한 개념들은, 첫째로 아버지에 대한 너희의 오해에서 왔고, 둘째로 사람의 기원, 자연 본성 그리고 운명에 대한 너희의 무지에서 탄생된 것이다.
148:4.9
(1660-8)
그리스인들과 다른 사람들은 너희에게, 사람은 경건한 완전함으로부터 계속하여 망각이나 혹은 파멸을 향해 꾸준히 하강하고 있다고 가르쳤다; 나는 사람이, 왕국에 들어감으로써, 확실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하느님과 신성한 신성한 완전성에 이르기까지 상승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와 있는 것이다. 영원한 아버지의 뜻의 신성하고 영적인 이상에 어떤 방식으로도 모자라는 존재는 잠재적으로는 악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죄가 있는 것이 아니며, 사악하게 불의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148:4.10
(1661-1)
도마야, 네가 성서에서 이렇게 쓰여 있는 것을 읽지 않았느냐; ‘너희는 주님 너희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내가 그의 아버지가 되겠고, 그가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내가 그를 아들로 선택했으며, 내가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데려오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내 이름에 의하여 불리는 자들도 다 오게 할 것이니, 이것은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아들들이다.’ ‘하느님의 영을 가진 자는 정말로 하느님의 아들들이다.’ 자연 본성적인 자녀 안에는 인간적 아버지의 물질적인 일부분이 있지만, 한편으로 왕국의 모든 신앙 아들 안에는 하늘 아버지의 영적인 일부분이 있다.”
148:4.11
(1661-2)
예수는 이 모든 것과 더 많은 것을 도마에게 말하였으며, 그 사도는 그중에서 많은 것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에게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문제들에 관하여 말하지 말라.”라고 권고하였다. 그래서 도마는 이 대화를 주(主)가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기 전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5. 고통의 목적
148:5.1
(1661-3)
또 다른 정원에서의 이들 사적인 면담에서, 나다니엘예수에게 물었다: “주(主)여, 저는 왜 당신이 치유하는 것을 무차별적으로 실천하기를 거절하는지 납득하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하늘에 계신 사랑의 아버지가 어찌하여 땅에 있는 자신의 그렇게 많은 자녀들에게 그렇게 많은 고통을 겪도록 허용하는지를 납득하기에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주(主)나다니엘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148:5.2
(1661-4)
나다니엘아, 너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혼동을 겪는 것은 이 세상의 자연 본성적 질서가 얼마나 많은 시절 특정한 반역자들의 죄 많은 모험들로 인하여 그렇게 뒤집혀 왔는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러한 것들을 질서 있게 정돈하는 일을 시작하려고 온 것이다. 그러나 우주의 이 부분을 이전의 길로 회복시키고, 사람들의 자녀를 죄와 반역의 별도로 추가된 짐으로부터 풀려나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악의 현존 혼자서도, 사람의 상승을 위한 충분한 시험이다─죄는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148:5.3
(1661-5)
“그러나 나의 아들아,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에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님을 너는 알아야만 한다. 사람이 신성한 뜻의 더 좋은 길 안에서 걸어갈 것을 끈질기게 거절한 결과로써, 불필요한 고통을 그 자신에게 덮어 씌고 있다. 고통은 악에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의 많은 것이 죄와 사악한 불의에 의하여 생산되어 왔다. 많은 유별난 사건들이 이 세상에서 벌어져 왔으므로,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목격하는 고통과 고난의 장면으로 인하여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너는 한 가지 일에서는 확신할 수도 있다: 아버지가 그릇된 행동에 대한 독단적인 징벌로써 고난을 보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불완전함과 악의 장애는 선천적이다; 죄에 대한 벌은 피할 수 없다; 사악한 불의에 대한 파괴하는 결말은 냉혹하다. 사람은 그가 선택한 일생의 자연 본성적인 결과인 그러한 고통들에 대하여, 하느님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이 세상에 살면서 일생의 한 부분인 그러한 체험들에 대하여, 불평해서도 안 된다. 필사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처지가 보다 좋게 하기 위하여 끈질기게 그리고 변함없이 일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다. 지능적 적응은 사람이 그의 땅에서의 비참함의 많은 것을 극복할 수 있게 할 것이다.
