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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2 편
예루살렘에서의 유월절
142:0.1
(1596-2)
그해 4월에 예수와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일했고, 매일 저녁 밤을 베다니에서 보내기 위해 도시 밖으로 나갔다. 예수 자신은 매주 하루나 이틀 밤은 그리스계 유대인플라비우스의 집에서 보냈으며 많은 저명한 유대인들이 그와 면담하려고 은밀히 그곳에 왔다.
142:0.2
(1596-2)
예루살렘에서의 첫째 날에 예수는 한때 높은 사제였고 세베대의 부인 살로메의 친척이며 자신의 예전 시절 친구인 안나스를 찾아서 만났다. 안나스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으며, 예수가 그 높은 사제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그를 받아들였다. 예수안나스의 냉담함을 감지했을 때 즉시 떠났고, 출발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두려움이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우두머리이고 자부심이 사람의 커다란 약점이다; 당신은 기쁨과 해방을 파괴하는 이들 파괴자 둘 모두에 속박되도록 자신을 배반할 것인가?” 그러나 안나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주(主)는 그가 사람의 아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그의 사위와 함께 앉게 될 때까지, 그를 다시 보지 않았다.
1. 성전에서의 가르침
142:1.1
(1596-3)
이 달 내내, 예수나 또는 사도 중의 하나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쳤다. 성전 가르침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으려는 유월절 군중들이 너무나 많아지자, 사도들은 성전 경내 밖에 여러 개의 가르치는 집단을 만들어서 행하였다. 그들의 메시지의 요점은 다음과 같았다:
1.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있다.
2. 하느님의 아버지신분이라는 신앙에 의하여 너희는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수도 있으며 그렇게 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
3. 사랑은 왕국 안에서 삶의 규칙이다.─하느님에 대한 최극의 헌신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너희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4.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는 것, 곧 각자의 개인적 일생 안에서 영의 열매를 맺는 것이, 왕국의 율법이다.
142:1.2
(1596-8)
유월절을 축하하려고 왔던 군중들은 예수의 이 가르침을 들었으며 그들 가운데 수백 명이 좋은 소식으로 기쁨을 향유하였다. 우두머리 사제들과 유대인들의 통치자들은 예수와 그의 사도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품게 되었고, 또한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자기들끼리 논쟁을 벌였다.
142:1.3
(1596-9)
성전 안에서 그리고 그 주위에서 가르치는 것 이외에도, 사도들과 다른 신자들은 유월절 개별 군중들 사이에서 많은 개인적인 일을 하는 데에 몰두하였다. 이들 흥미를 가진 남자들과 여자들은 예수의 메시지에 관한 소식을 이 유월절 축제로부터 로마제국의 가장 먼 곳들과 또한 동쪽 지역까지 가지고 갔다. 이것이 바깥쪽 세상을 향한 왕국의 복음 펼침의 시작이었다. 예수의 일은 더 이상 팔레스타인에 국한되지 않았다.
2. 하느님의 진노
142:2.1
(1597-1)
예루살렘에는 크레테에서 온 한 부유한 유대인 무역상인 야곱이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그는 예수를 사적으로 보려고 안드레에게 와서 요청하였다. 안드레예수와의 이 은밀한 만남을 다음 날 저녁 플라비우스의 집에서 갖도록 주선하였다. 이 사람은 주(主)의 가르침들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하느님의 왕국에 대해 좀 더 충분하게 물어보고자 갈망했기 때문에 찾아왔다. 야곱예수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랍비시여, 모세와 옛 선지자들은, 야훼가 질투하는 하느님, 크게 진노하고 그리고 불같이 화를 내는 하느님이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선지자들은 말하기를 그분은 악행을 저지르는 자를 미워하고 그의 율법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복수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하느님이 친절하고 연민이 가득한 아버지이고 모든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이 그처럼 바로 가까이 있다고 당신이 선포하는 이 새로운 하늘의 왕국 안으로 오는 그들을 환영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142:2.2
(1597-2)
야곱이 말을 마치자 예수가 대답하였다: “야곱아, 너는 옛 선지자들이 그들 시대의 빛에 따라서 그들 세대의 자녀들을 가르쳤던 가르침을 잘 발표하였다. 파라다이스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는 변함이-없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의 본성에 대한 개념은, 모세의 나날로부터 아모스의 시절을 거쳐 심지어 선지자 이사야 세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확대되고 성장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새로운 영광으로 아버지를 현시(顯示)하고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기 위해 육신으로 와 있다. 이 왕국의 복음이 모든 사람을 향한 선한 격려와 선한 뜻의 메시지와 함께 세상 위에 널리 퍼질 것이고 그에 따라, 모든 나라들의 가족들 가운데에서 향상되는 또한 더욱 나은 관계들이 자라날 것이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아버지들과 그들의 자녀들은 서로 각자를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이 땅의 자녀들을 향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더욱 나은 납득을 가져다줄 것이다. 야곱아, 선하고 참된 아버지는 자기 가족을 전체로─하나의 가족으로─사랑할 뿐만 아니라, 또한 개별존재 구성원을 참으로 사랑하고 애정으로 보살핀다는 것을 기억하라.”
