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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0 편
알렉산드리아의 로단
160:0.1
(1772-2)
9월 18일 일요일 아침, 안드레는 앞으로 일주일 동안 아무 일도 계획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나다니엘도마를 제외한 모든 사도들이 가족을 만나거나 친구들과 함께 머물기 위하여 고향으로 갔다. 이 일주일 동안 예수는 거의 완벽한 휴식을 즐겼지만, 나다니엘도마알렉산드리아에서 온 로단이라 불리는 어떤 그리스 철학자와 토론하기 위하여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이 그리스인알렉산드리아에서 사명을 수행했었던 아브너의 연관-동료들 중의 하나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최근에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이었다. 로단은 이제 자신의 삶의 철학과 예수의 새로운 종교적 가르침을 조화시키는 과제에 진지하게 몰두하고 있었으며, 주(主)가 이 문제들에 대하여 자기와 함께 전반적으로 얘기해 주리라고 희망하면서 마가단에 왔다. 또한 그는 예수나 그의 사도들로부터 복음에 대한 원래 그대로의 그리고 권위 있는 해석을 확보하기 원했다. 주(主)로단과 그러한 토론에 들어가기를 사양하였지만, 그를 정중하게 받아들였고 그리고 즉각적으로 나다니엘도마에게 그가 하고 싶어 하는 모든 얘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과 그리고 답례로 그에게 복음에 대하여 말해주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1. 로단의 그리스 철학
160:1.1
(1772-2)
월요일 이른 아침에, 로단나다니엘도마 그리고 우연히 마가단에 있게 되었던 스물네 명가량의 신자들 집단에게 열 번의 연속으로 이어진 강연을 하였다. 이들 얘기를 압축하고 병합하여, 현대의 문체로 다시 서술하면, 다음과 같은 사색에 대한 생각들로 제시된다:
160:1.2
(1772-3)
인간의 일생은 세 가지의 큰 본능적 욕구─충동, 욕망, 매혹─를 담고 있다. 강인한 성격, 당당한 개인성은 일생의 본능적인 충동을 삶의 사회적 예술로 전향시킴으로써, 현재의 욕망을 영속적인 달성이 가능한 더욱 높은 갈망들로 변환시킴으로서만 획득되며, 한편으로 실존에서의 평범한 애착을 자신의 인습적이고 이미 확립된 관념으로부터 미(未)-탐험된 관념과 미(未)-개척된 이상의 더욱 높은 영역으로 옮겨져야만 한다.
160:1.3
(1772-4)
문명이 더욱 복합적으로 되어갈수록, 삶의 예술은 더욱 어렵게 되어갈 것이다. 사회적인 관례에 있어서 변화가 더욱 빨라질수록 성격을 개발하는 과제는 더욱 복잡하게 되어갈 것이다. 만일 인류의 진보가 계속되어 간다면, 인류는 매 열 세대마다 삶의 예술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만일 사람이 너무 재능이 뛰어나게 되어서 그가 더욱더 빠르게 사회를 복합적으로 만든다면, 삶의 예술은 더욱 짧은 시간 안에, 어쩌면 매 세대마다, 다시-통달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약에 삶의 예술에서의 진화가 실존의 기법과 보조를 맞추는 데에 실패한다면, 인간성은 삶의 단순한 충동―현재적 욕망에서의 만족의 달성―으로 신속하게 되돌아갈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성은 미성숙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사회는 충분한 성숙에 이르는 성장에서 실패할 것이다.
160:1.4
(1773-1)
사회적 성숙은 그곳에 속한 사람의 우월한 갈망들, 곧 영구적인 목표를 향한 진보적인 전진에의 더욱 풍성한 만족을 잘 제공해주는 그러한 달성을 이루려고 분투하는, 우월한 갈망에의 즐거운 행사를 위하여, 단순히 과도기적이고 현재적인 만족을 사람들이 기꺼이 포기하려는 정도와 동등하다. 그러나 사회적인 성숙에서의 참된 표식은, 이상적인 영적 실체의 미(未)-개척된 목표를 달성하려고 미(未)-탐험된 가능성의 추구에서의, 고요함을-깨트리고 에너지를-요구하는 매혹을 위하여, 편안함을-조장하는 이미-확립된 기존의 믿음과 인습적인 관념에의 매혹의 표준 밑에서, 평화롭게 그리고 만족으로 여기며 사는 권리를 포기하려고 한 민족이 기꺼이 나서는 자발성이다.
160:1.5
(1773-2)
동물들도 일생의 충동에 훌륭하게 반응하지만, 오로지 사람만이 삶의 예술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대부분이 동물적인 충동으로 사는 체험만을 달성할 뿐이다. 동물들은 오로지 맹목적이며 본능적인 충동만을 알 뿐이다; 사람은 자연적인 기능에 반응하는 이러한 충동을 초월할 능력이 있다. 사람은 지능적 예술의 높은 지평에서, 심지어 천상의 기쁨과 영적 황홀의 지평에서 살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 동물들은 일생의 목적에 대하여 그 어떤 물음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걱정이라는 것이 없으며, 자살을 저지르지도 않는다. 사람들 가운데에서의 자살은, 그러한 존재들이 순전히 실존의 동물적 단계에서 창발해왔고, 그리고는 더 나아가 그러한 인간 존재들의 탐구적인 노력이, 필사자 체험의 예술적 차원을 달성하는 데에 실패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동물들은 삶의 일생의 의미를 모른다; 사람은 의미를 이해하고 가치를 인지할 수 있는 수용능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미들의 의미에 대하여 의식한다.─그는 통찰력에 대하여 자아-의식한다.
160:1.6
(1773-3)
사람들이 모험적인 예술과 불확실한 논리의 일생을 위해 자연적인 갈망의 일생을 감히 저버리고자 할 때는, 그들은 적어도 지적인 그리고 감정적인 성숙에서 어느 정도를 달성하기까지는, 그러한 저버림의 결과로써 뒤이어 일어나는 감정적 피해─갈등, 불행 그리고 불확실성─의 필연적 위험에 고통받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해야만 한다. 낙심, 염려, 게으름은 도덕적으로 미숙하다는 적극적인 증거이다. 인간의 사회는 두 가지 문제와 직면하고 있다; 개별존재의 성숙을 달성하는 것과 그리고 종족의 성숙을 달성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성숙한 인간은 모든 다른 필사자를 즉시 부드러운 느낌과 너그러운 감정을 가지고 바라보기 시작한다. 성숙한 사람은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품는 그런 사랑과 사려 깊음을 가지고 미성숙한 대중들을 바라본다.
