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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0 편
로마로 가는 길에서
130:0.1
(1427-2)
이 세상에서의 예수의 일생 중에서 28세가 되던 해 대부분과 29세 전반부 기간은 로마인들의 세상을 여행하는 데에 쓰였다. 예수와 두 명의 인도에서 온 인도인고노드와 그의 아들 가니드─은 서기 22년 4월 26일 일요일 아침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들은 일정에 따라서 여행을 하였고, 예수는 그 이듬해인 서기 23년 12월 10일에 페르시아 만의 카락스 시에서 그 아버지와 아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130:0.2
(1427-2)
예루살렘을 출발한 그들은 요파를 경유해서 케자리아로 갔다. 케자리아에서 그들은 배를 타고 알렉산드리아로 갔고, 거기서 다시 크레테라시아로 항해하였다. 크레테에서 키레네를 거쳐 카르타고로 갔다. 카르타고에서 그들은 나폴리로 향하면서 말타시라큐스메시나를 경유하였다. 나폴리로부터 그들은 카푸아로 갔고 그리하여 아피아 도로를 통하여 로마에 이르렀다.
130:0.3
(1427-3)
그들은 로마에서 머문 다음 육로를 이용해 타렌툼으로 갔다. 거기서 그들은 그리스아테네로 항해하였다. 그리고 중간에 니코폴리스고린도에서 머물렀다. 아테네로부터 그들은 트로아를 경유해서 에베소에 이르렀고, 에베소에서 다시 배를 타고 키프러스로 항해했다. 그리고 가는 도중 로드를 들렀다. 그들은 키프러스에 머물면서 상당한 시간을 방문과 휴식으로 보냈으며, 그 다음으로는 시리아안디옥을 향해 항해하였다. 안디옥에서 그들은 남쪽으로 내려와 시돈을 여행하였고, 다마스커스까지 갔다. 그곳에서 카라반 길을 통해 메소포타미아로 갔고 탑사쿠스라리싸를 지나갔다. 그들은 바빌론에서 얼마간 머물다가 우르와 다른 지역들을 방문하고 수사로 갔다. 수사에서 그들은 카락스로 갔고, 거기에서 고노드가니드는 배를 타고 인도로 떠났다.
130:0.4
(1427-4)
예수고노드가니드가 사용하는 언어의 기본 원리를 습득한 것은 다마스커스에서 일했던 4개월 동안이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고노드의 고향 출신인 한 인도인의 도움을 받아가며, 그리스어를 인도의 언어들 중의 하나로 번역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130:0.5
(1427-5)
이 지중해 지역 여행에서 예수는 매일 대략 절반의 시간을 가니드를 가르치는 일과, 고노드의 사업상 회합 그리고 사교에 있어서의 통역 일을 하며 보냈다. 매일의 나머지 시간은 예수가 자유롭게 쓸 수 있었고, 그는 그 시간들을 전적으로 주위 사람들과 사적으로 만나면서 보냈는데, 그가 그 세계의 필사자들과 그토록 가깝게 지내던 것은, 자신의 대중을 위한 사명활동을 시작하기 직전 몇 년 동안의 활동에 있어서 매우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130:0.6
(1427-6)
직접적인 관찰과 실재적인 접촉을 통해서 예수서양레반트 지역의 비교적 높은 물질적 그리고 지적 문명을 스스로 습득하였다; 고노드와 그의 영리한 아들로부터는 인도와 중국의 문명과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특히 고노드 자신은 인도의 시민이면서도 황색 인종의 제국까지 세 번이나 두루 여행을 한 사람이었다.
130:0.7
(1427-7)
이 젊은 사람 가니드는, 이와 같은 예수와의 길고도 친밀한 동행의 기간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들은 시간이 감에 따라 서로를 더욱 더 좋아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이 젊은이의 아버지는 예수에게 그들과 함께 인도로 가자고 여러 번 청했지만, 예수는 언제나 팔레스타인에 있는 가족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이유로 그의 청을 사양하였다.
