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1 편

PAPER 121

미가엘이 증여된 시기

THE TIMES OF MICHAEL'S BESTOWAL

121:0.1 나는 한 때 사도 안드레에게 소속되었던 2차 중도자이며, 유란시아 중도자 연합 형제회의 12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감독 밑에서 활동하면서, 우리 계층을 주관하는 우두머리와 기록을 담당하는 멜기세덱의 공동 후원을 받고 있으며, 지구 창조체들인 나의 계층에게 관찰되었던 그대로, 그리고 나의 일시적인 수호자관계에 있었던 인간 주체에게서 나중에 부분적으로 기록된 대로, 나사렛 예수의 일생에서의 활동행위에 대한 서술들을 기록으로 옮기도록 권한을 받았다. 안드레주(主)께서 글로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고 얼마나 세심하게 피했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글로 쓴 서술의 사본을 여러 부 만드는 것을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예수의 다른 사도들 편에서도 비슷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서들의 작성이 엄청나게 지연되었다. ACTING under the supervision of a commission of twelve members of the United Brotherhood of Urantia Midwayers, conjointly sponsored by the presiding head of our order and the Melchizedek of record, I am the secondary midwayer of onetime attachment to the Apostle Andrew, and I am authorized to place on record the narrative of the life transactions of Jesus of Nazareth as they were observed by my order of earth creatures, and as they were subsequently partially recorded by the human subject of my temporal guardianship. Knowing how his Master so scrupulously avoided leaving written records behind him, Andrew steadfastly refused to multiply copies of his written narrative. A similar attitude on the part of the other apostles of Jesus greatly delayed the writing of the Gospels.


1. 그리스도 뒤 1세기의 서양 세계  


1. THE OCCIDENT OF THE FIRST CENTURY AFTER CHRIST

121:1.1 예수는 이 세상이 영적으로 타락한 시기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유란시아아담계열-이후부터 당시까지의 모든 역사에서 알져진 적이 없고, 그 이후 어떤 시대에서도 체험하지 못했던 영적 사고(思考)와 종교적 삶의 부흥을 체험하고 있었다. 미가엘유란시아에 육신화 하였을 때, 세계는 창조주 아들의 증여를 위하여, 그 때까지 한번도 만연한 적이 없고 그 이후에도 한번도 획득할 수 없었던 최적의 조건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들 시절 바로 앞 여러 세기들 동안에,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어가 서양근동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일부 서양의 본성과 일부 동양의 본성을 모두 지닌, 레반트인의 하나인, 유대인들은 어떤 새로운 종교를 동방서방 양쪽 모두에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그러한 문화적 그리고 언어적 배경을 활용하기에 가장 우수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최적의 상황들은 지중해 세계에 대한 로마의 관대한 정치적 통치로 인하여 더욱 강화되었다. Jesus did not come to this world during an age of spiritual decadence; at the time of his birth Urantia was experiencing such a revival of spiritual thinking and religious living as it had not known in all its previous post-Adamic history nor has experienced in any era since. When Michael incarnated on Urantia, the world presented the most favorable condition for the Creator Son's bestowal that had ever previously prevailed or has since obtained. In the centuries just prior to these times Greek culture and the Greek language had spread over Occident and near Orient, and the Jews, being a Levantine race, in nature part Occidental and part Oriental, were eminently fitted to utilize such cultural and linguistic settings for the effective spread of a new religion to both East and West. These most favorable circumstances were further enhanced by the tolerant political rule of the Mediterranean world by the Romans.
121:1.2 이러한 세계적 영향에서의 전체적인 화합은 바울의 활동들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바울 자신은 로마 시민이었던 반면에, 종교적으로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유대인 메시아에 대한 복음을 그리스 언어로 전파하였다. This entire combination of world influences is well illustrated by the activities of Paul, who, being in religious culture a Hebrew of the Hebrews, proclaimed the gospel of a Jewish Messiah in the Greek tongue, while he himself was a Roman citizen.
 121:1.3 서양에서, 그 이전이나 그 이후 어느 때에도 예수의 시대와 같은 문명기는 없었다. 유럽의 문명은 아래의 세 가지 영향들 아래에서 통합되고 서로 합동을 이루었다: Nothing like the civilization of the times of Jesus has been seen in the Occident before or since those days. European civilization was unified and co-ordinated under an extraordinary threefold influence:
 

 1. 

로마의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체계.

 2.

그리스의 언어와 문화─그리고 어느 정도의 철학.

 3.

급속히 퍼져나간 유대인의 종교적 도덕적 교훈들의 영향력.

1.

The Roman political and social systems.

2.

The Grecian language and culture -- and philosophy to a certain extent.

3.

The rapidly spreading influence of Jewish religious and moral teachings.

121:1.4 예수가 태어났을 때, 지중해 연안의 모든 지역은 하나로 통합된 제국을 이루고 있었다.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많은 주요 중심지들을 연결해 주는 양호한 상태의 도로들이 건설되었다. 바다에서는 해적들이 소탕되어, 무역과 여행이 크게 활발해지는 시대가 빠르게 진척되고 있었다. 유럽그리스도 이후로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여행과 무역의 전성시대를 다시 맛보지 못하였다. When Jesus was born, the entire Mediterranean world was a unified empire. Good roads, for the first time in the world's history, interconnected many major centers. The seas were cleared of pirates, and a great era of trade and travel was rapidly advancing. Europe did not again enjoy another such period of travel and trade until the nineteenth century after Christ.
121:1.5 그리스-로마 시대의 내부적인 평화와 외견상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대다수 주민들은 열악한 환경과 빈곤 속에서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었다. 소수의 상위 등급들은 부유하였으나; 비참하고 가난에 쪼들리는 하위 등급들이 인간성에서의 일반서민을 이루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행복하고 풍요로운 중산층이 없었으며; 로마 사회 내에 그들의 모습이 막 나타나기 시작했었다. Notwithstanding the internal peace and superficial prosperity of the Greco-Roman world, a majority of the inhabitants of the empire languished in squalor and poverty. The small upper class was rich; a miserable and impoverished lower class embraced the rank and file of humanity. There was no happy and prosperous middle class in those days; it had just begun to make its appearance in Roman society.
121:1.6 확대되는 로마제국과 파르티아 국가들 간의 첫 번째 전쟁은 이 시기 직전에 종결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시리아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예수가 활동하던 시대에, 팔레스타인시리아는 번성기에 있었고 비교적 평화를 누리고 있었으며, 서방동방에 있는 지역들과 많은 상업적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The first struggles between the expanding Roman and Parthian states had been concluded in the then recent past, leaving Syria in the hands of the Romans. In the times of Jesus, Palestine and Syria were enjoying a period of prosperity, relative peace, and extensive commercial intercourse with the lands to both the East and the West.


