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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0 편
하늘의 왕국
170:0.1
(1858-2)
3월 11일 토요일 오후, 예수펠라에서 그의 마지막 설교를 했다. 이 설교는 그의 대중 사명활동의 주목할 만한 연설들 가운데에서, 하늘의 왕국에 대한 충분하고도 완벽한 논의를 포옹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증여 임무에 대하여 상호-교환할 수 있는 용어의 정의로 자신이 사용했던 “하느님의 왕국”이라는 용어와 그리고 “하늘의 왕국”이라는 용어들의 의미와 중요한-의의에 관하여 그의 사도들과 제자들의 마음 안에 존재하고 있는 혼동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하늘의 왕국이라는 그 용어가 바로 땅에서의 왕국들과 현세적인 정부들과 가지는 모든 연결들로부터 그 의미의 분리가 충분하게 되었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현세적인 왕의 관념이 유대인들의 마음 안에 너무나도 깊이-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한 세대 안에서 그것을 그렇게 몰아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오랫동안-지녀왔던 이 왕국의 개념을 처음에는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170:0.2
(1858-2)
이 안식일 오후에 주(主)는 하늘의 왕국에 관한 가르침을 명백하게 하기 위하여 애를 썼다; 그는 그 주제를 모든 관점에서 논의했고 또한 그 용어가 사용되어 왔던 곳에서의 서로 다른 감각들을 명백하게 만들기 위하여 노고를 기울였다. 우리는 이 이야기 안에서 이전의 여러 가지 경우에 예수에 의하여 제시되었던 수많은 진술들을 덧붙임으로써, 또한 바로 이날 저녁에 토론 시간 동안에 사도들에게만 해 주었던 견해들을 포함시킴으로써 그 연설을 더욱 증폭시킬 것이다. 또한 우리는 훗날의 그리스도교 교회와 관계되어 전개되는 그러한 뒤이어 일어나는 왕국 관념의 외적-작업을 다루면서 어떤 특정한 논평을 하려고 한다.
1. 하늘의 왕국의 개념들
170:1.1
(1858-3)
예수의 설교의 상술과 연결하여, 히브리 경전에 두루 걸쳐서 하늘의 왕국에 대한 이원적(二元的)인 개념이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선지자들은 하느님의 왕국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70:1.2
(1858-4)
1. 하나의 현재 실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러하다.
170:1.3
(1858-5)
2. 하나의 미래 희망이다─메시아가 출현하고 나서 충만함의-달성으로 실현될 때 이루어지는 왕국. 이것은 세례자 요한이 가르쳤던 왕국 개념이다.
170:1.4
(1858-6)
아주 처음부터 예수와 사도들은 이들 두 가지 개념의 둘 모두를 가르쳤다. 마음에 간직되어야 할 왕국에 대한 또 다른 두 가지의 관념들이 있다:
170:1.5
(1858-7)
3. 초자연적 기원을 가지고 그리고 기적적으로 개시되는 범-세계적이고도 또한 초월적인 왕국으로서 훗날의 유대인이 가진 개념.
170:1.6
(1858-8)
4. 세상이 끝날 때 악에 대한 선의 승리의 성취로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신성한 왕국의 확립을 묘사하고 있는 페르시아인의 가르침들.
170:1.7
(1858-9)
예수가 땅에 오기 바로 전에, 유대인들은 왕국에 대한 이 관념들을, 유대인의 승리의 시기를 확립하기 위한 메시아의 도래에서의 그들의 종말론적 개념, 땅에서의 하느님의 최극 통치의 영원한 시대, 새로운 세상, 모든 인류가 야훼를 경배하게 되는 시대라는 관념 속으로 병합하고 혼동하였다. 예수는 하늘의 왕국의 이 개념들을 활용하기로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 유대인과 그리고 페르시아인 종교 두 가지의 가장 생생하고 절정에 도달한 유산을 적당하게 가져다 쓰기로 작정했다.
170:1.8
(1859-1)
그리스도교인 시대의 여러 세기들을 두루 통하여, 납득되기도 하고 잘못-납득되기도 했었던 그러한 것으로서의 하늘의 왕국은, 뚜렷하게 서로 다른 관념의 네 집단을 포옹했다:
1. 유대인들의 개념.
2. 페르시아인들의 개념
3. 예수의 개인적-체험 개념─“너희 안에 있는 하늘의 왕국”
4. 그리스도교 창시자들과 선포자들이 세상에게 감명을 주기 위하여 찾아 나섰던, 합성되고 혼동된 개념들.
