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번호 | 복귀
제 149 편
두 번째 전도 여행
149:0.1
(1668-2)
갈릴리에서의 두 번째 대중 설교 여행은 서기 28년 10월 3일 일요일에 시작되어 거의 석 달 동안을 계속하여 12월 30일에 끝났다. 예수와 그의 열두 사도들은 새로 뽑은 117명의 전도자 무리단과 관심을 가진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협력을 받으며, 이번 노력에 참여하였다. 이 여행에서 그들은 가다라, 프톨레마이스, 야피아, 다바리타, 메기도, 예즈릴, 스키토 폴리스, 타리케아, 히포, 가말라, 벳새다-줄리아스, 그리고 많은 다른 도시들과 마을들을 방문하였다.
149:0.2
(1668-2)
이 일요일 아침 떠나기에 앞서, 안드레베드로예수에게 새 전도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내려 달라고 요청했으나, 주(主)는 사양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행할 수 있는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는 자기 몫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충분한 토의 끝에 야고보 세베대가 그 임무를 맡아서 관리-운영하기로 결정하였다. 야고보의 말이 결론에 이를 때에 예수가 전도자들에게 말하였다: “이제 너희가 나가서 너희에게 맡겨진 일을 행하라. 나중에 너희가 너희 자신의 유능함과 충실함을 보여주었을 때, 내가 그때 너희에게 왕국 복음을 전도하도록 성직-임명을 할 것이다.”
149:0.3
(1668-3)
이 여행에서는 단지 야고보요한만이 예수와 함께 여행하였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각각은 약 열두 명에 달하는 전도자들을 데리고 다녔으며, 한편으로는 전도하고 가르치는 그들의 일을 수행하는 동안에, 그들과 가까운 접촉을 유지하였다. 신자들이 왕국으로 들어올 준비가 되자마자, 사도들은 세례를 실시하곤 하였다. 예수와 그의 두 동행자들은 이 석 달 동안 광범위하게 여행하였다. 그들은 때로는 하루에 두 도시를 방문하면서 왕국을 건설하려고 자신들의 노력을 쏟고 있는 전도자들의 활동을 지켜보고 그리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 두 번째 전도 여행은 주로 새로 훈련받은 117명의 무리단을 위하여, 실천적인 체험을 마련해주려는, 하나의 노력이었다.
149:0.4
(1668-4)
이 기간과 그리고 뒤이어진 기간을 두루 통하여, 예수와 열두 사도들이 예루살렘으로 최종 출발할 그때까지 내내, 다윗 세베대벳세다에 있는 그의 아버지 집에 왕국의 일을 위한 상설 본부를 만들어 유지하였다. 이것은 이 땅에서의 예수의 일을 위한 정보교환 장소였고 그리고 다윗팔레스타인의 다양한 지역과 그 주변 지역에서 일하는 일꾼들 사이에서 수행한, 메신저 봉사를 위한 중계 정거장이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안드레의 승인을 얻어서 했지만, 그 자신이 앞장서서 행하였다. 다윗은 급속도로 확장되고 확대되는 왕국 일의 이러한 정보 부문에서 일할, 40명에서 50명 정도의 메신저들을 고용하였다. 그는 그의 오래된 고기잡이 일에 자신의 시간을 어느 정도 사용함으로써, 그렇게 고용하는 비용을 부분적으로 스스로 충당하였다.
1. 널리-퍼진 예수의 명성
149:1.1
(1668-5)
벳세다의 야영지가 해산될 무렵에는 예수의 명성, 특히 치유자로서의 명성이 팔레스타인 모든 지역과 그리고 시리아와 그 주위의 모든 지방들에 두루 퍼져 나갔다. 그들이 벳세다를 떠난 후 몇 주 동안에도 병자들이 계속하여 그곳에 도착하였고. 그리고 그들이 주(主)를 찾지 못하자, 다윗으로부터 그가 있는 곳을 알아내고는 그를 찾아 나서곤 하였다. 이번 여행에서 예수는 의도적으로 이른바 치유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도 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로워하던 수십 명이, 치료를 간구하도록 그들을 재촉하여 몰아간 강렬한 신앙의 회복하는 힘의 결과에 따라서, 건강과 행복을 되찾게 되었다.
149:1.2
(1669-1)
이 사명활동의 시기 무렵에─그리고 예수의 나머지 땅에서 살았던 나머지 기간을 두루 통하여 계속되는─특이하고 그리고 설명이 되지 않는 일련의 치유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석 달 동안의 여행의 과정에서 유대, 이두미아, 갈릴리, 시리아, 티레, 시돈 그리고 요단강 너머에 있는 지방에서 온 100명이 넘는 남자들, 여인들 그리고 아이들이 예수로 인하여 일어난 이 무의식적인 치유의 혜택을 받았고. 그리고는 그들이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면서 예수의 명성이 확장되는 데에 힘을 더했다. 예수가 이들 저절로 일어난 치유의 경우를 관찰할 때마다 매번 혜택을 받은 자들에게 직접 “아무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말라.”는 당부를 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을 행했다.
