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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2 편
로마 체류 기간
132:0.1
(1455-2)
고노드인도의 영주(領主)들로부터 로마인 통치자인 티베리우스에게 보내는 서신을 가지고 왔었기 때문에, 로마에 도착한지 3일 후에 이 두 사람의 인도인들과 예수티베리우스를 만나러 갔다. 그 시무룩한 황제는 그 날따라 평소와는 달리 매우 기분이 좋았고 이 세 사람들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이 자기 앞에서 물러가자, 황제는 예수를 언급하면서, 오른쪽에 서 있던 측근에게 “만약 내가 저 사람의 왕다운 자태와 우아한 태도를 가졌다면, 내가 실제 황제가 될 터인데. 그렇지 않으냐?”라고 한마디 하였다.
132:0.2
(1455-2)
로마에 있는 동안, 가니드는 공부와 도시 근처의 흥미로운 장소를 방문하는 데에 정기적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처리할 사업상 거래가 많았고, 자기 아들이 자라서 자신의 거대한 상업적 이권의 관리에 있어서 값진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는 이 소년을 사업세계에 입문시킬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로마에는 많은 인도인들이 있었으며, 고노드가 직접 채용한 사람들 중의 하나가 그를 위해 통역을 자주 맡아 주었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예수는 하루 종일 혼자서 보내곤 하였다; 이것이 200만 명의 주민을 가진 이 도시를 샅샅이 눈에 익힐 시간을 그에게 주었다. 그는 정치, 사법, 그리고 상업 활동의 중심지가 되는 토론광장에서 자주 눈에 띄었다. 그는 카피톨리움에 종종 올라갔고 거기서 쥬피터쥬노미네르바에게 바쳐진 웅장한 신전을 보면서, 이들 로마인이 붙들려 있는 무지의 사슬에 대해 깊이 묵상하였다. 그는 또한 팔라틴 언덕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곳에는 황제의 저택과 아폴로 신전 그리고 그리스라틴 도서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132:0.3
(1455-3)
이때의 로마제국은 남부 유럽 전체,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북서 아프리카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 곳에 사는 주민들 중에는 동반구(東半球)에 있는 모든 나라들의 시민들도 포옹되어 있었다. 이러한 유란시아 필사자들의 세계적인 집합체를 공부하고 또 그들과 함께 어울리려는 욕망이, 예수가 이 여행에 동참하기로 승낙한 주된 이유였다.
132:0.4
(1455-4)
예수로마에 머무는 동안 사람들에 대해서 많이 배웠지만, 그가 이 도시에서 6개월 체류기간동안 가졌던 다양한 모든 체험들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제국의 수도에 있는 종교 영도자들을 접촉하고 그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로마에서의 첫 주간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예수는 견유학파, 스토아학파, 신비종파, 그리고 특히 미트라를 숭배하는 집단의 쓸 만한 영도자들을 찾아내었고, 그들과 친숙해졌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유대인들이 명백하게 배척할 것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그의 메신저들이 하늘의 왕국을 선포하기 위하여 얼마 안 있어서 로마로 올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복음이 좀 더 수월하고도 확실히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가장 놀라운 방법으로, 미리 길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스토아학파 중에서 뛰어난 5명, 견유학파에서 11명, 그리고 신비-예배종파의 영도자 중에서 16명을 선택하였고, 거의 6개월 동안의 남는 시간 대부분을 이들 종교 선생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보냈다. 그가 가르친 방법은 다음과 같았는데: 그들의 가르침이 내포하는 실수들이나 결점을 절대로 공격하지 않았다. 각각의 경우마다 그들의 가르침 속에 있는 진리를 분리해 낸 후에 이 진리가 그들의 마음속에서 갖추어지고고 밝게 빛나도록 유도함으로써, 짧은 시간 내에 이러한 진리가 강화되어, 연관되어 있던 실수를 효과적으로 밀어내게 만들었다; 이렇게 예수가-가르쳤던 이 남녀들은, 나중에 초기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의 가르침들 속에서 좀 더 첨부되고 비슷한 진리들을 알아볼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 복음 설교자들의 가르침이 이런 식으로 일찍부터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로마에서 그리스도교가 급속도로 퍼지고 그곳으로부터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도록 강력한 촉진제가 제공되었다.
132:0.5
(1456-1)
주목할 만한 이 행동의 의의는 우리가 기록하려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부터 더 잘 납득될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로마에서 가르쳤던 32명의 종교 영도자들 중에서 단지 2명만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사실과; 나머지 30명이 로마에서 그리스도교가 설립되는 데 있어서 중심인물들이 되었고, 또한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최고의 미트라교 신전이 그 도시의 첫 번째 그리스도교 교회로 바뀌는데 있어서 공헌하기도 하였다는 사실이다. 뒤에서 인간들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던 우리로서는, 그리고 19세기 시대의 관점에서 고려해 볼 때, 유럽 전역에 그리스도교가 빨리 퍼지도록 하는 무대를 일찍부터 설치하는 데 있어서, 지상의 가치를 갖는 정확하게 세 가지 요소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 시몬 베드로를 사도(使徒)로 선택하고 유지한 점.
  • 스테반과의 예루살렘에서의 대화,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타르수스사울을 얻게 되었던 점.
  • 로마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그 제국 전역에서 새로운 종교의 영도자관계가 되도록 30명의 이 로마인들을 미리 준비시킨 점.
132:0.6
(1456-5)
스테반이나, 혹은 선택된 30명의 로마인도, 자신들의 모든 체험을 이루는 동안, 자기들이 한 때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의 이름이 자신들의 종교적 가르침의 주제가 되었다는 것을 언제까지나 깨닫지 못하였다. 기원적인 32명을 위하여 행한 예수의 활동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이었다. 이들 개별존재들에 대한 그의 노력에서,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은 결코 그들 중 세 사람 이상을 한 번에 만나지 않았으며, 두 사람 이상을 만나는 경우도 드물었고, 대부분의 경우에 혼자서 그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가 종교적으로 훈련시키는 이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남자들과 여자들이 전통에 속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미래의 모든 종교적 발달 과정과는 달리, 고정된 선입견의 희생자들이 아니었다.
132:0.7
(1456-6)
몇 년 후에 많은 사람들이 매우 신속하게 뒤따랐기 때문에, 베드로바울 그리고 로마에 온 다른 그리스도교 선생들은 자기들보다 먼저 앞장섰던, 그리고 자기들이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찾아올 수 있도록 매우 분명하게(그리고 그들이 자기도 모르게 상상하였던 대로) 그 길을 준비해 놓았던 이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바울은 비록 이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의 정체성을 한 번도 실제로 추측하지는 못하였지만, 그가 죽기 얼마 전에, 그에 대한 개인적 설명들의 유사성을 근거로 하여, “안디옥의 천막-만드는 자”가 바로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한 번은, 시몬 베드로가, 로마에서 설교하는 동안,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어쩌면 이 사람이 예수였었는지도 모른다고 추측하였지만, 그는 자기 스승이 로마에 온 적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그렇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곧 그 관념을 지워버렸다.