170:1.9
(1859-6)
예수가 대중을 가르칠 때에, 서로 다른 때에서 그리고 다양하게 변하고 있는 상황안에서, “왕국”에 대한 수많은 개념들을 제시해 왔던것으로 나타나지만, 그의 사도들에게는 항상, 왕국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고 땅에 있는 그의 동료들에 대한 관계에서의 사람의 개인적 체험을 포옹하는것으로 가르쳤다. 왕국과 연관하면서 말했던, 그의 마지막 말은 언제나 이것이었다, “왕국은 너희 안에 있다."
170:1.10
(1859-7)
“하늘의 왕국”이라는 용어의 의미에 관하여 여러 세기에 걸쳐 왔었던 혼동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들로 인해 기인되어왔다;
1. “왕국”의 관념을 예수와 그의 사도들에 의하여 다시 전개되는 다양한 진보적 위상을 두루거치며 지나온 것으로서 그것을 관찰함으로써 발생된 혼동.
2. 초기 그리스도교유대인의 토양으로부터 이방인의 토양으로 이식되는 과정과 관계적-연합을 이루면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혼동.
3. 그리스도교예수의 개인에 관해 그 중심적 관념을 두면서 조직화된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는 사실 안에 선천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혼동; 왕국 복음이 점점 더 그에 관한 종교가 되었다.
2. 왕국에 대한 예수의 개념
170:2.1
(1859-11)
주(主)는 하늘의 왕국이, 하느님의 아버지신분의 진리 그리고 상관관계가-되어있는 사람의 형제신분의 사실에서의 이원적(二元的) 개념으로, 그 안에 중심을 두면서, 시작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다. 예수는 그러한 가르침의 찬성과 받아들임은, 오랫-세월 속박되었던 동물적인 공포의 굴레로부터 사람을 해방할 것이고, 또한 그와 동시에 다음과 같은 영적 자유의 새로운 생명의 자질-부여를 받아 갖추면서 그로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리라고 선언했다:
170:2.2
(1859-12)
1. 새로운 용기와 증강된 영적 힘을 소유하는 것. 왕국 복음은 사람을 자유롭게 세워 놓았고, 그가 감히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지도록 영감을 주었다.
170:2.3
(1859-13)
2. 복음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마찬가지로 심지어 가난한 자를 위하여 새로운 확신과 참된 위안의 메시지를 담아 전했다.
170:2.4
(1859-14)
3. 복음은 그 자체로서 도덕적 가치의 하나의 새로운 표준이었고, 인간 행위를 재는 하나의 새로운 윤리적 잣대였다. 그것은 인간 사회에서의 결과적으로 생기는 하나의 새로운 질서의 이상을 묘사했다.
170:2.5
(1859-15)
4. 그것은 물질적인 것과 비교되는 영적인 것의 선재적-탁월성을 가르쳤다; 그것은 영적 실체들을 영화롭게 하고 또한 초인간적 이상들을 드높였다.
170:2.6
(1860-1)
5. 이 새로운 복음은 영적 달성을 삶의 참된 목표로 높이 들어 올렸다. 인간의 일생은 도덕적 가치와 신성한 존엄성의 하나의 새로운 자질-부여를 받았다.
170:2.7
(1860-2)
6. 예수는 영원한 실체는 정의로운 땅에서의 분투의 결과(보상)라고 가르쳤다. 땅에서 사람의 필사자로서의 체류가, 하나의 고귀한 운명을 인지하는 바탕 위에서, 그 귀결에 뒤따라오는, 새로운 의미들을 획득했다.
170:2.8
(1860-3)
7. 새로운 복음은, 인간의 구원이 하느님의 구원받은 아들들의 끝없는 봉사의 미래 운명 안에서 충만되고 또한 실현되어야 하는, 그러한 하나의 멀리-다다르는 신성한 목적의 계시라고 확언했다.
170:2.9
(1860-4)
이들 가르침은 예수에 의하여 가르쳐졌던 그러한 왕국에서의 확대된 관념을 망라한다. 이 위대한 개념은 세례자 요한의 초보적이고 또한 혼동된 왕국 가르침들 안에는 거의 포옹되지 않았다.
170:2.10
(1860-5)
사도들은 왕국에 관한 주(主)의 발언들들의 실제 의미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예수의 가르침에서의 뒤이어 따라오게 된 왜곡들은, 그들이 신약 성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 복음의 기록자들의 개념이, 예수가 그 당시에 이 세상에 단지 짧은 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다는 믿음에 의하여 채색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힘과 영광 안에서 왕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곧 돌아오리라는 믿음─그가 육신으로 있었던 동안 그들이 지녔던 바로 그러한 관념─에 의해 채색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이 세상에 돌아온다는 관념을 왕국의 확립과 연결시키지 않았다. “새 시대”의 출현에서의 그 어떤 신호도 없이 여러 세기들이 지났다는 것은 결코 예수의 가르침과의 조화로움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아니다.