2. 유대 민족  


2. THE JEWISH PEOPLE

121:2.1 유대인들은 고대의족의 일원이었으며, 바빌로니아인, 페니키아인, 그리고 그 당시까지 로마의 적이었던 카르타고인 들도족에 포함되어 있었다. 기원 후 1세기 전반 동안은 유대인들이족 중에서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집단이었으며, 그들은 그 당시의 무역활동을 지배하고 조직화하는데 있어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역을 우연히 점유하고 있었다. The Jews were a part of the older Semitic race, which also included the Babylonians, the Phoenicians, and the more recent enemies of Rome, the Carthaginians. During the fore part of the first century after Christ, the Jews were the most influential group of the Semitic peoples, and they happened to occupy a peculiarly strategic geographic position in the world as it was at that time ruled and organized for trade.
121:2.2 옛 국가들을 연결하는 많은 큰 간선도로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과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은 세 개의 대륙이 서로 만나고 교차되는 장소가 되었다.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이집트, 시리아, 그리스, 파르티아, 그리고 로마의 여행객이나 대상(隊商)들 그리고 집단들이 계속적으로 팔레스타인을 휩쓸고 지나갔다. 아득히 먼 옛날부터, 동방에서 오는 많은 대상들이 이 지역들 중 어떤 곳을 거쳐 지중해 동쪽 끝에 있는 미약한 항구로 통행하였으며, 그곳으로부터 선박들이 해로를 통해 화물을 서양의 전체 연해 지역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이러한 대상들의 행렬 중 반 이상이 갈릴리 안에 있는 나사렛의 작은 성읍을 통과하거나 그 근처를 경유해 지나갔다. Many of the great highways joining the nations of antiquity passed through Palestine, which thus became the meeting place, or crossroads, of three continents. The travel, trade, and armies of Babylonia, Assyria, Egypt, Syria, Greece, Parthia, and Rome successively swept over Palestine. From time immemorial, many caravan routes from the Orient passed through some part of this region to the few good seaports of the eastern end of the Mediterranean, whence ships carried their cargoes to all the maritime Occident. And more than half of this caravan traffic passed through or near the little town of Nazareth in Galilee.
121:2.3 팔레스타인유대교 문화의 본향이자 그리스도교의 탄생지이기는 하지만,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여러 나라에 살고 있었으며, 로마파르티아 국가들의 전체 지역에서 무역을 하였다. Although Palestine was the home of Jewish religious culture and the birthplace of Christianity, the Jews were abroad in the world, dwelling in many nations and trading in every province of the Roman and Parthian states.
121:2.4 그리스는 언어와 문화를 제공하였고, 로마는 도로와 통일된 제국을 건설하였지만, 흩어진 유대인들은 로마 세계 전 지역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200개 이상의 회당과 잘 조직된 종교적 공동체를 갖추고, 문화적 중심의 역할을 하였으며, 하늘의 왕국에 대한 새로운 복음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받아들여져서 그 기초를 다졌고, 나중에는 이곳으로부터 전 세계의 변두리 지역까지 퍼져나갔다. Greece provided a language and a culture, Rome built the roads and unified an empire, but the dispersion of the Jews, with their more than two hundred synagogues and well-organized religious communities scattered hither and yon throughout the Roman world, provided the cultural centers in which the new gospel of the kingdom of heaven found initial reception, and from which it subsequently spread to the uttermost parts of the world.
121:2.5 각각의 유대인 회당은 이방인 신자들의 분파집단, “헌신적”이거나 아니면 “하느님을-두려워하는” 자들을 받아들였으며, 바울이 초기에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킨 일단의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분파집단의 이 개종자들이었다. 심지어는 예루살렘 성전에도 화려하게 장식된 이방인들의 뜰이 있었다. 예루살렘안디옥의 문화와 상업 그리고 경배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안디옥에서 바울의 제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Each Jewish synagogue tolerated a fringe of gentile believers, "devout" or "God-fearing" men, and it was among this fringe of proselytes that Paul made the bulk of his early converts to Christianity. Even the temple at Jerusalem possessed its ornate court of the gentiles. There was very close connection between the culture, commerce, and worship of Jerusalem and Antioch. In Antioch Paul's disciples were first called "Christians."
121:2.6 예루살렘에서의 유대인 성전 경배 집중은, 그들의 유일신 사상이 존속되도록 하는 비결이자 동시에 그들을 양육하여 모든 나라들의 유일한 하느님이고 모든 필사자들의 아버지라는 새롭고도 확대된 개념의 세계로 그들을 보내 주시리라는 약속의 비결이었다. 예루살렘에서의 성전 경배는, 이방의 국가 군주들과 인종적 박해자들의 계속되는 몰락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종교 문화적 개념은 살아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The centralization of the Jewish temple worship at Jerusalem constituted alike the secret of the survival of their monotheism and the promise of the nurture and sending forth to the world of a new and enlarged concept of that one God of all nations and Father of all mortals. The temple service at Jerusalem represented the survival of a religious cultural concept in the face of the downfall of a succession of gentile national overlords and racial persecutors.
121:2.7 이 시기의 유대 민족은,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 마카비와 그 직속 후계자들이 당대에 획득한 해방에 대한 영웅적인 공적을 기리면서, 상당한 정도의 자치권을 향유하고 있었으며, 더욱 위대한 해방자, 오랫동안 대망해 오던 메시아의 즉각적인 도래에 대한 기대로 흥분하고 있었다. The Jewish people of this time, although under Roman suzerainty, enjoyed a considerable degree of self-government and, remembering the then only recent heroic exploits of deliverance executed by Judas Maccabee and his immediate successors, were vibrant with the expectation of the immediate appearance of a still greater deliverer, the long-expected Messiah.
121:2.8 유대인들의 왕국인 팔레스타인이 반(半)독립국가로서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은, 시리아이집트를 잇는 팔레스타인대로 뿐만 아니라, 서양동양을 잇는 무역 통로들의 서쪽 기착지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려는 로마 정부의 외교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로마레반트 지역에서 어떤 세력이 커져서, 장차 이 지역으로 확대하려는 자신들의 계획이 방해받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셀류시드가 관할하는 시리아프톨레마이오스가 관할하는 이집트가 서로 배척하고 있는 상태에 있어서 완충 지역으로, 팔레스타인을 분리되고 독립된 국가로 키우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있었다. 작고 힘없는 유대인 집단이 이렇게 여러 세대에 걸쳐서 북으로는 셀류시드에 배척되고 남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배척되면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파르티아가 강력한 세력이 부상하기 전에 이집트를 쇠퇴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셀류시드를 점차 약화시키려 했던 로마의 정책 때문이었다. 이러한 강력한 세력을 가진 주변의 정치적 조건으로 인하여 운 좋게도 해방과 독립을 누렸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선택된 백성”이므로 야훼가 직접적으로 관여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인종적 자만심의 태도는 결국에 가서 자신들의 영토를 점령해버린 로마의 통치를 도저히 견디어 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비참한 시기에 처했을 때에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지상 사명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다. The secret of the survival of Palestine, the kingdom of the Jews, as a semi-independent state was wrapped up in the foreign policy of the Roman government, which desired to maintain control of the Palestinian highway of travel between Syria and Egypt as well as the western terminals of the caravan routes between the Orient and the Occident. Rome did not wish any power to arise in the Levant which might curb her future expansion in these regions. The policy of intrigue which had for its object the pitting of Seleucid Syria and Ptolemaic Egypt against each other necessitated fostering Palestine as a separate and independent state. Roman policy, the degeneration of Egypt, and the progressive weakening of the Seleucids before the rising power of Parthia, explain why it was that for several generations a small and unpowerful group of Jews was able to maintain its independence against both Seleucidae to the north and Ptolemies to the south. This fortuitous liberty and independence of the political rule of surrounding and more powerful peoples the Jews attributed to the fact that they were the "chosen people," to the direct interposition of Yahweh. Such an attitude of racial superiority made it all the harder for them to endure Roman suzerainty when it finally fell upon their land. But even in that sad hour the Jews refused to learn that their world mission was spiritual, not political.
121:2.9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유별나게 걱정이 많고 의심이 많았는데, 왜냐하면 외국인이면서도 로마의 통치자들에게 아부함으로써 유대지역에 대한 주권을 갖게 된 이두미아헤롯이 자기들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헤롯히브리의 제사 의식들을 존중하겠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야릇한 많은 하느님들을 섬기는 신전들을 계속 건축하였다. The Jews were unusually apprehensive and suspicious during the times of Jesus because they were then ruled by an outsider, Herod the Idumean, who had seized the overlordship of Judea by cleverly ingratiating himself with the Roman rulers. And though Herod professed loyalty to the Hebrew ceremonial observances, he proceeded to build temples for many strange gods.
121:2.10 헤롯로마 통치자들 간의 우호적인 관계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온 세계를 안전하게 여행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점점 더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의 먼 지역들은 물론 다른 여러 동맹국들에게까지 하늘의 왕국의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스며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또한 헤롯의 지배는 히브리그리스의 철학들이 더욱 융화되는 데에도 많이 기여하였다. The friendly relations of Herod with the Roman rulers made the world safe for Jewish travel and thus opened the way for increased Jewish penetration even of distant portions of the Roman Empire and of foreign treaty nations with the new gospel of the kingdom of heaven. Herod's reign also contributed much toward the further blending of Hebrew and Hellenistic philosophies.
121:2.11 헤롯케자리아 항구를 건설하였는데, 이것으로 인하여 팔레스타인이 나중에 문명세계의 교차점이 되었다. 그는 기원전 4년에 죽었으며,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예수의 유년 시절 그리고 사명활동 기간 동안, 그리고 기원후 39년까지 갈릴리페레아 지역을 통치하였다. 안티파스는 자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건축가였다. 그는 세포리에 중요한 무역중심지를 세운 것을 포함하여, 갈릴리 지역에 있는 많은 도시들을 개축하였다. Herod built the harbor of Caesarea, which further aided in making Palestine the crossroads of the civilized world. He died in 4 B.C., and his son Herod Antipas governed Galilee and Perea during Jesus' youth and ministry to A.D. 39. Antipas, like his father, was a great builder. He rebuilt many of the cities of Galilee, including the important trade center of Sepphoris.
121:2.12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 랍비라고 불리는 선생들로부터 호감을 사지 못하였다. 예수가 태어나실 당시의 갈릴리유대인의 지역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방인의 지역이었다. The Galileans were not regarded with full favor by the Jerusalem religious leaders and rabbinical teachers. Galilee was more gentile than Jewish when Jesus was born.