142:2.3
(1597-3)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격에 관한 상당한 토론이 있은 후에 예수는 잠시 쉬면서 말했다: “야곱아, 너는 자녀가 많은 아버지로 있으니, 내 말의 진리를 잘 알고 있다.” 그러자 야곱이 말했다; “하지만 주(主)여, 내가 여섯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을 누가 당신에게 말했습니까? 어떻게 나에 대한 이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러자 주(主)가 대답하였다: “ 아버지아들이 모든 사물을 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는 그들이 정말로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땅에서 아버지로서 너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있으니, 너는 이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너에 대한 사랑을─아브라함의 모든 자녀뿐만 아니라, 너에 대한, 곧 너의 개별적인 혼에 대한 사랑을─실체로서 받아들여야만 한다.”
142:2.4
(1597-4)
그러고 나서 예수는 말을 계속하였다: “너의 자녀들이 아주 어리고 미숙할 때, 그리고 네가 그들을 꾸짖어야만 할 때는, 그들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화가 나서 분노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반영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미성숙함은 처벌을 넘어서서, 아버지의 멀리 내다보는 그리고 바로잡아주는 애정을 식별하기까지 꿰뚫어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동일한 이들 아이들이 성장한 남자와 여자가 되었을 때, 그들이 여전히 아버지에 대하여 이러한 예전의 잘못-착상되었던 생각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느냐? 남자와 여자로서 그들은 이제 그러한 모든 어릴 적의 단련 안에 있는 그들 아버지의 사랑을 식별해야만 한다. 그리고 여러 세기가 지남에 따라서, 이제는 인류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참된 본성과 사랑-많으신 성격을 좀 더 잘 납득해야 하지 않겠느냐? 만약 네가 모세와 선지자들이 보았던 것처럼 그렇게 하느님 보기를 고집한다면, 영적 조명의 연속으로 이어진 세대들에서 네가 무슨 이득을 얻느냐? 야곱아, 내가 말하겠는데, 너는 이 시각이 밝은 빛 아래에서, 이전에 앞서 간 저들의 어느 누구도 결코 바라본 적이 없는 아버지를 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그를 봄으로써 너는 그러한 자비로운 아버지가 다스리고 있는 왕국에 들어가는 기쁨을 향유해야 하고. 그리고 그때부터 그의 사랑의 뜻이 너의 일생을 지배하도록 추구하여야 한다.”
142:2.5
(1598-1)
야곱이 대답하였다: “랍비여, 내가 믿습니다; 당신께서 나를 아버지의 왕국으로 인도해 주기를 갈망합니다.”
3. 하느님 개념
142:3.1
(1598-2)
열두 사도들은, 그들 중 대부분이 하느님의 성격에 대한 이 토론을 들었었고, 그날 밤에 예수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하여 많은 질문들을 던졌다. 이 질문들에 대한 주(主)의 답변은 현대적 문체로써, 다음과 같은 요지로 가장 잘 제시될 수 있다.
142:3.2
(1598-3)
예수는 다음의 말을 하면서 열두 명을 가볍게 꾸짖었다: 너희는 야훼 관념의 성장과 관계되는 이스라엘의 전통을 알지 못하느냐? 또한 하느님의 신조에 관련하여 성서에서 가르치는 것을 모르느냐? 그러고 나서 주(主)는 사도들에게 유대 백성이 발전하는 과정 전체에 걸쳐서 신(神) 개념에서의 진화에 관하여 가르쳤다. 그는 하느님 관념에서의 다음과 같은 성장의 위상들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142:3.3
(1598-4)
1. 야훼시나이 씨족들의 하느님. 이것은 모세이스라엘주님 하느님의 더욱 높은 차원으로 고양시켰던 신(神)의 원시적인 개념이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땅에 있는 자신의 자녀들이 신(神)에 대한 개념에 그들이 얼마나 투박하든지, 또는 그의 신성한 본성을 어떤 이름으로 상징하든지 상관없이, 자녀들의 진정한 경배를 받아들이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142:3.4
(1598-5)
2. 지고자.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이 개념은 멜기세덱에 의해서 아브라함에게 선포되었고, 이후에 확대되고 확장된 이 신(神)의 관념을 믿었던 자들에 의해 살렘으로부터 멀리 옮겨졌다. 아브라함과 그의 형제는 태양 경배의 확립 때문에 우르를 떠났으며, 그들은 멜기세덱의 가르침인 엘 엘리온지고자 하느님─을 믿는 신자가 되었다. 그들의 개념은, 자신들의 옛 메소포타미아인들의 관념들과 지고자의 신조가 함께 섞여서 구성되어 있는, 하나의 혼성된 하느님의 개념이었다.
142:3.5
(1598-6)
3. 엘 샤다이. 이러한 초기 시절 동안, 많은 유대인들은 나일 강 지역에 포로로 있는 동안 자기들이 배웠던 이집트 사람들의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 개념인, 엘 샤다이를 경배하였다. 멜기세덱 시절 이후 오랜 세월이 흘러서, 이들 세 하느님에 대한 개념들은, 창조자 신(神), 이스라엘주님 하느님에 관한 신조를 형성하기까지, 모두가 함께 합쳐지게 되었다.
142:3.6
(1598-7)
4. 엘로힘. 아담의 시절부터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은 지속되어 왔다. 너희는 성서의 시작에서 “태초에 하느님들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단언하는 것이 생각나지 않느냐? 이것은 그 기록이 만들어졌을 때에 하나 안에 있는 세 하느님들의 삼위일체 개념이 우리 선조들의 종교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142:3.7
(1598-8)
5. 최극자 야훼. 이사야의 시절이 되어서 하느님에 대한 이들 믿음은 모든-힘을 지니고 모든-자비로움을 지닌 우주적 창조주의 개념으로 확대되었었다. 그리고 이러한 진화하고 있으면서 확장하고 있는 하느님의 개념은 우리 선조들의 종교 안에 있는 신에 대한 이전의 모든 관념들을 실질적으로 밀어냈다.