149:1.3
(1669-2)
이러한 저절로 곧 무의식적으로 치유되는 사례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결코 계시되지 않았다. 몇 번의 경우에서 단지 “나로부터 힘이 나간 줄을 내가 감지한다.”라고 주(主)가 말씀했던 것을 제외하면, 그는 결코 이러한 치유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자신의 사도들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 한번 어떤 병약한 아이가 그에게 손을 대었을 때 그가 언급하였다. “생명이 나로부터 나갔다는 것을 내가 감지한다.
149:1.4
(1669-3)
이러한 저절로 치유되는 사례들의 본성에 관하여 주(主)가 직접적인 아무런 말이 없는 상황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해서 일어났었는지를 설명하려고 우리가 떠맡는 것은 우리에게 주제넘은 일인 줄 알고 있지만, 그러한 모든 치유의 현상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기록하는 것은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이 세상 사명에서 발생했던 이러한 뚜렷한 치유의 기적은 다음 세 가지, 곧 강력한 영향력, 유력한 영향력 그리고 관계적-연합의 영향력이 공존했던 결과라고 믿는다:
149:1.5
(1669-4)
1. 끈질기게 치유받기를 추구하는, 그리고 그러한 치유가 순수하게 육체적인 회복보다는 오히려 그로 인한 영적 은혜를 위해 갈망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추구하는 그러한 인간 존재의 가슴 안에 있는 강하고 지배적이고, 살아있는 신앙의 현존.
149:1.6
(1669-5)
2. 그러한 인간의 신앙과 동시에 함께 하는, 거의 무제한적이고 무시간적인 창조적 치유의 능력들과 특권들을 그의 개인 안에 실재로 소유하고 있는, 육신화하고 자비에-지배된 하느님창조자 아들의 커다란 동정심과 연민의 실존.
149:1.7
(1669-6)
3. 창조체의 신앙과 창조자의 일생이 함께 있는 것과 더불어, 이 하느님-사람이 아버지의 뜻의 개인화(個人化)된 표현이라는 것도 또한 주목해야만 한다. 만약 인간 필요와 그에 부합하는 신성한 능력이 접촉을 이루고 있다면, 아버지가 달리 뜻하는 것이 없을 때는 그 둘은 하나가 되고, 그러면 치유가 인간 예수에게 무의식적으로 일어났고, 한편 그것은 그의 신성한 본성에 의하여 즉각적으로 인지되었다. 이러한 많은 치유의 사례들에 대한 설명은 우리에게 오랫동안 알려진 하나의 위대한 법칙, 창조자 아들이 원하고 그리고 영원한 아버지가 뜻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법칙에서 발견될 수밖에 없다.
149:1.8
(1669-7)
그렇다면 우리의 의견은, 예수의 개인적 현존에서는, 특정한 형태의 인간의 심오한 신앙이, 특정한 창조적 기세와 그리고 그 당시에 사람의 아들과 밀접하게 연관된 우주의 개인성들에 의한 치유의 현시활동 안에서, 문자 그대로의 그리고 참으로 강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자주, 고통받는 사람들이 그의 현존 안에서 그들의 강력한, 개인적 신앙에 의해 스스로를 치유하도록 했다는 기록은 하나의 사실이 된다.
149:1.9
(1670-1)
다른 많은 이들은 전적으로 이기적인 목적으로 치유를 구하였다. 티레의 부유한 과부는 자기 시종들과 함께 그녀의 병을 고치러 왔었는데, 그녀에게는 여러 가지의 병이 있었다. 그녀는 가장 돈을 많이 내는 자가 하느님의 힘을 살 수 있는 것처럼, 갈릴리 지방의 여기저기를 두루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점점 더 많은 돈을 계속 내밀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 번도 왕국 복음에는 결코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오로지 육체적 질병들의 치료였기 때문이다.
2. 사람들의 태도
149:2.1
(1670-2)
예수는 사람들의 마음을 납득하였다. 그는 사람들의 가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았으며 그래서 그의 가르침이 그가 그들에게 제시하였던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자신의 땅에서의 일생으로 잘 갖추어서 제공된 당대의 유일한 영감 받은 해석은, 모든 민족과 세상의 모든 종교가 신속하게 왕국 복음을 끌어안도록 하였을 것이다.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이 특정한 민족, 인류, 종교에 좀 더 쉽게 받아들여지도록 그의 가르침을 다시 진술했던 노력은 좋은 의도였지만, 오히려 그러한 가르침들이 모든 다른 민족, 종족 그리고 종교들에게 덜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결과를 낳았다.