1. 참된 가치
132:1.1
(1456-7)
로마 체류기간의 초기에 예수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스토아학파의 영도자인 앙가몬이었다. 이 사람은 나중에 바울의 훌륭한 친구가 되었고, 로마에서 그리스도교 교회를 강력하게 지지한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예수앙가몬에게 가르쳤던 내용을 현대 언어로 다시 요약하여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132:1.2
(1457-1)
참된 가치관의 기준은 영적 세계에서와 영원한 실체의 신성한 차원들에서 찾아져야만 한다. 상승하는 필사자에게는, 저급하고 물질적인 모든 기준들은 과도기적이고, 부분적이며 열등한 것으로 인지되어야만 한다. 과학자들은 물질적 사실들의 관계성을 발견하는 데에, 그렇게 나름대로 국한된다. 기술적으로 볼 때, 그는 자신이 물질주의자나 혹은 이상주의자라고 주장할 권리가 없는데, 이는 그렇게 주장하는 태도의 일부 또는 전부가 바로 철학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그가 진정한 과학자의 태도를 져버리는 것으로 가정했기 때문이다.
132:1.3
(1457-2)
만일 인류의 도덕적 통찰력과 영적 달성이 균형 잡힌 비례로 증강되지 않는다면, 순전히 물질적인 문화의 무제한적인 발전은 결국에는 문명에 위협이 될 수 있다. 순전히 물질적인 과학은 모든 과학적 투쟁성과를 파괴하는 잠재적 씨앗을 그 자체 내에 간직하고 있는데, 이로서 바로 이러한 속성은, 한 문명이 스스로 도덕적 가치감각을 포기해 가고 그리고 영적 달성목표를 배척해 가는 그러한 문명의 궁극적 붕괴를 가져오는 전조가 된다.
132:1.4
(1457-3)
물질적인 과학자와 극단적인 이상주의자는 항상 치고받으며 다투게 되어 있다. 이것은 높은 도덕적 가치와 영적 시험 차원의 상식적 기준을 소유한 저들 과학자와 이상주의자에게는 참말이 아니다. 모든 시대에서, 과학자들과 종교가들은 인간에게 필요하다는 심판대 앞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여야만 한다. 그들은 인간의 진보를 이루는 봉사에 더욱 더 헌신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속적인 생존을 정당화하려고 용감하게 분투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 서로간의 모든 전쟁을 피해가야만 한다. 만약에 어떤 시대의 이른바 과학이나 종교가 거짓되다면, 좀 더 진실하고 좀 더 가치 있는 질서의 물질적 과학 또는 영적 종교가 창발하기 전에 그것들의 활동들이 정화되거나 아니면 사라져야만 한다.
2. 선과 악
132:2.1
(1457-4)
마르두스로마에서 유명한 견유학파 영도자였으며,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에게 훌륭한 친구가 되었다. 그는 매일같이 예수와 이야기를 나눴고, 밤마다 그의 숭고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많은 중요한 토론들 중에는, 선과 악에 대한 이 진지한 견유학자의 질문에 답변하려는 의도로 마련된 것이 있었다. 예수가 말한 내용을 20세기 언어로 요약하여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132:2.2
(1457-5)
나의 형제여, 선(善)과 악(惡)이란 말은, 관찰 가능한 우주에 대하여 인간이 이해하고 있는 상대적 차원을 상징하는 단어에 불과하다. 만일 네가 윤리적으로 게으르고 사회적으로 무관심하면, 현재의 사회적 풍습들을 선에 대한 너의 기준으로 선택할 수도 있다. 만약 네가 영적으로 나태하고 도덕적으로 진보적이지 못하다면, 너는 같은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종교적 실천 관행과 전통을 너의 선의 기준으로 삼아도 된다. 그러나 시간에서 생존하여 영원 안에서 창발 하는 혼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사람의 가슴 안에 거하도록 보내준 신성한 영에 의해 세운 영적 기준들에 대한 진정한 가치에 따라 그들이 결정 되는대로 그에 따라, 선과 악 사이에서 활력을 주는 그리고 개인적 선택을 내려야만 한다. 이러한 내주(內住)하는 영이 바로 개인성 생존의 기준인 것이다.
132:2.3
(1457-6)
진리와 마찬가지로, 선이란 항상 상대적이며, 반드시 악과 대조된다. 이들 선과 진리의 본질특성에 대한 인식이 바로, 사람의 진화하는 혼이 영원한 생존에 필수 요소인 선택을 그러한 개인적 결정으로 내릴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132:2.4
(1458-1)
과학적 명령과 사회적 관례 그리고 종교적 독단론을 논리적으로 따르는, 영적으로 눈이 어두운 개별존재는, 자신의 도덕적 자유를 희생하고 영적 해방을 잃는 심각한 위험 속에 처해 있다. 그러한 혼은 지적 앵무새나 사회적 자동장치 또는 종교적 권한의 노예가 될 운명에 처해 있다.
132:2.5
(1458-2)
선(善)은 도덕적인 자아-실현과 영적 개인성의 달성─내주하는 조절자의 발견, 그리고 조절자와의 정체화구현─이라는 증가하는 해방의 새로운 차원들을 향하여 항상 성장한다. 체험이란, 그것이 아름다움(美)에 대한 깊은 이해를 높이고, 도덕적 의지를 강화시키고, 진리에 대한 식별력을 증강시키고, 자기 동료들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힘을 확대하고, 영적 이상을 고양(高揚)시키고, 시간에서의 최극의 인간 동기를 내주하는 조절자의 영원한 계획과 통합할 때. 선(善)하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소망이 커지도록 직접적으로 인도하고, 그로써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를 더욱 닮아가려는 신성한 열정을 육성시킨다.
132:2.6
(1458-3)
네가 창조체 발전의 우주 눈금을 상승해감에 따라서, 선을-체험하는 그리고 진리를-식별하는 너의 수용능력에 따라서, 완전 안에서 증가되는 선과 감소하고 있는 악을 너는 발견할 것이다. 상승하는 인간의 혼이 최종 영적 차원을 성취할 때까지는, 실수를 품거나 악을 체험하는 능력을 전적으로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132:2.7
(1458-4)
선(善)은 살아있고, 상대적이며, 항상 진보하고, 변함없는 하나의 개인적 체험이며, 진리(眞)와 아름다움(美)을 식별하는 것과 영구적으로 상관관계되어 있다. 선은 영적 차원의 긍정적 진리-가치를 인지하면서 그 안에서 발견되며, 긍정적 진리의 가치는 반드시, 인간의 체험 안에서, 부정적 복사본─잠재적 악의 그림자─과 대조되어야만 한다.