148:5.4
(1662-1)
나다니엘아, 사람들이 그들의 영적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움을 주는 일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그들의 마음에 박차를 가하여, 복잡한 물질적인 문제들을 풀어 나가는 데 있어서 그들을 좀 더 잘 준비시키고 그들에게 영감을 주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나는 네가 성서를 읽어 오면서 겪은 혼동을 알고 있다. 거기에서는 너무 자주, 무지한 사람들이 납득하는데 실패한 모든 것을 하느님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만연되어 있다. 아버지는 네가 이해하는 데 실패한 모든 것을 개인적으로 책임지지 않는다. 네가 순진하게 또는 고의적으로 그렇게 어떤 신성한 법령 공표를 위반하였기에, 아버지가 공표하여 제정한 공정하고 지혜로운 법이 너에게 고통을 주는 계기가 된다는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
148:5.5
(1662-2)
“그러나 나다니엘아, 만약 네가 분별력을 가지고 성서를 읽는다면, 그 안에는 너를 가르쳤을 것이 많이 들어 있다. 다음과 같이 쓰인 글들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 아들아, 주님의 징벌을 경멸하지 말라; 그가 바로 잡아주는 것에 싫증 내지도 마라, 이는 실로 아버지가 자신이 그 안에서 즐거워하는, 그러한 아들을 바로 잡아주는 것처럼, 주님은 그가 바로 잡아주는 그를 사랑한다.’ ‘주님은 자진해서 고통 주지 않는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길에서 벗어났지만, 이제는 법을 지키고 있다. 고통이 내게 좋았으니, 그로 인하여 내가 신성한 계명을 배울 수 있었다.’ ‘내가 너의 슬픔을 알고 있다. 영원한 하느님이 너의 피난처가 되시니, 그 아래에는 영속하는 팔들이 있다.’ ‘주님은 또 압박당하는 자의 피난처이시요, 파란만장한 시절에 휴식의 항구이다.’ ‘주님은 고통으로 침상에 있는 자에게 강한 힘을 주실 것이다; 주님은 병자를 잊지 않으신다.’ ‘아버지가 자기 자녀들에게 동정심을 보이듯이 주님은 그를 두려워하는 자를 동정하신다. 그는 너희의 몸을 아신다; 너희가 티끌임을 기억하신다’ ‘그는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어 주신다.’ ‘가난한 자의 희망이시며, 고뇌 속에 있는 궁핍한 자의 강한 힘이시며, 폭풍으로부터 피난처시며, 불같은 더위로부터 피하는 그늘이시다.’ ‘그는 미약한 자에게는 힘을 주시며, 아무 기력 없는 자에게는 강한 힘을 키워주신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한다.’ ‘네가 고통의 강물을 두루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며, 역경의 강물이 넘쳐 너를 덮칠 때에도, 나는 너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상심한 자를 싸매 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통곡하는 모든 자를 위로하라고 그가 나를 보내었다.’ ‘괴로움을 겪는 가운데에 바로잡는 것이 있다; 고통은 티끌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것이 아니다.’”
6. 고통에 대한 오해─욥에 대한 강연
148:6.1
(1662-3)
같은 날 저녁에 벳세다에서, 요한예수에게 왜 그렇게 겉보기에도 결백한 많은 일반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질병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많은 고통을 체험하는지 물었다. 다른 많은 것들 중에서 요한에게 대한 대답으로 주(主)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48:6.2
(1662-4)
“나의 아들아, 너는 재난의 의미와 혹은 괴로움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너는 족 문학의 걸작인 의 고통에 관한 성서의 이야기를 읽지 못했느냐? 이 놀라운 비유가 주님의 하인이 누리는 물질적인 번영에 대하여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어떻게 시작하는지 기억나지 않느냐? 은 자녀, 재물, 명예, 지위, 건강 그리고 사람이 현세의 일생에서 가치를 두는 모든 것에서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너는 잘 기억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유서 깊은 가르침에 따르면, 그러한 물질적인 번영은 신성한 은혜를 입었다는 충분한 증거였다. 그러나 그러한 물질적 소유물이나 그러한 현세의 번영이 하느님의 은혜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는 부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가난한 자도 똑같이 사랑하는 분이다; 그는 개인들을 차별하는 분이 아니다.