149:2.2
(1670-3)
사도 바울예수의 가르침이 그가 살던 시절에 있던 특정한 집단에게 우호적으로 주목받도록 만들려는 노력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는 편지들을 많이 썼다. 예수의 복음을 가르쳤던 다른 선생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러나 그 누구도 이러한 글들의 일부가 나중에 가서, 예수의 가르침을 체현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저들에 의하여, 한 군데 모아지게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른바 그리스도교라고 불리는 것에 주(主)의 복음이 다른 종교에서보다는 더 많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또한 예수가 가르치지 않은 것들도 많이 포함하고 있다. 페르시아 신비주의의 많은 가르침과 그리스 철학의 많은 것들이 초기 그리스도교에 들어온 것 말고도, 거기에는 두 가지의 엄청난 실수가 범해졌다:
149:2.3
(1670-4)
1. 복음의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유대의 신학에 연결시키려는 노력, 곧 그리스도교의 속죄의 교리─예수아버지의 엄격한 공의를 만족시키고 또한 신성한 진노를 완화시키는 희생제물이 되었던 아들이라고 가르침─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왕국 복음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좀 더 쉽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한 노력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유대인들을 설득하는 데에서는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후의 모든 세대에서 많은 정직한 혼들을 혼동시키고 소외시키는 데에서는 실패하지 않았다.
149:2.4
(1670-5)
2. 주(主)의 초기 추종자들의 두 번째의 큰 실책이자 또한 모든 후세 세대들이 영속으로 오류를 끈질기게 계속했던 것은, 너무나 완벽하게 예수개인에 관해서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조직화한 것이었는데,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예수의 개인성에 관한 이러한 지나친-강조는 오히려 그의 가르침을 모호하게 만들도록 작용했으며,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유대인, 모하멧 교도, 힌두인, 다른 동방의 종교 신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다. 우리가 그의 이름을 지닐지도 모르는 어떤 종교 안에서 예수의 개인이 차지하는 위치를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배려가 그의 영감 어린 일생이 빛을 잃도록 만들거나 그의 구원의 메시지─하느님의 아버지신분과 사람의 형제신분─를 대신하도록 허용하고 싶지는 않다.
149:2.5
(1670-6)
예수의 종교의 선생들은 다른 종교를 다루면서 그들의 차이점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을 삼가는 한편,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많은 것들이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예수의 메시지에서 온) 진리를 인지하면서 접근해야만 할 것이다.
149:2.6
(1671-1)
바로 그 특정한 시기에, 예수의 명성은 주로 치유자로서의 평판에 근거를 두었지만, 그러한 근거가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사람들이 그에게 영적 도움을 받기 위하여 그를 찾았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육체적 치료였다. 날이 갈수록 도덕적 노예상태의 희생자들과 정신적 고통의 희생자들이 예수를 찾았으며, 그는 변함없이 구원의 길을 그들에게 가르쳤다. 아버지들은 그들의 아들들을 다루는 것에 관하여 그의 조언을 구하였고, 어머니들은 그들의 딸들을 인도하는 것에 관하여 도움을 얻기 위해 예수를 찾아왔다. 어둠 속에 앉았던 자들이 그에게로 왔으며, 그는 그들에게 생명의 빛을 계시하였다. 그의 귀는 언제까지나 인류의 슬픔을 향해 열려 있었고, 그리고 그는 그의 사명활동을 구하는 자들을 항상 도왔다.
149:2.7
(1671-2)
창조자 자신이 필사자 육신의 모습으로 육신화 되어 땅에 있을 때, 무언가 비상한 일들이 일어나야만 했던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너희는 결코 이들 소위 기적적인 사건을 두루 통하여 예수에게 접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두루 통하여 기적애 접근하는 것을 배워라, 그러나 기적을 두루 통하여 예수에 접근해가는 실수를 범하지 마라. 그리고 이러한 권고는 나사렛 예수가 땅에서 초-물질적인 행동을 행한 유일한 종교적 창시자임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것이다.
149:2.8
(1671-3)
땅에서 미가엘이 수행한 사명활동에서의 가장 놀랍고 그리고 가장 혁명적인 모습은 여인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였다. 공공장소에서 남자가 심지어는 자신의 아내에게조차 인사를 건네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되어있던 시절과 세대에서, 예수는 대담하게 갈릴리에서의 그의 세 번째 전도 여행과 관련해서 복음의 선생들로 여인들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율법의 말씀을 여자에게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에 태우는 것이 더 낫다.”라고 선언했던 랍비의 가르침의 면전에서 이런 일을 행할 정도로, 그는 더할 나위 없는 용기를 가졌다.
149:2.9
(1671-4)
한 세대를 통하여 예수는 멸시 당하면서 잊혀서 사는 그 시대의 노예와 같은 고난에서 여자들을 들어 올렸다. 예수의 이름을 붙잡는 것으로 믿어지는 종교의 후세의 세대들이 그들의 태도에서 여자에 대한 이 고귀한 모범을 따를 용기를 잃은 것은 참 애석한 일이다.
149:2.10
(1671-5)
예수가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에 사람들은 예수가 그 시절의 미신들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종교적 편견들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는 결코 편협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적대감과 비슷한 그 어떤 것도 그의 가슴속에 지니지 않았다. 그는 선조들의 종교에서 좋은 점을 따랐지만, 한편으론 미신과 속박에서의 사람이-만든 전통을 무시하는 것에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대담하게 자연의 큰 재해, 뜻밖의 사고, 다른 여러 가지 비참한 재앙들이 신성한 심판이거나 섭리의 신비한 시대의-경륜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그는 의미 없는 예식에 노예처럼 헌신하는 것을 공공연히 비난하였으며, 물질적 경배의 오류를 폭로하였다. 그는 용감하게 사람의 영적 자유를 선포하였으며, 육신의 필사자들이 정말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자녀들이라고 대담하게 가르쳤다.