132:2.8
(1458-5)
네가 파라다이스의 차원들을 달성할 때까지, 선은 항상 달성한 체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목적이 될 것이며, 소유라기보다는 계속적인 추구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정의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며 나아갈 지라도, 부분적인 선의 달성 안에서 증가되어 가는 만족을 체험하게 된다. 이 세상에 선과 악이 현존한다는 사실은, 사람의 도덕적 의지의 실존과 실체, 이들 가치들을 그래서 정체화하고 또한 그 둘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개인성의 실존과 실체를, 그 자체로서 명확하게 증거하는 것이다.
132:2.9
(1458-6)
파라다이스의 달성 시기가 이르게 되면, 자아를 진정한 영적 가치들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상승하는 필사자의 수용능력은 생명의 빛을 소유하는 완전성의 달성으로 결과를 낳기까지 그렇게 확대된다. 그렇게 완전해진 영 개인성은, 너무나도 전적으로, 신성하게, 그리고 영적으로, 선함(善), 아름다움(美), 그리고 진리(眞)의 적극적이고도 최극의 본질특성과 통합되어지기 때문에 무한한 파라다이스 통치자의 신성한 빛의 날카로운 밝히 드러내는 광채에 쪼여질 때, 그러한 정의로운 영은 그 어떠한 잠재 악의 부정적인 그림자를 만들게 되는 아무런 가능성도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러한 모든 영적 개인성에서, 선(善)은 더 이상 부분적이거나, 대조적이거나, 비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성하게 완성되었고 영적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그것은 최극자의 순수함과 완전성에 가까워진다.
132:2.10
(1458-7)
악의 가능성은 도덕적 선택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재성은 아니다. 그림자는 단지 상대적으로 실제이다. 실재적인 악은 하나의 개인적 체험으로서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잠재적인 악은, 영적 발전의 낮은 차원들에서 이루어지는 도덕적 진보의 영역 안에서 결단을 이루는 하나의 자극제로 똑같이 잘 작용한다. 악은 오직 도덕적 마음이 악을 선택했을 때에만, 하나의 개인적 체험의 실체가 된다.
3. 진리와 신앙
132:3.1
(1459-1)
나본그리스 유대인이었고, 로마에서 으뜸 신비 예배종파인 미트라교의 우두머리들 중에서 영도자였다. 미트라교의 이 고위 사제는, 다마스커스의 서기관과 가진 여러 번의 만남 중에서, 어느 날 저녁 나누었던 진리와 신앙에 관한 토론으로 가장 변함없는 영향을 받았다. 나본예수를 개종시키려고 생각하였었고 미트라교의 선생이 되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라고 그에게 제의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예수가 왕국 복음에 대한 초기 개종자들 중의 하나로 자신을 준비시키고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가 가르친 요지를 현대 용어로 다시 서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132:3.2
(1459-2)
진리는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삶에 의해서만 정의(定意)되어질 수 있다. 진리는 항상 지식 이상의 것이다. 지식은 관찰할 수 있는 사물들과 관계되지만, 진리는 그러한 순전히 물질적인 차원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지혜와 조화롭게 어울리고 그리고 인간 체험처럼 그렇게 가치를 달아볼 수 없는 것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영적인 그리고 삶 실체들까지 포옹한다. 지식은 과학에 근원을 두고 있다; 지혜는 진정한 철학에 근원을 두고 있다; 진리는 영적 삶의 종교적 체험에 근원을 두고 있다. 지식은 사실들을 다룬다; 지혜는 관계들을 다룬다; 진리는 실체 가치들을 다룬다.
132:3.3
(1459-3)
사람은 과학을 결정화하고, 철학을 정형화하며, 진리를 독단화 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왜냐하면 삶에 있어서의 발전적인 투쟁에 적응시키는 일에 정신적으로 나태하고, 또 한편으로는 미지의 것에 대해 끔찍하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사람은 자신의 사고의 습관이나 자신의 삶의 기법들에 변화를 시도하는데 있어서 둔하다.
132:3.4
(1459-4)
계시된 진리, 개인적으로 발견된 진리는, 인간 혼의 최극의 기쁨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마음과 내재하는 영이 공동으로 창조한 것이다. 진리(眞)를 식별하고 아름다움(美)을 사랑하는 이 혼의 영원한 구원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하느님을 찾으며 그를 닮아가려는 단 한 가지의 목적만을 개발하도록 이 필사자를 인도하는 선(善)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에 의하여 확인된다. 진정한 지식과 진리 사이에는 아무 충돌이 없다. 지식과 인간 신념들, 편견으로 채색되고, 두려움에 의해 변형되고, 물질적 발견이나 영적 진보의 새로운 사실들에 대처하는 것을 두려워함으로써 지배를 당하는 신념들 사이에서는 아마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132:3.5
(1459-5)
그러나 진리는 신앙의 실천 없이는 절대로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조금도 틀리지 않는 것은, 사람의 생각들과 지혜 그리고 윤리와 이상들이 그 자신의 신앙, 자신의 최고의 희망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참된 신앙은 심오한 반영과, 진지한 자아-비판, 그리고 타협하지 않는 도덕적 의식 위에 세워진다. 신앙은 영성화된 창조적 상상력의 영감이다.
132:3.6
(1459-6)
신앙은 신성한 불꽃의 초인간적 활동, 불멸하는 씨앗들이 이루어지도록 작용하는데, 그 씨앗은 사람의 마음속에 살고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생존의 잠재자이다. 식물들과 동물들은, 자기와 동일한 입자들을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하는 기법에 의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존한다. 사람의 인간 혼(개인성)은 내주하는 이 신성의 불꽃과 관계적-연합하는 정체성에 의하여 이 세상의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으며, 그 불꽃은 불멸하는 것이고, 인간의 개인성으로 하여금 지속적이며 더 높은 차원의 진보적 우주 실존으로서 영속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인간 혼의 그 숨겨진 씨앗은 하나의 불멸하는 영이다. 혼의 두 번째 세대는, 영적이고 진보하는 실존들의 개인성 현시활동이며, 이것은 오직 이 신성한 실존개체가 그 실존의 근원, 모든 실존의 개인적 근원, 하느님, 우주 아버지께 이르렀을 때에만 끝나는 그 개인성 현시활동의 첫 번째 계승이다.