148:6.3
(1663-1)
“신성한 법의 위반은 조만간 처벌이라는 추수가 뒤따르고, 반면에 사람들이 분명하게 결국에는 자신들이 뿌린 것을 거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인간이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언제나 선행된 죄에 대한 처벌이 아님을 늘 알아야만 한다. 과 그의 친구들은 그들의 걷잡을 수없는 혼란에 대한 참된 해답을 찾아내는데 실패하였다. 그리고 너희가 지금 즐기고 있는 빛을 가지고는, 너희는 이 독특한 비유에서 그들이 상연하는 부분 부분들을 사탄의 역할로 돌리기도 힘들고 하느님의 역할로 돌리기도 힘들 것이다. 이, 괴로움을 당하면서 두루, 그의 지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이나 혹은 그의 철학적 어려움의 해결을 찾아내지 못했지만, 그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방어가 부서지는 바로 그 면전에 이르러서도, 그는 ‘나는 나 자신이 몹시 싫다.’라고 진지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영적 높이로 상승했다; 그러고 나서 그에게는 하느님의 환상을 보는 구원이 허락되었다. 그렇게 비록 잘못 납득된 괴로움을 통해서도, 은 도덕적 납득과 영적 통찰력에서의 초인간적 경지로 상승했다. 괴로워하는 하인이 하느님의 환상을 얻으면, 거기에는 모든 인간의 납득을 통과하는 혼의 평화가 뒤따른다.
148:6.4
(1663-2)
의 첫 친구인 엘리바스는 고통받는 자에게, 그가 번영을 누리던 시절에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처방해 주었던 바로 그 꿋꿋함을, 그의 환난 속에서 똑같이 드러내 보이라고 강력하게 권유하였다. 이 거짓 위로자는 말하였다: ‘이여, 너의 종교를 신뢰하라. 괴로움을 겪는 자는 사악한 자이며, 정의로운 자가 아님을 기억하라. 너는 이 처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 있었음이 틀림없으니, 그렇지 않으면, 너는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느님 보시기에 정의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너는 잘 알고 있다. 사악한 자는 결코 실제로 번영할 수 없음을 네가 알고 있다. 어쨌든 사람은 곤란을 겪는 운명으로 정해진 것처럼 보이고, 아마도 주님께서 단지 너에게 좋으라고 너를 응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쌍한 이 인간의 고통에 대한 문제에서의 그러한 해석으로부터 큰 위로를 얻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48:6.5
(1663-3)
“그러나 그의 두 번째 친구 빌닷의 조언은 그 당시 인정받던 신학의 입장에서는 건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압박을 가하는 것이었다. 빌닷이 말하였다: ‘하느님은 부당할 수가 없다. 네 자녀들이 죽었으므로, 그들이 죄인이었음에 틀림없다. 네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그렇게 고통을 당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네가 실제로 정의롭다면, 하느님은 분명히 너의 고통으로부터 너를 구원할 것이다. 너는 하느님이 사람을 다룬 역사로부터, 전능자는 오직 사악한 자만을 없앤다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148:6.6
(1663-4)
“그러고 나서 어떻게 이 그의 친구들에게 대답했는지를 너는 기억한다. 그는 말하였다: ‘하느님이 도움을 청하는 나의 외침을 듣지 않으신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어떻게 하느님이 정당하면서, 동시에 나의 결백함을 그렇게 철저하게 무시할 수 있는가? 내가 전능자에게 드린 간청으로부터는 아무런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지금 배우고 있다. 선한 자에 대한 사악한 자의 박해를 하느님께서 관용으로 참아주고 있다는 것을 너희는 분별할 수 없겠느냐?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허약한데, 전능한 하느님의 손에서 어떤 배려의 기회를 얻겠느냐? 하느님께서 나를 스스로인 나로 만드셨으므로, 그러니 그가 나를 외면하면, 나는 무방비가 된다. 어찌하여 하느님은 이러한 비참한 모양으로 그저 괴로움을 겪도록 나를 창조만 하신 것인가?”