170:2.11
(1860-6)
이 설교 안에 체현된 위대한 노력은, 하늘의 왕국에 대한 개념을,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관념에서의 이상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였다. 주(主)는 오랫동안 그의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당신의 왕국이 임하소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그리고 이때에 그는 그들에게 더욱 실천적인 동의어인,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왕국이라는 용어를 그들이 포기하여 내던져버리도록 유인하려고 진지하게 애를 썼다. 그러나 그는 성공하지 못했다.
170:2.12
(1860-7)
예수는 왕국, 왕, 그리고 주체인 백성들에 대한 관념을 대신하여, 하늘 가족,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리고 자신들의 동료 사람들을 위해 기쁘고 자발적인 봉사와 아버지 하느님에의 숭고하고 지능적인 경배에 종사된, 그러한 해방된 하느님의 아들들의 개념으로 대체하기를 갈망했다.
170:2.13
(1860-8)
사도들은 이때까지도 왕국에서의 중복된 관점을 획득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여겼다:
1. 개인적 체험의 일이고 그런 다음에 참된 신자의 가슴 안에서 현존하는 그러한 어떤 하나의 일, 그리고
2. 종족적인 혹은 세계적인 현상에서의 어떤 문제; 왕국이 미래에 있다는 것, 기대할 만한 어떤 무언가라는 것.
170:2.14
(1860-11)
그들은 사람들의 가슴 안에서 왕국이 다가오는 것을, 마치 밀가루 반죽 속의 누룩처럼 혹은 겨자씨가 커다랗게 자라나는 것처럼, 그러한 점진적인 발전으로 보았다. 그들은 왕국이 다가오는 것은 종족적인 감각에서나 혹은 세계적인 감각으로나 갑작스럽고도 동시에 극적인 장관이 될 것으로 믿었다. 예수는 하늘의 왕국이 더욱 높은 영적 삶의 본질특성을 실현하는, 그들의 개인적 체험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 주면서 결코 지친 적이 없었다; 그는 또한 영적으로 체험하는 이들 실체들은, 신성한 확실성과 영원한 장엄의 새롭고도 더욱 높은 차원들로, 진보적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말하면서 결코 지친 적이 없었다.
170:2.15
(1860-12)
이날 오후에 주(主)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위상을 묘사하는 것으로, 왕국의 이중적 자연본성의 새로운 개념을 뚜렷하게 구분되도록 가르쳤다:
170:2.16
(1860-13)
“첫째,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왕국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최극의 갈망, 진보된 윤리적 그리고 도덕적 행위에서의 선한 열매를 맺는 사람의 사심-없는 사랑이다.
170:2.17
(1861-1)
“둘째, 하늘 안에서 하느님의 왕국은, 필사자 신자들의 목표이며,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완전하게 되는 곳, 하느님의 뜻이 더욱 신성하게 이루어지는 그러한 본거지이다.”
170:2.18
(1861-2)
예수는 신자가, 신앙에 의하여, 왕국에 지금 들어간다고 가르쳤다. 그는 다양한 강론에서 왕국 속으로 들어가는 신앙-입구에 이르기 위해 다음의 두 가지가 필수적이라고 가르쳤다:
1. 신앙, 성실성. 어린아이처럼 오는 것, 아들관계의 증여를 하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 질문이 없이 그리고 아버지의 지혜에 대한 충만한 자신감과 진정한 신뢰의-충만함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로 복종하는 것;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으로 왕국 속으로 들어오는 것; 때 묻지 않은 어린이처럼 열린-마음으로 그리고 가르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
2. 진리에 굶주림. 정의에 목이 마름, 마음의 변화,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그리고 하느님을 발견하고자 하는 동기의 획득.
170:2.19
(1861-5)
예수는 죄가 어떤 결함이 있는 자연 본성의 탄생인 아이가 아니라, 오히려 순종적이지-않는 의지에 의해 지배된 어떤 알고 있는 마음의 자손이라고 가르쳤다. 예수는 죄에 관하여, 하느님이 용서했다는 것을 가르쳤다; 우리는 그러한 용서함을, 우리가 우리 동료들을 용서하는 행동으로써 개인적으로 사용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있음을 가르쳤다. 너희가 육신으로 있는 너희 형제를 용서할 때 그것으로써 너희는, 너희 자신이 저지른 나쁜 짓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함의 그 실체를 받아들이는 수용능력을 너희 자신의 혼 안에 창조한다.