142:3.8
(1598-9)
6.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리고 이제 우리는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로 알고 있다. 우리의 가르침은 믿는-자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종교를 마련하여 제공한다. 그것이 하늘의 왕국에 대한 복음의 좋은 소식이다. 아버지와 함께 아들이 공존하며, 이들 파라다이스 신(神)들의 본성과 사명활동에 대한 계시는 상승하고 있는 하느님의 자녀의, 영원한 영적 진보의 끝없는 시대들 전체를 두루 통하여, 계속 확장하고 그 빛이 밝아질 것이다. 모든 시절에서 그리고 모든 시대들 동안에, 어떤 인간 존재의 참된 경배라도─개별존재적인 영적 진보에 관련되는 것으로서─ 내주하고 있는 영에 의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드리는 존경과 경의로서 인지된다.
142:3.9
(1599-1)
이전 세대들의 유대인들 마음속에 있었던 하느님 개념의 성장을 예수가 다시 이렇게 되짚어보는 것을 듣고, 사도들은 이전에 결코 받아본 적이 없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너무 어리둥절해서 질문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들이 침묵 안에 예수 앞에 앉아 있자, 주(主)는 말을 계속하였다: “너희가 성서를 읽었다면, 이들 진리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사무엘서에서 ‘그리고 주님의 노여움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불이 붙었고, 그것이 너무 심하여 그가 그들을 대적하여 다윗을 움직여 이스라엘유다의 인구를 세러 가라고 말하였다’라는 구절을 읽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사무엘의 시대에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실제로 야훼가 선과 악 모두를 창조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훗날의 저자가 하느님의 본성에 대한 유대인 개념의 확대 이후에, 이들 일어난 사건들을 기술했을 때, 그는 감히 악을 야훼의 탓으로 돌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탄이스라엘에 대적하여 일어섰고 그리고 다윗을 격동시켜서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였다.’ 너희는 성서에 있는 그러한 기록들이, 하느님 본성의 개념이 어떻게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성장을 계속하여 왔는가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인지, 분별할 수 없겠느냐?
142:3.10
(1599-2)
“너희는 이들 확장하고 있는 신성(神性)의 개념과 완전하게 보조를 맞추어가면서, 신성한 율법에서의 납득이 성장하는 것을 또다시 분별해야만 할 것이다. 야훼에 대한 확장된 계시가 있기 이전 시대에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이집트로부터 나왔을 때, 그들이 시나이산 앞에서 야영하게 되었던 시절 바로 전까지, 그들에게는 그들의 율법으로 쓰였던 십계명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 십계명은 다음과 같았다:
142:3.11
(1599-3)
“1. 너희는 다른 하느님에게 경배하지 말라. 이는 주님은 질투하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142:3.12
(1599-4)
“2. 너희는 녹여서 주조된 하느님들을 만들지 마라.
142:3.13
(1599-5)
“3. 너희는 발효되지-않는 빵의 축제를 지키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라.
142:3.14
(1599-6)
“4. 사람이나 가축이나 모든 수컷 가운데 첫-탄생은 내 것이라, 주님이 말하였다.
142:3.15
(1599-7)
“5. 엿새 동안 너희는 일해도 좋으나, 그러나 일곱 번째 날은 너희가 쉬어야 한다.
142:3.16
(1599-8)
“6. 너희는 첫 열매의 축제와 한 해의 끝에서 함께 모여 지내는 축제를 거르지 말고 지켜야만 한다.
142:3.17
(1599-9)
“7. 너희는 어떤 희생제물의 피도, 발효시킨 빵과 함께 바치지 마라.
142:3.18
(1599-10)
“8. 유월절 축제에 바친 희생제물을 다음 날 아침까지 남기지 말라.
142:3.19
(1599-11)
“9. 너희는 땅에서의 첫 열매들의 처음 것을, 주님 너희의 하느님의 집으로 가져와야 한다.
142:3.20
(1599-12)
“10. 너희는 가축의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마라.
142:3.21
(1599-13)
“그러고 나서 시나이 산의 천둥과 번개들이 치는 와중에서 모세는 그들에게 새로운 십계명을 주었으며, 그것은 신(神)에서의 확장하고 있는 야훼 개념을 동반하는 것으로, 너희 모두는 그것을 더욱 값진 외침으로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성서에 이러한 계명들이 두 번 기록되었다는 것, 첫 번째 경우는 이집트로부터 해방이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로 지정되었고, 한편 나중 기록에서는, 우리의 조상들이 이것은 안식일 준수를 위한 이유이므로, 창조의 사실에 대한 인지로 바뀌어야 한다고 요구했던, 그러한 앞서-나아가는 종교적 믿음들의 기록이라는 것을 결코 알아차린 적이 없느냐?
142:3.22
(1599-14)
“그러고 나서 너희는 다시 한번─이사야 시대의 더욱 위대한 영적 깨우침 안에서─이들 열 개의 부정적인 계명들이 하느님을 최극으로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위대하고 긍정적인 사랑의 율법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또한 너희에게 사람의 온전한 의무를 구성하는 것으로 선언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그리고 사람에 대한 사랑의 이 최극 율법이다.”
142:3.23
(1600-1)
그리고 그가 말을 마치셨을 때, 아무도 그에게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저마다 각자의 잠을 자러 갔다.