3. 이방인의 형편  


3. AMONG THE GENTILES

121:3.1 로마국가의 사회적 경제적 조건이 가장 높은 수준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국내에 널리 퍼져있던 평화와 풍요는 미가엘이 증여되는 데 있어서 매우 적합하였다. 그리스도 이후 첫 세기 동안 지중해 지역의 공동체 속에는, 다음과 같이 잘 조직된 다섯 개의 사회계급들이 있었다: Although the social and economic condition of the Roman state was not of the highest order, the widespread domestic peace and prosperity was propitious for the bestowal of Michael. In the first century after Christ the society of the Mediterranean world consisted of five well-defined strata:
121:3.2 1. 귀족 계급. 돈과 힘을 쥐고 있는 상위등급으로 특권을 가진 지배계층. 1. The aristocracy. The upper classes with money and official power, the privileged and ruling groups.
121:3.3 2. 사업자 집단들. 부유한 상인들과 은행가들, 무역업자들─큰 규모의 수입, 수출업자들─과 그리고 국제적인 상인들. 2. The business groups. The merchant princes and the bankers, the traders -- the big importers and exporters -- the international merchants.
121:3.4 3. 소수의 중산층 계급. 이 집단은 규모는 매우 작았지만,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매우 영향력이 있었고 도덕적인 중추 역할을 하였으며, 교회는 이 집단들이 계속하여 다양한 생산과 교역을 하도록 장려하였다. 유대인들 중에서 많은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상인 등급에 속하였다. 3. The small middle class. Although this group was indeed small, it was very influential and provided the moral backbone of the early Christian church, which encouraged these groups to continue in their various crafts and trades. Among the Jews many of the Pharisees belonged to this class of tradesmen.
121:3.5 4. 자유 무산 계급.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거나 없는 집단.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자부심은 있으나 노예 노동자와 경쟁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상위 등급들은 이들을 경멸하였으며, “자손을 번성시키는 목적” 이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여겼다. 4. The free proletariat. This group had little or no social standing. Though proud of their freedom, they were placed at great disadvantage because they were forced to compete with slave labor. The upper classes regarded them disdainfully, allowing that they were useless except for "breeding purposes."
121:3.6 5. 노예들 로마제국 인구의 절반이 노예였으며; 많은 자들이 우수한 개별존재였고, 자유 무산 계급으로, 혹은 상인 계급에 이르기까지 자기들의 신분을 향상시키는 통로를 재빨리 개척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예들은 평범하거나 열등한 상태에 있었다. 5. The slaves. Half the population of the Roman state were slaves; many were superior individuals and quickly made their way up among the free proletariat and even among the tradesmen. The majority were either mediocre or very inferior.
121:3.7 우수한 사람들조차 노예가 된 것은 로마의 군사적 정복으로 인한 하나의 특징이었다. 노예에 대한 주인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초기의 그리스도교 교회는 주로 하층 등급들과 이러한 노예들로 구성되었다. Slavery, even of superior peoples, was a feature of Roman military conquest. The power of the master over his slave was unqualified. The early Christian church was largely composed of the lower classes and these slaves.
121:3.8 우수한 노예들은 임금을 받는 경우도 있었으며 자신들의 수입을 저축하여 돈으로 자유를 살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해방된 많은 노예들이 국가와 교회 그리고 상업세계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러한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초기의 그리스도교 교회는 변형된 이 노예제도를 쉽게 용납할 수 있었다. Superior slaves often received wages and by saving their earnings were able to purchase their freedom. Many such emancipated slaves rose to high positions in state, church, and the business world. And it was just such possibilities that made the early Christian church so tolerant of this modified form of slavery.
121:3.9 그리스도 이후 첫 세기 동안, 로마제국 안에는 널리 퍼져있는 사회적인 문제가 없었다. 대부분의 일반 대중들은 자신들이 우연히 태어난 그 집단 안에 소속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재능 있고 유능한 개별존재들에게는 낮은 계급에서 로마 사회의 높은 계급으로 상승할 수 있는 문이 언제나 열려 있었지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계급에 만족하였다. 그들은 등급을 의식하거나 이러한 등급 구분이 그릇되거나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는 억압받는 계층들의 고통을 개선시키는 그것의 목적을 위한 경제적인 움직임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There was no widespread social problem in the Roman Empire in the first century after Christ. The major portion of the populace regarded themselves as belonging in that group into which they chanced to be born. There was always the open door through which talented and able individuals could ascend from the lower to the higher strata of Roman society, but the people were generally content with their social rank. They were not class conscious, neither did they look upon these class distinctions as being unjust or wrong. Christianity was in no sense an economic movement having for its purpose the amelioration of the miseries of the depressed classes.
121:3.10 여자들은 비록 팔레스타인에서의 제한된 지위에 비하여, 로마제국 전역에서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가족에 대한 헌신과 자연스러운 애정은 이방인 세계의 그것을 훨씬 초월했다. Although woman enjoyed more freedom throughout the Roman Empire than in her restricted position in Palestine, the family devotion and natural affection of the Jews far transcended that of the gentile world.


4. 이방의 철학  


4. GENTILE PHILOSOPHY

121:4.1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 비해 어느 정도 열등하였으나, 보다 고상한 이방인들의 가슴 속에는 선천적인 선함과 잠재적인 인간 애정의 풍부한 토양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씨앗이 싹트고 자라나서 도덕적인 성격과 영적 성취에 대한 풍성한 열매를 수확할 수 있었다. 이방의 세계는 그 때 네 가지의 중요한 철학들에 의해서 지배되었는데, 이들 모두는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고대 그리스플라톤주의로부터 파생된 것이었다. 이 철학 학파들은 다음과 같다: The gentiles were, from a moral standpoint, somewhat inferior to the Jews, but there was present in the hearts of the nobler gentiles abundant soil of natural goodness and potential human affection in which it was possible for the seed of Christianity to sprout and bring forth an abundant harvest of moral character and spiritual achievement. The gentile world was then dominated by four great philosophies, all more or less derived from the earlier Platonism of the Greeks. These schools of philosophy were:
121:4.2 1. 쾌락주의 학파. 이 학파는 행복 추구에 전념하였다. 상급의 쾌락주의자들은 감각적 무절제에 빠지지 않았다. 이 사상은 적어도 절망적인 숙명론으로부터 로마인들을 구해주었다; 사람들이 그들의 땅에서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무지몽매한 미신과 효과적으로 싸워나갔다. 1. The Epicurean. This school of thought was dedicated to the pursuit of happiness. The better Epicureans were not given to sensual excesses. At least this doctrine helped to deliver the Romans from a more deadly form of fatalism; it taught that men could do something to improve their terrestrial status. It did effectually combat ignorant superstition.
121:4.3 2. 금욕주의 학파. 금욕주의는 상위계급의 사람들이 갖는 우월한 철학이었다. 금욕주의자들은 통제적인 이성-숙명이 모든 본성을 좌우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사람의 혼이 신성한 것이라고 가르쳤으며; 물질적 본성을 갖는 악한 육체 속에 그것이 속박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사람의 혼은 자연적인 본성, 하느님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통하여 해방을 성취할 수 있으며, 따라서 덕행은 스스로 보상을 가져오게 한다. 금욕주의는 이전의 어떤 순전한 인간의 철학체계도 초월하지 못하였던 숭고한 도덕성, 이상들로 상승하였다. 금욕주의자들은 “하느님의 자손”이 되겠다고 선언하였지만, 그를 알아내는 데에는 실패하였고 따라서 그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금욕주의는 하나의 철학으로 남아있게 되고; 종교가 되지못하였다. 그 추종자들은 우주적 마음과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자기들의 마음을 조율하려고 애썼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아버지의 자녀임을 직시하지 못하였다. 바울은 “나는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거기에 만족하는 것을 배웠다.”라는 글을 썼을 때, 그는 금욕주의에 상당히 의존되어 있었다. 2. The Stoic. Stoicism was the superior philosophy of the better classes. The Stoics believed that a controlling Reason-Fate dominated all nature. They taught that the soul of man was divine; that it was imprisoned in the evil body of physical nature. Man's soul achieved liberty by living in harmony with nature, with God; thus virtue came to be its own reward. Stoicism ascended to a sublime morality, ideals never since transcended by any purely human system of philosophy. While the Stoics professed to be the "offspring of God," they failed to know him and therefore failed to find him. Stoicism remained a philosophy; it never became a religion. Its followers sought to attune their minds to the harmony of the Universal Mind, but they failed to envisage themselves as the children of a loving Father. Paul leaned heavily toward Stoicism when he wrote, "I have learned in whatsoever state I am, therewith to be content."
121:4.4 3. 견유(犬儒)학파. 견유학파는 그들의 철학의 자취가 아덴디오게네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갔지만, 그들의 교리들 대부분은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가르침들 중에서 남아있는 부분으로부터 유래되었다. 견유주의는 초기에는 철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종교였다. 견유주의자들은 적어도 자기들의 종교적-철학을 민주적인 체제로 만들었다. 벌판에서나 시장에서 그들은 “사람은 원하기만 하면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자신들의 신조를 설파하였다. 그들은 단순성과 선행을 가르쳤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하도록 가르쳤다. 이러한 방랑하는 견유주의 전도자들은, 영적으로 배고픈 대중들이 나중에 그리스도교적 교리와 만날 수 있도록 많이 준비시켜 주었다. 그들의 대중 설교 계획은 바울 서신들을 주로 본 땄고 그것들의 문체와 흡사하였다. 3. The Cynic. Although the Cynics traced their philosophy to Diogenes of Athens, they derived much of their doctrine from the remnants of the teachings of Machiventa Melchizedek. Cynicism had formerly been more of a religion than a philosophy. At least the Cynics made their religio-philosophy democratic. In the fields and in the market places they continually preached their doctrine that "man could save himself if he would." They preached simplicity and virtue and urged men to meet death fearlessly. These wandering Cynic preachers did much to prepare the spiritually hungry populace for the later Christian missionaries. Their plan of popular preaching was much after the pattern, and in accordance with the style, of Paul's Epistles.
121:4.5 4. 회의주의 학파. 회의주의는 지식이란 그릇된 것이며 신념이나 믿음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순전히 부정적인 태도였으며 널리 전파된 적이 없었다. 4. The Skeptic. Skepticism asserted that knowledge was fallacious, and that conviction and assurance were impossible. It was a purely negative attitude and never became widespread.
121:4.6 이러한 철학들은 반(半)-종교적인 것들이었으며; 이것들은 종종 사람들을 활기 있게 하고 윤리적이며 고귀하게 만들기도 하였으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아마도 견유주의는 제외될 수 있겠지만, 이것들은 강한 자들과 현명한 자들을 위한 것이었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향한 구원의 종교는 아니었다. These philosophies were semireligious; they were often invigorating, ethical, and ennobling but were usually above the common people. With the possible exception of Cynicism, they were philosophies for the strong and the wise, not religions of salvation for even the poor and the weak.


