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번호 | 복귀
제 144 편
길보아와 데카폴리스에서
144:0.1
(1617-2)
99월과 10월은 길보아산 비탈진 곳에 세운 한적한 천막에서 물러나 지냈다. 예수는 9월 한 달 동안 이곳에서 자신의 사도들과 함께 홀로 지내면서 그들에게 왕국의 진리들에 관한 가르침과 지시를 주었다.
144:0.2
(1617-2)
예수와 사도들이 이때 사마리아데카폴리스의 경계인 이 지역으로 물러나서 있는 데에는 몇 가지의 이유들이 있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 통치자들이 매우 적대적이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여전히 요한을 감옥에 잡아둔 채, 그를 석방하는 것과 처형하는 것 두 가지 모두를 두려워하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요한예수가 어떤 면에서든지 관계적-연합을 이루고 있다는 의심을 계속 품었다. 이들 조건들은 유대 또는 갈릴리 지방 어느 곳에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시도하는 것이 지혜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었다. 그 외에도 세 번째 이유가 있었다: 요한의 제자들의 영도자들과 예수의 사도들 간에 긴장감이 서서히 증강하고 있었는데, 신자들의 수가 늘어가면서 점점 더 나빠졌다.
144:0.3
(1617-3)
예수는, 가르침과 설교에 있어서는 이제 예비적인 일들이 거의 끝났다는 사실, 다음 움직임은 그의 지상에서의 일생의 충만하고도 최종적인 노력의 시작이 포함되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리고 그는 이러한 일의 수행을 개시하는 데에 어떤 면에서도 세례자 요한에게 시련을 주거나 곤란을 겪게 하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다. 따라서 예수는 한동안 물러나서 있으면서, 사도들을 자세히 연습시키는데 시간을 보내고, 그 다음에는 요한이 처형을 당하거나 아니면 석방되어서 연합된 노력에 그들과 합칠 때까지는, 데카폴리스의 도시들에서 조용히 일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1. 길보아에서의 야영생활
144:1.1
(1617-4)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열두 사도들은 예수에게 더욱 헌신하게 되었으며, 왕국의 일에 점점 더 전념하게 되었다. 그들의 헌신은 대체적으로 개인적 충성의 문제였다. 그들은 그의 여러-방면에 걸친 가르침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의 본성이나 혹은 이 세상에서의 그의 증여의 중요한-의미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144:1.2
(1617-5)
예수는 그들이 물러나서 있는 세 가지 이유들을 사도들에게 분명하게 알려 주었다:
1. 왕국 복음에 대한 그들의 납득과 신앙을 확인하기 위하여.
2. 유대갈릴리 지방에서 자신들의 일에 대한 반대가 잠잠해 지기를 기다리기 위하여.
3. 세례자 요한의 숙명을 기다리기 위하여.
144:1.3
(1617-9)
길보아에서 머무는 동안, 예수는 열두 사도들에게 자신의 초기 일생과 헤르몬 산에서의 체험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또한 자신의 세례 직후 언덕에서의 40일 동안 일어났던 것에 관하여 어느 정도 계시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이들 체험들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직접 당부하였다.
144:1.4
(1618-1)
이 9월의 주간들 동안, 그들은 휴식과 방문을 하며 지냈고, 예수가 처음에 자신들을 봉사하자고 부른 이래로 그들이 겪은 체험들을 되새겼고, 그때까지 주(主)가 자신들에게 가르치셨던 것들을 조화-협동시키기 위해 진지한 노력에 몰두했다. 그들 모두는 이것이 오랫동안 휴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임을 어느 정도 눈치채었다. 그들은 유대 또는 갈릴리 지방에서 곧 있을 자신들의 대중을 위한 수고가, 다가오는 왕국에 대한 최종적 선포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왕국이 왔을 때, 그것이 과연 어떤 것이 될 것인가에 관한 확실한 관념을 거의 또는 전혀 갖고 있지 못하였다. 요한안드레는 왕국이 이미 와 있다고 생각하였다; 베드로야고보는 아직은 오지 않았다고 믿었다; 나다니엘도마는 자신들은 어리둥절하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마태, 빌립, 열심당원 시몬은 확실하지 않았고 혼동되어 있었다; 쌍둥이 형제는 다행히도 논쟁을 몰랐다; 그리고 가롯 유다는 침묵했고,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144:1.5
(1618-2)
이때에 예수는 야영지 가까이에 있는 산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이따금씩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갔지만, 혼자서 기도나 교제하기 위해 훌쩍 떠나는 일이 더 흔했다. 예수의 세례 직후에 페레아 언덕에서 지냈던 40일에 뒤이어 일어난, 그의 아버지와의 교제의 이들 계절을 기도라고 말하기에는 전혀 적당하지 않고, 또 예수가 경배를 드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도 맞지 않으나, 그러나 이들 계절을 그의 아버지와의 개인적 교제로 언급하는 것이 전적으로 정확하다.
144:1.6
(1618-3)
9월 한 달 내내 토론들의 중심 주제는 기도와 경배였다. 그들이 며칠 동안 경배에 대한 토론을 한 뒤에, 도마가 “주(主)여, 우리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요청한 것에 대답하여, 마침내 예수는 기도에 관한 그의 기억에 남을 강연을 했다.