4. 플라비우스와 그리스 문화
142:4.1
(1600-2)
그리스계 유대인 플라비우스는 문전의 개종자였으며, 할례도 세례도 모두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미술과 조각의 아름다운 것을 크게 사랑하는-자였기 때문에 그가 예루살렘에서 머물 때 차지하는 집은 하나의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이 집은 그가 세계 여행 중에 여기저기에서 수집한 매우 귀중한 보물들로 절묘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그가 예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려고 처음 생각했을 때, 이른바 형상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눈에 보이면 주(主)가 반감을 갖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그러나 예수가 그의 집에 들어섰을 때, 집안 곳곳에 놓인 이들 우상이라고 여겨지는 대상들을 가지고 그를 비난하는 대신에, 오히려 수집품 전체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현시하고, 그리고는 각각의 대상에 대해 깊이-이해하는 많은 질문들을 하자, 플라비우스는 놀랐으면서도 기뻤고, 그에 따라 플라비우스예수를 방에서 방으로 안내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조각품들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142:4.2
(1600-3)
주(主)는 예술에 대한 자신의 호감 어린 태도에 집주인이 어리둥절해하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모든 수집품을 다 돌아본 후에 예수가 이렇게 말씀하였다: “내 아버지가 창조한 사물과 사람의 예술적인 손길로 빚은 사물들의 아름다움을 네가 깊이-이해한다고 해서 왜 네가 꾸지람을 받을 것으로 예상을 했느냐? 모세가 한때 우상 숭배와 거짓 하느님들에 대한 경배를 퇴치시키려 애썼다고 해서, 왜 모든 사람들이 우아함과 아름다움의 재생산에 눈살을 찌푸려야만 하겠느냐? 플라비우스여, 내가 너에게 말하는데, 모세의 자손들은 그를 잘못 납득해 왔으며, 그리고 지금은 심지어 그가 하늘에서 그리고 땅 위에서 그의 형상이나 사물에서의 비슷한 것에 대한 금지조차도 거짓 하느님들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설사 모세가 그 시대의 어둠에-있는 마음들에게 그러한 제약을 가르쳤더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모든 것을 다스리는 영 통치자로서 계시된 오늘날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플라비우스여, 다가오는 왕국에서는 ‘이것을 섬기지 말라, 저것을 섬기지 말라’고 더 이상 가르치지 않을 것임을 내가 선언한다; 사람들이 이것을 삼가고 저것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명령에 더 이상 자신들을 연관하지 않게 될 것이고, 오히려 모두가 하나의 최극 의무에 연관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이 의무는 두 개의 위대한 특권으로 표현되고 있다: 무한한 창조자, 파라다이스 아버지에 대한 진정한 경배와 자신의 동료 인간들에 대한 사랑하는 봉사이다. 만일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하듯이 네가 네 이웃을 사랑한다면, 너는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실제로 안다.
142:4.3
(1600-4)
“나의 아버지가 잘 납득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우상 숭배를 물리치려는 모세의 시도가 정당화되었겠지만, 그러나 다가오는 시대에서는 아버지아들의 일생 안에서 계시될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하느님의 계시는 돌로 만든 우상이나 금과 은의 형상과 창조주 아버지를 혼동하는 것을 언제까지나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다. 이제부터는 지능적 사람은 아름다움에서의 그러한 물질적인 깊은-이해와, 만물과 모든 존재들의 하느님, 곧 파라다이스에 계시는 아버지에 대한 경배와 예배-봉사를 혼동함이 없이, 예술의 보물들을 즐길 수가 있다.”
142:4.4
(1600-5)
플라비우스예수가 자기에게 가르친 모든 것을 믿었다. 다음 날 그는 요단강 너머에 있는 베다니로 가서 요한의 제자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예수의 사도들이 아직 믿는-자들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플라비우스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예수를 위해 커다란 잔치를 베풀었으며 그의 친구 60명을 초대하였다. 그리고 이 손님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역시 다가오는 왕국의 메시지를 믿는-자가 되었다.
5. 확신에 대한 강연
142:5.1
(1601-1)
이 유월절 주간에 예수가 성전에서 설교한 위대한 설교 중의 하나는 그의 청중의 하나인 다마스커스에서 온 사람이 물은 질문에 답변한 것이었다. 이 사람은 예수에게 물었다: “그러나 랍비여, 하느님이 당신을 보냈다는 것과,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우리 가까이에 와 있다고 선언하는 이 왕국 안으로 우리가 참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확실성을 가지고 알겠습니까?” 그러자 예수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142:5.2
(1601-2)
“나의 메시지와 나의 제자들의 가르침에 관하여, 너희는 그들의 열매를 가지고 그들을 판단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너희에게 영의 진리들을 선포한다면, 영이 우리 메시지가 진짜임을 너의 가슴 안에서 증언할 것이다. 왕국에 연관하여 그리고 하늘 아버지에 의한 승인에서의 너희의 확신에 연관하여, 내가 묻겠는데, 너희들 중의 훌륭하고 인정 많은 아버지가, 아들이 가족 안에서 자신의 지위에 관하여 혹은 아버지 가슴의 애정 안에서 안전이 보장된 자신의 장소에 관하여, 근심과 불안을 간직하도록 놔두겠느냐? 땅 아버지인 너희는, 너희 자녀들이 너희 인간 가슴에서의 계속-머무는 사랑 안에 있는 그들 장소에 대하여, 안전에서의 불확실을 가지고 그들을 괴롭히면서 기쁨을 얻겠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영에서의 그의 신앙 자녀들을 마찬가지로 왕국 안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의심하는 불확실에 내버려두지 않는다. 만약 너희가 하느님을 너희의 아버지로 받아들인다면, 그러면 정말로 그리고 진리 안에서 너희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만약 너희가 아들이라면, 그러면 영원하고 신성한 아들관계에 연관하는 모든 위치와 입장에서 너희는 안전하다. 만약 너희가 나의 말을 믿는다면, 그로써 너희는 나를 보내신 를 믿는 것이며, 그렇게 아버지를 믿고 있는 것으로써, 너희는 하늘 시민관계 안에서 너희의 지위를 확실하게 만들어 온 것이다. 만약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면, 너희는 신성한 왕국 안에서 진보의 영원한 일생을 달성하는 데에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142:5.3
(1601-3)
최극 영은 너희가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너희의 영에게 증언하여 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너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그러면 너희는 하느님의 영에서 태어나서 있는 것이다; 영에서 태어난 있는 자는 누구든지 그 자신 안에 모든 의심을 극복하는 힘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모든 불확실, 심지어는 너희의 신앙마저도 극복하는 승리이다.