149:2.11
(1671-6)
예수가 참된 종교의 표시로 청결한 손 대신에 청결한 가슴으로 대담하게 대체하였을 때, 그는 자기 선조들의 모든 가르침을 초월하였다. 그는 전통의 자리에 실체를 놓았고 그리고 허영과 위선의 모든 허식을 쓸어 버렸다. 그럼에도 이 두려움 없는 하느님의 사람은 당시의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관례에 대한 파괴적인 비난의 말을 퍼붓거나, 혹은 전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현시하지 않았다. 그는 호전적인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는 진보적인 진화론자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되어 있어야만 하는 그러한 우월한 것을 동시에 제공할 때에만 오직 이미 있는 것들의 파괴에 들어갔다.
149:2.12
(1672-1)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복종을 받았다. 그의 개인적인 부름을 받은 자 중에서 단지 세 사람만이 제자 신분에 대한 초청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했다. 그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특출한 힘을 행사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독재적이 아니었다. 그는 확신에 넘쳐 명령하였지만, 누구도 그의 명령에 분개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 대하여 절대적 권한을 떠맡고 있었으나, 결코 누구도 항의하지 않았다. 그는 추종자들이 자신을 주(主)라고 부르도록 허락하였다.
149:2.13
(1672-2)
주(主)는 뿌리 깊은 종교적 편견을 품은 자들이나 그의 가르침 안에서 그들이 정치적인 위험을 분별했다고 생각했던 자들을 제외하면,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찬미를 받았다.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서의 기원성과 권위 있음에 깜짝 놀랐다. 사람들은 거꾸로 가고 또 문제를 야기하는 질문들을 대하면서 보여준 그의 인내에 경탄하였다. 그는 자신의 활동 영역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희망과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그를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만이 그를 두려워하였으며,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들의 가슴속에 붙들고 있으려고 결심한 악과 잘못을 타도하도록 운명된, 그러한 진리의 투사라고 예수를 여기었던 사람들만이, 그를 증오하였다.
149:2.14
(1672-3)
그는 친구들이나 적들 모두에게 강력한, 그리고 특출하게 매혹적인 영향을 끼쳤다. 군중들은 단지 그의 품위 있는 말을 듣고 그의 검소한 일생을 보기 위하여 몇 주일 동안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헌신했던 남자들과 여인들은 거의 초인간적인 애정을 가지고 예수를 사랑하였다. 그들이 그를 더 많이 알면 알수록, 더욱더 그를 사랑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여전히 진실이다. 오늘날 그리고 미래의 세기에서까지도 사람들은 이 하느님-사람을 좀 더 알면 알수록, 그를 더욱 사랑하고 그의 뒤를 더욱 따르게 될 것이다.
3. 종교 영도자들의 적개심
149:3.1
(1672-4)
일반 사람들이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종교 영도자들은 점점 더 경계심과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조직적이고 독단적인 신학을 형성해왔었다. 그런데 예수는 기회가 있으면 봉사하면서 가르침을 베푸는 선생이었다; 그는 조직적으로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었다. 예수는 율법으로부터 보다는 일생으로부터 비유를 사용하여 가르쳤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메시지를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했을 때, 그는 그 목적을 위한 이야기의 단 한 가지만을 위하여 그것을 사용하였다.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많은 그릇된 관념이 그의 비유로부터 우화를 만들려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149:3.2
(1672-5)
예루살렘 종교 영도자들은 최근에 젊은 아브라함이 개종했던 사건과 그리고 세 명의 첩자들이 예수를 감시하다가 떨어져 나가 베드로로부터 세례를 받고 지금은 갈릴리의 두 번째 전도 여행에 전도자들과 함께 다닌 사건의 결과로 거의 광적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유대인 영도자들은 두려움과 편견으로 말미암아 점점 더 눈이 멀어 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왕국 복음의 호소하는 진리를 계속하여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의 가슴이 점점 굳어져 갔다. 사람이 그들과 함께 거주하는 영의 호소를 차단하여 잠가 버릴 때, 거기에는 그들의 태도를 변경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149:3.3
(1672-6)