132:3.7
(1459-7)
인간의 생명은 계속 이어진다.─생존한다.─이는 그것이 하나의 우주 기능, 하느님을 찾아내는 과제를 가졌기 때문이다. 신앙-활성화된 사람의 혼은, 이러한 운명의 목적 달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지할 수 없으며; 일단 이러한 신성한 목적에 도달하게 되면, 그것은 하느님 처럼─영원히─되었기 때문에 절대로 끝날 수 없다.
132:3.8
(1460-1)
영적 진화는, 선(善)을 점점 더 많이 그리고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하나의 체험이며, 그로서 악할 가능성이 대등하게 그리고 점진적으로 감소되는 것을 성취하는 것이다. 선(善)에 대한 선택의 최종과 진리의 깊은 인식에 대한 완벽한 수용능력을 달성과 함께, 그 정의가 잠재 악의 개념조차도 창발될 가능성을 영원히 금지되는 그러한 아름다움(美)과 거룩함에 대한 완전성이 실존으로서 나오게 한다. 하느님을-아는 그러한 혼은, 신성한 선이라는 그러한 높은 영적 차원에서 작용할 때, 의심을 일으킬 만한 어떤 악의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는다.
132:3.9
(1460-2)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파라다이스 영의 현존은, 우주 아버지의 불멸적이고 내주 하는 이 영 단편과의 정체성을 성취하기 위하여 애쓰는 모든 혼을 위한 신성한 진보의 영원한 실존의 계시 약속과 신앙 서약을 성립시킨다.
132:3.10
(1460-3)
우주의 진보의 특징은 개인성 해방의 증대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자아-납득과 그로 인한 자발적 자아-억제라는 더욱 높고 높은 차원들에 대한 진보적인 달성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영적 자아-절제의 완전의 달성은, 우주 자유와 개인적 해방의 완성과 같다. 신앙은 그러한 광대한 우주 안에 적응하는 초기의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의 혼을 돌보고 관리하며, 그에 반하여 기도는, 내주하고 연관된 신성한 현존의 영적 이상들로 자신을 정체성 확인하려고 노력하는 혼의 신앙적 충동들과 창조적인 상상력의 다양한 영감을 놀라울 정도로 통합시켜 준다.
132:3.11
(1460-4)
나본예수와의 다른 모든 이야기들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말들에 매우 감명을 받았다. 이 진리들은 그의 가슴속에서 계속하여 타올랐고, 그래서 그는 나중에 도착한 예수의 복음을 설교하는 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4. 개인적 사명활동
132:4.1
(1460-5)
예수로마에 있는 동안, 앞으로 도래할 왕국에 대한 장래의 제자들을 준비시키는 일에만 그의 모든 여가시간을 다 소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국제적인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인종들과 계층들의 남녀 사람들에 대한 상세한 지식들을 수집하는 일에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수많은 인간들과의 접촉들마다, 예수는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육신 속에서 사는 삶에 대한 그들의 반응들을 알고 싶었고, 또한 그들의 일생을 더 풍부하고 가치 있도록 만들기 위해 무엇인가를 말하거나 행하려고 애를 썼다. 이러한 시절 동안의 그의 종교적 가르침들은, 그의 후반기 일생에 열 두 제자들의 선생이었을 때와 많은 군중들의 설교자였을 때 행했던 가르침들의 특징이었던 것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132:4.2
(1460-6)
그의 메시지의 요지는 항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사실과 그의 자비라는 진리와 함께, 사람은 이 동일한 사랑 넘치는 하느님의 신앙-아들이라는 기쁜 소식이었다. 사회적 접촉에 있어서의 예수의 통상적 방식은, 그들에게 질문을 함으로써 사람들 이끌어 내어 자기와 이야기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대화는 흔히 예수가 그들에게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그들이 예수에게 질문하는 것으로 끝이 나곤 하였다. 그는 질문을 하거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함으로써 가르치는 일에 모두 뛰어난 재능를 보였다. 일반적으로, 그가 가장 많이 가르쳤던 사람들에게, 그는 가장 적게 말하였다. 그의 개인적 사명활동으로부터 가장 많은 혜택을 본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진 자들과 걱정이 많고 낙심한 필사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말을 들어주는 동정심이 많고 납득해 주는 이 사람에게 자신들의 혼의 짐을 내려놓음으로써 많은 위안을 받을 수 있었으며, 또한 그는 이것들보다 훨씬 더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 인간 존재들이 예수에게 자신들의 고민들을 털어놓았을 때, 예수는 그들의 실제 어려움들을 앞으로 풀어 나가는데 있어서의 실천적이고 즉각적인 도움이 되는 제안들을 항상 해 줄 수 있었지만, 현재의 평안과 당장의 위안이 되는 말을 해 주는 것도 간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고난을 받는 필사자들에게는 반드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그들이 사랑이 많으시고 하늘에 계시는 이 아버지의 자녀들이라는 소식을 다양한 모든 방법으로 전하곤 하였다.
132:4.3
(1461-1)
이러한 방법으로, 로마에 체류하는 동안, 예수는 그 곳에 있는 거의 500명 이상의 필사자들과, 애정이 넘치고 정신을 향상시키는 개인적 만남을 가졌다. 이렇게 하여 그는,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얻지 못할 여러 다른 인종들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지상 일생 중에서 이 6개월의 기간을 가장 풍부하고 유익한 시기 중의 하나로 늘 간주하였다.
132:4.4
(1461-2)
아마도 예측되는바와 같이, 그렇게 재능이 많고 적극적인 사람이 세계의 중심지에서, 어떤 사업이나 또는 더욱 빈번하게는, 교육에서의 구체적인 투사, 사회 개혁, 아니면 종교적 운동과 관련하여 그의 사명활동을 확보 받고자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교섭을 받지 않는 채로, 6개월 동안이나 그러한 활동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한 제의가 12번 이상 들어왔는데, 예수는 각각의 경우마다, 적절한 말에 의해서 또는 친절한 봉사를 통하여, 영적 고결함에 대한 어떤 사상을 주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예수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위해 일을 행하는 것─아주 작은 일이라도─을 매우 좋아하였다.