144:1.7
(1618-4)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었는데, 그것은 다가오는 왕국에서의 구원을 위한 기도였다. 예수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요한의 기도 형식을 사용하지 말라고 결코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사도들은 매우 일찍부터 자신들의 주(主)가 읊조리는 격식과 형식적인 기도의 실천 관행을 충분하게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어떻게 기도하는 것인지 가르쳐 달라고 끊임없이 요청했다. 열두 사도들은 예수가 어떤 형태의 간구를 찬성할지 몹시 알기 원하였다. 그리고 예수가 이때에 도마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그들에게 기도를 연상시키는 어떤 형식을 가르치는 것에 동의한 것은, 주로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이러한 간단한 간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그들이 길보아 산에서 체류하던 셋째 주간의 어느 날 오후에 이 교훈을 주었다.
2. 기도에 관한 강연
144:2.1
(1618-5)
“요한은 진실로 너희에게 간단한 기도 형식을 가르쳤다: ‘오, 아버지시여, 우리를 죄로부터 씻어주시고,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고, 당신의 영이 우리의 가슴을 언제까지나 거룩하게 하소서. 아멘!’ 그는 너희가 군중을 가르칠 무언가를 가지고 있게 하려고 이 기도를 가르쳤다. 그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너희 자신의 혼에 대한 표현으로서 그렇게 정형화된 그리고 형식적인 간구를 사용해야만 한다고 의도하지 않았다.
144:2.2
(1618-6)
“기도는 영을 향한 혼의 태도에서의 전적으로 개인적이고 자발적인 표현이다; 기도는 아들관계에서의 교제이며 동료관계에서의 표현이어야 한다. 기도가, 영에 의해 쓰였을 때. 협동을 이루는 영적 진보로 인도한다. 이상적인 기도는 지능적 경배로 인도하는 영적 교제의 한 형식이다. 참되게 기도하는 것은 너희의 이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하늘을-향하여 뻗어나가고 있는 진지한 태도이다.
144:2.3
(1619-1)
“기도는 혼의 호흡이며, 아버지의 뜻을 확실하게 하려는 너희의 시도에서 끈질긴-지속으로 너희를 인도하는 그것이다. 만약에 너희 중에 누가 이웃이 있는데 한 밤 중에 그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친구여, 여행하는 나의 친구 하나가 나를 보려고 왔는데, 그 앞에 차려 놓을 것이 나에게 하나도 없으니, 빵 세 덩어리를 내게 빌려 달라’; 그런데 너의 그 이웃이 ‘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 이제 문은 닫혔고 아이들과 내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니 내가 일어나 네게 빵을 줄 수가 없다.’고 그가 대답한다면, 너희는 너희 친구가 배가 고프다는 것과 네가 그에게 제공할 아무 음식도 없음을 설명하면서, 끈질기게 지속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겠는데, 비록 너희 이웃이 자신이 너의 친구라는 이유에서는 일어나서 너희에게 빵을 주지는 않는다고 해도, 그러나 너희가 끈질기게 조르는 것 때문에, 일어나서 너희가 필요한 대로 너희에게 빵을 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끈질긴-지속이 필사 사람으로부터도 특혜를 얻는다면, 영 안에서 행하는 너희의 끈질긴-지속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기꺼이 내미는 손으로부터는 너희를 위한 생명의 빵을 얼마나 더 많이 얻을 수 있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다시 말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찾아 나서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이는 구하는 자마다 받기 때문이다; 찾아 나서는 자는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의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리기 때문이다.
144:2.4
(1619-2)
“너희들 중에서 어떤 아버지가, 만일 그의 아들이 지혜롭지 못하게 요청하고 있다면, 아들의 그릇된 간구에서 바라는 대로 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버이의 지혜에 따라 해주는 것에서 주저하겠느냐? 만약에 자녀에게 빵이 필요한데, 그가 지혜롭지 못하게 돌을 요청한다고 해서 너희가 그에게 돌을 주겠느냐? 너희 아들에게 생선이 필요한데, 그물에 생선과 함께 물뱀이 우연히 올라오고 단지 아이가 어리석게 그 뱀을 요청한다고 해서, 너희가 그에게 뱀을 주겠느냐? 그런데 만약에, 필사자이며 유한한 존재가 어떻게 기도에 대답하고 어떻게 너희 아이들에게 좋고도 적절한 선물을 주어야 하는 지를 알고 있다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는 자신에게 요청하는 그들에게 영과 다른 추가적인 축복들을 얼마나 많이 주시겠느냐? 사람들은 항상 기도하고 그리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144:2.5
(1619-3)
“어느 사악한 도시에 살았던 한 재판관 이야기를 해주겠다. 이 재판관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았다. 이제 그 도시에 한 빈궁한 과부가 있었는데, 그녀가 이 부당한 재판관에게 거듭 찾아와서 ‘내 적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가 얼마 동안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지만, 곧 그는 자기 스스로에게 말했다; ‘내가 하느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는 것을 그만둘 것 같지 않으니 내가 그녀를 변호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지치게 할 것이다.’ 이 이야기를 너희에게 하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기도를 끈질기게-지속하라고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지, 너희의 간구가 공정하고 정의로우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너희의 끈질긴-지속은, 비록 하느님의 은혜를 얻는 것은 아니지만, 너희의 땅에서의 태도를 변화시킬 것이며, 영 접수를 위한 너희 혼의 수용능력을 커지게 하는 것이다.