예수가 처음 벳세다 야영지에서 전도자들과 만났을 때, 자신의 연설을 마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는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몸과 마음으로─감정적으로─반응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똑같은 형태인 것은 내주하는 영뿐이다. 신성한 영들이 그들의 체험의 범위가 어느 정도 가지각색일 수 있지만, 그들은 모든 영적 호소에 한결같이 반응한다. 오직 이 영을 통해서, 그리고 이 영에 호소하고 따름으로써만 인류는 언제까지나 합일성과 형제애를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의 많은 영도자들은 복음의 영적 호소에 그들의 가슴의 문을 닫았다. 이 날부터 계속하여 그들은 주(主)를 없애려는 계획과 음모를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가 종교적 범죄자, 유대의 성스런 율법의 으뜸가는 가르침을 어긴 자로서 체포되고 유죄 판결을 받아서 처형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4. 전도 여행의 진행
149:4.1
(1673-1)
이 전도 여행에서 예수는 대중을 위한 일을 거의 하지 않았으나, 야고보요한과 우연히 머물게 된 대부분의 도시나 동네에서는 신자들과 함께. 많은 저녁 수업을 지도하였다. 이러한 저녁 수업시간 가운데 하나에서, 나이 어린 전도자가 예수에게 분노에 관해서 질문하자, 주(主)는 다른 것들 중에도 이렇게 대답했다:
149:4.2
(1673-2)
“분노는, 일반적인 방법에서, 통합된 지적(知的) 본성과 육체적 본성에 대해 통제를 이루어 보려는 영적 본성에서 그 실패를 재어볼 수 있는 물질적 현시활동이다. 분노는 너그러운 형제로서의 사랑에 대한 너의 부족함과 여기에 너의 자아-존중과 자아-통제에 대한 부족함이 합해진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분노는 건강을 해치고 마음을 저하시키며 사람 혼의 영적 선생에게 장애가 된다. ‘분노가 어리석은 사람을 죽인다.’라는 것과 사람이 ‘분노 안에서 스스로 상처를 낸다.’ 또한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다,’ 한편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라는 글을 너희가 성서에서 읽지 않았느냐? 너희 모두는 다음의 말들도 잘 알고 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혀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한다.’ ‘슬기가 노하기를 더디게 한다.’ ‘자기 자신의 자아를 통제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벽이 없는 무방비한 성과 같다.’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다.’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게 하는 자는 범죄 함이 많다.’ ‘정신에서 서두르지 말라. 분노는 바보들의 품에 머문다.’” 예수가 말씀을 마치기 전에 좀 더 계속하였다: “신성한 아들관계의 직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동물적인 진노를 터뜨리는 경향으로부터 너희를 구원하고 있는, 너의 영 안내자가 아무 문제도 가지지 않도록, 너희의 가슴이 사랑에 의해 지배되어 있도록 하라.”
149:4.3
(1673-3)
바로 이 기회에, 주(主)는 무리들에게 균형 잡힌 성격을 소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어떤 직업에 통달하려고 그들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 필요함을 인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전문화를 지향하는 것, 일생의 활동에 있어서 편협한 마음을 갖게 되어 스스로를 한정 짓는 모든 경향을 개탄하였다. 어떤 미덕이든지 그것이 극단으로 실행된다면 악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주었다. 예수는 항상 절제를 설교하였고, 일관성─일생 문제에서의 균형 잡힌 조절─을 가르쳤다. 지나친 동정심과 연민은 심각한 감정적인 불안정으로 퇴행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열정이 광신주의로 계속 몰아갈 수도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그들의 옛 연관-동료들 중 하나가, 스스로의 상상력이 그 자신을 환상적이고 비-실천적인 과업으로 이끌었었던 일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와 동시에 그는 지나치게-보수적인 단조로움에서의 둔감성이 주는 위험을 그들에게 경고하였다.
149:4.4
(1673-4)
그러고 나서 예수는 용기와 신앙이 때로는 어떻게 생각이 없는 혼들을 무모함과 억측으로 이끌어 가는지, 그 위험성에 대해서 강론하였다. 그는 또한 신중함과 사려 깊은 분별력이 너무 지나치면 어떻게 그것들이 비겁함과 실패로 이끌어 가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다. 그는 듣는 이들에게 편향으로 기우는 모든 성향을 피하고, 독창성을 위하여 분투할 것을 교훈하였다. 그는 감상에 젖음이 없는 동정심과 독실한 척하지 않는 경건함을 가지도록 호소하였다. 그는 두려움과 미신에 속박받지 않고 드리는 존경을 가르치셨다.
149:4.5
(1674-1)
예수 자신의 연관-동료들에게 감명을 주었던 것은 균형 잡힌 성격에 관한 그의 가르침보다는 예수 자신의 일생 자체가 그의 가르침을 웅변적으로 예증하는 본보기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압박감과 폭풍의 한가운데에서 살았지만, 결코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적들은 그에 대하여 계속해서 덫을 놓았지만, 결코 그를 옭아매지 못하였다. 지혜롭고 학식 있는 자들이 그를 넘어뜨리려고 애썼으나, 그는 비틀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논쟁에 휩쓸어 넣으려고 했지만, 그의 대답은 항상 깨우침을 주고, 위엄 있고 최종적인 것이었다. 그가 여러 종류의 질문으로 말미암아 그의 강론이 중단되었을 때에도, 그의 대답은 항상 의미심장하고 결론적이었다. 그는 그에 대한 공격으로 온갖 종류의 거짓되고 부당하며 불의한 방법을 주저 없이 동원하는 그의 적들의 계속되는 압력을 만나면서도, 결코 비열한 전략에 기대지 않았다.