132:4.5
(1461-3)
그는 로마의 어떤 원로원 의원과 정치와 정치적 수완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였고, 예수와의 이 한 번의 만남에 의하여 이 입법부 의원은 커다란 감명을 받았으며, 그는 자신의 동료들로 하여금 정부가 국민을 후원하고 부양하는 개념으로부터 국민이 정부를 후원하는 관념으로 통치 제도의 방침을 바꾸도록 유도하려고 여생동안 노력하였으나 허사였다. 예수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사람이라는 주제에 대해 어떤 부유한 노예 소유자와 하루 저녁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클라우디오스라는 이 사람은 다음 날 117명의 자기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는 저녁 식사시간에 어느 그리스 의사를 만났는데, 그는 그의 환자들이 육체 이외에도 마음과 혼을 갖고 있다고 그에게 말해 주었으며, 그리하여 이 유능한 의사는 자기 이웃들에 대한 더욱 멀리-뻗치는 사명활동에 애를 쓰게 되었다. 그는 모든 계급에 속하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로마에서 그가 방문하지 않은 단 하나의 장소는 대중 목욕탕이었다. 난잡한 성(性) 행위가 그곳에서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친구들과 함께 목욕탕에 가는 것을 거절하였다.
132:4.6
(1461-4)
로마의 병정에게는, 함께 티버 강변을 걸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손뿐만 아니라 가슴도 용감해야 한다. 대담하게 공의를 행하고 자비를 보이기에 충분할 만큼 큰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네가 상급자들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너의 낮은 본성으로 하여금 더 높은 본성에 복종하도록 굴복시켜야 한다. 선을 존경하고 진리를 드높여라. 추한 것들 대신에 아름다운 것들을 선택하라. 너의 동료들을 사랑하고 온 가슴을 다하여 하느님을 향하여 손이 닿도록 하라. 이는 하느님이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132:4.7
(1461-5)
공개토론회의 연사(演士)에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의 웅변술은 만족할 만한 수준이고, 너의 논리는 감탄할 만하며, 네 음성은 듣기에 아름답지만, 너의 가르침은 진리와 너무 먼 것이다. 만일 네가, 너의 영적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아는 영감 어린 만족을 누릴 수만 있다면, 너는 너의 동료들을 어둠의 속박과 무지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에 너의 연설력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로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그의 후계자가 되었던 마커스였다. 시몬 베드로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로마의 박해자들에게 도전하고 새로운 복음 설교를 계속하였던 이가 바로 이 사람이었다.
132:4.8
(1462-1)
누명을 쓴 한 가엾은 사람을 만났을 때, 예수는 그와 함께 행정관에게 가서, 그를 대변해 줄 수있는 특별한 허락을 얻은 후에, 그 과정 중에 놀라운 연설을 하였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공의가 한 나라를 위대하게 만들기 때문에, 나라가 위대해질수록, 가장 미천한 시민에게까지 불공정이 행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더욱 애를 써야만 할 것이다. 단지 돈과 세력이 있는 자들에게만 법정에서 공의를 베풀려고 하는 나라에는 재앙이 있으리라! 죄지은 자를 벌주는 것뿐만 아니라, 죄 없는 자를 풀어주는 것도 행정관의 신성한 의무이다. 법정의 공명정대, 공정성, 그리고 고결한-순수성 위에 한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다. 진정한 종교가 자비 위에 세워지는 것처럼, 시민의 정부는 공의 위에 세워진다.” 그 재판관은 그 사건의 재판을 다시 열었으며, 증거를 면밀히 검사한 뒤에 죄수를 석방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예수의 개인적 사명활동 중에서, 이 사건이 대중적인 출현에 가장 가깝게 나온 것이었다.
5. 부자에게 준 조언
132:5.1
(1462-2)
금욕주의자이며 로마시민인 어떤 부자가, 앙가몬의 소개를 받고, 예수의 가르침에 매우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여러 번의 친숙한 만남이 있은 후, 이 부자는 예수에게 그가 만일 많은 재산을 가졌다면 그것을 어떻게 관리-운영하겠느냐고 물었으며, 예수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지식이나 지혜나 영적 봉사를 지적 일생의 풍요나 사회생활의 고상함이나 또는 영적 일생의 향상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처럼, 나는 물질적 재산은 물질적 일생을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할 것이다. 다음 세대와 그 이후에 계속되는 후손들의 이익과 고상함을 위하여 쓰일 자원을 책임진, 한 세대의 현명하고 효력적인 신탁인의 자격으로서 재산들을 관리-운영할 것이다.”
132:5.2
(1462-3)
그러나 그 부자는 예수의 대답에 충분하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대담하게 다시 물었다: “그러면 나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은 자기 재산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그것을 간직해야 합니까? 아니면 남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까?” 하느님에 대한 그의 충성심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의무에 대한 진리를 그가 실제로 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예수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대답하였다: “나의 선한 친구여, 네가 지혜를 진지하게 구하는 자이며 진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라는 것을 나는 알 수가 있다; 따라서 나는 너에게 재물에 대한 의무들을 이행하는 것과 관련된 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나의 견해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네가 나의 조언을 요청하였기 때문이며, 이 충고를 주는데 있어서, 그것을 다른 부자들의 재물은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직 너에게, 그리고 너의 개인적 지침이 되도록 충고하는 것이다. 만일 네가 진정으로 너의 재물을 하나의 신탁물로 여기기 원한다면, 네가 그 축적된 재물에 대하여 현명하고도 유능한 청지기가 되기를 실제로 원한다면, 너의 부(富)의 근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함으로써 너에게 조언을 하고자 한다: 이 재물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네 자신에게 물어보고, 그런 다음 정직한 대답을 찾도록 최선을 다 해라. 너의 많은 재산의 출처에 대한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다음과 같은 물질적 재산 축적에 대한 열 가지 방법을 고려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 상속된 재산─부모나 다른 조상들로부터의 부(富).
  • 발견되어진 재산─본래의 땅에 있는 개발되지 않은 자원으로부터의 부.
  • 거래에 의해 얻은 재산─물질적 상품의 물물교환에서 정당한 이익으로 얻어진 부.
  • 부당한 재산─부당한 착취나 혹은 자신의 동료를 노예화함으로 얻어진 부.
  • 금리로 얻은 재산─투자한 자본의 공정하고 정당한 수익 가능성으로부터의 수입.
  • 천재적 재능으로 얻은 재산─인간 마음에서의 천재적으로 창조적이고 발명적인 부여된-자질의 보상으로 얻은 부.
  • 우연히 얻은 재산─자신의 동료의 관대함으로 부터나 혹은 일생의 환경에서 온 부(富).
  • 훔친 재산─부당함, 부정직, 도둑질, 혹은 사기에 의한 부.
  • 신탁된 기금─현재나 혹은 미래에 있어서 어떤 특정한 사용을 위해 네 이웃들로부터 너에게 맡겨진 재산.
  • 벌어서 모은 재산─네 자신의 노동, 마음과 육체를 사용하여 네가 직접 매일 수고한 것에 대한 공정하고 정당한 보수로부터 직접적으로 얻은 부.