170:2.20
(1861-6)
사도 요한예수의 일생과 가르침들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할 무렵까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들이 박해의 하나의 원인이었던 하느님-의-왕국 관념에 너무도 많은 곤경을 겪었으므로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거의 내던져 버렸었다. 사도 요한은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많이 이야기했다. 예수는 그것을 “생명의 왕국”으로 자주 말했다. 그는 또한 “너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왕국”에 대하여서도 자주 언급했다. 그는 한때 그러한 체험을 “아버지 하느님과의 가족 동료관계”라고 말했다. 예수는 왕국이라는 말 대신에 다른 많은 용어로 대체하려고 찾아 나섰지만, 언제나 실패했다. 다른 여러 가운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용어를 사용했다; 하느님의 가족, 아버지의 뜻, 하느님의 친구들, 신자들의 동료관계, 사람의 형제신분, 아버지의 양 떼, 하느님의 자녀들, 신실한 자의 동료관계, 아버지의 봉사, 그리고 해방된 하느님의 아들들이었다.
170:2.21
(1861-7)
그러나 그는 왕국 관념의 사용을 회피할 수가 없었다. 50년이 넘게 지난 후에, 로마 군대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나서야, 왕국에 대한 이 개념은, 그 자체에 대한 사회적 그리고 제도적인 측면들이 급속도로 확장되고 또 결정화되어가는 그리스도교 교회에 의해서 점령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예배종파 속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3. 정의(正義)에 대한 관계
170:3.1
(1861-8)
예수는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그들이 일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세상이 보는 앞에서 그토록 허세부리면서 과시하는 그런 노예-같은 일의 정의를 능가하는 그러한 하나의 정의를, 신앙으로써, 획득해야만 한다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항상 노력했다.
170:3.2
(1861-9)
예수는 신앙,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믿음이 왕국의 문에 들어가는 열쇠라고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그는 문으로 들어가면, 모든 믿고 있는 어린이는 하느님의 강건한 아들의 충만한 모습까지 성장하기 위하여, 상승해야만 하는 정의(正義)의 진보적인 계단들이 있다는 것도 또한 가르쳤다.
170:3.3
(1861-10)
왕국의 정의의 달성이 계시되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있는 기법에 대한 숙고 안에 있다. 신앙은 하느님의 가족 속으로 들어가는 입장을 위해서 너희가 지불하는 값이다; 그러나 용서는 너희의 신앙을 입장하는 값으로 찬성하여 받아들인 하느님의 행동이다. 그리고 어느 한 왕국 신자에 의해서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접수는 명확하고도 실재적인 체험을 포함하며, 다음과 같은 네 단계, 곧 내적 정의(正義)의 왕국 단계들로 구성된다:
170:3.4
(1862-1)
1. 하느님의 용서는 사람에 의해서 그가 그의 동료들을 용서하는 바로 그만큼만 실재적으로 사용-가능하고 또한 개인적으로 체험되는 것이다.
170:3.5
(1862-2)
2. 사람은 그가 자기 동료들을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는 한, 진실로 그의 동료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170:3.6
(1862-3)
3.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그러한 사랑이 최고의 윤리이다..
170:3.7
(1862-4)
4. 그러면 도덕적 행위, 참된 정의는 그러한 사랑의 자연적인 결과가 된다.
170:3.8
(1862-5)
그러므로 왕국에의 참된 그리고 내적인 종교는 틀림없이 그리고 점점 더, 사회적인 봉사에서의 실천적인 큰길에서 그 스스로를 현시하려는 경향이 있음이 분명하다. 예수는 신자들이 사랑넘치는 봉사에 행하는 것에 종사하도록 추진하여 몰아가는 살아있는 종교를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는 종교의 자리에 윤리를 놓지 않았다. 그는 종교를 원인으로 그리고 윤리를 결과로 가르쳤다.
170:3.9
(1862-6)
그 어떤 행동의 정의로움도 동기로써 측정되어야만 한다; 선의 가장 높은 최고 형태는 그리하여 무의식적이다. 예수는 도덕이나 혹은 윤리 그 자체에 결코 관여하지 않았다. 그는 전적으로 아버지 하느님과의 안쪽으로 그리고 영적인 동료관계에 관여했으며, 그리하여 그것으로 사람을 위한 바깥쪽으로 그리고 서랑넘치는 봉사로 그 자체를 그렇게 너무나도 확실하게 또한 직접적으로 현시했다. 그는 왕국의 종교는, 어떤 사람도 자기 자신 안에 그것을 담아서 가두어 놓을 수가 없는 그러한 진정한 개인적 체험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또한 신자들로 이루어진 가족의 한 구성원이 되어간다는 의식은 불가피하게, 가족 행위의 교훈에서의 실천관행으로, 곧 형제신분을 증진시키고 확대하려는 노력 안에서 자신의 형제와 자매들에의 봉사로 인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쳤다.