144:2.6
(1619-4)
“그러나 너희가 기도할 때, 너희는 너무나 작은 신앙을 발휘한다. 진정한 신앙은, 혼 확대와 영적 진보의 경로에 어쩌다 놓일 수도 있는, 물질적 어려움의 산들을 제거할 것이다..”
3. 신자의 기도
144:3.1
(1619-5)
그러나 사도들은 여전히 만족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가 그들이 새로운 제자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모범이 될 만한 기도문을 가르쳐 주기를 원하였다. 기도에 관한 이 강연을 듣고 난 후, 야고보 세베대가 말하였다: “아주 좋습니다, (主)여,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받아들일 수 있게 어떻게 기도하는지 가르쳐 달라’고 우리에게 아주 자주 간청하는 새로운 신자들을 위한 기도의 형식을 원합니다.”
144:3.2
(1619-6)
야고보가 말을 끝내자 예수가 말씀하였다: “만약 너희가 여전히 그러한 기도를 원한다면, 내가 나사렛에서 내 동생들에게 가르쳤던 것을 제시해 보겠다:
144:3.3
(1620-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왕국이 임하옵소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옵소서.
오늘 우리에게 내일을 위한 우리의 빵을 주시고;
생명의 물로 우리의 혼을 새롭게 하옵소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모두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유혹 안에서 구하시고,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권해주시며,
우리를 당신 자신과 같은 완전이 점점 증가되도록 만들이 주옵소서.
144:3.4
(1620-11)
사도들이 신자들을 위한 모범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예수에게 원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추종자들에게 여러 가지의 기도문들을 가르쳤으며, 모든 다른 위대한 선생들도 자기 제자들을 위한 기도문들을 만들었었다. 유대인의 종교 선생들은 25 내지 30개의 지정된 기도문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들을 회당에서 심지어 길거리의 모퉁이에서 낭송했다. 예수는 대중 장소에서 기도하는 것에 특히 반발했다. 열두 사도들은 그가 기도하는 것을 이때까지 겨우 몇 번만 들었다. 그들은 그가 밤새도록 기도하거나 경배하는 것을 지켜보았으므로, 그의 간구 방식이나 형식을 무척 알고 싶어 하였다. 그들은 실제로 대중들이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쳤었던 것처럼, 어떻게 기도하는지 가르쳐 달라고 청했을 때, 대중들에게 대답할 무언가를 알려고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144:3.5
(1620-12)
예수는 언제나 남모르게 기도할 것을 열둘에게 가르쳤다; 기도에 들어갈 때에는 혼자서 훌쩍 떠나 자연의 조용한 환경 가운데로 들어가거나 혹은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으라고 가르쳤다.
144:3.6
(1620-13)
예수의 죽음과 아버지에게로 상승 이후에, 소위 주기도문이라고 불리던 이 기도에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말을 추가함으로써 끝마치는 것이 많은 신자들의 실천 관행이 되었다. 그 이후에 이것을 계속 사용하다가, 복사하는 과정에서 두 줄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다음과 같은 구절이 이 기도문에 보태졌다: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144:3.7
(1620-14)
예수나사렛 집에서 가족들이 기도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도들에게 공동으로 하는 형식의 기도를 주었다. 그는 결코 형식적인 개인적인 기도, 집단만을, 가족만을, 또는 어떤 사회적 간구만을 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결코 그것을 하려고 자원하지 않았다.
144:3.8
(1620-15)
예수는 효력이 있는 기도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1. 사심 없이─자기 자신만을 홀로 위함이 아님
2. 믿으면서─신앙에 따라서.
3. 진정으로─가슴에서의 정직으로
4. 지능적으로─빛에 따라서.
5. 신뢰하면서─아버지의 모든 것에-지혜로운 뜻에 복종하면서.
144:3.9
(1620-21)
예수가 산 위에서 기도하며 온 밤을 지새울 때, 그것은 주로 자신의 제자들을 위한 것이었고, 특히 열두 사도들을 위해서였다. 주(主)는 자신의 파라다이스 아버지와의 교제를 납득하는 본성에서의 경배를 많이 드리긴 하였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기도한 적이 거의 없었다.
4. 기도에 대한 더 많은 가르침
144:4.1
(1620-22)
기도에 관한 강연이 있은 후 여러 날 동안, 사도들은 주(主)에게 이러한 모든 것에서-중요하고 또 경건한 실천 관행에 관해 질문을 계속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기도와 경배에 관하여 사도들에게 주신 예수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현대 어법으로 요약되어 다시 서술될 수도 있다:
144:4.2
(1621-1)
어떤 간구라도 진지하고 간절히 갈망하는 반복은, 그러한 기도가 하느님의 자녀에서의 진정한 표현이고 그리고 신앙에서 소리가 나오고 있을 때는, 직접 응답하는 것이 얼마나 무분별하던지 또는 불가능하던지에 상관없이, 그것은 영적 접수성을 위한 혼의 수용능력을 확장하는 데에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144:4.3
(1621-2)
모든 기도에 있어서, 아들관계가 하나의 선물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어떤 자녀도 아들이나 딸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하여 해야 할 것은 없다. 땅의 자녀는 부모의 뜻에 의해 존재로 나아온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느님의 자녀는 은총 안에서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의하여 영의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온다. 따라서 하늘의 왕국─신성한 아들관계─는 작은 어린아이가 하듯이 그렇게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너희가 정의로움─진보하는 성격 발달─은 획득하지만, 아들관계는 너희가 은총에 의하여 그리고 신앙을 통하여 받는다.