132:5.3
(1463-7)
“그러므로, 나의 친구여, 네가 만일 너의 많은 재산에 대한 신실하고 의로운 청지기라면,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봉사함에 있어서, 재산을 대략 이러한 열 가지의 부문으로 나누어야만 한다. 그런 다음, 그러한 각각의 몫을 공의, 공평, 공정성, 진정한 효율성이라는 법들의 현명하고 정직한 판단에 따라서 계속 관리-운영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네가 가끔 확실치 않은 상황들에 처하여, 필사자 일생의 불행한 환경 아래 고통 받는 희생자들의 괴로움을 도와주며 자비롭고 사심-없는 배려를 하는 중에서 실수를 범한다고 한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너를 책망하지 않으실 것이다. 물질적 상황의 공평함과 공의에 대해서 진정으로 확실하게 알지 못할 경우에 있어서는, 궁핍한자에게 유리하고 불행으로 부당하게 고생을 겪고 있는 자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결정을 내리도록 해라.”
132:5.4
(1463-8)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여러 시간을 토의한 후에, 그 부자는 좀 더 자세한 가르침을 간청하였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는 자신의 충고를 상세하게 설명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재산에 대한 너의 태도에 관하여 좀 더 상세하게 제안함에 있어서, 나의 조언을 단지 너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그리고 네 개인적 지침으로만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나는 오직 내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질문하는 친구에 대한 답변으로 말할 뿐이다. 다른 부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네가 명령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너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자 한다:
132:5.5
(1463-9)
“1. 상속되어진 재산의 청지기로서 너는 그것의 근원을 살펴보아야 한다. 너는 정당한 재산에 대하여 현세대의 이득을 위한 공정한 몫을 제한 후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 주는 일에 있어서, 과거의 세대들을 대표하는 도덕적 의무 아래에 있다. 그러나 네 조상들에 의해 부당하게 축적된 재산에 내포된 어떤 부정직함이나 불공정이든지 계속 유지시킬 의무는 없다. 사기나 부당함에서 연유되었다고 밝혀진, 너에게 상속된 재산의 어떤 부분이라도, 너는 공의와 관대함 그리고 배상에 대한 네 신념에 의거하여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정당하게 상속된 너의 나머지 재산은 네가 공평하게 사용할 수 있고,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겨주는 신탁자로서 안전하게 전해야 한다. 네 후손들에게 재물을 전해주는 데 있어서, 현명한 식별력과 건전한 판단력이 네 의사 결정들을 좌우해야 할 것이다.
132:5.6
(1463-10)
“2. 발견에 의한 결과로 재산을 얻은 모든 사람은, 한 개별존재가 이 땅에 살 수 있는 것은 아주 짧은 기간뿐임을 기억해야만 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숫자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으로 그러한 발견들을 그들과 나누어 가지도록 적절한 준비를 해야 한다. 발견한 자의 수고의 대가가 무시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또한 자연의 숨겨진 보물의 자원으로부터 유래한 모든 이익들과 축복들을 자신만의 것이라는 이기적인 권리 주장을 해서도 안 될 것이다.
132:5.7
(1464-1)
“3. 사람들이 상업과 물물 교환으로 세상의 사업을 수행하기로 선택하는 한, 그들은 정당하고 합법적인 이익을 취할 수 있다. 모든 소매상인들은 자신의 봉사에 대한 임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 무역업자는 그를 고용할 권리가 있다. 이 세상의 조직화된 상업에 있어서 정당한 무역과 자신의 동료들에 대한 공정한 대우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이익금을 창출한다; 이러한 모든 재산의 근원들은 공의와 정직 그리고 공정성이라는 최고의 원칙들에 의해 판별되어야 한다. 정직한 무역업자는, 같은 종류의 거래를 하는 동료 무역업자들과 기꺼이 화합할 수 있도록 만드는, 똑같은 이익을 남기는 일에 주저해서는 안 된다. 사업 거래들이 대규모로 수행되고 있을 때, 이러한 종류의 재산이 개별적으로는 똑같은 소득을 버는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정직하게 축적된 재산은 소유자에게 뒤이어 일어나는 분배에서 상당한 지분을 자질로서 부여한다..
132:5.8
(1464-2)
“4. 하느님을 알고 신성한 의지를 행하기를 원하는 필사자라면, 누구든지 억압에 의한 재산 착취에 가담하지 못할 것이다. 숭고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육신의 형제들을 노예화하거나 부당하게 착취함으로써 부(富)를 축적하지 않을 것이고 재산-힘을 모으려고 분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이 억압된 필사자들의 땀으로부터 얻어졌을 때, 부(富)는 도덕적 저주와 영적 오점이 된다. 그러한 모든 재산은, 그런 식으로 빼앗긴 사람들이나 아니면 그 자손과 자손의 자손에게 반환되어야 한다. 지속적인 문명은, 고용된 노동자를 착취하는 실천 관행 위에서는 세워질 수 없다.
132:5.9
(1464-3)
“5. 정당한 재산은 이자를 받을 권리가 있다. 사람들이 빌리고 빌려주는 한, 빌려준 자본이 합법적인 재산이라면 공정한 이자를 거둘 수가 있다. 이자에 대한 권리 주장을 하기 전에, 먼저 네 자본을 깨끗하게 하라. 고리대금의 실천 관행에 굴복할 정도까지 너무 비열하고 탐욕스럽게 되지 마라. 돈의 힘을 이용하여, 너의 분투하는 동료에게서 부당한 이익을 얻으려는 그 같은 이기적이 되려는데, 네 자신을 결코 용납하지 말라. 않도록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한 네 형제로부터 고리대금을 취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마라.
132:5.10
(1464-4)
“6. 만일 네가 우수한 천부적 재능에 의해 우연히 재산을 얻었다면, 만일 발명하는 자질에 대한 보상으로 너의 재산이 주어졌다면, 그러한 보상에 대해 부당한 몫을 주장하지 마라. 비범한 자질은 그의 조상들과 그의 자손들 둘 모두에게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는 인류, 국가, 그리고 자신의 독창적인 발견들을 가능하게 한 환경들에게도 의무가 있다; 자기가 수고하여 발명한 것도, 사람들 속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 이룩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들의 재산을 증식하는 비범한 재능을 박탈하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로 옳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부의 공정한 분배에서 이들에 관한 모든 문제에 동등하게 적용할 수 있는 규칙과 규정들을 세운다는 것은 사람에게 영원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너는 먼저 사람들이 네 형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고, 네 의도대로 상대방을 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너도 그의 의도대로 그에게 해주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공의, 정직, 공정이라는 평범한 양심의 지시가 경제적인 보상들과 사회정의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함에 있어서 바르고 치우치지 않도록, 너를 안내해줄 것이다.