160:1.7
(1773-4)
성공적인 삶이란 평범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신뢰할만한 기법들을 통달하는 예술보다 더한 것도 덜한 것도 아니다. 어떤 문제라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첫 단계는 그 어려움을 찾아내고, 그 문제를 분리하며, 그것의 본성과 비중을 정직하게 인지하는 것이다. 커다란 실수는, 일생의 문제들이 우리의 깊은 두려움을 자극할 때,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의 어려움들을 인정하는 것이 오래동안-애착했던 자부심의 축소, 질투심의 용인, 또는 깊이-자리 잡은 편견을 내던져버리는 것을 필연적으로 수반할 때에는, 보통 사람들은 무사-평온에 대한 옛 환상과 보호-안전에 대한 오래동안-애착했던 거짓 느낌에 집착하기를 더 좋아한다. 오로지 용감한 개인만이 진지하고도 논리적인 마음이 발견한 것을, 기꺼이 정직하게 인정하고 두려움 없이 마주한다.
160:1.8
(1773-5)
어떤 문제라도 그에 대한 지혜롭고 효력적인 해결은 마음이, 문제 자체가 해결을 제시하도록 문제를 정리하며 나아가게 하는 그러한 실재적 요소들에 대해, 냉정하게 조사하는 것을 방해할지도 모르는 편향, 정열 그리고 다른 모든 순전히 개인적인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만 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일생 문제들의 해결은 용기와 진정성을 요구한다. 오직 정직하고 용감한 개별존재만이, 당혹하게 만들고 혼란을 주는 삶의 미로를 두루 거치면서, 두려움 없는 마음에서의 논리가 인도할 수도 있는 곳까지 용감하게 따라갈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과 혼의 해방을 이루는 것은 종교적 열정과 경계가 닿아있는 지능적 열정의 추진력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어려운 물질적 문제들과 다양한 지적 위험들이 따라다니는, 어떤 하나의 목표를 추구하는 데에 사람을 계속해서 기운차게 몰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위대한 이상의 매혹을 요구한다.
160:1.9
(1774-1)
비록 너희가 일생의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효력적으로 무장되어 있다 할지라도, 너희들로 하여금 너희 동료들로부터 가슴에서 우러난 지원과 협동을 얻게 만들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의 지혜와 개인성의 매력을 너희가 갖추지 않는 한, 너희는 도저히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 너희가 너희의 동료들을 어떻게 설득하는지, 사람들을 어떻게 설복시킬 수 있는지 배을 수 없다면, 너희는 세속적인 일이나 혹은 종교적인 일이나 어디에서도, 성공에 대한 커다란 결실을 이루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 너희는 간단히 말해서 재치와 관용을 가져야만 한다.
160:1.10
(1774-2)
그러나 나는 너희의 주(主)이신 예수로부터 문제를 해결하는 모든 방법의 가장 위대한 것을 배웠다. 내가 언급하는 것은 그가 늘 실천한 것이고, 또 너희에게도 엄중하게 가르쳤던 것으로, 경배넘치는 명상으로의 고립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교제하기 위하여 스스로 혼자서 그렇게 자주 떠나는 이러한 예수의 습관 안에서, 일상적인 삶의 갈등을 위한 강한 힘과 지혜를 모으는 것뿐만 아니라, 도덕적 그리고 영적 본성의 보다 높은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에너지를 합당하게 소유하는, 기법이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는 올바른 방법이라 하더라도, 개인성에서의 선천적인 결함들을 보상하거나 혹은 참된 정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의 부재(不在)를 대속하지는 못할 것이다.
160:1.11
(1774-3)
나는 삶의 문제에 대한 홀로 단독으로 살펴보는 이러한 시기에 스스로 몰입하기 위하여 혼자서 따로 가는 예수의 관습에 깊은 감명과 인상을 받고 있다; 이는 사회적 봉사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지혜와 힘의 새로운 비축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이는 신성과 접촉하고 있는 의식에 전체 개인성을 실재적으로 종속시킴으로써 삶의 최극의 목적을 활성화하고 심화하려는 것이다; 이는 언제까지나-변화하고 있는 삶의 실존의 상황에 자신을 조절하는 것에서의 새롭고 더욱 좋은 방법의 소유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보람되고 실제적인 모든 것들을 꿰뚫어 보는 강화된 통찰력에 그토록 필수적인 자신의 개인적 태도를 생생하게 재-구축하고 재-조절하는 것은 완수하려는 것이며,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너희의 주(主)가 진정성에서 즐겨하는 기도, “나의 뜻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에 대한 하나의 목적을 지니고 행하려는 것이다.
160:1.12
(1774-4)
너희의 주(主)의 경배넘치는 실천 관행은 마음을 새롭게 해주는 긴장-이완을 가져온다; 혼이 영감을 받도록 빛을 가져온다; 자신의 문제들에 용감하게 직면할 수 있게 만드는 용기를 가져온다; 스스로 자신을 쇠약하게 하는 두려움을 없애버리도록 만드는 자아-납득을 가져온다; 그리고 사람이 감히 하느님-같이-거룩함이 될 수 있다는 확신으로 그를 갖추게 하는, 그러한 신성과의 연합의 의식을 가져온다. 경배의 긴장-이완, 곧 주(主)에 의해 실천되었듯이 그러한 영적 교제는 긴장을 해소시키며, 갈등을 없애주고, 개인성의 전체 자원을 막강하게 증강시켜 준다. 그리고 왕국의 복음에 보태진, 이 모든 철학은 내가 이해하는 것과 같은, 새 종교를 구성하고 있다.