148:6.7
(1663-5)
“그리고 그의 친구들의 조언과 자신의 마음을 차지했던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관념에 비추어볼 때, 누가 의 태도에 도전할 수 있는가? 인간적인 하느님을 갈구하고 있었으니, 그가 사람의 필사자 처지를 알고, 긴 파라다이스상승의 이 첫 번째 일생의 한 부분으로서 때때로 올바른 자가 결백한 가운데 고통받아야 함을 납득하는, 그런 신성한 존재와의 교제에 굶주렸다는 것을 보지 못하느냐? 그것 때문에 사람의 아들이, 이제부터 의 고통을 언제까지나-견디도록 시달리고 있다고 호소할 수밖에 없는 저들 모든 이를 위로하고 구조할 수 있도록, 육신을 입고 그렇게 일생을 살아가기 위하여 아버지로부터 와 있다.
148:6.8
(1663-6)
의 세 번째 친구 소팔은, 그때 여전히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을 하였다: ‘네가 그렇게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면서, 네가 정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을 이해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아마도 너의 모든 비참한 불행에는 어떤 감추어진 목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세 친구 모두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은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탄원하면서 하느님에게 직접 도움을 간청하였다.
148:6.9
(1664-1)
“그러고 나서 그의 친구들과의 두 번째 회합이 시작되었다. 엘리바스는 더욱 준엄해지고 비난하면서, 빈정거렸다. 빌닷이 친구들을 경멸하는 것에 분개하게 되었고, 소팔은 그의 우울한 조언을 되풀이하였다. 이때가 되어서 은 그의 친구들에게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했고, 그래서 하느님에게 다시 간청하였다. 이제 그는 그의 친구들의 철학 안에서 체현되고, 심지어 그 자신의 종교적 태도 안에서 소중히 간직했던 불공정의 하느님에 맞서서, 공정한 하느님에게 간청하였다. 다음으로 은, 필사자 실존에서의 불공평이 더욱 공정하게 시정될 미래 일생의 위안 속으로의 피난을 택했다. 사람으로부터 도움받는 것에 실패한 것이 하느님에게 몰아갔다. 그런 후에 그의 가슴속에서 신앙과 의심의 커다란 투쟁이 뒤따라 일어났다. 마침내, 고통을 겪는 인간이 생명의 빛을 보기 시작하고, 시달리던 그의 혼은 희망과 용기의 새로운 높이로 상승했다; 그는 계속 고통을 겪고 그리고 심지어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깨우친 혼은 이제 ‘나의 정당함을-입증하는 자가 살아계신다!’라는 승리의 외침을 외쳤다.
148:6.10
(1664-2)
하느님이 그들의 부모를 벌주기 위하여 그 자녀들을 괴롭힌다는 신조에 이 도전하였을 때, 그는 전적으로 옳았다. 은 언제까지나 하느님이 정의롭다는 것을 즉시 인정 헸지만, 영원자의 개인적 성격에 대하여 혼이-만족하는 어떤 계시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땅에서의 우리의 사명이다. 어떤 고통당하는 필사자도,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비를 납득함으로써 얻는 위로를 더 이상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회오리바람으로부터 하느님이 말씀한다는 것은 그 말씀이 있던 당시로서는 장엄한 개념이었지만, 너희는 이미 아버지가 자신을 그런 식으로 계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는 인간의 가슴 안에서 조용하고, 작은 음성으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것이 길이다, 그 길로 걸어라.’ 하느님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 그가 너희를 그가 무엇이라는 그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그가 너희가 무엇이라는 그것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너희는 이해하지 못한단 말이냐!”