132:5.11
(1464-5)
“7. 관리-행정을 통해서 획득한 바르고 정당한 보수를 제외하고, 시간과 기회로 인해서 자기 손안에 떨어진 재산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개인적 소유권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우연히 얻은 재산은, 자신이 소속된 사회적, 경제적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쓰이기 위한 신탁물이라는 입장에서 간주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재산의 소유자들은, 노력 없이 얻은 그러한 자원에 대한 현명하고 효력적인 분배를 결정함에 있어서 다수의 의견에 따라야만 할 것이다. 교양이 높은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통제하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개인적이며 사적(私的)인 소유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132:5.12
(1465-1)
“8. 만일 네 재산의 어떤 부분이라도 사기 행위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만일 네 재산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부정직한 실천 관행이거나 정당하지 못한 수단에 의해서 축적된 것이라면; 만일 네 재산이 네 이웃들과의 부당한 거래에 의한 산물이라면, 잘못 얻어진 이러한 모든 소득 물을 당연히 받아야 할 주인들에게 서둘러서 반환해라. 충분한 보상을 통하여 너의 모든 부정직한 재산을 깨끗하게 만들어라.
132:5.13
(1465-2)
“9.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한 사람이 그 재산을 신탁 관리하는 일은 하나의 중대하고 신성한 의무를 갖는다. 그러한 신용에 해를 입히거나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공정한 사람들이 허용할 수 있는 만큼의 양(量)만을 그 신탁금에서 네 몫으로 떼어놓아라.
132:5.14
(1465-3)
“10. 너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노력으로 얻은 네 재산은─만약 그 일이 공정함과 공평함으로 된 것이었다면─, 진정한 네 소유이다. 그러한 재산을 간직하고 사용하는 너의 권리를 행사함에 있어서, 네가 보기에 그것이 네 이웃들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반박할 수 없다.”
132:5.15
(1465-4)
예수가 그에게 조언을 마치자, 이 부유한 로마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하면서 속으로 이렇게 약속하였다: “나의 선한 친구여, 나는 당신이 위대한 지혜와 선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나는 내일부터 당신의 조언에 따라 나의 모든 재산의 관리-행정을 시작할 것입니다.”
6. 사회적인 사명활동
132:6.1
(1465-5)
이곳 로마에서, 한 우주의 창조자가, 길 잃은 아이를 초조해하는 그의 어머니에게 되찾아 주느라고 몇 시간을 보낸 감동적인 사건이 또한 발생했다. 이 어린 소년은 자신의 집을 떠나서 여기저기 방황했었고, 겁에 질려 울고 있는 그 아이를 예수가 발견하였다. 그와 가니드는 도서관에 가는 길이었지만, 그 아이의 집을 찾아 주는 일에 헌신하였다. 가니드예수가 하였던 다음과 같은 말을 결코 잊지 못하였다: “가니드야, 대부분의 인간 존재들은 길을 잃은 아이와 같다. 사람들은 진실로, 안전과 안심으로부터 단지 짧은 거리에 있음에도, 두려움에 울고 슬픔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것은 이 아이가 집으로부터 조금만 떨어져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하다. 그리고 진리의 길을 알고 또한 하느님을 아는 확신을 즐기는 모든 자들은, 삶의 만족을 찾으려는 노력 속에 있는 자기 동료들에게 안내를 제공해 주려고, 의무가 아닌 하나의 특권으로, 나서야만 한다. 이 아이에게 어머니를 찾아주는 이 일을 하면서 우리가 최극의 기쁨을 누리지 않았느냐?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하느님에게 인도하는 자들은, 인간 봉사의 최극 만족을 체험한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가니드는 그의 자연적 일생의 남은 기간 동안, 길 잃은 아이를 그들의 집에 되찾아 줄까 하여, 계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며 보았다.
132:6.2
(1465-6)
남편을 사고로 사별한 후, 다섯 아이를 데리고 혼자 사는 과부가 있었다. 예수는 자신의 아버지를 사고로 잃었던 일에 대하여 가니드에게 이야기하였으며, 그들은 이 어머니와 아이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여러 번 갔으며, 한편으로 가니드는 음식과 옷을 제공하려고 아버지로부터 돈을 구하였다. 그들은 가장 나이든 소년이 일자리를 찾아서 그로써 그가 가족을 보살피는 일에서 도움을 줄 수 있기까지 그러한 수고를 멈추지 않았다.
132:6.3
(1465-7)
그 날 밤, 고노드는 이러한 체험들에 관해서 설명을 듣다가, 예수에게 부드럽게 말하였다: “나는 내 아들을 학자나 사업가로 키우려고 하였는데, 당신은 이제 이 아이를 철학자나 자선가로 만들기로 작정하셨군요.” 그러자 예수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마 우리는 당신이 말한 그 네 가지 전부를 그가 성취하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그의 귀가 한 가지 음색 대신에 네 가지 음색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일생 속에서 네 곱절의 만족을 즐길 수 있을 것이오.” 그러자 고노드가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은 실제로 철학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당신은 후손들을 위하여 책을 쓰셔야 되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책이 아니라, - 나의 사명은 이 세대와 모든 세대를 위해서 사는 것이오. 나는-” 그러나 그는 말을 멈추면서 가니드에게, “얘야, 이제 잘 시간이 다 되었다.”라고 하였다.
7. 로마 근처를 여행함
132:7.1
(1466-1)
예수고노드가니드는, 로마를 떠나 그 변방의 지역들에 있는 흥미로운 곳들로, 다섯 차례의 여행을 하였다.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호수를 방문하였을 때, 사람이 하느님을 알기를 원하지 않으면, 하느님에 대하여 그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에 관하여, 예수가니드와 오랫동안 이야기하였다. 그들은 호수로 올라가는 길에서, 생각이-짧은 한 이방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예수가 대화로써 사람을 흥미를 끌어내어 영적 의문점들에 대해 토론하기까지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는 그의 통상적인 실천 관행을 따르지 않은 것에, 가니드는 놀라게 되었다. 가니드가 그의 선생에게 왜 이 이방인에게는 그렇게 거의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지를 묻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132:7.2
(1466-2)
가니드야, 그 사람은 진리에 굶주려 있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불만이 없었다. 그는 도움을 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의 마음의 눈은 혼을 위한 빛을 받기 위해 열려있지 않았다. 저 사람은 구원의 수확을 위해 익지 않았다; 그가 지혜와 높은 깨달음을 받아들기 위해서는, 그를 준비시킬 생활의 시험과 어려움을 위해 좀 더 많은 시간을 주어야만 한다. 아니라면, 우리가 그를 우리와 함께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보여 줄 수 있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삶에 매료되어, 그도 우리 아버지에 대하여 부득이 우리에게 물어 오게 될 것이다. 너는 하느님을 찾지 않는 자들에게 그를 계시할 수 없다; 원하지 않는 혼을 구원의 기쁨으로 인도할 수도 없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겪는 체험의 결과로서, 진리에 대하여 굶주려야만 한다, 아니라면, 다른 인간 존재가 그러한 동료 필사자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매개체로서 행동할 수 있기 전에, 이미 신성한 아버지를 알고 지내는 저들의 삶과 친숙하게 된 결과에 따라서, 그가 하느님을 알기를 갈망하여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을 안다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실제 사업은, 아버지께서 우리의 삶 속에 자신을 계시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그렇게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하느님을-찾아나서는 모든 개인들이 아버지를 볼 것이고 그러면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표현을 찾아내는 하느님에 대해, 더욱 많은 것을 찾아내는 것에서, 우리의 도움을 청할 것이다.”