144:4.4
(1621-3)
기도는 예수를 이끌어, 그의 혼이 우주들의 우주의 최극 통치자들과 가지는 초(超)-교제로 인도했다. 기도는 이 세상의 필사자들을 참된 경배의 교제로 인도할 것이다. 받아들이는 접수성에 대한 혼의 영적 수용능력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개인적으로 충당될 수 있고 또한 의식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하늘의 축복의 양을 결정한다.
144:4.5
(1621-4)
기도와 그에 관련된 경배는 일생의 매일매일의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물질적 실존에서의 고되고 단조로운 것으로부터 떼어놓아 초연을 이루게 하는 하나의 기법이다. 그것은 영성화된 자아-실현과 지능적이면서 종교적인 달성에서의 개별존재성에 가까이 다가가는 하나의 큰길이다.
144:4.6
(1621-5)
기도는 해로운 내면-성찰에 대한 해독제이다. 적어도 주(主)가 가르쳐 준 것과 같은 기도는 혼에 너무나도 유익한 사명활동이다. 예수는 자신의 동료들을 위하여 기도의 유익한 영향을 한결같이 행사하였다. 주(主)는 통상적으로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으로 기도하였다. 예수는 오직 자신의 지상 일생의 커다란 위기 안에 있을 때에만, 그 자신을 위하여 기도했다.
144:4.7
(1621-6)
기도는 인류의 종족들의 물질적인 문명의 한가운데에 있는, 영 생명의 숨결이다. 경배는 쾌락을-찾아나서는 필사자들의 세대들에 대한 구원이다.
144:4.8
(1621-7)
기도가 혼의 영적 배터리를 재-충전하는 것에 비유될 수도 있는 것처럼, 그처럼 경배는 우주 아버지무한한 영의 우주 방송을 잡아채려고 혼 안에서 조율하고 있는 행동에 비교될 수도 있다.
144:4.9
(1621-8)
기도는 아이가 자신의 영 아버지를 진정으로 그리고 갈망하면서 쳐다보는 표정이다; 그것은 인간 의지를 신성한 의지와 교환하는 정신적 과정이다. 기도는 무엇으로 있는 어떤 그것을, 무엇으로 되어있어야만 하는 어떤 그것으로 바꾸기 위한 신성한 계획의 일부분이다.
144:4.10
(1621-9)
예수가 밤을 지새울 때에 그와 그렇게 자주 동행했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예수가 기도하는 소리를 결코 듣지 못했던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그들의 주(主)가 좀처럼 자신의 기도를 단어로 말하듯이 그렇게 입 밖으로 소리 내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모든 예수의 기도는 영 안에서 그리고 가슴속으로─침묵으로─하였다.
144:4.11
(1621-10)
모든 사도들 중에서 베드로야고보가 기도와 경배에 관한 주(主)의 가르침을 가장 가깝게 이해하였다.
5. 기도의 다른 형식들
144:5.1
(1621-11)
때때로, 예수의 땅에서 머무르는 나머지 기간 동안, 그는 여러 추가적인 기도의 형식들에 사도들의 주목을 끌게 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이것을 단지 다른 문제들을 설명하는 예시로서만 그렇게 했던 것이며, 그래서 그는 이들 “비유적인 기도들”이 군중들에게 가르쳐져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였다. 그 기도들 중에서 많은 것들은 다른 생명 거주 행성들로부터 온 것이었지만, 예수는 이 사실을 열둘에게 밝히지 않았다. 이 기도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144:5.2
(1622-1)
그 안에 우주의 영역들이 존재해 있는 우리의 아버지시여,
당신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며 당신의 성격이 무한한 영광을 받으소서.
당신의 현존이 우리를 감싸주시고, 당신의 영광이 현시되시며
그것이 위에서 완전하게 보인 것처럼 불완전하게나마 우리를 통해 현시되게 하소서.
우리에게 오늘 날 활기찬 빛의 힘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상상하는 악의 길로 빠져들지 말게 하시며,
영속하는 힘, 영광스러운 내주하심이 당신의 것이오니,
우리에게는 당신의 아들의 무한한 사랑의 영구한 선물을 주시옵소서.
실로 그러하오니, 그렇게 영속하는 진리이나이다.

* * * *
144:5.3
(1622-10)
우주의 중심이 되시는 우리의 창조적인 어버이시여,
우리에게 당신의 본성을 부여하시고 당신의 성격을 주시옵소서.
자비로 우리를 당신의 아들들과 딸들로 만드시고,
우리의 영원한 성취를 통하여 당신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소서.
당신이 조절하시고 통제하시는 영을 우리 안에 살고 거하시게 하셔서
천사가 빛으로 당신의 명령을 행하듯이 우리로 이 구체에서 당신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오늘날 진리의 경로를 따라는 우리의 진보 안에서 우리를 지탱케 하여 주소서.
타성과 악과 모든 죄를 짓는 행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형제들에게 사랑넘치는-친절을 보인 것처럼 우리를 참으소서.
우리 창조체의 가슴속에 당신의 자비의 영을 널리 펼치소서.