1. 요파에서─요나에 관한 설교
130:1.1
(1428-1)
요파에서 그들이 머무는 동안, 예수는 제혁업자인 시몬이라는 사람을 위해 일하는 가디아라는 필리스틴 사람 통역자를 만났다.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고노드의 대리상(代理商)들이 이 시몬과 많은 거래를 하고 있었으므로, 고노드와 그의 아들은 케자리아로 가는 길에 이 시몬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그들이 요파에 머무는 동안 예수가디아는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이 젊은 필리스틴 사람은 진리 탐구자였다. 예수는 진리 수여자였으며; 그 세대 동안에는 유란시아에서 진리 그 자체였다. 위대한 진리 탐구자와 위대한 진리 수여자가 만날 때, 그 결과는 새로운 진리의 체험에서 탄생되는 어떤 위대하면서도 자유로움을 주는 깨우침이 된다.
130:1.2
(1428-2)
어느 날 저녁식사를 마친 뒤, 예수필리스틴 청년은 해변을 거닐었으며, 가디아는 이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이 히브리 역사에 정통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요나타르쉬시로 가는 불행한 항해를 위해 승선했던 배가 정박해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예수에게 그 배를 가리켰다. 그는 설명을 마치면서, “그렇지만, 큰 물고기가 실제로 요나를 삼켰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하였다. 그 때 예수는, 이 젊은이의 일생이 이러한 전통에 크게 영향을 받아왔으며, 그것이 임무로부터 도망치는 어리석음에 대한 깊은 사색을 통하여 감동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예수가디아의 실천적인 생활을 위한 현실적 동기를 이루는 토대를 갑자기 무너뜨릴만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예수는 이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의 친구여,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삶을 살아가는 요나들이며, 우리가 삶에서의 현재의 의무에서 벗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유혹으로 도망치려고 할 때마다 항상, 우리는 진리와 정의(正義)의 기세로 지도되지 않는 그러한 영향력의 직접적인 통제에 우리 자신을 맡기게 되는 것이다. 의무를 회피하는 것은 진리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하느님을-저버린 그런 요나들이 가슴을 돌이켜 그 절망의 수렁에서라도 하느님과 그 분의 선함을 탄원하지 않는 한, 빛과 생명의 봉사에서 도피하는 것은 결국에는 어둠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이기심이라는, 다루기 힘든 고래들과 비참한 투쟁을 해야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낙심된 혼들이 진심으로 하느님을 찾고자 열망─진리에 대한 굶주림과 정의에 대한 갈증─할 때에는, 아무 것도 그들을 더 이상 붙잡아 매어 둘 수 없다. 그들이 빠진 수렁이 아무리 깊다 해도, 그들이 전심으로 빛을 구하기만 하면, 하늘에 계신 주님 하느님의 영이 그들을 그 수렁에서 구원할 것이며, 일생을 둘러싼 악한 환경이 그들을 토해내어 그들은 다시 새로워진 봉사와 현명한 삶을 위한 신선한 기회의 마른 땅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130:1.3
(1428-3)
가디아예수의 가르침에 깊이 감동되었고 그들은 밤이 깊도록 해변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서로를 위하여 함께 기도하였다. 나중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나사렛 예수를 신실하게 믿게 되었으며, 도르가의 집에서 어느 날 저녁에 베드로와 인상적인 토론을 벌였던 가디아가 바로 이 사람이었다. 그리고 가디아는, 부유한 가죽 상인 시몬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는 마지막 결심을 하게 된 일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30:1.4
(1428-4)
(예수가 지중해 지역을 여행하는 동안 동료 필사자들과 함께 하였던 개인적 행적들을 서술함에 있어서, 우리가 허락 받은 한도 내에서, 이것이 쓰이던 당시에 사용되고 있는 유란시아의 현대적 언어로 그의 말들을 자유롭게 번역할 것이다.)
130:1.5
(1429-1)
예수가 마지막으로 가디아를 만났을 때, 그들은 선(善)과 악(惡)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필리스틴 청년은 세상에 선과 악이 병행하여 현존하고 있으니 불공정하다는 느낌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하느님이 무한히 선하시다면, 어째서 우리로 하여금 악으로 인한 슬픔을 겪게 내버려두시는지요? 결국 악은 누가 만들어낸 것입니까?”라고 말하였다.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이 선과 악 둘 모두를 창조했다는 것을 여전히 믿고 있었지만, 예수는 그 같은 잘못을 결코 가르치지 않았다. 그 질문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의 형제여,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므로; 그는 선하실 수밖에 없으며; 그의 선함은 너무나 크고 실제여서, 악으로 인한 사소하고도 비(非)실제적인 것들을 포함할 수 없다. 하느님은 너무나 긍정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부정적인 악이 남아있을 소지가 절대적으로 없다. 악은, 선에 저항하고 아름다움을 거부하며 진리에 불충하는 무리들의 성숙되지 못한 선택이며 경솔한 실수이다. 악은 단지 미숙함에서 오는 부적응이거나, 혹은 무지에서 오는 분열시키고 왜곡시키는 영향력일 뿐이다. 악은 어리석게 빛을 거부한 결과로 수반되는 필연적인 어두움이다. 악은 어둡고 거짓된 것이며, 의식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뜻이 담겨서 지지될 때 죄가 된다.