149:4.6
(1674-2)
많은 남자들과 여인들이 생계를 위한 직업으로 어떤 정해진 일에 스스로 부지런하게 애쓸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재들은 땅에서 살아가는대로 자신의 일생과 함께 광범위한 문화적 친숙함을 경작해야만 하는 것이 전적으로 바람직하다. 참으로 교육받은 개인들은 자기 동료들의 일상과 행하는 것에 대해 무지한 채로 남아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5. 만족에 관한 교훈
149:5.1
(1674-3)
예수열심당원 시몬의 감독 밑에서 일하고 있던 전도자들의 집단을 방문하였을 때, 그들이 저녁 회의를 하는 도중에, 시몬예수에게 질문하였다: “어찌하여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행복해하고 또 만족스러워하는지요? 만족하다는 것은 종교적 체험의 문제인가요?” 여러 다른 것들 중에서, 예수시몬의 질문에 대답하였다:
149:5.2
(1674-4)
시몬아, 어떤 사람들은 자연-본성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 많은 것, 아주 많은 것이, 사람이 자기 안에 함께 살고 있는 아버지의 영에게 인도받고 지도받으려고 기꺼이 나서는 데에 달려있다. 너희의 현자가 ‘사람의 영은 주님의 촛불이다. 내면의 모든 부분을 탐색하고 있다.’고 한 말을 성서에서 읽지 않았느냐? 또한 저들 영에-인도된 필사자들이 말하였다: ‘줄이 그어져 기쁨이 넘치는 곳 안에 내가 들게 되었다. 그렇다. 값진 유산을 받았구나.’ ‘정의로운 사람이 가진 적은 것이 많은 것을 가진 사악한 자의 부유함보다 더욱 낫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은 자기 자신 안에서 그로부터 만족될 것이기 때문이다.’ ‘쾌활한 가슴은 활기찬 표정을 만들고, 계속 이어지는 잔치와 같다. 주님을 존경하면서 적게 가진 자가, 커다란 재물과 함께 하고 있는 괴로움을 가지는 것보다 낫다. 사랑이 있는 곳에서 나물로 먹는 저녁밥이 살찐 송아지를 증오와 함께 있는 먹는 것보다 낫다. 정의로움과 함께하는 적은 소득이 공정함이 없는 커다란 소득보다 낫다.’ ‘쾌활한 가슴은 약처럼 좋은 것이다.’ ‘평정과 함께 있는 한 움큼이, 슬프고 괴로운 영과 함께 있는 넘치도록-풍성함보다 낫다.’
149:5.3
(1674-5)
“대부분의 사람의 슬픔이 그의 야망을 이루지 못한 실망과 자부심의 상처에서 탄생되는 것이다. 비록 사람들이 이 땅에서의 그들의 삶에서 최선의 것을 만들어내야 할 의무를 지고 있고, 그래서 진지하게 전력을 기울여 가야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몫을 활기차게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손에 들어온 것에서 최상의 것을 만들어내는 본래의 창의력을 행사하여야만 한다. 사람의 괴로움의 너무 많은 모든 것들이 그 자신의 자연 본성적 가슴 안에 있는 두려움이라는 토양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사악한 자는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 ‘사악한 자는 사나운 바다와 같으니, 그것은 쉴 수 없고, 단지 진창과 더러움이 솟구치는 물일 뿐이다. 하느님이 말씀하셨다, 사악한 자에게는 평화가 없다.’
149:5.4
(1674-6)
“그러므로 거짓 평화와 과도기적인 기쁨을 찾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 안에서 평정, 가득한 만족 그리고 최극의 즐거움을 결실로 낳는 그러한 신앙의 확신과 그리고 신성한 아들관계의 확실성을 구하라.”
149:5.5
(1675-1)
예수는 이 세상을 전혀 “눈물의 골짜기”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 세상을 파라다이스 상승의 영원하고 불멸의 영들이 탄생하는 구체, “혼을 만드는 골짜기”로 바라보았다.
6. “주님을 두려워 함”
149:6.1
(1675-2)
가말라에서 있었던 저녁 회합 시간에 빌립예수에게 말하였다: “주(主)여, 성서에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치는데, 어찌하여 주(主)는 저희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지요? 우리가 이 두 가르침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합니까?” 예수빌립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149:6.2
(1675-3)
“나의 자녀들아, 너희가 그런 질문을 하게 된 것에 나는 놀라지 않는다. 태초에는 단지 두려움을 통하여 사람이 존경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이 세상에 왔고, 그로서 아버지의 깊고 완전한 사랑에 대한 아들의 애정 넘치는 인지와 이에 대한 보답인 그려냄으로써, 너희는 영원자에 대한 경배로 이끌릴 것이다. 내가, 질투하고 자주 진노하는 왕-하느님을 지겹도록 섬기게 만드는 노예와 같은 두려움으로 너희 자신들을 몰아가는 그 속박으로부터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하느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아버지-아들 관계라는 것을 일깨워서, 그것으로 사랑이 많으시고, 의로우시며, 자비로우신 아버지-하느님에게 숭고하면서도 더할 나위 없는 자유로운 경배 속으로 너희가 기쁘게 인도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149:6.3
(1675-4)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연속되어진 여러 세대에서 다른 의미들을 가졌는데, 그것은 두려움으로부터 시작하여 고통과 불안을 거쳐서, 경외와 존경까지 올라와 있다. 이제는 내가 존경에서 시작하여 인지, 실현, 그리고 깊은 감사를 거쳐서 사랑에 올라와 이르도록 너희를 이끌고자 한다. 사람이 하느님의 업적만을 인지할 때, 그는 최극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끌려오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 계신 하느님의 개인성과 성격을 납득하고 체험하기 시작할 때, 그는 점점 더 어떤 선하고 완전하며 우주적이며 영원한 그러한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과 하느님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땅에 있는 사람의 아들의 사명을 구성하고 있다.