인생의 불확실한 미로를 두루 거쳐갈 때 한 걸음 한걸음 당신 자신의 손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우리의 끝이 와야만 할 때, 우리의 신실한 영들을 당신 자신의 품속으로 받아 주소서.
실로 그러하오니, 우리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 * * *
144:5.4
(1622-25)
우리의 완전하시고 정의로우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오늘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밝히소서.
우리의 발걸음을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조화-협동하여 주소서.
영원한 진보의 길로 늘 우리를 인도하소서.
힘의 충만함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지혜로 채워주시며
당신의 무한한 에너지로 활력을 주소서.
천사 무리의 현존과 안내를 깨달아
신성한 의식으로 우리에게 영감을 주소서.
빛의 길에서 늘 위로 햐아도록 우리를 안내하소서;
큰 심판의 날에 우리를 충분하게 정당화하여 주소서.
영원한 영광 안에서 당신 자신처럼 우리를 만드시고
높은 곳에 있는 당신의 끝남이 없는 봉사 안으로 우리를 받아주소서.

* * * *
144:5.5
(1622-37)
신비 속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에게 당신의 거룩한 성격을 나타내소서.
오늘날 지상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길과 빛과 진리를 보여 주소서.
우리에게 영원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시고
그 안에서 걸어갈 의지를 주소서.
당신의 신성한 왕의 신분을 우리 안에 세우시고
그로써 우리에게 충만한 자아의 통달을 증여해 주소서.
우리가 어둠과 죽음의 옆길로 빗나가지 않게 하시고;
우리를 생명의 물가로 언제까지나 인도하소서.
당신 자신을 위하여 우리의 이러한 기도를 들어주소서;
우리를 더욱 더 당신 자신과 같도록 만드는 것을 기뻐하소서.
끝에 이르러, 신성한 아들을 위하여
영원한 품 안으로 우리를 받아주소서.
실로 그러하오니, 우리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 * * *
144:5.6
(1623-5)
한 부모로 병합된 영화로운 아버지와 어머니시여,
당신의 신성한 본성에 우리가 충성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신성한 영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두루 통하여 다시 사시고
당신의 신상한 영의 선물과 중여에 따라서 되었나이다.
당신이 높은 곳에서 완전하게 그리고 장엄하게 보이듯이
그렇게 이 구체 안에서 불완전하게 당신을 다시 생산하나이다.
날마다 형제신분의 당신의 감미로운 사명활동을 우리에게 주시고,
사랑넘치는 봉사의 통로로 매 순간마다 우리를 인도하소서.
실로 우리가 당신의 인내력을 우리 자녀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를 언제까지나 어김없이 인내하소서
모든 일을 잘 행하는 신성한 지혜를 우리에게 주시고,
모든 창조체에게 은혜가 되는 무한한 사랑을 주소서.
우리에게 당신의 인내와 사랑넘치는-친절을 내리시고
우리의 자선으로 이 영역의 약한 자를 감싸안게 하소서.
우리의 인생이 완결되면, 그것이 당신에게 영광이 되며,
당신의 선한 영에게 기쁨이 되며, 우리의 혼의 조력자들에게 만족이 되게 하소서.
우리의 사랑-넘치는 아버지시여, 우리의 소망대로 하지 마시고,
당신의 필사자 자녀들의 영원한 선을 갈망하는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실로 그러하오니, 그것이 있기를 원하나이다.

* * * *
144:5.7
(1623-25)
우리의 모든-충성스러움의 근원이며 모든-힘을 지니신 중심이시여,
모든 것에-자비로운 당신 아들의 이름을 경건하고 거룩하게 하소서.
당신의 자비심과 축복을 우리에게 내려와 있으므로,
그렇게 우리로 당신의 뜻을 행하고 당신의 명령을 행하도록 힘을 주나이다.
매 순간 순간마다 우리에게 생명나무의 자양분을 주시고;
우리를 매일 그 강의 생명수로 새롭게 하소서.
한 걸음 한 걸음 어둠으로부터 우리를 끌어내어 신성한 빛 안으로 인도하소서.
내주하고있는 영의 변환으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그리고 필사자 마지막이 마침내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를 당신 자신에게 받아주시고 우리를 영원 안으로 나아가도록 보내소서.
결실-넘치는 봉사에서의 천상의 왕관을 우리에게 씌워주소서
우리가 아버지아들거룩한 영향에게 영광을 돌리리이다.
실로 그러하오니, 끝이 없는우주에 두루 하겠나이다.

* * * *
144:5.8
(1623-38)
우주의 비밀인 곳에 거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시여,
당신의 이름이 영예로우며, 당신의 자비가 존경받으며, 당신의 판단이 존중되나이다.
정의의 태양이 한 낮에 우리를 비추게 하소서
또한 황혼 안에서 걷잡지못하는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기를 당신에게 탄원하나이다.
당신 자신이 선택한 길 ㅇ나으로 우리 손을 잡아 인도하시고
길이 힘들고 때가 어두울 때 우리를 버리지 마소서.
우리가 자주 당신을 소홀히 하고 잊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잊지 마시고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기를 갈망하듯이 당신께서 자비롭고 우리를 사랑하소서.
우리가 우리를 괴롭히고 해치는 자들을 공의로 용서한 것 같이
우리를 친절함으로 내려다보시고 자비로서 우리를 용서하소서.