130:1.6
(1429-2)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는, 진리와 잘못 둘 중에서 선택하는 힘을 너희들에게 자질로서 부여주심으로써, 빛과 생명의 긍정적 길에서의 부정적 잠재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악에서의 그러한 잘못은, 지능 창조체들이 일생에서의 길을 잘못 선택함으로, 그러한 것들의 실존을 뜻하기로 정할 때까지는, 실제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 어떤 뜻대로 하는 반역적 창조체가 알면서 고의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선택하면 그로 인하여, 그것들은 죄로 올라오게 되는 것이다. 수확의 시기까지 알곡과 쭉정이가 함께 자라고 있듯이, 이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 선과 악을 생명의 끝날 까지 함께 존재하도록 허락하는 이유이다.” 가디아는 그 뒤에 이어진 자기들의 토론들을 통하여 이러한 중요한 말들의 실제 의미들을 마음속에서 명료하게 이해하게 되자, 자기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에 충분히 만족하게 되었다.
2. 케자리아에서
130:2.1
(1429-3)
예수와 그의 친구들은, 자기들이 타고 가려던 배의 커다란 노 중에 하나가 쪼개질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계획보다 더 오래 케자리아에 머물러 있었다. 선장은 새로운 노가 만들어질 동안 항구에서 정박해 있기로 결정하였다. 이 일을 맡아서 할 숙련된 목수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예수는 자원해서 그 일을 도와주었다. 저녁시간 동안에는 예수와 그의 친구들이 항구 주위에서 산책로로 쓰이는 아름다운 제방 위를 걸어 다녔다. 가니드는 도시의 수리(水利) 체계와 또한 조수를 이용해서 도로와 하수도를 씻어 내리도록 꾸며진 기법에 대한 예수의 설명을 듣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 젊은 인도인아우구스투스의 신전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그 신전은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었으며 로마 황제의 거대한 동상이 그 위에 서 있었다. 그곳에 머문 지 이틀째 되는 날 오후, 그 세 사람은 좌석이 2만 개나 되는 거대한 원형극장의 공연에 참석하였으며, 그 날 밤에는 극장에서 상연되는 그리스 연극을 보러 갔다. 이러한 것들은 가니드가 처음으로 구경하는 것들이었으며, 그는 그것들에 대해서 예수에게 많은 질문을 하였다. 케자리아팔레스타인의 수도였고 로마 행정관의 거주지였기 때문에, 그들은 셋째 날 아침에 총독의 관저를 공식적으로 방문하였다.
130:2.2
(1429-4)
그들이 머무는 숙소에 몽고에서 온 한 상인이 묵고 있었고, 극동(極東)에서 온 이 사람은 그리스어에 유창하였기 때문에 예수는 여러 차례 긴 시간 동안 그를 만났다. 그 사람은 예수의 일생의 철학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매일 복종함으로써,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늘의 일생을 누리는 것”에 관한 그의 지혜로운 말들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이 상인은 도교를 믿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우주적 신(神)의 교리를 깊이 믿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몽고로 돌아갔을 때, 그는 이 진보된 진리들을 자신의 이웃과 동반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그러한 활동의 직접적인 결과로, 그의 장남은 도교의 제관(祭官)이 되려고 결심하게 되었다. 이 젊은이는 이 진보된 진리가 널리 펼쳐지도록 일생동안 애를 썼고, 그의 아들과 손자 역시 유일신 하느님─하늘의 최극 통치자─에 대한 교리에 헌신적으로 충성하였다.