160:1.13
(1774-5)
선입견은 혼이 진리를 인지하지 못하도록 눈을 멀게 한다, 그리고 선입견은 오로지 자기 동료 사람들의 모든 것을-포옹하고 모든 것을-포함하는 하나의 어떤 원인을 찬미하는 데에 헌신하는 혼의 진정한 헌신으로만 제거될 수 있다. 선입견은 자아중심과 분리될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다. 선입견은 오직 자아-추구의 포기와 그리고 그 자리에 자아보다 위대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성보다도 위대한 어떤 하나의 원인─하느님을 향한 탐색, 신성의 달성─에 대해 봉사하는 만족을 탐구하는 것으로 대체함으로써만 제거될 수 있다, 개인성이 성숙하였다는 증거는, 최고의 그리고 가장 신성하게 실제인 그러한 가치들의 실현을 위하여, 그처럼 끊임없이 찾아 나서도록 인간 욕망의 변환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160:1.14
(1774-6)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는 세상 안에서, 진화하고 있는 사회 계층의 한가운데에서는, 안정되고 확립된 운명의 목표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개인성의 안정성은 오로지 살아 계신 하느님을 무한히 달성해야 할 영원한 목표로서 발견한 그리고 포옹한 그러한 자들에 의해서만 체험될 수 있다. 그래서 이처럼 사람의 목표를 시간으로부터 영원으로, 땅에서부터 파라다이스로,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신성한 것으로 옮기는 데에는, 그 사람이 재생성, 전환, 다시 태어남으로 되어야 할 것이 필요하다; 그가 신성한 영이 다시 창조한 어린아이로 되어야만 할 것이 필요하다; 하늘의 왕국의 형제신분 안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얻어야만 할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이상들이 부족한 모든 철학과 종교는 미성숙한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 철학은 너희가 전도하는 복음, 성숙된 새로운 종교, 곧 모든 미래 세대들의 이상(理想)을 대표하는, 그 복음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참된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의 이상은 최종적이며 결코 틀림이 없으며, 영원하며, 우주적이며, 절대적이며, 또한 무한하기 때문이다.
160:1.15
(1775-1)
나의 철학은 나에게 참된 달성의 실체들, 성숙의 목표를 수색하여 찾아내도록 충동과 자극을 주었다. 그러나 나의 충동은 무기력하였다; 나의 수색은 추진력이 부족하였다; 나의 탐색은 방향성구현에서의 확실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이들 결핍들은 예수의 이 새로운 복음에 의하여, 그 통찰력의 증진으로, 이상들이 높아짐으로, 그리고 목표에서 안정을 이룸으로써 더욱 풍성하게 공급되었다. 나는 이제 의심이나 걱정 없이 전심으로 영원한 모험에 들어갈 수 있다.
2. 삶의 예술
160:2.1
(1775-2)
필사자들이 함께 살아갈 수가 있는 정확히 두 가지 길이 있다: 물질적 혹은 동물적인 길과 그리고 영적 혹은 인간적인 길이다. 동물들은 한정된 길 안에서, 여러 신호나 소리를 사용하여 각기 다른 상대와 서로 교통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통에서의 그러한 형식은 의미, 가치 그리고 관념을 전달하지 않는다. 사람과 동물 사이의 한 가지 특출한 차이점은 사람이 의미, 가치, 관념 그리고 심지어 이상들을, 가장 확실하게 명시하고 또 정체화하는 상징들을 수단으로 사용하여, 그의 동료들과 교통 할 수 있다는 것이다.
160:2.2
(1775-3)
동물들은 각기 다른 상대에게 서로 관념을 교통 할 수 없기 때문에 개인성을 개발할 수 없다. 사람은 그가 관념과 이상 둘 모두에 관련하여 그의 동료들과 그처럼 교통 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성을 개발한다.
160:2.3
(1775-4)
인간의 문화를 구성하도록 하고 그리고 사람에게 사회적인 관계적-연합을 통하여 문명을 세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바로 의미들을 교통하고 또한 공유할 수 있는 이 능력이다. 지식과 지혜는 축적될 수가 있는데, 왜냐하면 이들 소유물들을 뒤이어지는 세대들에게 교통하는 사람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종족의 문화적 활동들: 예술, 과학, 종교 그리고 철학이 일어나는 것이다.
160:2.4
(1775-5)
인간 존재들 사이에서의 상징적인 교통은 사회적 집단들의 실존을 가져오도록 예정한다. 모든 사회적 집단에서의 가장 효력적인 것이 가족이며, 더욱 특정적으로는 두 분 부모들이다. 개인적인 애정은 이들 물질적인 관계적-연합들을 함께 붙잡고 있는 영적 결속이다. 그러한 효력적인 관계는 또한, 진정한 친구관계에 헌신하는 것에서 아주 풍부하게 예시되는 것처럼, 그렇게 같은 성(性)을 가진 두 개인들 사이에서도 가능하다.
160:2.5
(1775-6)
친구관계와 상호 간의 애정으로 이루어지는 이들 관계적-연합들은 사회화되고 고상하게 되는 데, 왜냐하면 그들이 삶의 예술의 더욱 높은 차원에서 필수적인 다음과 같은 사실적 요소들에 용기를 북돋우고 그리고 용이하게 하기 때문이다:
160:2.6
(1775-7)
1. 상호적인 자아-표현과 자아-납득. 많은 훌륭한 인간의 추진력은 그들의 표현을 들어주는 자가 없기 때문에 죽어 버린다. 그런 까닭에 사람이 혼자가 되어 있는 것은 참으로 좋지 않다. 인지에서의 어느 정도와 그리고 깊은 이해에서의 얼마만큼을 받는 것은 인간 성격의 개발에 필수적인 것이다. 한 가정에서의 진정한 사랑이 없이는, 어떤 어린아이도 정상적인 성격의 개발을 충만하게 성취할 수 없다. 성격은 단순히 마음이나 도덕보다도 더 큰 그 어떤 것이다. 성격을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모든 사회적 관계들 중에서 가장 효력적이고 이상적인 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지적인 결혼생활의 상호 간의 포옹 안에서 애정이 넘치고 그리고 납득하는 친구관계이다. 결혼은, 그 다양한 관계들과 함께, 강한 성격의 개발에 필수 불가결한 그러한 정교하고 값진 추진력과 그리고 보다 높은 동기들을 이끌어내도록, 최상으로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주저하지 않고 가정생활을 찬미하는데, 이는 너희의 주(主)가 아버지-자녀 관계를 새로운 이 왕국 복음의 바로 그 주춧돌로서 지혜롭게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의 가장 높은 이상들을 다정하게 포옹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그러한 관계의 공동체는 너무나 가치가 있고 또 체험을 만족시키는 것이어서 그것의 소유를 위한 것이라면 어떤 값, 어떤 희생, 또는 대가도 치를 가치가 있다.