148:6.11
(1664-3)
그런 후에 예수가 이렇게 마지막 언급을 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사람들의 자녀를 자진해서 괴롭히지 않는다. 사람은, 첫째로, 시간에서의 우연히 일어나는 사고와 그리고 미숙한 물리적 실존의 악에서의 불완전으로부터 고통을 겪는다. 그다음으로, 죄─생명과 빛의 법칙을 어김─의 냉혹한 결과로 고통을 겪는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땅에서 정의로운 하늘의 법칙에 반하는 반란으로, 자기 자신의 사악하게 불의한 고집에 따라 결실을 맺는다. 그러나 사람의 비참한 불행은 신성한 심판이 개인적으로 내려진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신의 현세적인 고통을 줄이기 위해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으로 한번 더, 악한 자의 간절한 부탁에 의해 하느님이 사람을 괴롭힌다는 미신으로부터 해방되어라. 하느님에 대한 얼마나 많은 그릇된 관념들이 선한 사람들조차 정직하게 받아들여졌는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욥기를 공부하라. 그러고 나서 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애처롭게 괴로워하던 이 어떻게 하여 위안과 구원의 하느님을 발견했는지 유의하라. 마침내 그의 신앙이 아버지로부터 치유의 자비와 영속하는 정의로움으로 퍼붓는 생명의 빛을 분별하기 위해 고통의 구름을 꿰뚫었다.”
148:6.12
(1664-4)
요한은 여러 날 동안 그의 가슴속에서 이 말들을 숙고하였다. 그 정원에서 주(主)와 가진 이 대화의 결과로, 그의 전체적인 훗날-일생은 현저하게 변화되었다. 그는 훗날 시절에, 다른 사도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인간 괴로움의 근원, 본성 그리고 목적에 관하여 그들의 견해를 바꾸도록 유도하는데 많은 것을 했다. 그러나 요한주(主)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결코 이 회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7. 손 마른 사람
148:7.1
(1664-5)
사도들과 새 전도자들 집단이 두 번째 갈릴리 설교 여행을 떠나기 전 두 번째 안식일에, 예수는 “정의로운 삶의 즐거움”에 대하여 가버나움 회당에서 설교하였다. 예수가 말을 끝마쳤을 때, 불구된 자, 절름발이, 병자, 고난당하는 자들의 큰 무리가 치유해 줄 것을 호소하면서 그를 둘러싸며 모여 들었다. 또한 그 무리 속에는 사도들과 새로 된 전도자들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 첩자들도 섞여 있었다. 예수가 가는 곳은 어디에나(아버지의 일을 하러 언덕으로 갔을 때를 제외하고) 여섯 명의 그 예루살렘 첩자들도 항상 따라갔다.
148:7.2
(1665-1)
예수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며 서있을 때, 바리새인 첩자들의 영도자가 손 마른 사람에게 예수에게 가까이 가서 안식일에 치유를 받는 것이 율법에 합당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날에 도움 받기를 구해야 하는지 물어보라고 설득했다. 예수가 그 사람을 보고, 그의 말을 듣고, 그가 바리새인들로부터 보내졌음을 감지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너에게 물어 볼 것이 있으니, 앞으로 나오너라. 너에게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네가 손을 아래로 뻗어 그것을 구해 내겠느냐?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한 일이냐?”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주(主)여, 안식일에 그처럼 좋은 일을 하는 것은 합당합니다.” 그러자 예수가 모든 자들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왜 이 사람을 내 앞에 보냈는지를 나는 알고 있다. 너희는 나로 하여금 안식일에 자비를 베풀도록 나를 유혹할 수 있다면, 너희는 나를 공격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것이다. 비록 안식일이라도 양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너희 모두가 말없이 동의하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동물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안식일에 사랑과-친절함을 베푸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증언하라고 요청한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내가 선포하겠는데,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들 모두가 그의 앞에 조용히 서 있자, 예수가 마른 손을 가진 사람에게 향해서 말하였다: “모두가 너를 볼 수 있도록 내 옆으로 와서 여기 서라. 이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나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 너에게 고침을 받을 만한 신앙이 있으면, 내가 명하겠는데, 너의 손을 내밀어라.”