5. 이방의 종교들  


5. THE GENTILE RELIGIONS

121:5.1 이전의 모든 시대를 통하여 종교는 주로 한 부족이나 또는 국가의 문제였으며; 개별존재에게 관심을 두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방 신들은 부족 또는 국가를 위한 존재였고, 개인을 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한 종교 체계들은 보통 개인으로서의 개별적인 영적 소망에는 별다른 만족을 주지 못하였다. Throughout preceding ages religion had chiefly been an affair of the tribe or nation; it had not often been a matter of concern to the individual. Gods were tribal or national, not personal. Such religious systems afforded little satisfaction for the individual spiritual longings of the average person.
121:5.2 예수 시대에 서양의 종교들에는 다음이 포함 된다: In the times of Jesus the religions of the Occident included:
121:5.3 1. 이교도 종파. 이것들 속에는 그리스라틴의 신화, 애국심, 그리고 전통이 뒤섞여 있었다. 1. The pagan cults. These were a combination of Hellenic and Latin mythology, patriotism, and tradition.
121:5.4 2. 황제숭배. 국가의 상징으로서 사람을 이렇게 신성화하는 것에 대하여 유대교인들과 초기 그리스도교인 들은 매우 분개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로마 정부로 하여금 이 양쪽 교회들에 대하여 혹독한 박해를 가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2. Emperor worship. This deification of man as the symbol of the state was very seriously resented by the Jews and the early Christians and led directly to the bitter persecutions of both churches by the Roman government.
121:5.5 3. 점성술. 바빌론의 이 사이비 과학은 그리스-로마제국에 두루 종교로 발전하였다. 심지어 20세기 사람들도 이 미신적인 믿음으로부터 충분하게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3. Astrology. This pseudo science of Babylon developed into a religion throughout the Greco-Roman Empire. Even in the twentieth century man has not been fully delivered from this superstitious belief.
121:5.6 4. 신비 종교. 그토록 영적으로 굶주린 세계에, 신비종파들, 레반트 지역으로부터 생겨난 새롭고 낯선 종교들의 홍수가 덮쳐 들어왔었고 이들 종교들은 일반 대중들을 홀리게 만들고 그들에게 개별적 구원을 약속했다. 이들 종교는 급속하게 그리스-로마 세계의 하위 계층의 인정을 받는 믿음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리스도교 가르침들, 신(神)에 대한 장엄한 개념을 제시하는, 광대하게 우수한 그리스도교 가르침들이 급속하게 확산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그리스도교 가르침들은, 부수적으로는 지식인에게 흥미를 이끄는 신학을, 그리고 무지하였지만 영적으로 굶주린 평범한 사람을 포함하는 당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에 대한 심오한 제안을 제시하였다. 4. The mystery religions. Upon such a spiritually hungry world a flood of mystery cults had broken, new and strange religions from the Levant, which had enamored the common people and had promised them individual salvation. These religions rapidly became the accepted belief of the lower classes of the Greco-Roman world. And they did much to prepare the way for the rapid spread of the vastly superior Christian teachings, which presented a majestic concept of Deity, associated with an intriguing theology for the intelligent and a profound proffer of salvation for all, including the ignorant but spiritually hungry average man of those days.
121:5.7 신비 종교들은 민족적 믿음들의 종말을 가져왔고, 수많은 개인적 종파들의 탄생으로 귀결되었다. 신비교는 수가 많았지만 모두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었다: The mystery religions spelled the end of national beliefs and resulted in the birth of the numerous personal cults. The mysteries were many but were all characterized by:
121:5.8 1. 어떤 신화같은 전설, 일종의 신비─그것으로부터 그 이름이 유래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신비교는 미트라교의 가르침에 의하여 묘사되듯이 어떤 하느님의 일생과 죽음, 그리고 일생으로 되돌아오는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으며, 한동안 그리스도교의 바울의 떠오르는 종파와 동시대에서 함께, 경쟁자로 있었다. 1. Some mythical legend, a mystery -- whence their name. As a rule this mystery pertained to the story of some god's life and death and return to life, as illustrated by the teachings of Mithraism, which, for a time, were contemporary with, and a competitor of, Paul's rising cult of Christianity.
121:5.9 2. 신비교들은 국가와 인종을 초월한다. 그들은 개인적이고 우애적이었고, 종교적 형제신분과 수많은 종파적 사회를 나타나게 만들었다. 2. The mysteries were nonnational and interracial. They were personal and fraternal, giving rise to religious brotherhoods and numerous sectarian societies.
121:5.10 3. 그들의 경배는 화려한 입장 의식과 감동적인 성찬이 특징 이었다. 은밀하게 행해지는 그들의 의식과 예식은 때로는 무시무시하고 혐오스러운 경우도 있었다. 3. They were, in their services, characterized by elaborate ceremonies of initiation and impressive sacraments of worship. Their secret rites and rituals were sometimes gruesome and revolting.
121:5.11 4. 그러나 그들의 예식들의 본질이나 그것들의 지나친 정도가 어떠하였는지에 상관없이, 이러한 신비교들은 하나같이 그것들의 신봉자들에게 구원, “악으로부터의 해방, 죽음 이후의 생존, 그리고 슬픔과 속박이 가득한 이 세상을 초월한 가장 행복한 세계에서의 항구적 일생”을 약속했다. 4. But no matter what the nature of their ceremonies or the degree of their excesses, these mysteries invariably promised their devotees salvation, "deliverance from evil, survival after death, and enduring life in blissful realms beyond this world of sorrow and slavery."
121:5.12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과 이러한 신비교의 가르침을 혼동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신비교의 대중적 인기는 생존에 대한 사람의 탐구가 있음을 계시하는 것이며, 그와 같이 개인적 종교와 개별적 정의에 대한 실제적 굶주림과 갈증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신비교가 이러한 소망을 적절하게 만족시키는 데에는 실패하였지만, 그들은 정말로 바로 뒤이어, 생명의 빵과 생명의 물을 이 세상으로 가져왔던 예수의 출현을 위하여 그 길을 예비하였던 것이다. But do not make the mistake of confusing the teachings of Jesus with the mysteries. The popularity of the mysteries reveals man's quest for survival, thus portraying a real hunger and thirst for personal religion and individual righteousness. Although the mysteries failed adequately to satisfy this longing, they did prepare the way for the subsequent appearance of Jesus, who truly brought to this world the bread of life and the water thereof.
121:5.13 바울은 널리 퍼져 있는 보다 나은 유형의 신비 종교들을 활용하고자 애쓰면서, 개종이 기대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예수의 가르침들 중 일부분을 개작(改作)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들(그리스도교)이 바울에 의해 변형되었을지라도, 신비교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보다도 다음과 같은 점에서 훨씬 우월하였다: Paul, in an effort to utilize the widespread adherence to the better types of the mystery religions, made certain adaptations of the teachings of Jesus so as to render them more acceptable to a larger number of prospective converts. But even Paul's compromise of Jesus' teachings (Christianity) was superior to the best in the mysteries in that:
121:5.14 1. 바울은 도덕적인 대속(代贖)과 윤리적인 구원을 가르쳤다.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생명을 지적하고 새로운 이상을 선포하였다. 바울은 마법적인 의식과 제의적인 매력들을 거부하였다. 1. Paul taught a moral redemption, an ethical salvation. Christianity pointed to a new life and proclaimed a new ideal. Paul forsook magic rites and ceremonial enchantments.
121:5.15 2. 그리스도교는 슬픔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존 본질성의 정의로운 성격 자질에 의하여 이어지는 죄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하는, 인간 문제의 최종적인 해답을 움켜쥔 하나의 종교를 출현시켰다. 2. Christianity presented a religion which grappled with final solutions of the human problem, for it not only offered salvation from sorrow and even from death, but it also promised deliverance from sin followed by the endowment of a righteous character of eternal survival qualities.
121:5.16 3. 신비교들은 신화에 기반을 두었다. 그리스도교는 바울이 가르쳤듯이, 하느님아들미가엘이 인류에게 증여되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기반을 두었다. 3. The mysteries were built upon myths. Christianity, as Paul preached it, was founded upon a historic fact: the bestowal of Michael, the Son of God, upon mankind.
121:5.17 이방인들 사이에서 도덕성은 종교나 철학과 반드시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팔레스타인 이외의 지역에서는, 종교적인 지도자가 도덕적인 일생도 역시 인도해야 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항상 간주되지는 않았다. 유대의 종교와, 그 뒤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 그리고 바울에 의해 나중에 발전된 그리스도교는, 한 손은 도덕 위에 다른 한 손은 윤리 위에 놓고 종교인들로 하여금 이 두 가지 일에 모두 어떤 관심을 가질 것을 주장하는 첫 번째로 전 유럽에 퍼진 종교가 되었다. Morality among the gentiles was not necessarily related to either philosophy or religion. Outside of Palestine it not always occurred to people that a priest of religion was supposed to lead a moral life. Jewish religion and subsequently the teachings of Jesus and later the evolving Christianity of Paul were the first European religions to lay one hand upon morals and the other upon ethics, insisting that religionists pay some attention to both.
121:5.18 사람들이 이러한 미완성 철학체계와 복잡한 사교(邪敎)들에 의해 지배를 받아 혼란 속에 있던 그러한 인류 세대 속에, 예수팔레스타인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바로 이 세대의 사람들에게, 개인적 종교─하느님과의 아들관계─에 대한 자신의 복음을 제공하였다. Into such a generation of men, dominated by such incomplete systems of philosophy and perplexed by such complex cults of religion, Jesus was born in Palestine. And to this same generation he subsequently gave his gospel of personal religion -- sonship with God.