160:2.7
(1776-1)
2. 혼들의 연합─지혜의 동원. 모든 인간은 조만간에 이 세상에 대한 어떤 특정한 개념과 다음 세상에 대한 어떤 특정한 환상을 획득한다. 일시적인 실존의 이들 관점들과 영원한 전망들을 하나로 연합하는 것은 이제 개인성 관계적-연합을 통하여 가능해졌다. 그래서 한 사람의 마음은 다른 사람의 통찰에서의 많은 것을 얻음으로써 그 영적 가치를 증강시킨다. 사람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각각의 영적 소유물을 한 곳에 모아 놓음으로써 혼을 풍성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바로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그 언제까지나-현존하는 성향들, 곧 시야의 왜곡, 관점의 편견, 그리고 판단의 편협에, 희생자가 되는 그러한 성향을 피할 수 있다. 두려움, 질투, 그리고 자만은 다른 마음들과의 친밀한 접촉을 통해서만 막을 수 있다. 나는 너희의 주(主)가 왕국 확장을 위한 수고에 너희를 결코 혼자서 내보내지 않는 사실에 너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그는 항상 너희를 둘씩 둘씩 내보낸다. 그리고 지혜는 초(超)-지식이기 때문에, 사회적 집단들은 작든지 크든지 간에, 지혜의 연합 안에서, 모든 지식들을 상호적으로 공유하는 일이 일어난다.
160:2.8
(1776-2)
3. 삶에 대한 열렬한 정성. 고립은 혼의 에너지 충전을 소진시키는 경향이 있다. 동료들과의 관계적-연합은 삶에 대한 열정을 다시-새롭게 하는데 필수적이며 인간 삶의 더욱 높은 차원으로의 상승에서, 결과로써 따라오는 그러한 전투를 싸울 용기를 유지하는데 필수 불가결하다. 친구관계는 기쁨을 강화하고 일생의 승리들을 더욱 영광스럽게 한다. 사랑넘치고 그리고 친밀한 인간의 관계적-연합은 그 쓰라림의 많은 슬픔과 고초의 괴로움을 깨끗이 닦아 없애는 경향이 있다. 친구의 현존은 모든 아름다움을 강화하고 모든 선을 드높인다. 사람은 지적 상징들에 의해 친구들을 깊이 이해하는 수용능력을 촉진하고 확장할 수 있다. 인간의 우정에 대한 최고의 기쁨 중의 하나는 상상력의 상호적 자극-작용에의 이런 힘과 가능성이다. 위대한 영적 힘은 하나의 공통되는 원인에 전심을 다한 헌신에의 의식, 조화우주 신(神)에 대한 상호적인 충성 안에 선천적으로 있다.
160:2.9
(1776-3)
4. 모든 악에 대항하는 강화된 방어. 개인성 관계적-연합과 상호 간의 애정이, 악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보호 대비책이다. 곤경, 슬픔, 실망, 패배를 혼자서 견딜 때에는 더욱 고통스럽고 더욱 낙담이 된다. 관계적-연합 자체가 악을 정의로 변질시키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것은 찌르는 고통을 크게 줄어들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너희의 주(主)는 “슬퍼하는 자는 행복하다”라고 말했다.─만일 어떤 친구가 옆에 있다면 그런 것이다. 너희가 다른 사람의 복지를 위하여 살고 있고, 그리고 이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너희의 복지와 향상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지식 안에는 긍정적인 강한 힘이 있다. 사람은 고립으로 그 안에서 시들어간다. 인간 존재들이 시간의 일시적 활동행위만을 바라볼 때, 어김없이 낙심하게 된다. 현재가, 과거와 미래로부터 분리되었을 때는, 분통이 터지도록 하찮은 것이 된다. 단지 영원의 순환계를 힐끗 보는 것만이, 사람이 자신의 최선을 행하도록 영감 받을 수 있고, 또한 자신 안에 있는 최선에 그것을 최대한으로 행하려고 도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이 자신의 최선을 다할 때, 그는 다른 이들의 좋은 것, 시간과 영원 안에 있는 그의 동료 거주민들의 좋은 것을 위하여 가장 사심-없이 살아간다.
160:2.10
(1777-1)
내가 반복하자면, 영감을 주고 그리고 고상하게 만드는 그와 같은 관계적-연합은 인간의 결혼 관계 안에서 그 이상적인 가능성을 발견한다. 많은 것들이 결혼 생활 바깥에서 달성되는 것은 참이고 그리고 또한 많고 많은 결혼들이 이러한 도덕적인 그리고 영적인 열매를 맺는 데에 철저하게 실패한다. 인간 성숙을 가져오는 이러한 우월한 동반자 삶보다 더욱 낮은 어떤 다른 가치들을 찾아 나서는 그러한 자들이 결혼에 들어가는 경우가 너무나도 자주 있다. 이상적인 결혼은 감상에서의 요동과 그리고 단순한 성적 이끌림에서의 변덕스러움보다는 무언가 더욱 안정된 어떤 것 위에 바탕을 이루어야만 한다; 그것은 진정 어린 그리고 상호적인 개인의 헌신에 기초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가 그러한 신뢰할만하고 효력적인 인간의 관계적-연합에서의 작은 단위들을 그런 식으로 세울 수가 있다면, 이들이 총합으로 모일 때, 세상은 위대하고 영화로운 사회적 구조, 필사자 성숙의 문명을 목격할 것이다. 그러한 종족은 “땅에는 평화요 사람들 사이에 선한 뜻”이라는 너희 주(主)의 이상에서의 무언가를 실현하기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회가 완전하거나 악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것은 성숙의 안정화-달성에 다가갈 것이다.