130:2.3
(1430-1)
필라델피아에 그 본부를 둔 초기 그리스도교의 동쪽 지류(支流)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형제들보다 예수의 가르침을 더욱 신실하게 믿는 동안, 베드로와 같은 태도로 중국으로 들어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고 바울과 같은 태도로 인도로 들어간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었으며, 그 곳의 영적 토양은 그 때 이미 새로운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에 너무나도 적당한 옥토로 되어 있었다. 필라델피아인 들이 갖고 있었던 바로 이들 예수의 가르침은, 영적으로 굶주리고 있던 이 아시아 사람들의 마음에게도, 베드로바울의 설교가 서방에서 이룩했던 것과 똑같이, 즉각적이고도 효력이 있는 호소를 이루어냈을 것이다.
130:2.4
(1430-2)
예수와 함께 키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한 젊은이가, 그들이 조선소에서 고된 일을 하는 동안 예수가 시간 시간마다 이따금씩 내 던지는 말에, 하루는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땅에 있는 자녀들의 행복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예수가 넌지시 비췄을 때, 이 젊은 그리스인 아낙산드는, “만약 하느님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왜 그들은 이 무자비하고 부당한 십장(什長)을 없애버리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였다. 그는 예수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마도 하느님들은 네가 친절을 베푸는 방법을 알고 있고 공의를 존중하기 때문에, 네가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더 좋은 이러한 길로 인도할 수 있도록 네게 가까이 두는 것 같다. 아마 네가 이 형제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더욱 인정할 수 있도록 만드는 소금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곧, 네가 아직 맛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이 사람이 너에게 불리하게 영향을 끼치는 악한 길에서 너의 주인이 되고 있다. 너는 왜, 선의 힘에 기대어 악에 대한 너의 주인된 권리를 주장하여 그로서 너희 둘 사이의 모든 관계에서 네가 주인이 되려고 하지않는 것이냐? 내가 예언하건대, 네가 만약 네 안에 있는 선이 제대로 살아날 기회를 주기만 한다면, 그 선이 악을 압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필사자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잘못과 악에 대항해서 승리하는 영적 에너지와 그리고 신성한 진리와 손을 잡고 일하는 기쁨보다, 더 신나는 모험은 아무 것도 없다. 영적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영적 빛의 살아있는 통로가 되어 준다는 것은 놀랍고도 그리고 변환이 일어나는 체험이다. 만약 네가 이 사람보다 진리에 대한 축복을 더 많이 받았다면, 그의 부족함은 너에게 도전이 될 것이다. 너는, 수영을 못하는 친구가 바다에 빠져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도 그대로 바닷가에 서 있을 겁쟁이는 분명히 아니다! 물 속에 빠져 죽어가는 육체와 비교해 볼 때,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이 사람의 혼은 얼마나 더 많은 가치가 있겠느냐!”
130:2.5
(1430-3)
아낙산드예수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윽고 그는 예수가 한 말을 자기 상급자에게 전했고, 그날 밤 그 둘은 자신들 혼의 행복을 위해 예수에게 충고를 구했다. 그리고 뒷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케자리아에 전파되었을 때, 한 사람은 그리스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로마인인 이 두 사람은, 모두 빌립의 설교를 믿고 빌립이 설립한 교회의 훌륭한 회원이 되었다. 후에 이 젊은 그리스인로마군 백부장인 코넬리우스의 청지기가 되었고, 베드로의 전도를 통해서 신자가 되었다. 아낙산드바울케자리아에서 감옥에 갇히는 날까지, 어둠 속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빛을 전했으며, 그러다가 그는 2만 명 유대인 대학살 사건 당시 고통 받는 이들과 죽어 가는 이들을 위해 일하던 중에, 그 자신도 사고로 죽었다.
130:2.6
(1431-1)
이 무렵에 가니드는, 자신의 선생이 자기 동료들에게 이러한 유별난 개인적 사명활동에서 어떻게 자신의 여가 시간을 보냈는지를 알기 시작하였으며, 그 젊은 인도인예수가 이러한 끊임없는 활동을 하는 동기를 알아보려고 하였다. 그는, “당신은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일에 왜 그토록 끊임없이 몰두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가니드야, 하느님을 아는 사람에게는 어떤 사람도 낯선 사람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찾는 체험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형제임을 발견하게 되는데, 새로 발견한 형제를 만나는 즐거움에 빠지는 것이 그렇게도 이상하게 보이는가?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사귀고, 그들의 문제를 알게 되고,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 삶에 있어서의 최극 체험이 된다.”