170:3.10
(1862-7)
왕국의 종교는 개인적이고 개별적이다; 그 열매, 그 결과는 가족적, 곧 사회적이다. 예수는 공동체에 대조되는 것으로서 개별존재의 성스러움을 드높이려는 것을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사람이 사심-없는 봉사에 의하여 그의 성격을 발전한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사람은 그의 도덕적 본성을 그의 동료와의 사랑넘치는 관계 안에서 전개한다는 것을 또한 인지했다.
170:3.11
(1862-8)
왕국이 개별존재 안에 함께 있다는 것을 가르침으로써, 개별존재를 높이 드높힘으로써, 예수는 참된 사회적 정의(正義)의 새로운 섭리시대로 인도하는 것으로서 낡은 오래된 사회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세상이 이러한 새로운 사회의 질서를 거의 알지 못했던 것은 하늘의 왕국의 복음에서의 원칙들을 실천하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적 출중함의 왕국이 땅 위에 나아올 때, 그것은 단순히 향상된 사회적 그리고 물질적 조건으로 그 안에서 현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향상된 인간 관계들과 또한 전진하는 영적 달성들로 이루어지는 그 접근하며 다가오고 있는 시기의 특징을 나타내는, 그런 증진되고 그리고 풍성한 영적 가치들의 영광으로 그 안에서 현시될 것이다.
4. 왕국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170:4.1
(1862-9)
예수는 왕국에 대한 어떤 정밀한 정의를 결코 준 적이 없었다. 그는 어떤 한 시점에서는 왕국에서의 하나의 위상을 강론하고, 또 다른 시점에서는 그는 사람들의 가슴 안에 있는 하느님의 치세에서의 형제신분의 어떤 다른 양상을 토론하곤 했다. 이 안식일 오후 설교의 과정에서, 예수는 왕국의 적어도 다섯 위상들, 또는 신기원-시대들을 다음과 같이 유의하며 가리켰다:
1. 개별 신자와 아버지 하느님과의 동료관계에서의 영적 삶의 개인적이고 그리고 안쪽-방향으로의 체험.
2. 복음 신자들에서의 확대되고 있는 형제신분, 개별 신자들의 가슴 안에서 하느님의 영의 치세로부터 결과적으로 생기는, 증진된 도덕과 그리고 촉진된 윤리의 사회적 양상들.
3. 땅 위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위력을-펼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의 초-필사자 형제신분, 하느님의 초-인간 왕국.
4. 하느님의 뜻에서의 더욱 완전한 충족의 전망, 증진된 영적 삶과 연결된 새로운 사회적 질서의 여명─사람의 다음 시기─를 향한 전진.
5. 그 자체의 충만함으로 있는 왕국, 땅에서의 빛과 생명의 미래 영적 시기.
170:4.2
(1863-5)
그런 까닭에 우리는 주(主)가 하늘의 왕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가 이들 다섯 위상들에서의 어떤 것을 언급하는지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항상 주(主)의 가르침을 검토해야만 한다. 점차적으로 바꾸는 사람의 의지의 이런 진행과정에 따라서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인간의 결정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미가엘과 그의 관계적-연합-동료들은 마찬가지로 점차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사회적인 그리고 다른 여러 것의, 인간 진화의 전체 과정을 바꾸고 있다.
170:4.3
(1863-6)
이번 기회에 주(主)는 왕국 복음의 가장 근본적인 특색을 대표하는 다음과 같은 다섯 관점을 강조했다:
1. 개별존재에서의 출중함.
2. 사람의 체험 안에서 결정하고 있는 요소로서의 의지.
3. 아버지 하느님과의 영적 동료관계.
4. 사람에의 사랑넘치는 봉사의 최극 만족들.
5. 인간 개인성 안에서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는 영적인 것의 초월성.
170:4.4
(1863-12)
이 세상은 하늘의 왕국의 예수의 신조의 역동적인 관념들과 신성한 이상들을 결코 진지하게 또는 정직하게 시도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너희는 왕국 관념이 유란시아에서 겉보기에 명백하도록 천천히 진보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낙심해서는 안 된다. 진보적인 진화의 질서는 물질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의 양쪽 모두에 있어서 갑작스럽지만 또한 예상치 못했던 주기적인 변동들이 전제가 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육신화한 아들로서의 예수의 증여는 세계의 영적 일생 안에서 그처럼 이상하고도 또한 예상치 못했던 하나의 발생사건이었다. 왕국의 시대적 현시활동을 찾으면서, 너희 자신의 혼 안에서 왕국 확립에 영향을 주는 데 실패하는, 그러한 치명적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
170:4.5
(1863-13)
예수가 비록 왕국의 한 위상을 미래적인 것으로 언급하고, 또한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러한 사건이 어떤 세계적 위기의 한 부분으로 출현할지도 모른다고 넌지시 알렸지만;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가 아주 확실하게, 언젠가 유란시아로 돌아올 것을 여러 번 명확하게 약속했지만, 그는 이들 두 관념을 결코 긍정적으로 연결시키지 않았다는 것은 기록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는 땅에 그리고 또한 언젠가 미래의 시간에 왕국의 어떤 하나의 새로운 계시를 약속했다; 그는 또한 언젠가 이 세계에 개인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것도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이들 두 사건이 같은 의미의 동의어라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한, 이들 약속은 같은 사건으로 언급할 수도, 혹은 아닐 수도 있다.