3. 성숙의 매혹들
160:3.1
(1777-2)
성숙을 향한 노력에는 일을 필요로 하며 그리고 일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는 힘이 어디로부터 오는가? 물리적인 것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지만, 주(主)가 꼭 맞게 바로 말하였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수 없다.” 정상적인 몸과 상당히 좋은 건강의 소유가 허락되었다면, 그다음에 우리는 또한 사람의 잠자고 있는 영적 기세를 불러 깨워서 나오도록 할 자극으로 활동할, 매혹들을 찾아야만 한다. 예수하느님께서 사람 안에 살아 계시다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람을 설득하여 이러한 신성과 무한에의 혼에-결속된 힘을 풀어놓아 줄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사람들을 설득하여, 하느님이 우리 자신의 혼을 일깨워 다시-새롭게 북돋게 하려고 우리 안에서 솟아오르고 한편으로는 밖을 향해 통과하여 수없이 많은 다른 혼들을 깨우치고, 들어 올리고, 축복하려는 목적에 봉사할 수도 있게 하는, 그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도록 설득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내가 너희의 혼 속에 누워 동면하고 있는 이 잠재 힘들을 최선으로 깨울 수 있겠는가? 한 가지는 내가 확신한다: 감정적 흥분은 이상적인 영적 자극이 아니라는 것이다. 흥분은 에너지를 증강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오히려 마음과 몸 둘 모두의 힘을 소진시킨다. 그렇다면 이 큰 일들을 행할 수 있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가? 너희의 주(主)를 바라보자. 우리들이 여기에서 에너지를 내어 보내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언덕에 올라서 힘을 취하고 있다. 이런 모든 문제의 비밀은 영적 교제 안에, 경배 안에 싸여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그것은 명상과 긴장-이완의 병합된 문제이다. 명상은 마음과 영이 접촉하도록 한다; 긴장-이완은 영적 접수성을 위한 수용능력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렇게 약한 것을 강한 힘으로, 두려움을 용기로, 자아의 마음을 하느님의 뜻으로 교체하는 이것이 경배를 이룬다. 적어도 이것이 철학자가 그것을 보는 길이다.
160:3.2
(1777-3)
이들 체험이 자주 반복되면 습관, 곧 강한 힘을-주는 경배-넘치는 습관으로 결정화되고, 그리고 그러한 습관은 결국에는 그들 자신을 영적 성격으로 형성해 주며, 그러한 성격이 마침내 그의 동료들에 의해 성숙한 개인성으로 인지된다. 이러한 실천 관행들은 처음에는 어렵고 시간이-소비되는 것이지만, 그것들이 습관적이 되면, 곧 편안해지고 동시에 시간이-절약된다. 사회가 점점 복잡해질수록, 그리고 문명의 매혹이 배로 늘어날수록, 하느님을-아는 개별존재들은 자신들의 영적 에너지들을 보전하고 증강시키려고 고안된 그러한 보호하는 습관적 실천관행들을 형성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시급하게 될 것이다.
160:3.3
(1778-1)
성숙의 달성을 위한 또 하나의 필요한 조건은 늘 변화하고 있는 환경에 대한 사회적 집단들의 협동하는 조절작용이다. 미-성숙한 개별존재는 자기 연관-동료들의 반감을 일으킨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자기 친구들로부터 가슴에서 우러나는 협동을 얻으며, 그로 인하여 그의 일생의 노력의 결실들을 여러 배로 거둔다.
160:3.4
(1778-2)
나의 철학은, 정의(正義)에서의 나의 개념을 방어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내가 싸워야만 하는 시절이 있다고 내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주(主)가, 개인성에서의 더욱 성숙된 유형으로, 재치와 관용의 그의 우월하고 매력 있는 기법으로 똑같은 승리를 쉽고도 은혜롭게 얻을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가 올바름의 권리를 위하여 싸울 때, 우리 모두는 너무나 자주, 승리자와 패배자 둘 모두가 좌절을 겪는 것으로 판명된다. 나는 주(主)가 바로 어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잠긴 문을 두루 통해서 들어가려고 찾아 나설 때, 현명한 자는 그 문을 부수기보다는 그 문을 열기 위한 열쇠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너무나 자주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이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에게 확신시키기 위해서 싸움에 빠지곤 한다.
160:3.5
(1778-3)
이 새로운 왕국의 복음은 더욱 높은 삶을 위한 하나의 새롭고도 더욱 값진 격려를 준다는 점에서 삶의 예술에 커다란 봉사를 제공한다. 그것은 운명의 새롭고도 드높여진 목표, 곧 최극 일생 목적을 제시한다. 그리고 실존에서의 영원하고 신성한 목표의 이들 새로운 개념들은 그들 스스로가, 사람의 더욱 높은 본성 안에 거주하고 있는 바로 그 최선의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초월적 자극이다. 지능적 생각의 모든 산꼭대기에는 마음을 위한 긴장-이완, 혼을 위한 강한 힘, 영을 위한 교제가 발견되도록 되어 있다. 높은 삶의 그러한 유리한 지점으로부터, 사람은 생각의 낮은 차원─염려, 질투, 시기, 원한, 미-성숙한 개인성의 자부심─의 물질적 짜증스러움을 초월할 수가 있다. 이처럼 높이 상승하는 혼들은 삶의 사소한 일들의 역류시키는 갈등들의 군집으로부터 그들 스스로를 구원하며, 그리하여 영 개념과 천상의 교통의 더욱 높은 흐름의 의식을 달성하려고 자유롭게 된다. 그러나 일생 목적은 쉽고 그리고 과도기적인 달성을 추구하는 유혹으로부터 방심하지 말고 수호되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일생 목적은 광신주의의 재앙을 일으키는 위협들에 면역성을 갖추기까지 육성되어야만 한다.