130:2.7
(1431-2)
이 이야기는 밤이 깊도록 계속되었고, 그러는 중에 그 젊은이는, 하느님의 뜻과, 의지라고 불리는 선택을 이루는 인간 마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예수에게 물었다. 예수가 말한 요지는 이러하였다: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의 길, 어떤 잠재적인 양자택일에 직면하였을 때 하느님의 선택과 동반자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점점 더 하느님처럼 되어 가는 진보의 체험이며, 하느님은 모든 선(善)하고, 아름답고(美), 참된(眞) 것의 근원이자 운명이시다. 사람의 의지는 사람의 길이며, 그것은 되고자하고 하고자하는 필사자의 선택의 총합(總合)이자 본질체이다. 의지는 지능적인 반영에 기초를 두고, 결정-행위로 인도하는 자아-의식 존재의 고의적인 선택이다.
130:2.8
(1431-3)
그 날 오후 예수가니드는 아주 영리한 목양견(牧羊犬) 한 마리와 즐겁게 놀았는데, 가니드는 문득 개도 혼을 갖고 있으며 의지를 갖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가니드예수에게 질문을 하자, 예수는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개는 자기 주인, 물질적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일종의 마음은 갖고 있지만, 영(靈)이신 하느님을 알 수는 없으며, 따라서 개는 영적 본성을 갖고 있지 않고 영적 체험도 즐길 수 없다. 개는, 본능에서 나오고 훈련으로 증강될 수 있는 어떤 의지를 갖고 있고 있지만, 그러한 마음의 힘은 영적 기세도 아니며, 더욱이 그것은 반영적이 아니기 때문에─그것은 보다 고상하고 도덕적인 의미들을 분별한 결과가 아니고, 영적이고 영원한 가치들을 선택한 결과도 아니다─, 인간의 의지와는 비교될 수 없다. 필사 사람으로 하여금 도덕적인 존재, 영적인 책임을 갖는 속성과 영원한 생존의 잠재력을 자질로서 부여받은 창조체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영적 분별력과 진리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동물에게는 그런 정신력이 없기 때문에 언어를 발전시킨다거나 영원에서의 개인성 생존과 동등한 어떤 것을 체험하기란 언제까지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덧붙여서 설명하였다. 그 날 예수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가니드는 사람의 혼이 동물의 몸속에 윤회된다는 믿음을 다시는 갖지 않게 되었다.
130:2.9
(1431-4)
다음 날 가니드는 자기 부친과 이 문제 전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고, 고노드의 질문에 대해, 예수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동물적 실존에서의 물질 문제를 행하려고 내리는 일시적인 결정들로 온통 몰두되어 있는 인간 의지는 때가 되면 소멸될 운명에 처해 있소. 전심을 다해서 내린 도덕적 결정과 분별불가적인 영적 선택을 내리는 사람들은 내주하는 신성한 영과 점차로 정체성이 확인되어 가며,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생존의 가치들─신성한 봉사의 끝남이 없는 진보─속으로 점점 더 변환되어 가는 것이오.”
130:2.10
(1431-5)
바로 그 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대한 진리를 처음 들었는데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의지란, 주관적 의식이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표현하도록 할 수 있고, 하느님과-닮음이 되고 싶은 열망의 현상을 체험하도록 할 수 있는 인간 마음의 현시활동이다.” 그리고 모든 반영적이고 그리고 영적으로 마음기능을 하는 인간이 창조적으로 된다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의미이다.
3. 알렉산드리아에서
130:3.1
(1432-1)
케자리아의 사건 많은 방문은 매우 뜻 깊은 것이었고, 배가 준비되자, 예수와 그의 두 친구들은 어느 날 정오에 이집트알렉산드리아를 향해 출발하였다.