148:7.3
(1665-2)
이 사람이 자기의 마른 손을 내밀자, 그 손이 회복되었다.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을 혼내주려고 마음을 품었지만, 예수는 그들을 차분히 있으라고 명하며 말하였다: “내가 방금 너희에게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해를 가하거나 죽이려는 가슴을 품으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화가 난 바리새인들은 떠나갔다. 안식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티베리아스까지 서둘러 가서 헤롯과 상의하였고, 헤롯 집안이 예수와 반목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편견을 일으킬 만한,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헤롯은 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불평을 하라고 충고하면서, 예수에 대한 어떤 행동도 취하기를 거절하였다.
148:7.4
(1665-3)
이것이 그의 적들의 도전에 응답하여 예수가 행한 첫 번째 기적이었다. 주(主)가 기적이라 불리는 이 일을 행한 것은 자신의 치유의 힘을 실증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종교의 안식일 휴식에 대해 억압을 가하여 어떤 진정한 속박으로 만드는 것에 반대하여 효과적으로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이 사람은 자신의 직업인 석공의 일로 다시 돌아갔으며, 그 치유로 인한 감사와 정의로움의 일생을 살았던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8. 벳세다에서의 마지막 주간
148:8.1
(1665-4)
벳세다에서 머물던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 첩자들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대해 분열이 일어났다. 세 명의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보고 들은 것에 굉장한 감명을 받았다. 한편 예루살렘에서는 산헤드린의 젊고 영향력 있는 회원인 아브라함이 공개적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지지하였고, 실로암 연못에서 아브너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모든 예루살렘이 이 사건으로 떠들썩해졌고, 메신저들이 곧 벳세다로 여섯 명의 바리새인 첩자들을 소환하러 파견되었다.
148:8.2
(1666-1)
전에 있었던 갈릴리의 여행에서 왕국을 받아들였던 그리스 철학자가 알렉산드리아의 부자인 어떤 유대인과 함께 돌아왔다. 그들은 다시 한 번 병자들을 위한 병원은 물론이고 철학과 종교의 합동 학교를 세우는 목적으로 예수를 그들의 도시로 초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공손하게 그 초청을 거절하였다.
148:8.3
(1666-2)
이 무렵에 바그다드로부터 커르메스라는 최면술을 쓰는 선지자가 벳세다 야영지에 도착하였다. 선지자라고 여겨지는 이 사람은 최면 상태에 들어가면 특이한 환상들을 보았으며, 그의 잠이 방해가 될 때는 환상적인 꿈들을 꾸었다. 그는 야영지에서 상당한 소동을 피웠다. 그래서 열심당원 시몬이 자아-기만에 빠진 이 사이비 선지자를 다소 거칠게 다스리려고 하였지만, 그러나 예수가 중재하여 그에게 며칠 동안 모든 행동의 자유를 허락하였다. 그의 설교를 들었던 모든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왕국 복음으로 판단하여 볼 때, 건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그는 얼마 있다가, 단지 여섯 명의 불안정하고 정상이 아닌 혼들을 데리고, 바그다드로 돌아갔다. 예수바그다드 선지자를 위해 원만하게 중재를 하기도 전에, 다윗 세베대가 자아-임명한 위원회의 도움을 받으면서, 커르메스를 호수로 데려가서 여러 번 물속으로 그를 처넣은 후에, -그 자신의 캠프를 조직하고 세우라고-그 곳을 떠나라고 조언하였다.
148:8.4
(1666-3)
같은 이 날에 페니키아 여인인 베스마리온이 너무나 열광하여 정신이 나갔고, 물 위를 걸으려고 시도하다 거의 물에 빠질 뻔 한 후에, 그녀의 친구들에 의해 돌려보내졌다.
148:8.5
(1666-4)
예루살렘의 새 개종자인 바리새인 아브라함이 그의 세상에서의 재물들 모두를 사도 기금으로 기부했으며, 이 기부금으로 그들은 100 명의 새로 훈련된 전도자들을 즉각 파견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많은 기여를 하였다. 안드레가 이미 야영지를 닫는다고 발표하였고, 모든 사람들은 집으로 가거나 아니면 갈릴리로 전도자들을 따라 갈 준비를 하였다.