4. 성숙의 균형
160:4.1
(1778-4)
너희는 영원한 실체들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한 곳만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면서, 한편으로 현세적 삶에서의 필요한 것들을 위하여 잠정적-마련도 준비하여야만 한다. 영이 우리의 목적지이지만, 한편으로 육체는 하나의 사실이다. 삶의 필수품들이 우연한 사건으로 우리 손에 굴러 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것들을 위하여 지능적으로 일해야만 한다. 일생에는 두 가지 주요 문제가 있다: 현세적인 삶을 이루어가는 것과 영원한 생존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삶을 이루어가는 문제도 참으로 이상적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종교가 필요하다. 이들은 둘 모두가 아주 개인적 문제들이다. 참 종교는, 사실상, 개별존재로부터 분리되어 기능하지 않는다.
160:4.2
(1778-5)
내가 보는 바로는 현세적 일생의 필수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좋은 물리적 건강
2. 맑고 깨끗한 생각
3. 능력과 기술
4. 재산─일생의 물건들
5. 좌절을 견디는 힘
6. 문화─교육과 지혜
160:4.3
(1779-1)
심지어 육체적인 건강과 능률에 관한 물리적 문제들일지라도 우리 주(主)의 가르침이 지닌 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최선으로 해결된다: 사람의 육체와 마음은 하느님들의 선물, 사람의 영이 되어가는 하느님의 영이 내주 하는 장소이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은 물질적인 것들과 영적 실체 사이의 중재자가 된다.
160:4.4
(1779-2)
일생에서 바람직한 것들을 자신의 몫으로 확보하는 데에는 지능이 필요하다. 자신의 일상생활 활동에서 신실하기만 하면 재물의 보상이 보장될 것이라는 생각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특별한 경우 또는 우연히 부를 획득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현세적인 일생의 물질적 보상은 어떤 확실한 잘 조직된 경로 안에서 흐르는 것이 발견되며, 이 경로들에 접속하는 자들만이 그들의 현세적인 노력에 대하여 좋은 보상을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고립되거나 개별적인 경로들 속에서 부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모두 결국 가난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계획이 세계적인 번영에 필수적인 것이다. 성공은 자기 일에 헌신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물질적 부의 어느 한 경로에서 한 부분으로 활동해야 한다. 만일 너희가 현명하지 못하면, 너희가 일생동안 헌신적인 일생을 살아도 물질적인 보상이 없을 수 있다; 만일 너희가 부의 흐름으로부터 우연히 수익을 얻었다면, 너희의 동료들에게 가치 있는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치 속에 빈둥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160:4.5
(1779-3)
능력은 물려받는 선천적인 것이지만 한편, 기술은 습득하는 것이다. 어떤 한 가지 일을 능숙하게 잘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일생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기술은 삶의 만족에서의 실제적인 근원 중의 하나이다. 능력이란 선견(先見), 멀리 내다보는 시야를 지닌 재능을 암시한다. 정직하지 않은 성취의 그 유혹하는 보상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 정직한 노력에 선천적으로 들어있는, 그 훗날의 보상을 위하여 기꺼이 수고하라. 지혜로운 자는 수단과 목적을 구분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때때로 미래에 대한 과도한 계획이 그 자체의 높은 목적을 좌절시킨다. 즐거움을 찾는 자로서, 너희가 즐거움의 소비자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항상 그러한 생산자가 되려는 표적이 있어야만 한다.
160:4.6
(1779-4)
너희가 자신의 기쁨과 계몽을 위해 뜻대로 회상할 수 있는, 강함을-주고 가치를-지닌 일생의 에피소드들을, 성스러운 믿음으로 지니도록 너희의 기억을 단련시켜라. 그리하여 너희들 자신 안에 그리고 너희 자신을 위하여, 아름다움(美), 선(善), 그리고 예술적 장관의 저장 전시관을 세우라. 그러나 모든 기억들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은 빼어난 친구관계에서의 엄청난 순간에의 보물로 간직된 회상이다. 그리고 이들 기억에서의 모든 보물들은 영적 경배의 풀어놓는 손길 밑에서 가장 소중하고 그리고 드높이는 영향력을 내뿜으며 방출한다.
160:4.7
(1779-5)
그러나 만일 너희가 실패를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삶은 현실적 실존의 짐이 될 것이다. 좌절에는 고귀한 혼이 반드시 습득하는 어떤 예술이 들어있다; 너희는 당당하게 지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너희는 실망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실패를 인정하는 것에 결코 주저하지 말라. 속이는 미소와 명랑하게 보이는 낙천주의로 애써 실패를 감추려 시도하지 말라. 성공을 주장하는 것은 항상 듣기 좋지만, 마지막 결과는 끔찍하다. 그러한 기술은 비-실체의 세계를 창조하도록 직접적으로 이끌고 또한 궁극적 망상의 필연적인 파괴로 이끈다.
160:4.8
(1779-6)
성공이 용기를 낳고 자신감을 증대시켜 주기는 하지만, 지혜는 오직 자신의 실패로 인한 결과에 조절하는 체험으로부터 나온다. 실체에 대해 낙천적 환상을 선호하는 자는 결코 지혜롭게 될 수 없다. 오직 사실을 마주 보고 그것들을 이상에 맞게 조절하는 자만이 지혜를 성취할 수 있다. 지혜는 사실과 이상을 모두 포옹하며, 그리하여 철학에서의 불모의 두 극단─사실을 배제하는 이상주의자와 영적 전망이 결여된 물질주의자─에 헌신하는 자가 되는 것에서 사람을 구해 준다. 성공에 대한 계속적인 거짓 환상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일생의 투쟁을 겨우 유지할 수 있는 소심한 혼들은, 자기들만의 환상의 세계에서의 꿈에서 궁극적으로 깨어날 때에, 실패를 당하고 패배를 체험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160:4.9
(1780-1)
그리고 최극 영향을 발휘하는 종교에서의 멀리까지-미치는 환상은 실패에 대처하고 패배에 적응하는 이러한 일에서 생긴다. 우주를 탐구하려는 영원한 탐험을 개시한 하느님을-찾아나서는 사람이 체험하는 것들 안에서, 실패는 다만 하나의 교육적 에피소드─지혜 습득을 연마하는 실험─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패배는 단지 우주 실체의 높은 차원을 획득하기 위한 하나의 새로운 도구일 뿐이다.