130:3.2
(1432-2)
그 세 사람은 알렉산드리아로 항해하면서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가니드는 그 항해를 매우 즐겼으며, 예수는 그의 여러 가지 질문에 대답하기 바빴다. 그들이 항구에 다가가자 가니드파로스의 거대한 등대를 보고 흥분하였는데, 그 등대는 알렉산더가 방파제를 만들어서 본토를 연결시켜 놓은 섬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는 또한 두 개의 커다란 항구를 만들어서 알렉산드리아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의 해상무역의 교차로 구실을 하게 하였다. 이 거대한 등대는 세계 7대 불가사의(不可思議) 중의 하나였고, 후대의 모든 등대들의 기원이 되었다. 그들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이 장엄한 건축물을 보기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났고, 가니드가 감탄사를 연발하는 동안 예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 아이야, 네가 인도로 돌아가면 네 부친이 돌아가신 후일지라도 이 등대와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너는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주위 사람들의 빛이 될 것이고, 누구든지 안전하게 구원의 항구에 도착하는 길을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그 길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러자 가니드예수의 손을 붙잡고,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130:3.3
(1432-3)
초기 그리스도교 교사들이 로마 세계라는 서방 문명권에만 집중적으로 그들의 주의를 기울인 것은 커다란 오류였음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지적하는 바이다. 예수의 가르침들이 1세기에 메소포타미아의 신자들에 의해 간직되었던 것처럼, 아시아 종교인들의 여러 집단들에 의해서도 쉽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130:3.4
(1432-4)
항구에 도착한지 네 시간이 지나서 그들은 길고 넓은 도로, 폭은 30미터이고 길이는 5마일 정도 되고, 1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그 도시의 서쪽 끝까지 뻗어 있는 큰길의 동쪽 끝부분 가까운 장소에 숙박 장소를 정하였다. 그 도시에서 제일 볼만한 것들─대학(박물관), 도서관, 알렉산더의 왕릉, 궁전, 바다의 왕 넵튠 신전, 극장, 체육관─을 먼저 돌아본 후에, 고노드는 자신의 사업에 관계되는 일을 시작하였고, 예수가니드는 세상에서 가장 큰 도서관으로 갔다. 그곳에는 모든 문명세계; 그리스, 로마, 팔레스타인, 파르티아, 인도, 중국 그리고 일본에서까지 가져온 거의 100만 권에 이르는 서적들이 모여 있었다. 이 도서관에서 가니드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도 문헌들을 보았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에 머무는 동안 이곳에서 매일 일정한 시간을 보냈다. 예수가니드에게 이곳에서 히브리 경전이 그리스어로 번역된 일에 관해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모든 종교에 대해서 계속 토론하였으며, 그 때마다 예수는 이 젊은이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면서 이 젊은 마음에 진리를 심어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야훼멜기세덱의 계시와 아브라함의 언약으로부터 발생된 하느님이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고, 나중에는 멜기세덱이 살았고 가르쳤으며 모든 세계들에 선생들을 보낸 중심지였던 이 땅을 차지하였다; 그래서 결국에는 유대인들의 종교는 다른 어떤 세계 종교들보다, 이스라엘주님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우주 아버지로서 훨씬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130:3.5
(1432-5)
가니드예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우주적 신(神)을 인정하는 모든 세계 종교들의 가르침들이 비록 다른 한 편으로는 종속적인 신(神)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종합해 보았다. 예수가니드는 많은 토론 끝에, 로마인들은 그들의 종교 속에 실제적인 하느님을 갖고 있지 않다는, 그들의 종교는 거의 황제 경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리스인들의 경우에는, 철학을 갖고 있을 뿐 개인적 하느님을 가진 종교는 갖고 있지 않다고 결론지었다. 신비 예배종파의 경우에는, 많은 신(神)들로 인해 혼란스러운 데다가, 신(神)들에 대한 그들의 다양한 개념도 다른 종교 또는 더 고대의 종교들로부터 파생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것들은 제외시켰다.
130:3.6
(1433-1)
비록 이 해석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행해졌으나, 가니드가 최종적으로 선별작업을 마무리하고 자신의 개인적 결론들을 첨가한 것은, 로마에서의 체류기간이 다 끝나 갈 무렵이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성스러운 문헌들의 저자들 중에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영원한 하느님의 실존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거나 하느님의 성격과 필사자와의 관계에 대한 의견들이 많이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무척 놀랐다.