6. 히브리 종교  

6. THE HEBREW RELIGION

121:6.1 기원전 1세기가 끝날 때까지, 예루살렘의 종교적 사상은 그리스의 문화적 가르침들에 의해서, 심지어는 그리스 철학에 의해서 매우 많은 영향을 받아서 어느 정도 변형되어 있었다. 히브리 사상에 대한 동방 학파와 서방학파의 견해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대립이 이루어지던 중에, 예루살렘과 그 외의 서양레반트 지역은 일반적으로 서방유대인 즉 변형된 그리스 관점을 채택하였다. By the close of the first century before Christ the religious thought of Jerusalem had been tremendously influenced and somewhat modified by Greek cultural teachings and even by Greek philosophy. In the long contest between the views of the Eastern and Western schools of Hebrew thought, Jerusalem and the rest of the Occident and the Levant in general adopted the Western Jewish or modified Hellenistic viewpoint.
121:6.2 예수 시대에 팔레스타인에서는 세 가지 언어가 통용되었는데: 보통사람들은 사투리가 약간 섞인 아람어를; 사제들과 랍비들은 히브리어를; 그리고 교육받은 계층과 상류층 유대인들은 대개 그리스어를 사용하였다. 초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히브리 경전은, 나중에 유대 문화와 신학에서 그리스파가 우세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같은 언어로 기록된 그리스도교 교사들의 작품들이 곧 출현하게 되었다. 유대주의의 부흥은 히브리 경전이 그리스어로 번역되는 때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나중에 바울그리스도교 종파가 동방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서방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결정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In the days of Jesus three languages prevailed in Palestine: The common people spoke some dialect of Aramaic; the priests and rabbis spoke Hebrew; the educated classes and the better strata of Jews in general spoke Greek. The early translation of the Hebrew scriptures into Greek at Alexandria was responsible in no small measure for the subsequent predominance of the Greek wing of Jewish culture and theology. And the writings of the Christian teachers were soon to appear in the same language. The renaissance of Judaism dates from the Greek translation of the Hebrew scriptures. This was a vital influence which later determined the drift of Paul's Christian cult toward the West instead of toward the East.
121:6.3 그리스화된 유대인의 믿음은 쾌락주의학파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철학과, 자기를 극복하려는 금욕주의자들의 교리로부터 현저하게 영향을 받았다. 금욕주의에 의해 크게 잠식당하였다는 사실은 마카비서의 제4권에 잘 나타나 있으며: 플라톤의 철학뿐만 아니라 금욕주의의 교리 역시 침투해 있었다는 사실은 솔로몬의 지혜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스화된 유대인들은 히브리 경전에 대해 이러한 우화적인 해석을 함으로써, 자기들이 존경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히브리 신학에 접목시키는 일에 별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알렉산드리아필로그리스 철학과 히브리의 신학을 간단하고 비교적 모순이 없는 종교적 신앙과 실천의 체계로 조화시키고 체계화하여 이 문제들이 처리되기 전까지는 극도의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예수가 살아 있으면서 가르치던 시기에, 팔레스타인에는 이러한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이 합쳐진 후대의 가르침이 성행하고 있었으며, 바울은 이를 좀 더 진보적이고 계몽된 그리스도교 종파를 세우기 위한 기초로 활용하였다. Though the Hellenized Jewish beliefs were very little influenced by the teachings of the Epicureans, they were very materially affected by the philosophy of Plato and the self-abnegation doctrines of the Stoics. The great inroad of Stoicism is exemplified by the Fourth Book of the Maccabees; the penetration of both Platonic philosophy and Stoic doctrines is exhibited in the Wisdom of Solomon. The Hellenized Jews brought to the Hebrew scriptures such an allegorical interpretation that they found no difficulty in conforming Hebrew theology with their revered Aristotelian philosophy. But this all led to disastrous confusion until these problems were taken in hand by Philo of Alexandria, who proceeded to harmonize and systemize Greek philosophy and Hebrew theology into a compact and fairly consistent system of religious belief and practice. And it was this later teaching of combined Greek philosophy and Hebrew theology that prevailed in Palestine when Jesus lived and taught, and which Paul utilized as the foundation on which to build his more advanced and enlightening cult of Christianity.
121:6.4 필로는 위대한 선생이었으며; 모세 이후 서양 세계의 윤리적 그리고 도덕적 사상에 그토록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었다. 윤리적인 가르침과 종교적인 가르침이라는 동시 발생적 체계들 속에서, 보다 훌륭한 요소들을 결합한 일곱 명의 탁월한 인간 선생들을 꼽자면, 쎄타드, 모세, 조로아스터, 노자, 부처, 필로, 그리고 바울이 해당된다. Philo was a great teacher; not since Moses had there lived a man who exerted such a profound influence on the ethical and religious thought of the Occidental world. In the matter of the combination of the better elements in contemporaneous systems of ethical and religious teachings, there have been seven outstanding human teachers: Sethard, Moses, Zoroaster, Lao-tse, Buddha, Philo, and Paul.
121:6.5 필로의 모순점들 중에서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들은, 그리스의 신비철학과 로마의 금욕주의 교리를 형식에 매인 히브리 신학에 병합하려는 노력으로 인하여 발생되었는데, 이 점을 인식한 바울그리스도교가 형성되기 이전의 그의 기초 신학에서 이러한 문제를 현명하게 제거하였다. 필로유대 신학 안에 오랫동안 잠재해 오고 있던 낙원천국 삼위일체 개념을 완벽하게 회복시켜줄 수 있는 길로 바울을 인도하였다. 바울알렉산드리아의 이 부유하고 교육받은 유대필로와 보조를 맞추지 못하였거나 또는 그의 가르침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속죄에 관한 교리였는데; 필로는 오직 피를 흘림으로써만 용서를 받는다는 교리로부터 해방을 가르쳤던 것이다. 또한 그는 생각조절자의 실체와 현존에 대해 바울이 알고 있던 것보다는 조금 더 분명하게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의 원죄(原罪) 이론, 유전적인 죄와 선천적인 악 그리고 그것들로부터의 속죄에 관한 교리는, 부분적으로 미트라 숭배에서 기원된 것이었으며, 히브리 신학이나 필로의 철학 또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원죄와 속죄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들 중에서 어떤 형태들은 바울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Many, but not all, of Philo's inconsistencies resulting from an effort to combine Greek mystical philosophy and Roman Stoic doctrines with the legalistic theology of the Hebrews, Paul recognized and wisely eliminated from his pre-Christian basic theology. Philo led the way for Paul more fully to restore the concept of the Paradise Trinity, which had long been dormant in Jewish theology. In only one matter did Paul fail to keep pace with Philo or to transcend the teachings of this wealthy and educated Jew of Alexandria, and that was the doctrine of the atonement; Philo taught deliverance from the doctrine of forgiveness only by the shedding of blood. He also possibly glimpsed the reality and presence of the Thought Adjusters more clearly than did Paul. But Paul's theory of original sin, the doctrines of hereditary guilt and innate evil and redemption therefrom, was partially Mithraic in origin, having little in common with Hebrew theology, Philo's philosophy, or Jesus' teachings. Some phases of Paul's teachings regarding original sin and the atonement were original with himself.
121:6.6 이 세상에서의 예수의 일생을 기록한 것들 중에서 마지막으로 기록된 요한복음은, 서방 사람들을 위해 기록된 것으로서, 그 내용은 필로의 가르침들도 동시에 따르고 있던 후대의 알렉산드리아 그리스도교인 들의 관점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The Gospel of John, the last of the narratives of Jesus' earth life, was addressed to the Western peoples and presents its story much in the light of the viewpoint of the later Alexandrian Christians, who were also disciples of the teachings of Philo.
121:6.7 그리스도의 시대 무렵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이상한 나쁜 감정이 다시 일어나서, 전에 유대인들의 근거지였던 이곳으로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지독한 박해의 물결이 시작되어 로마에까지 퍼지게 되었으며, 그곳으로부터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추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운동들은 오래가지 않았으며; 황제가 통치하는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국 전역의 유대인들에게 빼앗은 해방을 충분히 회복시켜 주었다. At about the time of Christ a strange reversion of feeling toward the Jews occurred in Alexandria, and from this former Jewish stronghold there went forth a virulent wave of persecution, extending even to Rome, from which many thousands were banished. But such a campaign of misrepresentation was short-lived; very soon the imperial government fully restored the curtailed liberties of the Jews throughout the empire.
121:6.8 무역이나 혹은 박해로 인해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같이 예루살렘에 있는 거룩한 성전을 가슴 중심부에 간직하고 있음으로써 하나가 되었다. 유대인들의 신학은, 바빌로니아 선생들이 때때로 개입함으로 인하여 잊힐 뻔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해석되어지고 실천되어 왔던 그대로 유지되었다. Throughout the whole wide world, no matter where the Jews found themselves dispersed by commerce or oppression, all with one accord kept their hearts centered on the holy temple at Jerusalem. Jewish theology did survive as it was interpreted and practiced at Jerusalem, notwithstanding that it was several times saved from oblivion by the timely intervention of certain Babylonian teachers.
121:6.9 흩어져 살고 있던 이백 오십 만 명이나 되는 많은 유대인들은 민족적인 종교 축제들을 축하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동방(바빌로니아)의 유대인들과 서방(그리스)의 유대인들이 신학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예루살렘이 그들의 경배의 중심이라는 것, 그리고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을 늘 기대하는 데에 의견이 같았다. As many as two and one-half million of these dispersed Jews used to come to Jerusalem for the celebration of their national religious festivals. And no matter what the theologic or philosophic differences of the Eastern (Babylonian) and the Western (Hellenic) Jews, they were all agreed on Jerusalem as the center of their worship and in ever looking forward to the coming of the Messiah.