142:5.4
(1601-4)
“선지자 이사야가 이런 시절에 대해서 말했다; ‘영이 높은 곳으로부터 우리 위에 쏟아부어질 때는, 정의의 일들은 언제까지나 평화요 평정이요 확신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복음을 참으로 믿는 모든 이들에게, 나는 그들이 내 아버지 왕국의 영원한 자비와 영속하는 일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위한 보증인이 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 곧 이 메시지를 듣고 왕국의 이 복음을 믿는 자들은, 하느님의 아들들이고 그리고 너희는 영속하는 생명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세상에게, 너희가 영에서 태어나 있다는 증거는, 너희가 진정으로 서로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142:5.5
(1601-5)
듣는 자들의 군중이 많은 시간을 예수와 함께 남아 있으면서, 그에게 질문들을 물었고 위로를 주는 그의 답변들을 주의 깊게 들었다. 심지어는 사도들도 예수의 가르침으로 대담해져서 왕국의 복음을 더 큰 힘과 확신을 가지고 설교할 수 있게 되었다. 예루살렘에서의 이 체험은 열두 명에게 커다란 영감이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엄청난 군중들과의 첫 접촉이었으며, 그들은 후일 그들의 일에서 커다란 도움이 증명된, 많은 소중한 교훈들을 배웠다.
6. 니고데모와의 대화
142:6.1
(1601-6)
어느 날 저녁에 플라비우스의 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를 만나러 왔는데, 그는 부자였으며 유대 산헤드린의 나이가 지긋한 회원이었다. 그는 이미 이 갈릴리 사람의 가르침에 대해 많은 소문을 들었으므로, 어느 날 오후에 예수가 성전 마당에서 가르칠 때 그의 말을 들으러 갔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들으러 자주 가려했었지만, 그의 가르침에 참석한 국민 눈에 뜨이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이는 유대인의 통치자들은 이미 예수와 너무나 차이 났기 때문에 산헤드린의 어떤 회원도 어떤 공개적인 방식으로도 그와 정체화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고데모는 특별히 이날 저녁에 밤이 된 후 예수와 사적으로 만나도록 안드레와 함께 준비하고 있었다. 면담이 시작되었을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플라비우스의 마당에 있었지만, 그러나 나중에 그들 모두는 강연이 이어지고 있던 집안으로 들어갔다.
142:6.2
(1602-1)
니고데모를 맞아들이면서 예수는 아무런 특별한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그와 이야기하면서 어떤 적당한 타협이나 지나친 설득도 없었다. 주(主)는 그의 은밀한 방문객에게 퇴박을 주려는 어떤 의도도 없었으며, 또한 어떤 빈정거림도 행사하지 않았다. 이 저명한 방문객을 다루는 모든 것에서, 예수는 차분하고 진지하였으며 위엄이 있었다. 니고데모산헤드린의 공식적인 대표가 아니었다; 그는 주(主)의 가르침에 대한 전적으로, 개인적인 그리고 진정한 관심 때문에 예수를 보러 왔다.
142:6.3
(1602-2)
플라비우스가 소개하자마자, 니고데모가 말하였다: “랍비여, 우리는 당신이 하느님이 보내신 선생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는 하느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였다면 어떤 단순한 사람도 그렇게 가르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다가오는 왕국에 관한 당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더욱 알고자 하는 갈망에 싸여 있습니다.”
142:6.4
(1602-3)
예수니고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니고데모여,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하겠는데, 사람이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고는 그는 하느님의 왕국을 볼 수가 없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답하였다: “그러나 그가 늙어서 있는데, 어떻게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그가 태어나기 위해 다시 그의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142:6.5
(1602-4)
예수가 말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네게 선언한다. 영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고는, 그는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육신에게서 태어난 것은 육신이고, 영에게서 태어난 난 것은 영이다. 그러나 네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네가 불가사의하다고 하면 안 된다. 바람이 불 때에, 네가 나뭇잎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지만, 그 바람을─그것이 어디서 오는지 혹은 어디로 가는지를─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영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육신의 눈으로 네가 영의 현시활동은 바라볼 수는 있지만, 실재로 영을 식별할 수는 없다.”