160:4.10
(1780-2)
하느님을-찾아나서는 사람의 생애는, 비록 현세의-일생 사업 전체가 압도하는 실패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해도, 각각의 일생의 실패가 지혜의 교양과 영적 성취의 결실을 낳는 것으로 제시된다면, 영원의 빛 안에서는 하나의 위대한 성공임이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지식, 교양 그리고 지혜를 혼동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 그것들이 일생과 관련되기는 하지만, 방대하게 서로 다른 영적 가치들을 나타낸다; 지혜는 언제까지나 지식을 지배하고 항상 교양을 영화롭게 한다.
5. 이상(理想)의 종교
160:5.1
(1780-3)
너희는 나에게 너희의 주(主)가 인간의 진정한 종교를 영적 실체와 가지는 개별존재의 체험으로 간주한다고 말하였다. 나는 종교를, 어떤 사람이 모든 인류가 경의를 표하고 헌신을 드릴만 하다고 여기는 어떤 무언가에 대하여 반응하는 그의 체험으로 간주해왔다. 이런 감각에서 종교는, 실체의 이상들에서의 우리의 가장 높은 개념을 대표하고 그리고, 영적 달성에서의 영원한 가능성을 향해 우리 마음이 가장 멀리 도달할 것을 나타낼 수 있는 것에 대한, 우리의 최극 헌신을 상징한다.
160:5.2
(1780-4)
사람들이 부족적 감각, 민족적 감각 또는 인종적 감각 안에서 종교에 반응할 때는,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집단 밖에 있는 자들을 참으로 인간적이 아니라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종교적인 충성심의 대상이 언제나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 마땅한 존재로서 바라본다. 종교는 결코 단순히 지적인 믿음이나 철학적인 추론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종교는 언제나 그리고 언제까지나, 일생의 상황에서의 반응의 양식이다; 그것은 행위의 일종이다. 종교는 우리들이 우주적인 찬미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실체에 대한 경건한 생각, 느낌, 그리고 행동하는 것을 포옹한다.
160:5.3
(1780-5)
만일 어떤 무언가가 너희의 체험 안에서 하나의 종교가 되어왔다면, 너희들 자신이 이미 그 종교의 활발한 전도자가 되어왔음이 자아-명백한 것인데, 이는 너희가, 너희 종교의 최극 개념을 모든 인류, 모든 우주 지능 존재들이 마땅히 경배할만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너희가 너희의 종교의 적극적이고 사명을 가진 전도자가 되지 못한다면, 너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 오로지 전통적인 믿음이거나 단순한 지적 철학 체계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너희는 자아-기만에 있는 것이다. 만일 너희의 종교가 영적 체험이라면, 너희의 경배 대상은 우주적인 영 실체이자 그리고 너희의 모든 영성화된 개념들의 이상이어야만 한다. 나는 두려움, 감정, 전통, 그리고 철학에 기초하고 있는 모든 종교들을 지적 종교로 정의하고, 반면에 참된 영 체험에 기초를 둔 그러한 종교를 참된 종교로 정의하곤 한다. 종교적 헌신의 대상은 물질적인 또는 영적인 것이거나, 참된 또는 거짓된 것이거나, 실제적 또는 비실제적인 것이거나, 인간적인 또는 신성한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들은 선하거나 또는 악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수가 있다.
160:5.4
(1780-6)
도덕성과 종교가 필연적으로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도덕의 체계가 경배의 대상을 파악함으로써 하나의 종교가 될 수도 있다. 종교는 충성심과 최극 헌신에 대한 우주적 호소력을 잃어버림으로써 하나의 철학 체계나 또는 어떤 도덕의 규범으로 진화할 수도 있다. 종교적 충성심에서의 최극 이상을 구성하고 그리고 경배하는 자들의 종교적 헌신을 받는 이러한 것, 이러한 존재, 이러한 상태, 혹은 실존에서의 이러한 질서, 또는 그에 대한 달성의 가능성이, 하느님이시다. 영 실체의 이런 이상(理想)에 적용되는 그 이름에 관계없이, 그것은 하느님이시다.
160:5.5
(1781-1)
참된 종교의 사회적인 특징들은 개별존재를 전향시키고 또한 세계를 변환시키려고 변함없이 찾아 나선다는 사실들 속에 있다. 종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이상, 곧 문명에서의 가장 성숙된 제도들의 가장 높은 사회적 관습 안에서 체현되어 있는 그러한 윤리와 도덕의 알려져 있는 표준들을 훨씬 초월하는, 이상들이 실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종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이상들, 아직 탐험되지 않은 실체들, 초인간적 가치들, 신성한 지혜, 그리고 참된 영의 달성을 향하여 뻗어 나아간다. 참된 종교는 이 모든 것을 성취한다; 그 외의 다른 모든 믿음들은 참된 종교라는 그러한 이름으로 불릴 가치가 없다. 영원한 하느님에 대한 최극의 그리고 숭고한 이상이 없이는, 너희는 진정한 영적 종교를 가질 수 없다. 이러한 하느님이 없는 종교는 하나의 사람의 발명품이요, 생명 없는 지적 믿음이요 그리고 의미 없는 감정적 예식들로 이루어진 인간적인 제도이다. 종교가 그 헌신의 대상으로 위대한 이상을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비(非)-실체성의 이상들은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개념은 착각이다. 인간적 달성에서의 쉽게 가능성의 영향을 받는 유일한 이상들은 영원한 하느님의 영적 사실 안에 내재하는, 무한한 가치의 신성한 실체들이다.
160:5.6
(1781-2)
하느님이라는 단어, 곧 하느님에의 이상과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하느님에의 관념은, 어떤 종교가 아무리 우연하게 유치하거나 또는 거짓되거나 그에 상관없이, 그 종교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 관념은 모든 것, 그것을 품는 자들이 그런 종교를 만들려고 선택할 수 있는 어떤 것도, 그 관념이 될 수 있다. 하급 종교들은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관념을 인간의 가슴에서의 자연적 상태에 맞추기 위하여 다듬어서 형상을 갖춘다; 상급 종교들은 참된 종교의 이상들에서의 요구에 맞추기 위하여. 인간의 가슴이 변화될 것을 요구한다.