장엄한 아들의 사랑과 헌신과 증여가
당신의 끝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유용한 생명을 영속하게 하소서.
우주들의 하느님이 그의 영을 충만할 정도로 우리에게 증여하시고;
이 영의 인도를 따라 열매를 맺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소서.
헌신하는 천사 무리들의 사랑-넘치는 사명활동으로
세대 끝까지 아들이 안내하고 인도하게 하소서.
언제까지나 우리를 점점 당신 자신과 닮도록 만드시고
우리의 끝에서 영원한 파라다이스의 품 안으로 우리를 받아 주소서.
실로 그러하오니, 증여되는 아들의 이름으로
그리고 최극자 아버지의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하소서.
144:5.9
(1624-13)
사도들은 이러한 기도들을 대중을 위한 가르침에서 자유롭게 제시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이 모든 계시들로부터 그들의 개인적 종교 체험에 있어서 많은 혜택을 받았다. 예수는 이것과 그리고 다른 기도 모형들을 열둘의 친밀한 교육과 연결하여 예시로서 사용하였는데, 이들 일곱 개의 표본 기도들을 이 기록으로 옮겨 쓰기 위한 특별 허가가 주어졌다.
6. 요한의 사도들과의 회의
144:6.1
(1624-14)
10월 초하루 무렵에 빌립과 몇 명의 동료 사도들이 가까운 마을에서 음식물을 사고 있는 중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중 몇 명을 만나게 되었다. 시장에서의 이런 우연한 만남의 결과로 예수의 사도들과 요한의 사도들이 길보아 야영지에서 삼 주일 동안의 회합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요한이 최근에 예수를 본받아 열두 명의 영도자들을 사도들로 임명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요한이 자신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들 중 우두머리인 아브너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예수는 이 공동 회합의 첫 주일 동안 내내 길보아 야영지에 있었지만, 마지막 두 주일 동안은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144:6.2
(1624-15)
이 달의 두 번째 주 초순경에, 아브너길보아 야영지에 있던 자신의 모든 연관-동료들을 집결시켜, 예수의 사도들과의 상담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삼 주일 동안 이들 스물네 명은, 일주일에 엿새 동안 하루에 세 번씩 회합을 가졌다. 첫째 주간에는 예수가 오전, 오후 그리고 저녁 회합 사이에 그들과 함께 섞였다. 그들은 주(主)가 자기들과 함께 계시면서 합동 심의를 전반적으로 주관해 주기를 원하였지만, 그는 확고부동하게 그들의 토론에 참여하기를 거절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 번의 기회에 걸쳐서 그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예수가 스물네 명에게 했던 연설은 공감, 협동 그리고 관용에 관한 것이었다.
144:6.3
(1624-16)
안드레아브너는 두 사도 집단들의 합동 모임을 번갈아가면서 주관했다. 이 사람들에게는 토의해야 할 많은 어려움들과 풀어야 할 수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거듭하여 그들이 예수에게 자신들의 어려운 문제들을 가지고 갔으나, 단지 다음의 대답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오직 너희의 개인적 문제와 순수하게 종교적인 문제들에만 관련되어 있다. 나는 개별존재에 대한 아버지의 대리인이며, 집단에 대한 대리인은 아니다. 만일 너희가 하느님과 너희와의 관계에서 개인적 어려움이 있으면 나에게 가지고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의 말을 들어주고, 너희 문제의 해결에 너희에게 조언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종교적인 질문들의 다양한 인간 해석들에서의 조화-협동이라든지 종교의 사회화에 대해 들어갈 때에는, 너희는 너희 자신들의 결정으로 모든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운명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공감하고 항상 관심을 갖고 있으며, 비(非)-영적 중요성이 있는 이들 문제들을 다루면서 너희가 너희 결론에 도달하고 너희가 모두 동의가 되어 있다면, 그러면 내가 미리 말하지만, 나의 충만한 승인과 전심 어린 협력을 약속하겠다. 그리고 이제 너희의 심의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나는 2주 동안 너희에게서 떠나 있겠다. 내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 나에 대해 걱정하지 마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일에 관한 것을 할 것이니, 이는 우리가 이곳 말고도 다른 영역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44:6.4
(1625-1)
그렇게 말한 뒤에 예수는 산에서 내려갔고, 그리고 그들은 꼬박 2주 동안 그를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 기간 동안 그가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하였는지 결코 알지 못하였다. 스물네 명이 안정을 찾으면서 그들의 문제들을 심각한 숙고에 이르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주(主)가 없음으로 해서 매우 당황되었다. 그렇지만, 한 주일이 지나기 전에 그들은 다시 자신들의 토론들의 핵심으로 들어갔으며, 도움을 청하러 예수에게 갈 수도 없었다.
144:6.5
(1625-2)
그 집단들이 첫 번째로 동의하였던 항목은 예수가 최근에 그들에게 가르쳤던 기도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었다. 이 기도를 신자들에게 가르치기로 결정하는 일에 양쪽 사도들은 투표에 의해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144:6.6
(1625-3)
그 다음 그들이 결정한 것은, 요한이 살아있는 한, 그가 감옥에 있던지 석방 되든지에 관계없이 열두 사도들의 양쪽 집단은 현재의 자신들의 일을 계속할 것과 그때마다 쌍방의 동의를 얻은 장소에서 일주일 동안의 합동 회의를 석 달마다 한 번씩 갖는 것이었다.