142:6.6
(1602-5)
니고데모가 답하였다: “그러나 나는 납득이 안 됩니다─어떻게 그랄 수가 있습니까?” 예수가 말했다: “네가 이스라엘에 있는 선생임이 있을 수 있고, 그리고 여전히 이 모든 것에 무지하다는 것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영의 실체에 대해서 아는 자들의 의무는, 오로지 물질적 세상의 현시활동 작용만 식별하는 자들에게 이들 사물들을 계시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늘 진리들을 말한다면, 네가 우리를 믿겠느냐? 니고데모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자, 실로 사람의 아들이라도 믿으려는 용기를 가지고 있느냐?”
142:6.7
(1602-6)
그러자 니고데모가 말하였다: “그렇지만, 왕국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준비하면서 나를 다시-만들어주려고 있는 이 영을 붙잡는 것을 내가 어떻게 시작할 수 있습니까?” 예수가 대답하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이 이미 네 안에 내주하고 있다. 만일 네가 위로부터 온 이 영의 인도를 받으려 한다면, 너는 곧 영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게 될 것이며, 그리고 그렇게 되면 영의 안내를 전심으로 선택하는 것으로써, 너는 영에게서 태어나는 것이다. 이는 삶 안에서 너의 유일한 목적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영에게서 그리고 하느님의 왕국 안에서 행복하게 태어난 너 자신을 발견하면서, 너는 일상생활 속에서 풍부한 영의 열매를 맺기 시작할 것이다.”
142:6.8
(1602-7)
니고데모는 철저하게 진지했다. 그는 깊이 감동을 받았으나 어리둥절한 채로 떠났다. 니고데모는 자아-발전, 자아-절제, 그리고 높은 도덕적 본질특성까지도 성취되어 있었다. 그는 세련되고, 자기본위적이고, 이타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린아이가 지혜롭고 사랑-넘치는 세상의 아버지의 안내와 인도에 기꺼이 복종하듯이, 그렇게 자신의 뜻을 신성한 아버지의 뜻에 어떻게 복종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실체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 곧 영원한 왕국의 진보하는 상속자가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142:6.9
(1603-1)
그러나 니고데모는 왕국을 붙잡고 있기에 충분한 신앙을 스스로 불러일으켰다. 그는 산헤드린의 그의 동료들이 심문 없이 예수에게 죄를 규탄하려 할 때, 약하게나마 항의하였다; 그는 나중에 대부분의 제자들마저도 주(主)의 마지막 고통과 죽음의 현장으로부터 두려워 달아났을 때에도, 용감하게 자기 신앙을 인정하면서 아리마대요셉과 더불어, 예수의 몸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7. 가족에 관한 교훈
142:7.1
(1603-2)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주간의 가르침과 개인적 사명활동으로 바쁜 기간이 지난 이후에 예수는 다음 수요일을 베다니에서 그의 사도들과 쉬면서 보내셨다. 그날 오후에 도마가 길고도 교훈적인 대답을 이끌어낸 질문을 하였다. 도마가 말하였다: “주(主)여, 우리가 왕국의 대사들로 따로 세움을 받던 날에 당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하였고, 우리에게 우리의 일생에서의 개인적인 방식에 관하여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군중들에게는 무엇을 가르쳐야 합니까? 이들 국민들은 왕국이 더욱 충만하게 다가 온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당신의 제자들이 노예를 소유해도 됩니까? 당신을 믿는 자들은 가난을 벗하면서 재물을 버려야 합니까? 더 이상 어떤 법과 공의를 안 가져도 될 만큼 자비가 홀로 만연하여야 합니까?” 예수와 열두 사도들은 그 날 오후 내내 그리고 저녁 식사 후의 저녁 내내 도마의 질문을 토론하면서 보냈다. 이러한 기록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주(主)의 교훈을 다음과 같은 요약으로 제시한다:
142:7.2
(1603-3)
예수는 자기 자신은 육신을 입고 그리고 독특한 일생으로 땅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과 그들, 열두 사도들은 사람의 아들의 이런 증여 체험에 참가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먼저 사도들에게 분명하게 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일하는 자로서 그들도 역시, 증여 체험 전체에서의 많은 특별한 제약이나 의무를 나누어 가져야만 한다고 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사람의 아들하느님의 깊은 가슴속과 그리고 사람의 혼의 매우 깊은 속을 동시에 볼 수 있었던 자로, 이제까지 이 땅에 살았던 자로 유일한 개인이었음을 어렴풋이 비치는 말이 있었다.
142:7.3
(1603-4)
예수는, 하늘의 왕국은 바로 이 땅에서 시작하여 계승되는 일생 정거장들을 통하여 두루 파라다이스까지 진보하면서 올라가는 진화적인 체험이라는 것을 매우 뚜렷하게 설명하였다. 그날 저녁 시간에 말한 강론 중에서, 그는 왕국 발전의 어느 미래 단계에서, 그가 영적 힘과 신성한 영광으로 이 세상을 재-방문할 것임을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142:7.4
(1603-5)
그다음에 그는 “왕국 관념”이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를 묘사하는 가장 좋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이 왕국을 기대하고 있었고, 요한이 다가오는 왕국이라는 용어로써 설교했었기 때문에 연설에서의 그러한 모습을 채택한 것임을 설명하였다. 예수가 말했다: “다른 시대의 국민들은 왕국의 복음이 가족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로 제시될 때─사람들이 종교를 하느님의 아버지신분과 사람의 형제신분 곧 하느님의 아들관계로 이해할 때─왕국의 복음을 더울 잘 납득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주(主)는 상당히 길게 하늘의 가족을 묘사하기 위하여 땅의 가족에 관해 상당한 시간을 강연하였으며 두 가지의 근본적인 삶의 법칙을 재-언급하였다: 그것은 아버지, 곧 가족의 우두머리에 대한 사랑의 첫 번째 계명이고, 그리고 자녀들 가운데에서 네 자신을 사랑하듯, 네 형제를 사랑하라는 상호 사랑의 두 번째 계명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형제의 애정의 그러한 본질특성은, 사심-없고 그리고 사랑-넘치는 사회적 봉사 안에서 어김없이 스스로를 현시할 것임을 설명하였다.