9. 중풍 병자를 고치심
148:9.1
(1666-5)
10월 1일 금요일 오후에 예수가 사도들, 전도자들, 그리고 해산되는 야영지에 있었던 다른 영도자들과 함께 마지막 회의를 하고 있었을 때, 예루살렘에서 온 여섯 명의 바리새인들도 세베대의 집에 널찍하고 크게 트여진 맨 앞의 방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앞자리에 함께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의 모든 이 세상 일생에서 가장 이상하고 특이한 에피소드중의 하나가 발생하였다. 이때에, 주(主)는 비가 내리는 이 계절에 이러한 모임들로 사용하기 위하여 세운 큰 방에 서서 말하고 있었다. 그 집은 예수의 강연을 조금이라도 더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던 수많은 사람들로 전반적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148:9.2
(1666-6)
그 집이 사람들로 가득 차고 열성적인 청중들에 의해 전반적으로 둘러 싸여 있는 동안에, 중풍으로 오래 괴로움을 당하던 사람이 친구들에 의해 침상에 누운 채로 가버나움으로부터 왔다. 이 중풍 병자는 예수벳세다를 떠나려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최근에 그렇게 온전하게 된 석공인 아론과 이야기를 한 후, 그가 치유를 구할 수 있는 장소인, 예수의 현존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가 고쳐지도록 하기로 작정하였다. 그의 친구들은 앞문과 뒷문 양쪽을 통하여 세베대의 집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사람들로 너무 많이 붐비고 있었다. 그러나 중풍 병자는 실패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의 친구들에게 사다리를 가져다 예수가 말하고 있는 방의 지붕으로 올라가도록 지도하였다. 기와를 벗기고 그들은 대담하게 침상채로 그 병자를 줄에 매달아 주(主)의 바로 앞바닥에 내려놓았다. 예수가 그들의 행동을 보고 말을 중단하였고, 한편 그 방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그 병자와 친구들의 인내력에 감탄하였다. 중풍 병자가 말하였다: “주(主)여, 당신의 가르침을 방해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낫게 되기를 꼭 원합니다. 저는 고침을 받아들이고 바로 당신의 가르침을 잊어버리는 저들과는 다릅니다. 제가 하늘의 왕국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것, 그 모든 것이 갖추어지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이 사람의 고난이 그 자신의 잘못 살았던 일생으로 인하여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본 예수가 중풍 병자에게 말하였다: “아들아, 두려워 마라, 너의 죄는 용서되었다. 너의 신앙이 너를 구할 것이다.”
148:9.3
(1667-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이 그들과 함께 앉아 있던 서기관들과 율법사들과 함께 예수의 이 발표를 들었을 때, 그들은 자기들끼리 말하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이 사람이 그렇게 대담하게 말하는가? 그러한 말이 신성모독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그는 모르는가? 하느님 이외에 누가 죄를 사할 수 있느냐?” 그들의 각 마음속에서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그렇게 따져보는 것을 예수가 그의 영으로 감지하고 말하였다: “너희는 가슴 속에서 어째서 그렇게 따져보느냐? 너희가 누구이기에 나를 비판하는 자리에 앉느냐? 내가 이 중풍 병자에게 네가 죄 사함을 받았다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기 위하여, 내가 이 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하겠다.” 예수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자, 그 중풍 병자는 일어났으며 그들이 그를 위하여 길을 비켜주자 그들 모두 앞에서 걸어 나갔다. 이 일을 목격한 모든 자들이 놀랐다. 베드로가 무리들을 해산시켰으나, 많은 자들이 기도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면서, 그렇게 기이한 일은 이전에는 결코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였다.
148:9.4
(1667-2)
이 무렵에 산헤드린의 메신저들이 여섯 첩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는 전갈을 가지고 도착하였다. 그들이 이 전갈을 들었을 때, 그들 안에서는 심각한 토론이 벌어졌는데, 그들이 그들의 토의를 완결한 이후, 영도자와 두 사람이 메신저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세 명의 바리새인 첩자들은 예수에게 신앙을 고백하고 바로 호수로 가서 베드로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사도들에 의해 왕국의 자녀로서 연관-동료관계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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