160:5.7
(1781-3)
예수의 종교는 경배의 관념에 대하여 우리들이 이전에 가졌던 모든 개념을 초월하는데, 그는 경배 안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무한한 실체에의 이상(理想)으로서 묘사할 뿐만 아니라, 또한 땅에서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기를 선택하여, 그것으로서 하느님과의 아들관계 그리고 사람들과의 형제신분을 수락한다고 인정하는 모든 필사 창조체들이, 이 가치들의 신성한 근원과 우주의 영원한 중심을 참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선언한다. 이것은, 내가 말하건대, 세상에 알려진 것들 중에서 가장 높은 종교의 개념이며 그리고 나는, 실체들의 무한성, 가치들의 신성, 그리고 우주적 달성들의 영원성을 포옹하는 이 복음보다 더 높은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한 개념은 최극과 궁극에 대한 이상주의의 체험을 성취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160:5.8
(1781-4)
나는 너희의 주(主)의 이 종교에서의 더할 나위 없는 이상들로 인하여 신비롭게 매료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나는 영 실체들에 대한 이런 이상들이 달성될 수 있다는 그의 공표에 대한 나의 믿음을 고백하기까지 강력하게 감동되었다; 그것은 너희와 내가, 궁극적으로는 파라다이스의 현관에 도달할 것이라는 그의 확실성에서의 보장과 함께, 우리가 이 길고도 영원한 탐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형제들이여, 나는 신자이며, 나는 이미 항해를 시작했다. 나는 이 영원한 모험에 너희와 함께 나의 길을 가고 있다. 주(主)는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왔다고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길을 보여줄 것임을 말한다. 나는 그가 진리를 말한다고 충만하게 설득되고 있다. 나는 최종적으로 영원한 우주 아버지와 떨어져서는, 달성할 수 있는 실체의 이상들이나 완전의 가치들은 없다고 확신된다.
160:5.9
(1781-5)
그래서 나는 다만 실존의 하느님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실존 가능성의 하느님을 경배하려고 왔다. 그러므로 최극 이상에 대한 너희의 헌신은, 그 이상이 실제적인 것이라면, 사물들과 존재들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우주들의 이 하느님에게 대한 헌신이 되어야만 한다. 어떤 다른 하느님도 없으니, 이는 그 어떤 다른 하느님도 있을 가능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하느님들은 상상으로 꾸며낸 것이고, 필사자 마음의 환상이며, 거짓된 논리의 왜곡이며, 그러한 것들을 창조하는 자들의 자아-기만적인 우상들이다. 물론, 너희는 이 하느님 없이도 종교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만일 너희가 살아 있는 하느님에의 이 이상의 실체 대신에 하느님 단어로 대체하려고 추구한다면, 이상의 자리, 곧 신성한 실체의 자리에 어떤 하나의 관념을 집어넣음으로써 오로지 너희 자신을 속여 왔을 뿐이다.
160:5.10
(1782-1)
나는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최상에 도달한 종교를 본다. 이 복음은 우리가 참 하느님을 찾아 나서고 그리고 그를 발견하도록 해 준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늘의 왕국으로 들어가는데 필요한 값을 기꺼이 지불하고 있는가? 우리들은 다시 태어나려고, 다시-만들어지려고 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아-파괴의 그리고 혼을 다시-건설하는 혹독하고 어려운 과정에 기꺼이 복종하고 있는가? 주(主)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그것을 잃을 것이다. 내가 평화를 가져다주려고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혼의 투쟁을 주려고 왔다.” 그렇다, 우리가 아버지의 뜻에 전념하는 값을 지불한 후에, 봉헌된 삶의 이러한 영적 경로 안에서 걷기를 계속한다면, 우리는 커다란 평화를 체험한다.
160:5.11
(1782-2)
우리는 지금 참으로 실존의 알려진 계층의 매혹들을 저버리고 있으면서, 한편으로 우리는 신성한 실체의 더욱 높은 이상주의의 영적 세계 안에서 모험하는 미래 일생의, 그 알려지지 않고 탐험되지 않은 실존의 계층에서의 매혹들에 관한 우리의 탐구에 아낌없이 전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동료들에게 예수의 종교의 이상주의의 실체에 대한 이 개념들을 전달하는 데 사용할 의미의 상징들을 찾고 있으며, 또한 모든 인류가 이 최극의 진리의 공동 사회적 전망으로 말미암아 전율하게 될 그 날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할 것이다. 바로 지금, 초점을 맞춘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우리 가슴속에 간직된 것처럼, 하느님은 영이다; 그것은 친구들에게 전한 것처럼, 하느님은 사랑이다.
160:5.12
(1782-3)
예수의 종교는 살아 있는 영적 체험을 요구한다. 다른 종교들은 전통적인 믿음들, 감정적인 느낌, 철학적인 의식,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 이루어져 있을 수 있지만, 주(主)의 가르침은 실제적 영 진보에서의 실재적 차원들에서의 달성을 요구한다.
160:5.13
(1782-4)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충동의 의식은 참된 종교는 아니다. 하느님을 경배하려는 감정적 느낌도 참된 종교가 아니다. 자아를 저버리고 하느님을 섬기려는 신념의 지식도 참된 종교가 아니다. 다른 모든 것들 중에서 이 종교가 최상이라는 논리적 이론의 지혜는 개인적 그리고 영적 체험으로서의 종교가 아니다. 참된 종교는 전심을 다해서 신앙에서-받아들이는 것의 실체 그리고 이상주의와 연관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달성의 운명과 실체에도 연관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진리의 영의 계시에 의하여 우리에게 개인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
160:5.14
(1782-5)
이렇게 하여 예수의 복음을 믿는 신자가 되었던 자, 자기 민족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의 하나인, 그리스 철학자의 강론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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