170:4.6
(1863-14)
그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아주 확실하게 이들 두 가르침을 함께 연결시켰다. 왕국이 그들이 기대했었던 것처럼 실재적으로 물질화되는 데에 실패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미래의 왕국과 연관하는 주(主)의 가르침을 상기하면서 그리고는 다시 오겠다는 그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이들 약속은 똑같은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도약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권능과 영광으로 그리고 그것의 충만함 안에서 왕국을 확립하는 그의 즉각적인 두 번째 오는 재림에 대한 희망 안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렇게 계승된 믿음을 가진 세대들은, 영감을 주지만 한편 실망시키는 동일한 희망을 품으면서 땅에서 살았다.
5. 왕국에 대한 훗날 관념들
170:5.1
(1864-1)
하늘의 왕국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들을 요약하면서, 우리는 왕국의 개념에 덧붙여지는 특정한 훗날의 관념을 서술하도록 그리고 또한 그것이 다가 올 시기 안에서 진화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그에 따라 왕국의 예언적 예측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허락을 받았다.
170:5.2
(1864-2)
그리스도교 선전과 포교의 처음 몇 세기에 두루 걸쳐서, 하늘의 왕국의 관념은 급속도로 펼쳐나가는 그리스인 이상주의의 견해, 곧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의 그림자라는 관념─영원한 것의 시간 그림자로서의 현세적인 것─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다.
170:5.3
(1864-3)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유대인 토양에서 이방인 토양으로 이식하는 것이 표시되었던 위대한 발걸음은, 왕국의 메시아가 교회, 바울과 그의 후계자들의 활동으로부터 성장하며 나아온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조직체 그러면서 또한 필로의 관념들과 선과 악에 대한 페르시아 교리로써 보완시킨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를 두었던, 그러한 교회에서의 대속자가 되었을 때 내딛게 되었다.
170:5.4
(1864-4)
왕국의 복음의 가르침 안에서 체현되었던 예수의 관념들과 이상들은,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공표들을 점진적으로 왜곡시킴으로써, 그 실현에 거의 실패했다. 왕국에의 주(主)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커다란 경향들로 인하여 눈에 띄게 변경되었다:
170:5.5
(1864-5)
1. 유대인 신자들이 그를 메시아로 간주하기를 끈질기게 고집했다. 그들은 예수가 범-세계적이고 또한 다소간의 물질적인 왕국을 확립하기 위하여 아주 곧 실재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170:5.6
(1864-6)
2. 이방인 그리스도교인들이 바울의 교리들을 매우 일찍부터 찬성하여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그 교리들은 예수가 교회의 자녀들의 대속자, 곧 왕국의 순수하게 영적인 형제신분의 초기 개념의 새로운 그리고 제도적인 후계자들의 대속자라는 일반적인 믿음으로 점차적으로 이끌었다.
170:5.7
(1864-7)
왕국의 하나의 사회적 파생물로써의 교회는, 전적으로 자연적인 것이었으며 또한 오히려 바람직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교회의 악은 교회 그 자체의 실존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왕국에서의 예수 개념을 거의 완벽하게 대체했다는 것이다. 바울의 제도화된 교회는 예수가 선포했었던, 하늘의 왕국을 대신하는 하나의 실질적인 대용품이 되었다.
170:5.8
(1864-8)
그러나 의심하지 말라, 주(主)가 가르쳤던 바로 이 하늘의 왕국은 신자의 가슴 안에 존재하고 있으며, 아직도 이 그리스도교 교회에게는 물론, 심지어 땅 위에 있는 다른 모든 종교들, 종족들, 국가들에게─심지어 모든 개별존재에 이르기까지─ 선포될 것이다.
170:5.9
(1864-9)
예수의 가르침에서의 왕국, 곧 개별적 정의로움에서의 영적 이상과 그리고 하느님과 가지는 사람의 신성한 동료관계의 개념은, 대속자-창조자로서의 그리고 하나의 사회화된 종교적 공동체의 영적 우두머리로서의 예수의 개인의 신비적 개념 속으로 점차적으로 잠기어서 가라앉게 되었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의 형식적이고 제도화된 교회가 개별적으로 영이-인도하는 왕국의 형제신분을 대신하는, 대체자가 되었다.