7. 유대인과 이방인  


7. JEWS AND GENTILES

121:7.1 예수가 왔을 무렵에,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운명에 대해 확고한 개념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이방세계 사이에 견고한 벽을 쌓아 놓고 있었으며; 이방인들의 방식은 무엇이던지 심하게 경멸하였다. 그들은 글자 그대로 율법을 경배하였으며 자신들의 혈통에 대한 그릇된 자부심에 근거하여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약속된 메시아에 대하여 이미 여러 선입견들을 만들어 놓고 있었으며; 이러한 기대들 대부분은 그들의 나라와 민족 역사의 한 부분으로 오는 메시아를 상상하였다. 당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유대 신학은 돌이킬 수 없도록 정착되어지고 언제까지나 고정된 상태였다. By the times of Jesus the Jews had arrived at a settled concept of their origin, history, and destiny. They had built up a rigid wall of separation between themselves and the gentile world; they looked upon all gentile ways with utter contempt. They worshiped the letter of the law and indulged a form of self-righteousness based upon the false pride of descent. They had formed preconceived notions regarding the promised Messiah, and most of these expectations envisaged a Messiah who would come as a part of their national and racial history. To the Hebrews of those days Jewish theology was irrevocably settled, forever fixed.
121:7.2 관용과 친절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과 실천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이라고 간주하는 다른 민족들에 대해 그들이 오랫동안 품어온 태도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서 유대인들이 키워온 외부 세계에 대한 태도는, 사람들의 영적 형제애에 대한 주(主)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함께 야훼를 똑같이 공유하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따라서 이렇게 새롭고 생소한 교리를 가르치는 자를 하느님아들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The teachings and practices of Jesus regarding tolerance and kindness ran counter to the long-standing attitude of the Jews toward other peoples whom they considered heathen. For generations the Jews had nourished an attitude toward the outside world which made it impossible for them to accept the Master's teachings about the spiritual brotherhood of man. They were unwilling to share Yahweh on equal terms with the gentiles and were likewise unwilling to accept as the Son of God one who taught such new and strange doctrines.
121:7.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성직자들이 유대인들에게 형식주의와 율법주의라는 무서운 굴레로 씌워 놓았는데, 이러한 굴레는 현실적으로 로마의 정치적 규제보다도 더 엄한 것이었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은 율법에 복종 당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들의 요구에 노예처럼 속박되어 있었는데, 그것들은 그들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생활의 모든 권역을 일일이 간섭하고 침범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세한 행위성 규칙들은 모든 충실한 유대인들을 지배하였으며, 그들이 신성한 전통을 무시하거나 오랫동안 받들어 온 사회 행위성의 규율을 감히 경멸하는 그들의 동료들 중 하나를 즉시 제거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조상 아브라함이 직접 제정했다고 믿고 있던 교리들과 충돌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의 가르침을 선의로 보아줄 수가 없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주었던 율법에 대해서 그들은 손상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The scribes, the Pharisees, and the priesthood held the Jews in a terrible bondage of ritualism and legalism, a bondage far more real than that of the Roman political rule. The Jews of Jesus' time were not only held in subjugation to the law but were equally bound by the slavish demands of the traditions, which involved and invaded every domain of personal and social life. These minute regulations of conduct pursued and dominated every loyal Jew, and it is not strange that they promptly rejected one of their number who presumed to ignore their sacred traditions, and who dared to flout their long-honored regulations of social conduct. They could hardly regard with favor the teachings of one who did not hestitate to clash with dogmas which they regarded as having been ordained by Father Abraham himself. Moses had given them their law and they would not compromise.
121:7.4 그리스도 이후 1세기까지, 명망 있는 선생들이나 율법학자들이 율법에 대해 말로 해석한 내용이 문자화된 율법 그 자체보다 더욱 높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몇몇 종교 지도자들은 유대인들이 새로운 복음을 배척하도록 묶어둘 수 있었던 것이다. By the time of the first century after Christ the spoken interpretation of the law by the recognized teachers, the scribes, had become a higher authority than the written law itself. And all this made it easier for certain religious leaders of the Jews to array the people against the acceptance of a new gospel.
121:7.5 이러한 상황들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종교적인 자유와 영적 해방에 대한 새로운 복음의 전언자들로서의 그들의 신성한 운명을 완수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전통의 족쇄를 부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사람의 가슴에 기록되어진 율법”을 이야기하였고, 에스겔은 “사람의 혼 속에 거할 새로운 영”을 말하였으며, 시편 기자는 하느님에게 “깨끗한 가슴을 창조하시고 올바른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선행을 강조하고 율법의 노예가 된 유대 종교가 전통적 타성의 침체에 희생자로 전락하였을 때, 종교적 진보의 물결은 서쪽의 유럽인들에게로 옮겨갔다. These circumstances rendered it impossible for the Jews to fulfill their divine destiny as messengers of the new gospel of religious freedom and spiritual liberty. They could not break the fetters of tradition. Jeremiah had told of the "law to be written in men's hearts," Ezekiel had spoken of a "new spirit to live in man's soul," and the Psalmist had prayed that God would "create a clean heart within and renew a right spirit." But when the Jewish religion of good works and slavery to law fell victim to the stagnation of traditionalistic inertia, the motion of religious evolution passed westward to the European peoples.
121:7.6 그리하여 하나의 진보된 신학, 그리스인들의 철학, 로마인들의 법, 히브리인들의 도덕성,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바울에 의해 조직적으로 만들어진 개인성의 존엄성과 영적 해방에 대한 복음 등을 포함하는 하나의 교육 체계를 세계로 전파하는 일에 다른 민족이 요청 받게 되었다. And so a different people were called upon to carry an advancing theology to the world, a system of teaching embodying the philosophy of the Greeks, the law of the Romans, the morality of the Hebrews, and the gospel of personality sanctity and spiritual liberty formulated by Paul and based on the teachings of Jesus.
121:7.7 바울그리스도교 종파는 그것의 도덕성이 유대로부터 왔다는 흔적을 보여주었다. 유대인들은 역사를 하느님─일하는 야훼─의 섭리로 여겼다. 그리스인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해 보다 확실한 개념들을 그 새로운 가르침 속에 전해주었다. 바울의 교리들은 신학과 철학적 면에서 예수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플라톤필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윤리적 면에 있어서, 그는 예수뿐만 아니라 금욕주의자들에게서도 영감을 받았다. Paul's cult of Christianity exhibited its morality as a Jewish birthmark. The Jews viewed history as the providence of God -- Yahweh at work. The Greeks brought to the new teaching clearer concepts of the eternal life. Paul's doctrines were influenced in theology and philosophy not only by Jesus' teachings but also by Plato and Philo. In ethics he was inspired not only by Christ but also by the Stoics.
121:7.8 바울안디옥 그리스도교 종파에서 구체화되었듯이, 예수의 복음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들과 융합되었다: The gospel of Jesus, as it was embodied in Paul's cult of Antioch Christianity, became blended with the following teachings:
 

 1. 

유대주의로 개종한 그리스인들의, 영원한 생명에 관한 그들의 개념들 중 일부를 포함하고 있는 철학적 논법.

 2.

널리 퍼져 있던 신비교들의 매혹적인 가르침들, 특히 어떤 하느님이 희생됨으로써 이루어진 대속, 속죄, 그리고 구원에 대한 미트라 숭배의 교리들.

 3.

이미 확립된 유대 종교의 완강한 도덕성.

1.

The philosophic reasoning of the Greek proselytes to Judaism, including some of their concepts of the eternal life.

2.

The appealing teachings of the prevailing mystery cults, especially the Mithraic doctrines of redemption, atonement, and salvation by the sacrifice made by some god.

3.

The sturdy morality of the established Jewish religion.

121:7.9 예수 시대에, 지중해의 로마제국과 파르티아 왕국 그리고 인접된 지역의 민족들은 모두, 세계 지리와 천체 연구 그리고 신체 상태와 질병 등에 대해 아주 미숙하고 원시적인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나사렛의 목수인 예수의 새롭고 놀라운 선언을 듣고 그들이 놀란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선한 영과 나쁜 영을 소유한다는 관념은, 단순히 인간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모든 바위와 나무도 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 시대는 마법이 성행하던 때였으며, 모든 사람들은 기적이 보통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믿었다. The Mediterranean Roman Empire, the Parthian kingdom, and the adjacent peoples of Jesus' time all held crude and primitive ideas regarding the geography of the world, astronomy, health, and disease; and naturally they were amazed by the new and startling pronouncements of the carpenter of Nazareth. The ideas of spirit possession, good and bad, applied not merely to human beings, but every rock and tree was viewed by many as being spirit possessed. This was an enchanted age, and everybody believed in miracles as commonplace occurrences.