149:6.4
(1675-5)
“지능적인 자녀들은 자기 아버지로부터 좋은 선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의 애정에서의 구술에 따라서 자신의 아들들과 딸들에게 증여된 풍부한 선물을 이미 가진, 사랑을 많이 받아들인 이들 자녀들은 그러한 아낌없이 주는 은혜에 대한 인지와 깊은 감사로 응답하면서, 자신들의 아버지를 사랑하도록 인도된다. 하느님의 선함은 회개로 인도한다; 하느님의 은혜는 봉사로 인도한다; 하느님의 자비는 구원으로 인도한다; 한편 하느님의 사랑은 지능적인 경배와 자유로운-가슴의 경배로 인도한다.
149:6.5
(1675-6)
“너희의 조상들은 하느님의 막강하심과 신비로움으로 인해 그를 두려워하였다. 너희는 그를 찬미할 것이니 이는 그가 사랑에서 장엄하고, 자비에서 충만하며, 그리고 진리에서 영광스럽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힘은 사람의 가슴 안에 두려움을 일으키지만, 그의 개인성에서의 고귀성과 정의로움은 존경, 사랑, 자발적인 경배를 하게 만든다. 순종적이고 애정 깊은 아들은 실로 막강하고 고귀한 아버지일지라도 그를 두려워하거나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내가 두려움의 자리에 사랑을, 슬픔의 자리에 기쁨을, 공포의 자리에 자신감을, 노예적인 억압과 무의미한 의식(儀式)의 자리에 사랑하는 봉사와 감사의 경배를 놓아두기 위하여 이 세상 속으로 나왔다. 그러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지혜의 시작’이 된다는 것은 여전히 진실이다. 그러나 빛이 더욱 충만하게 와 있을 때에는, 하느님의 아들들은 무한자를 그가 행한 것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기보다는, 그가 그인 것 때문에 찬양하도록 인도된다.
149:6.6
(1675-7)
“자녀들이 어리고 생각이 없을 때는, 그들은 그들의 부모를 명예로 존경하도록 훈계를 받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이 나이가 들어 부모의 사명활동과 보호의 혜택을 어느 정도 좀 더 깊이 감사하게 될 때는, 그들은 납득하는 존경과 증가하는 애정을 두루 통하여. 부모가 해왔던 것 때문이라기보다는 부모라는 것 때문에, 자신들의 부모를 실재적으로 사랑하는 그러한 체험의 차원까지 올라가도록 인도된다. 아버지는 본성적으로 자기 자녀를 사랑한다; 그러나 자녀는 아버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하여 경외, 공포, 의존 그리고 존경을 두루 통하여, 사랑에 관해 깊이 감사하고 그리고 애정 깊은 사랑까지 이르도록, 아버지에 대한 그의 사랑을 발전시켜야만 한다.
149:6.7
(1676-1)
“너희는 이것이 사람의 전적인 의무이니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라.’라고 배웠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새롭고 더욱 높은 계명을 주려고 왔다. 나는 너희에게 이는 하느님의 해방된 자녀의 최고의 특권이니,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것을 배워라.’고 가르치겠다. 너희의 선조들은 ‘하느님─막강하신 왕을 두려워하라.’고 배웠지만, 나는 ‘하느님─ 모든-자비넘치는 아버지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149:6.8
(1676-2)
“내가 선포하러 온 하늘의 왕국에는 높고 막강한 왕이 없다; 이 왕국은 하나의 신성한 가족이다. 우주보편적으로 인지되고 망설임 없이 경배되는 중심이며, 지능 존재들의 이처럼 광대하게-펼쳐진 형제신분에서의 우두머리가 되는 분이, 나의 아버지이자 또한 너희의 아버지이시다. 나는 그의 아들이며 그리고 너희도 역시 그의 아들들이다. 따라서 너희와 내가 하늘 영토 안에서 형제라는 사실은 영원한 진실이며, 우리가 땅에서 사는 일생에서 육신으로 형제가 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 그러니 하느님을 왕으로서 두려워하거나 주로서 그를 섬기는 것을 그만 두라. 그를 창조자로 존경하는 것을 배우라; 젊은 너희 영의 아버지로 명예롭게 공경하라; 그를 자비 넘치는 옹호자로 사랑하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너희의 더욱 성숙한 영적 실현과 깊은 감사에서의 아버지로, 사랑넘치는 그리고 모든-지혜의 아버지로 경배하라,
149:6.9
(1676-3)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너희의 그릇된 개념으로부터 겸손에 대한 거짓된 관념이 자라나고 많은 너희의 위선이 생겨났다. 사람이 본성과 기원에서 흙에서 난 벌레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에게 내 아버지의 영이 깃들게 되면, 그 사람은 그 운명이 신성하게 된다. 내 아버지로부터 증여된 영은 신성한 근원과 기원이 되는 우주 차원으로 확실하게 되돌아갈 것이며, 그리고 내주하는 이 영으로 인해 다시 태어난 아이가 될 필사 사람의 인간 혼도, 분명히 그 신성한 영과 함께 영원한 아버지의 바로 그 현존까지 상승하게 될 것이다.