144:6.7
(1625-4)
그러나 그들의 모든 문제들 중에서 가장 심각했던 것은 세례에 관한 문제였다. 그 주제에 대하여는 예수가 어떤 발언도 하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어려움은 점점 악화되었다. 그들은 마침내 다음과 같이 찬성하였다: 요한이 살아 있는 한, 혹은 그들이 합동으로 이 결정을 수정할 때까지는, 단지 요한의 사도들만이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겠고 예수의 사도들만이 최종적으로 새로운 제자들에게 지침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때부터 요한이 죽을 때까지 두 명의 요한의 사도가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서 예수와 그의 사도들과 동행했다. 이는 합동 심의회가, 세례는 왕국의 관련사들과의 동맹을 밖으로 나타내는 시작의 걸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기 때문이었다.
144:6.8
(1625-5)
그 다음에 찬성된 것은, 요한이 죽을 경우에 요한의 사도들이 예수 앞에 스스로 나와서 그의 지도에 따르기로 한 것과, 그리고 그들이 예수나 그의 사도들의 허락 없이는 더 이상 세례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144:6.9
(1625-6)
그리고 그 다음에는, 요한이 죽을 경우에는 예수의 사도들이 신성한 의 세례에 대한 상징으로 물로 세례를 주기 시작할 것을 가결했다. 세례에서의 설교에서 회개가 결부되어야 할 것인가 아닌가는 선택사항으로 남겨두었다; 집단을 구속하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았다. 요한의 사도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라고 설교했고, 예수의 사도들은 “믿고 세례를 받으라”라고 선포하였다.
144:6.10
(1625-7)
그리고 이것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다양한 노력들을 조화-협동시키고, 의견의 차이들을 가다듬고, 집단의 사업 착수를 조직화하고, 밖으로 표현되는 관점들을 법으로 정하고, 개인적인 종교적 실천관행을 사회화하려고 처음으로 시도한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144:6.11
(1625-8)
많은 다른 사소한 문제들이 고려되었고 그런 것들의 해결은 만장일치로 찬성되었다. 이들 스물네 사람들은 예수없이, 문제들과 마주하고 그리고 어려움들을 풀어나가야만 했던 이러한 두 주일 동안에 참으로 놀랄만한 체험을 가졌다. 그들은 의견을 달리하고, 논쟁하고, 다투고, 기도하고, 타협하기를 배웠고 그리고 그것을 두루 통하여 모두가, 다른 개인의 관점에 공감을 남겨두는 것과 또한 그의 정직한 견해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관용을 남겨두는 것을 배웠다.
144:6.12
(1625-9)
그들이 재정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토론하던 날 오후에, 예수가 돌아왔으며, 그들의 심의를 듣고, 그들의 결정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면 이런 것들이 너희의 결론들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 각자가 너희의 연합된 결정의 영을 수행하도록 도울 것이다.”
144:6.13
(1626-1)
이때부터 두 달 반 후에, 요한이 처형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내내 요한의 사도들은 예수와 열둘과 함께 남아 있었다. 그들 모두는 데카폴리스의 도시들에서 이 수고하던 계절 동안 함께 있으면서 일을 하였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길보아 야영지는 서기 27년 11월 2일에 해체되었다.
7.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에서
144:7.1
(1626-2)
11월과 12월 두 달 내내, 예수와 스물넷은 데카폴리스그리스인 도시들에서, 주로 스키토폴리스, 게라사, 아빌라, 가다라에서 조용하게 일하였다. 이것은 실제로 요한의 일과 조직을 넘겨받는 예비적인 기간의 끝이었다. 새로운 계시에서의 사회화된 종교는, 항상 구원을 추구하는 기존 종교의 확립된 형식과 관습에 타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세례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사회화된 종교적 집단으로, 세례 요한의 추종자인, 그들과 함께 활동하기 위해서 치른 대가였다. 요한의 추종자들은, 예수의 추종자들과 합치는 데 있어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144:7.2
(1626-3)
예수데카폴리스의 도시에서는 거의 대중 가르침을 하지 않았다. 그는 24명을 가르치는 일에 많은 시간들을 사용하였으며, 요한의 열두 사도들과는 여러 차례의 특별 수업들을 가졌다. 얼마 되지 않아서 그들은 왜 예수가 감옥에 있는 요한을 방문하러 가지 않았으며, 왜 그가 그의 석방을 보장하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좀 더 납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왜 예수가 결코 아무 기적도 행하지 않는지, 그리고 왜 자신의 신성한 권한에 대한 밖으로 내보이는 표적을 일으키기를 거절하는지를 납득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길보아 야영지로 오기 전에는 주로 요한의 증거로 인하여 예수를 믿었으나, 그 뒤에는 곧 직접적인 주(主)와의 접촉과 그의 가르침의 결과로 인해 믿기 시작하였다.
144:7.3
(1626-4)
이러한 두 달 기간 동안, 그 집단은 대부분 짝을 지어 일하였는데, 예수의 사도 한 사람과 요한의 사도 한 사람이 함께 일하였다. 요한의 사도가 세례를 주었고, 예수의 사도는 가르침을 주었으며, 한편으로는 그들 모두가 자기들이 납득하는 왕국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이방인들과 신앙을 저버린 유대교들 사이에서 많은 혼들을 믿도록 만들었다.