8. 이전에 쓰인 기록들  


8. PREVIOUS WRITTEN RECORDS

121:8.1 우리는 유란시아에서의 예수의 일생을 다루고 있는 기존의 기록들이 우리의 임무와 모순되지 않는 한, 최대한도로 활용하고 어느 정도까지는 합동시켜 보려고 노력하였다. 우리는 분실된 사도 안드레의 기록을 읽어 볼 수 있는 기쁨도 누렸고, 미가엘이 증여되었던 기간 동안 지상에 있었던 다양한 우주적 존재들의 (특히 그의 개인성구현된 조절자의) 협조를 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었지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잘 활용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기도 하였다. As far as possible, consistent with our mandate, we have endeavored to utilize and to some extent co-ordinate the existing records having to do with the life of Jesus on Urantia. Although we have enjoyed access to the lost record of the Apostle Andrew and have benefited from the collaboration of a vast host of celestial beings who were on earth during the times of Michael's bestowal (notably his now Personalized Adjuster), it has been our purpose also to make use of the so-called Gospels of Matthew, Mark, Luke, and John.
121:8.2 이 신약성경의 기록들은 다음과 같은 배경 속에서 작성되었다: These New Testament records had their origin in the following circumstances:
121:8.3 1. 마가복음. 요한 마가예수의 일생에 관하여 가장 최초로 (안드레의 단편적인 기록을 제외하고는) 가장 짧고 가장 단순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주(主)를 한 사람의 섬기는 자,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한 사람으로 소개하였다. 마가는 자신이 서술한 장면들 중에서 많은 경우에 한 소년으로서 그 현장 주변에 있었지만, 실제로 그의 기록은 시몬 베드로에 의해 만들어진 복음서이다. 그는 처음에는 베드로와; 그리고 나중에는 바울과 함께 활동하였다. 마가베드로의 부탁에 의해서 그리고 로마에 있는 교회의 간곡한 청에 의해 이것을 기록하였다. 마가 주(主)가 땅에서 사신 동안 자신의 가르침들을 글로 남기는 것을 얼마나 원하지 않았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사도들과 다른 수제자(首弟子)들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기기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로마에 있는 교회에게 이러한 기록된 이야기가 필요함을 느꼈으며, 마가는 그 일의 준비를 담당하기로 동의하였다. 그는 베드로가 기원 후 67년에 죽기 전까지 간단한 기록들을 많이 만들었으며, 베드로가 승인한 전체적인 윤곽에 따라서 그리고 로마에 있는 교회를 위하여, 베드로가 죽은 직후부터 이 기록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 복음서는 기원 후 68년 말경에 완성되었다. 마가는 순전히 자신과 베드로의 기억에 의존하여 글을 썼다. 그 기록은 그 후에 상당히 많이 변경되었는데, 수많은 구절들이 삭제되고 후대의 문서들 일부가 끝 부분에 삽입되어 복음서 원형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후반부 부분을 대치하였으며, 최초의 원본에 있었던 그 부분은 사본이 만들어지기 전에 유실되었다. 안드레의 초고와 마태의 초고와 함께, 마가의 이 기록은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을 그려내려고 하였던, 후에 기록된 모든 복음서들에게 성문화된 기초 역할을 하였다. 1. The Gospel by Mark. John Mark wrote the earliest (excepting the notes of Andrew), briefest, and most simple record of Jesus' life. He presented the Master as a minister, as man among men. Although Mark was a lad lingering about many of the scenes which he depicts, his record is in reality the Gospel according to Simon Peter. He was early associated with Peter; later with Paul. Mark wrote this record at the instigation of Peter and on the earnest petition of the church at Rome. Knowing how consistently the Master refused to write out his teachings when on earth and in the flesh, Mark, like the apostles and other leading disciples, was hesitant to put them in writing. But Peter felt the church at Rome required the assistance of such a written narrative, and Mark consented to undertake its preparation. He made many notes before Peter died in A.D. 67, and in accordance with the outline approved by Peter and for the church at Rome, he began his writing soon after Peter's death. The Gospel was completed near the end of A.D. 68. Mark wrote entirely from his own memory and Peter's memory. The record has since been considerably changed, numerous passages having been taken out and some later matter added at the end to replace the latter one fifth of the original Gospel, which was lost from the first manuscript before it was ever copied. This record by Mark, in conjunction with Andrew's and Matthew's notes, was the written basis of all subsequent Gospel narratives which sought to portray the life and teachings of Jesus.
121:8.4 2. 마태복음. 소위 마태에 의한 복음서라고 불리는 이 복음서는 유대그리스도교인 들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씌어진, 주(主)의 일생에 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의 저자는 예수의 일생 속에서 그가 행한 대부분의 사건이 “예언자에 의해서 선포된 말씀이 성취될 것이다.”라는 말과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일관된 노력을 견지하였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다윗의 자손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가 율법과 선지자들을 크게 신뢰하고 있는 것처럼 서술한다. 2. The Gospel of Matthew. The so-called Gospel according to Matthew is the record of the Master's life which was written for the edification of Jewish Christians. The author of this record constantly seeks to show in Jesus' life that much which he did was that "it might be fulfilled which was spoken by the prophet." Matthew's Gospel portrays Jesus as a son of David, picturing him as showing great respect for the law and the prophets.
121:8.5 사도 마태는 이 복음서를 쓰지 않았다. 마태의 제자들 중 하나인 이사도르가 이것을 기록하였는데, 그는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이 사건들에 대한 마태의 개인적 기억뿐만 아니라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직후에 이사도르 자신이 그의 말씀들을 모아놓은 것들의 도움도 받았다. 마태가 기록한 것은 아람어로 되어 있었으며; 이사도르그리스어로 기록하였다. 이 글을 마태의 작품이라고 공언함에 있어서 속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제자들이 자기 스승에게 경의를 표하는, 당시의 관습이었다. The Apostle Matthew did not write this Gospel. It was written by Isador, one of his disciples, who had as a help in his work not only Matthew's personal remembrance of these events but also a certain record which the latter had made of the sayings of Jesus directly after the crucifixion. This record by Matthew was written in Aramaic; Isador wrote in Greek. There was no intent to deceive in accrediting the production to Matthew. It was the custom in those days for pupils thus to honor their teachers.
121:8.6 마태의 기원적 기록은 기원 후 40년, 그가 예루살렘을 떠나 복음전도의 전파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편집되고 첨가되었다. 그 기록은 사적인 것이었으며, 마지막 사본이 기원 후 416년 시리아의 수도원 화재 때 소실되었다. Matthew's original record was edited and added to in A.D. 40 just before he left Jerusalem to engage in evangelistic preaching. It was a private record, the last copy having been destroyed in the burning of a Syrian monastery in A.D. 416.
121:8.7 기원후 70년 티투스 장군의 무리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을 때, 이사도르마태의 단편적인 기록들을 가지고 도시를 빠져 나와 펠라로 도피하였다. 기원 후 71년, 펠라에 거하면서 이사도르마태의 단편적 기록들에 의거하여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그는 또한 마가의 기록 중 5분의 4에 해당하는 첫 부분을 갖고 있었다. Isador escaped from Jerusalem in A.D. 70 after the investment of the city by the armies of Titus, taking with him to Pella a copy of Matthew's notes. In the year 71, while living at Pella, Isador wrote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He also had with him the first four fifths of Mark's narrative.
121:8.8 3. 누가복음. 피시디아안디옥에서 의사였던 누가바울에 의해서 개종된 이방인이었는데, 그는 주(主)의 일생에 관하여 매우 다른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그는 기원 후 47년 바울을 추종하기 시작하면서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대하여 배웠다. 누가바울은 물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 사실들을 수집하여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은혜”에 대해 많이 기록하여 보관하였다. 그는 주(主)를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로 묘사하였다. 그는 바울이 죽기 전에는 자신의 많은 단편적 기록들을 복음서로 조직화시키지 않았다. 누가아카이아에서 82년에 기록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그리스도교에 관한 역사를 다루는 세 권의 책을 쓸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두 번째 책인, “사도행전”을 완성하기 직전인 기원 후 90년에 죽었다. 3. The Gospel by Luke. Luke, the physician of Antioch in Pisidia, was a gentile convert of Paul, and he wrote quite a different story of the Master's life. He began to follow Paul and learn of the life and teachings of Jesus in A.D. 47. Luke preserves much of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in his record as he gathered up these facts from Paul and others. Luke presents the Master as "the friend of publicans and sinners." He did not formulate his many notes into the Gospel until after Paul's death. Luke wrote in the year 82 in Achaia. He planned three books dealing with the history of Christ and Christianity but died in A.D. 90 just before he finished the second of these works, the "Acts of the Apostles."
121:8.9 복음서의 편집을 위한 재료로서, 누가는 처음에는 바울이 자기 체험과 관련시켜 말하였던 예수의 일생에 대한 자료에 의존했었다. 따라서 누가복음은 어떤 면에서는 바울에 의한 복음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다른 정보들도 갖고 있었다. 그는 예수의 일생 가운데에서 여러 에피소드들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기록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5분의 4에 해당하는 첫 부분의 마가복음 사본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사도르의 글들과, 그리고 기원 후 78년 안디옥에서 세데스라는 한 신자(信者)가 쓴 간단한 기록도 가지고 있었다. 누가는 또한 사도 안드레의 것으로 여겨지는, 종합적이고 많이 편집된 단편적인 기록들의 사본도 갖고 있었다. As material for the compilation of his Gospel, Luke first depended upon the story of Jesus' life as Paul had related it to him. Luke's Gospel is, therefore, in some ways the Gospel according to Paul. But Luke had other sources of information. He not only interviewed scores of eyewitnesses to the numerous episodes of Jesus' life which he records, but he also had with him a copy of Mark's Gospel, that is, the first four fifths, Isador's narrative, and a brief record made in the year A.D. 78 at Antioch by a believer named Cedes. Luke also had a mutilated and much-edited copy of some notes purported to have been made by the Apostle Andrew.