170:5.10
(1864-10)
교회는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서 생긴 필연적이며 유용한 사회적 결과물이었다; 비극은, 왕국의 가르침에 대한 이 사회적인 반응이, 예수가 가르치고 또 그것을 살았던 것으로서의 실제 왕국의 영적 개념을 그처럼 충만하게 대치해 버렸다는 사실에 들어 있었다.
170:5.11
(1865-1)
유대인들에게는, 왕국이 이스라엘 종족공동체였다; 이방인들에게는 그것은 그리스도교 교회였다. 예수에게 그 왕국은, 하느님의 아버지신분을 믿는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그로써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그들의 전심을 다하는 헌신을 선언하고, 그리하여 사람의 영적 형제신분의 구성원이 되어가는 그러한 각 개별존재들의 총합이었다.
170:5.12
(1865-2)
주(主)는 왕국의 복음의 널리 펼쳐짐의 하나의 귀결로서 어떤 사회적 결과물이 세상 안에 출현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깨달았다; 그러나 그가 의도했던 것은 그러한 모든 바람직한 사회적 현시활동들은, 개별적인 신자의 이러한 내적인 개인적 체험에서의, 곧 모든 그러한 신자들 안에 내주 하면서 그들을 활성화하는 신성한 영과 함께 하는, 순수하게 영적인 동료관계와 교제에서의, 그러한 무의식적이고 또한 필연적인 파생물이나 혹은 자연적인 열매들로서 출현하리라는 것이었다.
170:5.13
(1865-3)
예수는 어떤 하나의 사회적 조직이나 또는 교회가 참된 영적 왕국의 진보를 뒤따르리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이 세례자 요한의 세례 예식을 실천-관행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진리를-사랑하는 혼, 하느님을 위하여, 정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가 신앙에 의하여 영적 왕국에 인정되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와 동시에 사도들은, 그렇게 한 신자는 세례에서의 외적 예식에 의해서 제자들의 사회적 조직체에 인정되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가르쳤다.
170:5.14
(1865-4)
예수의 즉각적인 추종자들은, 그들이 개별적인 신자의 영의 지배와 인도에 따라서 사람들의 가슴 안에서의 왕국의 확립의 주(主)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서 그들의 부분적인 실패를 인지했을 때, 그들은 왕국에서의 그의 가르침의 이상을, 눈에 보이는 사회적 조직체 곧 그리스도교 교회의 점차적인 창조로 대신하여 대체함으로써, 전적으로 잃게 되는 것으로부터 그의 가르침을 구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대체-작업의 계획을 완수했었을 때, 그들은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또한 왕국의 사실에 관련되는 주(主)의 가르침에 대한 인지를 마련하여-정하는 준비를 위하여, 그들은 왕국을 현재에서 떼어내어 미래 속에 있는 왕국으로 설정하는 일을 진행했다. 그런 일이 잘 확립되자마자, 교회는 왕국은 그리스도교인의 시기의 절정에서, 곧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는 재림 때에, 왕국이 실체 안에서 출현할 것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170:5.15
(1865-5)
이런 방법으로 왕국은 하나의 시기의 개념, 미래에 찾아오는 것이라는 관념, 그리고 지고자의 성자들의 최종적인 대속의 관념으로 되어갔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그리고 훗날의 그들 가운데에서 너무도 많은 모든 이들)은 예수의 왕국의 가르침 안에 체현되어 있는 아버지-와-아들 관념을 보는 시력을 일반적으로 잃어버렸으며, 반면에 그들은 그렇게 그 대신에 교회의 잘 조직된 사회적 동료관계로 대체시켰다. 그리하여 교회는 대부분이 하나의 사회적 형제신분이 되었으며, 그것은 영적 형제신분에 대한 예수의 개념과 이상의 자리를 효과적으로 자리바꿈 하였다.