142:7.5
(1603-6)
그다음에는 가족 일생에서의 근본적인 특징들과 그리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관계에 이것들을 적용하는 데 대한 기억할만한 토론이 뒤 따랐다. 예수는 참된 가족은 다음의 일곱 가지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언급했다:
142:7.6
(1604-1)
1. 실존의 사실. 자연-본성에서의 관계와 필사자 유사성에서의 현상은 가족 안에 단단히 묶여 있다: 자녀들은 부모의 어떤 특색을 이어받는다. 자녀들은 부모 안에 기원을 가진다; 개인성 실존은 부모의 활동에 의존한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모든 자연-본성에서 선천적인 것이며, 모든 살아있는 실존에 만연하고 있다.
142:7.7
(1604-2)
2. 안전과 즐거움. 참된 아버지는 그들 자녀의 필요를 마련해주는 것에서 커다란 즐거움을 누린다. 많은 아버지들은 단순히 그들 자녀들의 원하는 것을 공급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자녀들의 즐거움을 위해 잠정적인-마련을 만드는 것을 또한 즐긴다.
142:7.8
(1604-3)
3. 교육과 훈련. 지혜로운 아버지들은 그들의 아들과 딸의 교육과 적절한 훈련을 위해서 주의 깊게 계획을 세운다. 아이들이 어릴 때, 훗날 일생에서의 더 큰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그들은 준비된다.
142:7.9
(1604-4)
4. 단련과 제약. 멀리-내다보는 아버지들은 그들의 어리고 미숙한 자식의 필요한 단련, 안내, 교정 그리고 때로는 제약을 위하여 또한 잠정적인-마련을 만든다.
142:7.10
(1604-5)
5. 동행자관계와 충성. 애정이 넘치는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들과 친밀하고 사랑-넘치는 교제를 유지한다. 그의 귀는 그들의 청원에 항상 열려있다; 그는 언제까지나 그들의 고난을 함께 나누어 가지며, 그들의 어려움들을 도와주려는 준비가 되어있다. 아버지는 그의 자손의 진보하는 복지에 최극으로 관심을 두고 있다.
142:7.11
(1604-6)
6. 사랑과 자비. 동정심이 가득한 아버지는 아낌없이 용서해준다; 아버지들은 그들 자녀들에 대하여 복수하려는 기억들을 간직하지 않는다. 아버지들은 재판관, 적대자 또는 채권자와 같은 분들이 아니다. 실제 가족은 관용, 인내, 그리고 용서 위에 세워진다.
142:7.12
(1604-7)
7. 미래를 위한 준비. 현세적인 아버지들은 그들의 아들들에게 유산을 남겨주기를 좋아한다. 가족은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이어져 계속된다. 죽음은 단지 한 세대가 끝나고 또 다른 세대의 시작을 표시하는 것이다. 죽음은 개별존재의 일생을 종료시키지만, 그러나 가족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142:7.13
(1604-8)
주(主)는 가족 일생의 이들 모습을, 땅의 자녀인 사람과 파라다이스 아버지, 곧 하느님과의 관계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 여러 시간 동안 토론하였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이러했다: “아들과 아버지에 대한 이러한 전체적인 관계는, 내가 완전함 안에서 알고 있다. 이는 너희가 영원한 미래 안에서 아들관계를 달성해야만 하는 모든 것을, 내가 지금 이미 달성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아버지의 오른편으로 올라갈 준비가 되어있으며, 그러므로 너희가 영광스러운 진보를 완결하기도 전에, 너희 모두가 하느님을 보도록 하기 위한 길이 그리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게 되는 길이, 내 안에 지금 여전히 더욱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142:7.14
(1604-9)
사도들은 이러한 깜짝 놀라게 하는 말들을 들었을 때, 그들은 예수의 세례가 있던 시간에 요한이 했던 선언을 상기하였으며, 그리고 또한 그들은 주(主)의 죽음과 부활에 뒤이어 이루어진 자신들의 설교와 가르침에서도 이 체험이 연결되어 생생하게 상기하였다.
142:7.15
(1604-10)
예수는 신성한 아들, 우주 아버지의 충만한 신임을 받는 분이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있었으므로 그를 충만하게 이해했다. 그는 이제 그의 땅의 일생을 아버지의 충만한 만족에 이르기까지 살았으므로 육신으로의 육화는 그로 하여금 사람을 충만하게 이해하도록 해주었다. 예수는 사람에서의 완전이었다; 그는 모든 참된 믿는 자들이 그의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달성하도록 운명된 바로 그러한 완전을 달성했던 것이다. 예수하느님의 완전을 사람에게 계시하였고 그 자신으로 하느님에게 권역에서의 완전하게 된 아들을 제시하였다.
142:7.16
(1605-1)
예수가 여러 시간 동안 강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도마는 아직도 만족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말하였다: “그러나 (主)여,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항상 우리에게 친절하고 자비-넘치게 대한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여러 차례, 우리는 땅에서 지독한 고통을 당하고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언제나 응답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당신 가르침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서, 어느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까?”