121:8.10 4. 요한복음. 요한의 복음서에는 다른 기록들에서는 볼 수 없는, 유대 지역과 예루살렘 근방에서의 예수의 활동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세베대의 아들 요한에 의한 복음서라고 불렸으며, 비록 요한이 직접 복음서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의 영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이 복음서가 첫 번째로 쓰인 이후, 요한 자신이 직접 쓴 것처럼 보이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편집되었다. 이 기록이 작성되었을 때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을 갖고 있었고, 많은 내용이 생략되어 있음을 발견하였으며; 따라서 그는 기원 후 101년에 케자리아에서 온 그리스 유대인인 자기 친구 나단을 설득하여 이것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요한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재료들을 그에게 제공하였고 이미 쓰인 세 권의 기록들을 참고하도록 하였다. 요한 자신이 직접 쓴 기록은 없었다. “요한1서”라고 알려진 서신서는 그가 직접 쓴 것이었는데, 그것은 그의 지시에 따라 나단이 기록한 작품의 서언(序言)에 해당하는 편지였다. 4. The Gospel of Joh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relates much of Jesus' work in Judea and around Jerusalem which is not contained in the other records. This is the so-called Gospel according to John the son of Zebedee, and though John did not write it, he did inspire it. Since its first writing it has several times been edited to make it appear to have been written by John himself. When this record was made, John had the other Gospels, and he saw that much had been omitted; accordingly, in the year A.D. 101 he encouraged his associate, Nathan, a Greek Jew from Caesarea, to begin the writing. John supplied his material from memory and by reference to the three records already in existence. He had no written records of his own. The Epistle known as "First John" was written by John himself as a covering letter for the work which Nathan executed under his direction.
121:8.11 이 저자들 모두는 예수의 모습을 보았던 그대로, 기억나는 대로, 혹은 그에 대하여 배운 대로 정직하게 기록하였으며, 오래 전에 있었던 이 사건들은 나중에 지지를 받게 된 바울그리스도교 신학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기록들은 불완전한 것이기는 하지만, 거의 2,000년 동안 유란시아 역사의 방향을 바꾸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All these writers presented honest pictures of Jesus as they saw, remembered, or had learned of him, and as their concepts of these distant events were affected by their subsequent espousal of Paul's theology of Christianity. And these records, imperfect as they are, have been sufficient to change the course of the history of Urantia for almost two thousand years.
121:8.12 [감사의 글: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을 다시 진술하고 활동을 다시 서술하는 나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나는 기록된 모든 자료들과 행성 정보를 자유롭게 이용하였다. 나는 이 기록이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의 세대들을 계몽시키는 것 뿐 아니라 미래의 세대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주요 동기를 두었다. 내가 사용할 수 있었던 엄청나게 많은 모든 정보들로부터, 이 목적을 달성하는데 가장 적합한 정보들만을 선택하였다. 나는 가능하다면 순전히 인간 근원으로부터 나의 정보를 도출하였다. 그러한 근원이 없을 경우에만, 초인간적인 기록들에 의지하였다.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대한 관념과 개념들이 인간 마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표현되었을 때, 나는 명백하게 그러한 인간의 생각 원형틀을 반드시 우선하였다. 주(主)의 일생과 가르침의 실제적인 의미와 진정한 뜻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잘 맞을 수 있도록 단어 표현을 조절하려고 내가 애를 쓰기는 하였지만, 나의 모든 서술을 가능한 한 실제적인 인간의 개념과 생각 원형틀에 맞추도록 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나는 인간 마음에 기원을 두고 있는 이런 개념들이, 모든 다른 인간 마음에도 또한 받아들여 질 수 있고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을 잘 안다. 인간의 기록이나 인간의 표현에서 필요한 개념을 찾아 낼 수 없는 경우에만, 나는 내가 소속된 계층이며 땅의 창조체들인 중도자들의 기억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의 2차 근원이 부적당한 경우에는 주저하지 않고 정보에서의 초(超)행성적 근원에 의존했다. Acknowledgment: In carrying out my commission to restate the teachings and retell the doings of Jesus of Nazareth, I have drawn freely upon all sources of record and planetary information. My ruling motive has been to prepare a record which will not only be enlightening to the generation of men now living, but which may also be helpful to all future generations. From the vast store of information made available to me, I have chosen that which is best suited to the accomplishment of this purpose. As far as possible I have derived my information from purely human sources. Only when such sources failed, have I resorted to those records which are superhuman. When ideas and concepts of Jesus' life and teachings have been acceptably expressed by a human mind, I invariably gave preference to such apparently human thought patterns. Although I have sought to adjust the verbal expression the better to conform to our concept of the real meaning and the true import of the Master's life and teachings, as far as possible, I have adhered to the actual human concept and thought pattern in all my narratives. I well know that those concepts which have had origin in the human mind will prove more acceptable and helpful to all other human minds. When unable to find the necessary concepts in the human records or in human expressions, I have next resorted to the memory resources of my own order of earth creatures, the midwayers. And when that secondary source of information proved inadequate, I have unhesitatingly resorted to the superplanetary sources of information.
121:8.13 내가 수집해 온,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한 이 서술을 준비하였던 메모들─사도 안드레의 기록으로부터의 기억을 제외하고─은, 예수가 왔던 날부터 이 계시들, 더욱 정확하게 다시 진술된 기록이 쓰인 시기까지 지구상에 살았던 2,000명 이상의 인간 존재들로부터 수집된 주옥같은 생각들과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최상의 개념들을 포옹하고 있다. 인간의 기록과 인간 개념이 적절한 생각 원형틀을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에만 계시적 허용이 활용되어 왔다. 내가 소속된 계시 위원회는, 내가 순수한 인간들로부터는 필요한 개념적 표현을 찾아내지 못하였다는 것을 증명할 때까지는 내가 인간의 범위 밖에 있는 어떤 정보나 개념의 도움을 받을 수 없도록 금지하였다. The memoranda which I have collected, and from which I have prepared this narrative of the life and teachings of Jesus -- aside from the memory of the record of the Apostle Andrew -- embrace thought gems and superior concepts of Jesus' teachings assembled from more than two thousand human beings who have lived on earth from the days of Jesus down to the time of the inditing of these revelations, more correctly restatements. The revelatory permission has been utilized only when the human record and human concepts failed to supply an adequate thought pattern. My revelatory commission forbade me to resort to extrahuman sources of either information or expression until such a time as I could testify that I had failed in my efforts to find the required conceptual expression in purely human sources.
121:8.14 나는 나의 11명 동료 중도자들의 도움과 기록 담당 멜기세덱의 감독 하에서,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로 한 나의 선택에 따라서 그리고 그것의 효력적인 배열에 대한 나의 개념에 맞도록 이 이야기를 표현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렇게 하여 활용한 그 관념들 대부분 그리고 심지어 효력 있는 표현들 중 일부분은, 이 일이 시작될 때 아직 살아있던 자들에 이르기까지, 개입된 그 세대들 동안에 걸쳐 지구에 살았던 여러 인종들의 사람들의 마음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들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나 자신이 직접 이야기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정보를 수집하고 편집을 하는 자의 역할을 하였다. 나는 인간의 개념들과 관념들을 더 적극적으로 채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것들은 나로 하여금 예수의 일생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가장 효력적인 창작성을 제공하였으며, 내가 예수의 비길 데 없는 가르침을 다시 기록함에 있어서 가장 현저하게 도움을 주고 가장 보편적인 어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향상시켜 주었다. 유란시아에 있는 연합 중도자 형제단을 대신하여, 나는 이 세상에서의 예수의 일생에 대하여 우리가 다시 서술한 내용을 더 고양시키는데 있어서, 이어지는 다음 장들의 기록과 개념의 모든 근원들에 우리가 빚진 것을 가장 감사하면서 깊이 인정한다.] While I, with the collaboration of my eleven associate fellow midwayers and under the supervision of the Melchizedek of record, have portrayed this narrative in accordance with my concept of its effective arrangement and in response to my choice of immediate expression, nevertheless, the majority of the ideas and even some of the effective expressions which I have thus utilized had their origin in the minds of the men of many races who have lived on earth during the intervening generations, right on down to those who are still alive at the time of this undertaking. In many ways I have served more as a collector and editor than as an original narrator. I have unhesitatingly appropriated those ideas and concepts, preferably human, which would enable me to create the most effective portraiture of Jesus' life, and which would qualify me to restate his matchless teachings in the most strikingly helpful and universally uplifting phraseology. In behalf of the Brotherhood of the United Midwayers of Urantia, I most gratefully acknowledge our indebtedness to all sources of record and concept which have been hereinafter utilized in the further elaboration of our restatement of Jesus' life on ear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