144:7.4
(1626-5)
요한의 사도들의 우두머리인 아브너예수를 충심으로 믿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주(主)가 그 복음을 가르치도록 임무를 맡긴 70명 선생들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8. 펠라 근처에 있는 야영지에서
144:8.1
(1626-6)
12월 후반기에, 그들 모두는 펠라에서 가까운 요단강 근처로 갔으며, 그곳에서 다시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복음을 들으러 이 야영지로 찾아 왔다. 예수가 어느 날 오후에 군중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요한의 절친한 친구들이 요한으로부터의 마지막 전갈을 주(主)께 전하러 왔다.
144:8.2
(1626-7)
요한은 지금까지 1년 반 동안 감옥에 갇혀 있는 중이었으며, 대부분의 이 기간 동안, 예수는 매우 조용하게 일을 진행하였으므로; 요한이 왕국 일에 대해서 궁금해 하였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요한의 친구가 다음과 같은 말로 예수의 가르침을 중단시켰다: “세례자 요한이 우리를 보내 다음과 같이 물으라고 했습니다.─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144:8.3
(1626-8)
예수요한의 친구들에게 말씀하기 위해 잠시 멈추셨다: “돌아가서 요한에게 그가 잊힌 것이 아니라고 전해라.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그에게 말하되,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해라.” 그리고 예수요한의 메신저들에게 말씀을 덧붙이신 후에, 다시 무리를 돌아보며 말씀하였다: “요한이 왕국 복음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는 단지, 내 제자이기도 한, 자신의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하여 물은 것뿐이다. 요한은 약한 자가 아니다. 헤롯이 그를 감옥에 가두기 전에 요한의 설교를 들었던 너희들에게 묻겠다: 요한에게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더냐─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더냐? 기분이 변덕스럽고 부드러운 천의 옷을 입은 사람이더냐? 대체로 화려한 복장을 입은 사람과 우아하게 살고 있는 이들은 왕궁이나 부자의 집안에 있다. 그러나 너희가 요한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알았느냐? 선지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겠는데, 그는 선지자보다도 더 큰 자이다. 요한에 대해 기록되기를: ‘보라. 내가 내 메신저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고 하였다.”
144:8.4
(1627-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겠는데, 여인에게서 태어난 자들 가운데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일어난 적이 없다; 그러나 하늘의 왕국에서는 비록 단지 작은 자라도 그보다 더욱 큰 데, 왜냐하면 그가 영 안에서 태어난 것이고 그리고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144:8.5
(1627-2)
그 날 예수의 그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며, 왕국에 들어간 것을 그렇게 하여 공개적으로 고백하였다. 요한의 사도들은 그 날 이후로 예수와 단단하게 연합되었다. 이 발생사건이 요한예수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실제 화합을 시작하게 하였다.
144:8.6
(1627-3)
그 메신저들은 아브너와 이야기를 나눈 후, 요한에게 이 모든 것을 보고하기 위해 마캐루스로 떠났다. 요한은 크게 위안을 받았으며, 그의 신앙은 예수의 말과 아브너로부터의 소식으로 인하여 강화되었다.
144:8.7
(1627-4)
이 날 오후에 예수는 가르침을 계속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였다: “그러나 내가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너희 중에 많은 사람들은 요한의 메시지나 나의 가르침 모두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장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같아서 그들이 친구들을 불러 말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통곡을 하여도 너희는 슬퍼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너희 중의 일부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자 저희는 그가 악마에게 사로잡혔다고 하였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똑같은 이 사람들은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내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다’라고 하였다. 정말로, 지혜는 그 때의 어린아이들로 인하여 정당화되는 법이다.
144:8.8
(1627-5)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이러한 진리들을 지혜롭고 거만한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모든 것들을 잘 주관하며; 자신이 선택한 방법으로 우주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 모든 사람들은 내게로 와라, 그러면 너희는 너희 혼들을 위해 휴식을 얻게 될 것이다. 신성한 멍에를 메라, 그러면 너희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하느님의 평안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9. 세례자 요한의 죽음
144:9.1
(1627-6)
세례자 요한은 서기 28년 1월 10일 밤에 헤롯 안티파스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다음 날 요한의 제자 몇 명이 그의 처형 소식을 듣고 마캐루스로 가서 그의 시체를 찾아 묻었으며, 나중에는 다시 아브너의 고향인 세바스티에 묻었다. 그 다음 날인 1월 12일에, 그들은 펠라 근처에 있던 요한예수의 사도들의 야영지로 가서 요한의 죽음을 예수께 전하였다. 예수는 그들의 보고를 받자 무리들을 해산시키시고 24명을 한 자리에 불러 놓고 말씀하였다: “요한이 죽었다. 헤롯이 그의 목을 베었다. 오늘 밤 공동 협의회를 갖고 그에 따른 너희의 관련사들을 준비하여라. 더 이상 지체하지 말라. 왕국을 공개적으로 힘차게 선포할 때가 왔다. 우리는 내일 갈릴리로 떠날 것이다.”
144:9.2
(1627-7)
따라서, 서기 28년 1월 13일 이른 아침에, 예수와 사도들은 25명쯤 되는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을 향해 그들의 길을 떠났으며, 세베대의 집에서 그날 밤 숙박하였다.
이어지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