149:6.10
(1676-4)
“하늘 왕국으로 가는 영원한 상승의 그러한 모든 신앙의 후보자들에게 신성한 존엄성이 붙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이들 모든 선물을 받는 필사 사람에게 정말로 어울리는 것이다. 외양으로 꾸미는 그리고 거짓된 겸손의 무의미하고 천박한 실천-관행은, 너희 구원의 근원에 대한 깊은 감사와 그리고 너희 영으로-태어난 혼의 운명에 대한 인지와 모순된다.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은 너희 가슴의 깊은 속에서 모든 면에서 적절한 것이다; 사람 앞에서의 온유함은 칭찬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자아-의식적이고 그리고 관심을-갈망하는 겸손의 위선은 왕국의 깨우친 자녀에게서 유치한 것이며 그리고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149:6.11
(1676-5)
“너희가 하느님 앞에서 온유하게 되고 사람들 앞에서 자아-통제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그러나 너희의 온유함이 영적 기원에 있게 하라, 그래서 자아-정의로운 우월성의 자아-의식적 감각에서의 자아-기만적 전시가 되지 않도록 하라. 선지자가 충고하여 말하기를, ‘하느님과 함께 겸손하게 걸으라.'라고 하였으니, 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무한자이며 영원자이지만 한편으로는 또한 그는, ‘뉘우치는 마음과 겸손한 영을 지닌 그러한 자와 함께'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자만심을 경멸하며, 위선을 몹시 싫어하며, 사악한 불의를 혐오한다. 그리고 내가 필사 사람이 하늘의 왕국의 영 실체로 들어가는 데에 그토록 필수적인 마음의 태도와 영의 반응을 예증하면서, 어린아이를 그렇게 자주 언급했던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이 넘치는 지원과 신실한 인도에 대한 완전한 신뢰와 성실성에서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149:6.12
(1677-1)
“선지자 예레미야가 많은 필사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것은 잘 묘사한 것이었다: ‘너희가 입으로는 하느님 가까이에 있지만, 그러나 가슴 안에서는 그에게서 멀리 있다.’ 그리고 너희는 또한 무서운 경고를 한 선지자의 말을 읽지 못했느냐? ‘그렇게 사제는 보수를 위하여 가르치고, 그렇게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예언을 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경건함을 고백하고, 주님이 저희와 함께 있다고 선포한다.’ 너희는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가슴에는 해악이 있는’ 사람들과, ‘입술로는 치켜세우지만, 한편 가슴은 이중-거래에 쏠려있는’ 사람들에 대해 경고받지 않았는가? 신뢰하고 있는 사람의 모든 슬픔 가운데, ‘신뢰하던 친구의 집에서 상처를 받은 것’만큼 그처럼 끔찍한 것은 없다.”
7. 벳세다로 돌아감
149:7.1
(1677-2)
안드레시몬 베드로와 상의하고 예수의 승인을 얻은 후, 모든 사람들이 여행을 끝내고 12월 30일, 목요일에 벳세다로 돌아오라는 지침을 전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전도하고 있는 집단에게 메신저들을 파견하라고 벳세다에 있는 다윗에게 지시하였다. 비 오는 날인 그날 저녁식사 시간이 되기 까지, 모든 사도 일행들과 가르치는 전도자들은 세베대의 집에 도착하였다.
149:7.2
(1677-3)
그 일행은 벳세다와 근처에 있는 가버나움의 여러 집들에서 편의를 제공받으면서 안식일 동안에 함께 머물렀다. 그 후에 일행 전부에게는 각자의 집으로 가족들에게 가거나 친구들을 방문하거나, 혹은 고기를 잡으러 가도록 두 주일의 휴가가 주어졌다. 그들이 벳세다에서 함께 있었던 2-3일은 정말로 상쾌하고 그리고 영감을 주는 날들이었다. 심지어 더 나이든 선생들조차도 젊은 전도자들이 자신들의 체험담을 서술할 때에 교화되었다.
149:7.3
(1677-4)
갈릴리의 두 번째 전도 여행에 참가했던 117명의 전도자들 중에서 겨우 약 75명만이 실재적인 체험의 시험에서 생존하였으며, 그리고 이들은 두 주일의 휴가가 끝났을 때 봉사에 배정되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예수안드레,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세베대의 집에 남아있었으며, 그리고 왕국의 복지와 확장에 관한 회의를 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어지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