132:7.3
(1466-3)
예수가 그 아버지와 아들 모두와 함께 하루 종일 불교에 관해 이야기를 한 것은, 스위스를 방문하였을 때 높은 산 위에서였다. 가니드예수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서 부처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들을 했었지만, 그는 항상 다소 회피적인 대답을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었다. 이제는, 자기 아들의 현존 앞에서, 아버지가 예수에게 부처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을 하였는데, 그는 바로 대답을 듣게 되었다. 고노드가, “저는 당신이 실제로 부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132:7.4
(1466-4)
“당신들의 부처는 당신들의 불교보다 훨씬 뛰어났었소. 부처는 위대한 사람이었고, 심지어 자기 민족에게 선지자였지만, 그는 고아(孤兒) 선지자였소; 내 말은, 그가 일찍이 그의 영적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보는 것을 잃어버렸다는 뜻이오. 그의 체험은 비극이었소. 그는 하느님의 메신저처럼 살고자 그리고 가르치고자 시도했지만, 그러나 하느님 없이 그렇게 하였소. 부처는 그의 구원의 배를 필사자 구원의 피난처의 입구 바로 앞까지, 안전한 항구의 바로 앞까지 인도하였으나, 바로 그곳에서 잘못된 항해 해도 때문에, 그 선한 배는 땅 위로 올라가 버렸소. 그것은 거기서 이들 여러 세대 동안 움직임이 없이, 그리고 거의 희망도 없이 좌초되어 쉬고 있소. 그리고 당신 민족의 많은 이들이 이들 세월 내내 그 위에서 머물러 왔던 것이오. 그들은 휴식의 안전한 바다에서 소리치면 들릴만한 가까운 거리 내에 있지만, 그러나 선한 부처의 고귀한 배가 항구 바로 바깥에서 땅에 닿는 불행을 만났기 때문에, 그들은 들어가기를 거절하고 있소. 그리고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 선지자의 철학적 배를 포기하고 그의 고귀한 영을 잡아채어 붙잡지 않는 한, 이 항구에 결코 들어가질 않을 것이오. 당신의 민족이 부처의 영에 참으로 머물고 있었더라면, 당신들은 영 평온, 혼 휴식, 그리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 당신들의 피난처에 오래 전에 들어왔었을 것이오.
132:7.5
(1467-1)
고노드여, 부처가 영적으로는 하느님을 알았지만, 마음속에서 그를 분명하게 발견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유대인들은 마음속에서는 하느님을 발견하였지만, 영적으로 그를 아는 데에는 크게 실패하였소. 오늘날, 불교신자들은 하느님이 없는 철학 안에서 버둥거리고 있고, 반면에 나의 민족들은 가련하게도 생명과 해방의 구원이 되는 철학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있소. 당신들은 하느님 없는 하나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소유하고는 있지만, 거기에 관련되는 삶의 철학은 거의 갖고 있지 못하오. 마음속에 하느님을 영으로 그리고 아버지로 바라보지 못한 부처는, 그의 가르침에 있어서 하나의 종교가 반드시 소유해야 하는─만약에 종교가 인류를 변화시키고 한 국가를 높여주는 것이라면─도덕적 에너지와 영적으로 연유되는 힘을 제공하는 데 실패하였소.”
132:7.6
(1467-2)
그러자 가니드가 이렇게 부르짖었다: “선생님, 우리가 하나의 새로운 종교, 인도를 위해 충분히 훌륭하고 로마를 위해서도 충분히 거창한 것을 만들지요,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그 종교를 야훼를 대신할 수 있도록 유대인에게 전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가니드야, 종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종교는 오랜 세월을 통하여 자라나는 것이며, 반면에 하느님의 계시는, 하느님을 자기 동료들에게 나타내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이 세상에 섬광처럼 번쩍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예언적인 말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132:7.7
(1467-3)
그날 밤, 그들이 잠자리로 돌아갔을 때, 가니드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와 오래도록 이야기를 하였으며, 마지막에 가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 저는 어떤 때는 여호수아가 선지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단지 졸음 섞인 말투로, “아들아, 다른 사람들도 있단다─”라고 대답하였다.
132:7.8
(1467-4)
그 날 이후, 가니드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내내, 자기 자신의 종교를 발전시키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는 예수의 넓은-마음가짐과 공정함 그리고 관대함으로 말미암아 그 자신이 지닌 마음 안에서 강력하게 감동을 받았다. 철학과 종교에 대한 그들의 모든 토론들 속에서, 이 젊은이는 결코 분개심의 감정이나 반목의 반응들을 체험하지 않았다.
132:7.9
(1467-5)
인도인 소년이 우주의 창조자에게 새로운 종교를 만들자고 제의하는 광경은, 천상의 지능존재들이 바라보면 얼마나 놀라운 장면이었겠는가! 그리고 비록 이 젊은이는 알지 못했지만, 바로 그때 거기에서 그들은 하나의 새롭고 영속하는 종교─이 새로운 구원의 길, 예수를 통하여 그리고 예수 안에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를 만들고 있었다. 그 소년이 가장 하고 싶었던 바로 그것을, 그는 무의식적으로 실재로 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그러하다. 영적 가르침과 인도함에 의해 깨우치고 반영되는 인간의 상상력이, 온 가슴으로 그리고 사심-없이 하고 싶고 그리고 되고 싶어 하는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신성하게 행하려는 필사자의 전념의 정도에 따라서, 잴 수 있을 만큼 창조적으로 되어 간다. 사람이 하느님과 동반자관계 안에서 함께 갈 때, 위대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고, 또한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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