142:7.17
(1605-2)
예수가 답하였다: “도마야, 도마야, 얼마나 더 오래 있어야 네가 영의 귀로 듣는 능력을 획득하겠느냐? 네가 이 왕국이 영적 왕국이라는 것과 나의 아버지 또한 영적 존재라는 것을 식별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릴 것이냐? 내가 너희에게, 아버지되심이 무한하고 영원한 영으로 있는 그러한, 하늘의 영적 가족 안에 있는 영적 자녀들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너희는 납득하지 못하느냐? 물질적인 관련사에 나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그렇게 적용하지 말고, 땅의 가족을 신성한 관계의 하나의 예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내게 허용하지 않을 것이냐? 너의 마음속에서 왕국의 영적 실체들을 그 시대의 물질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들과 분리시킬 수는 없겠느냐? 나는 영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데, 내가 단지 예시의 목적으로 평범하고 사실적인 관계를 채택한다고 해서, 어찌하여 너희는 나의 의미를 육신의 언어 안에서 번역하려고 고집하느냐? 나의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겠는데, 영적 왕국의 가르침을 노예제도, 빈곤, 주택, 토지와 같은 옹졸한 관련사들이나 인간의 평등과 정의라는 물질적인 문제에 적용하는 것을 제발 그만두기 바란다. 이러한 세속적인 문제들은 이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이고, 그것들이 어떤 면에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반면에 너희는 내가 나의 아버지를 대표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나를 대표하도록 소명을 받은 것이다. 너희는 영적 왕국의 대사, 곧 영 아버지의 특별한 대표들이다. 이제는 내가 너희를 영적 왕국의 충만하게-성장한 사람으로서 가르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겨우 아이들처럼 대해야 하겠느냐? 너희가 영 이해력 안에서 성장할 수는 결코 없는 것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육신으로서 우리의 관계적-연합의 바로 그 끝까지 너희를 사랑하며 너희를 참고 견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때가 오더라도 나의 영은 너희들보다 먼저 세상 모두 안으로 갈 것이다.”
8. 남부 유대 지방에서
142:8.1
(1605-3)
4월 말경에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에서 예수에 대한 반대가 너무 뚜렷해져서 주(主)와 사도들은 잠시 예루살렘을 떠나 베들레헴헤브론에서 일하러 남쪽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5월 한 달 전부는 이들 도시에서 그리고 인근 마을의 국민들과 개인적인 일을 행하면서 보냈다. 이 여행 중에는 아무런 대중 설교를 하지 않았고 단지 집집마다 방문으로 설교하였다. 사도들이 복음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돌보는 동안, 이 기간들 중의 얼마간을 예수아브너나지르인의 거류민을 방문하면서 엥게디에서 지냈다. 세례자 요한이 이곳 출신이었고 아브너는 이 집단의 우두머리였다. 나지르인 형제신분의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금욕적이며 괴벽스러운 이 사람들 대부분은 예수가 금식과 몇몇 형태의 자아-부정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하늘에서 보낸 선생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다.
142:8.2
(1605-4)
이 권역에 사는 국민은 예수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몰랐다. 사람들은 제자들의 대다수가 그랬던 것처럼, 항상 주(主)나사렛에서 태어났다고 추측하였지만, 열두 사도들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142:8.3
(1605-5)
유대의 남부에서의 이 체류는 휴식이 되고 그리고 수고의 열매가 풍족히 열린 계절이었다; 많은 혼들이 왕국에 더해졌다. 6월의 첫째 날이 되어서, 예수를 반대하는 동요가 예루살렘에서 어느 정도 가라앉아 조용해졌으므로 주(主)와 사도들은 믿는 자들을 가르치고 위로해주기 위하여 되돌아갔다.
142:8.4
(1606-1)
예수와 사도들이 예루살렘 안이나 그 근처에서 그달 전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기간 동안 아무런 대중을 위한 가르침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당시에 겟세마네라고 불리던 그늘진 공원의 정원에 직접 세웠던 천막 안에서 대부분의 날을 살았다. 이 공원은 기드온 시냇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올리브 산의 서쪽 비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안식일인 주말에는 그들은 대개 베다니에서 나사로와 그의 여동생들과 함께 지냈다. 예수예루살렘 성안 담장 안으로는 몇 번만 들어가을 뿐이지만, 많은 숫자의 관심을 가진 문의자들이 그를 방문하려고 겟세마네로 나왔다. 어느 금요일 밤에 니고데모아리마대 요셉이 모함을 무릅쓰고 예수를 보러 왔었으나 주(主)의 천막 입구 앞까지 왔다가, 두려워하여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물론, 예수가 그들의 행동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감지하지 못하였다.
142:8.5
(1606-2)
유대인 통치자들이, 예수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를 체포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그가 아무런 대중을 위한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을 관찰하고 예수가 자신들이 벌린 이전의 동요로 겁을 먹은 것으로 결론을 내렸고, 그의 가르침을 이러한 사적인 방법으로 수행하는 것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허용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시몬이라는 산헤드린의 회원이 예수의 가르침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후에, 유대인 통치자 앞에서 자신이 그러하다는 것을 선언한 6월의 마지막 날 전까지는, 이런 식으로 관련사들이 조용하게 움직였다. 즉각적으로 예수를 체포하기 위한 새로운 동요가 갑자기 일어났으며 또한 너무 강하게 자라났기 때문에 주(主)사마리아데카폴리스에 있는 도시로 물러나 있기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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