170:5.16
(1865-6)
예수의 이상적인 개념은 대체적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주(主)의 개인적 일생과 가르침은, 그리스인페르시아인의 영원한 생명의 개념들로써 보충된, 그리고 또한 영적인 것과 대비되는 현세적인 것의 필로의 교리로써 증강된, 그러한 가르침 위에서 바울유란시아에 일찍이 존재했던 가장 진보적인 인간의 사회들 중의 하나를 세우기 위해 나섰다,
170:5.17
(1865-7)
예수의 개념은 세계의 전진된 종교들 안에서 여전히 살아있다. 바울그리스도교 교회는, 예수가 하늘의 왕국은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그리고 앞으로 아주 확실하게 그렇게 되어야 할 것으로─의도했던 것의 사회화되고 또한 인간화된 그림자이다. 바울과 그의 후계자들은 영원한 생명의 쟁점들을 개별존재로부터 교회로 부분적으로 이전시켰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이처럼 왕국의 아버지의 가족 안에 있는 개별 신자의 맏형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바울과 그리고 그가 살았던 당대의 사람들은 예수가 그 자신과 개별 신자에 관하여 밀접하게 관계시켰던 모든 영적 암시를, 신자들의 하나의 집단으로 있는 교회에 적용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개별 신자의 가슴 안에 있는 신성한 왕국의 예수의 개념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170:5.18
(1866-1)
그리고 그렇게,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교회는 커다란 곤혹스러움을 겪으면서 수고해 왔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왕국의 신비로운 힘들과 특권들, 곧 오로지 예수와 그의 영적 신자 형제들 사이에서만 행사되고 체험될 수 있는 그러한 힘들과 특권들에 대하여 감히 권리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처럼 교회 안에서의 구성원관계가 왕국에서의 동료관계를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외견상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하나는 영적이고, 다른 하나는 주로 사회적이다.
170:5.19
(1866-2)
조만간에 또 다른 그리고 더 위대한 세례자 요한이 마땅히 “하느님의 왕국이 가까이 있다.”라고 선포하면서─이것은 왕국이 신자의 가슴 안에서 지배적이고 초월적인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을 선포했던, 예수의 높은 영적 개념으로 돌아오라는 의미의 선포이다.─일어나도록 되어있다, 또한 이것은 땅에 있는 눈에 보이는 교회나 혹은 예상되는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는 재림이나 둘 모두 어떤 식으로도 언급하지 않으면서, 이 모든 일들을 행할 것이다. 예수실재적 가르침들의 부흥은 반드시 올 것이다, 그처럼 땅 위에 미가엘의 체류의 사실성에 관하여 하나의 사회-철학적 믿음의 체계를 창조하려고 몰두했던 그의 초기 추종자들의 작업을 안 했던 것으로 돌이킬 그러한 재-진술이 있을 것이다. 짧은 시간 안에, 예수관한 이런 이야기의 가르침이 예수의 왕국의 복음의 설교를 거의 밀어내고 대신 들어앉았다. 이러한 식으로, 하나의 역사적인 종교가 대신하여 자리바꿈 한 것은, 예수가 그 안에서 사람의 가장 높은 도덕적 관념과 영적 이상들을 미래에 대한 사람의 가장 숭고한 희망─영원한 생명─과 함께 혼합시켰던 바로 그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왕국의 복음이었다.
170:5.20
(1866-3)
불과 몇 세기 안에, 예수의 가르침들의 기록들의 학생들이 그토록 많은 예배종파들과 분파들로 갈라지게 된 것은, 순전히 예수의 복음이 너무나 많은-방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이 가련한 계속 분기되는-분할은 주(主)의 여러 가지 가르침들 안에서 그의 비할 데 없이 뛰어난 일생에서의 신성한 하나-됨을 분별하는데에서의 실패에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예수를 믿는 참된 신자들이 불신자들 앞에서 그들의 태도가 그렇게 영적으로 분할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지적 이해와 해석의 다양성을 가질 수도 있고, 심지어 사회화-구현에서의 다양한 등급도 가질 수가 있지만, 영적 형제신분의 부족함은 변명할 수없고 마찬가지로 책망받아야 할 것이다.
170:5.21
(1866-4)
실수하지 말라! 예수의 가르침 안에는,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슴 안에서 언제까지나 열매를 맺지 못한 채로 남아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하나의 영원한 본성이 있다. 예수가 큰 범위로 되어야 한다고 착상했던 그대로의 왕국은 땅에서 실패했다; 일정기간 동안 밖을-향하는 외향적인 교회가 그것의 자리를 차지해 왔다; 그러나 너희는 이러한 교회가 단지, 주(主)의 가르침을 이 물질적인 시기를 두루 거치며 운반하고 또한 그의 가르침이 발전을 향하여 더욱 충만한 기회를 누릴 수도 있는 그러한 더욱 영적인 섭리시대로 넘겨주기만 하는, 그 좌절된 영적 왕국의 애벌레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래서 이른바 그리스도교 교회는 그 안에서 예수의 개념의 왕국이 지금 잠들어 있는 고치가 되어 있다. 신성한 형제신분의 왕국은 여전히 살아있으며, 마치 탈바꿈으로 발전하는 덜 매력적인 창조체에서 결국에는 아름답게 펼치어 전개되면서 창발 하는 나비처럼, 그와 똑같이 분명하게 결국에는 그리고 확실하게 이 오랜 침잠으로부터 솟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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