130:3.7
(1433-2)
예수가니드알렉산드리아에 머무는 동안 박물관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박물관은 희귀한 물건들을 수집해 놓은 곳이라기보다는 미술, 과학, 문학 등을 가르치는 대학에 더 가까웠다. 그곳에서는 학식 있는 교수들이 매일 강의를 하였고, 당시에는 이곳이 서양 세계의 지적(知的) 중심지였다. 예수는 날마다 가니드에게 그 강의들을 해석해 주었다; 1주일째 되던 어느 날 가니드는 큰소리로 말하였다: “여호수아 선생님, 당신은 이 교수들보다 더 많이 아십니다: 당신은 나에게 말해준 위대한 것들을 일어나서 그들에게도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많은 생각으로 인해 흐려져 있습니다. 제가 아버지에게 부탁드려서 이 일을 주선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는 칭찬 받을 학생이지만, 이 선생들은 너와 내가 그들을 가르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영성화 되지 못하는 배움의 자부심은 인간 체험에 있어서 위험한 것이다. 참된 선생은 언제나 배우는 자로 남음으로써 지적인 고결한-순수성을 유지한다.”
130:3.8
(1433-3)
알렉산드리아서양의 모든 문화가 혼합된 도시였고, 로마 다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크고 격조 높은 도시였다. 이곳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유대인 회당, 알렉산드리아 산헤드린의 행정 중심부인 70명의 통치하는 장로들이 있었다.
130:3.9
(1433-4)
고노드가 사업상 거래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알렉산더라는 한 유대인 은행가가 있었는데, 그의 형제인 필로는 당대에 가장 유명한 종교 철학자였다. 필로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을 조화시키는 훌륭하면서도 매우 어려운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가니드예수필로의 가르침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의 강의에 참석하려고 계획했지만, 이 유명한 그리스유대인은 그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머무는 동안 내내 병석에 누워있었다.
130:3.10
(1433-5)
예수가니드에게 그리스 철학과 스토아 철학에서 많은 것들을 칭찬하였지만, 자기 민족 중에서 어떤 사람들의 불확실한 가르침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신앙 체계들은, 그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찾도록 그리고 영원한 분을 아는 살아있는 체험을 즐기도록 인도해줄 때에만 종교적인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진리를 그 젊은이에게 가슴 깊이 새겨주었다.
4. 실체에 관한 강연
130:4.1
(1433-6)
그들이 알렉산드리아를 떠나기 전날 밤 가니드예수플라톤의 가르침을 강의하는 정부 소속 교수들 중 한 사람과 그 대학교에서 오랜 동안 만났다. 예수는 박식한 그 그리스인 교수의 말을 통역했지만, 그리스 철학에 반박하는 입장으로서의 자신의 가르침은 거기에 개입시키지 않았다. 고노드는 그 날 밤 사업 관계로 다른 곳에 있었다; 그래서 교수가 자리를 떠나자 그 선생과 그의 제자는 플라톤의 학설에 관해 심금을 털어놓고 오랫동안 이야기하였다. 예수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이, 보이지는 않지만 보다 본질적인 영적 실체에 대한 그림자라는 이론을 다루어야만 했던 그리스 철학의 어떤 가르침에 대하여 분별화되었음을 인정해 주면서, 한편으로는, 그 젊은이의 사고에 좀 더 신뢰할만한 기초를 마련해주려고 애를 썼다; 그리하여 그는 우주에 있어서의 실체의 본질에 관하여 긴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가니드에게 말했던 요지를 현대의 언어로 말해 보면 다음과 같다:
130:4.2
(1434-1)
우주 실체의 근원은 무한자이다. 유한한 창조의 물질적인 사물들은 파라다이스 원형틀과 영원한 하느님우주 마음의 시간-공간 반향(反響)들이다. 물리적 세계에서의 원인성, 지적 세계에서의 자아-의식, 영적 세계에서의 진보하는 자아신분은─우주규모로 구체적으로 투사되고, 영원한 관계성 속에 병합되며, 본질특성의 완전성과 가치의 신성(神性)과 함께 체험되는, 이들 실체는─ 최극자의 실체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원인성, 지능, 영 체험에서의 기원적 개인성은, 언제까지나-변화하는 우주 속에서도 변화하지 않는다, 절대적이다. 만물은, 무한한 가치와 신성한 본질특성의 영원한 우주에서 조차도, 모두 변할 수도 있고 또 종종 변하지만, 절대자, 그리고 물질적 지위, 지적인 포옹, 다시 말해서 절대인 영적 정체성을 달성한 것은 예외이다.
130:4.3
(1434-2)
유한한 창조체가 진보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은, 우주 아버지를 인식하는 것이며 최극자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후에도 최종 운명을 갖는 그러한 존재들은 물리적 세계의 움직임들과 그것의 물질 현상 속에 있어서의 변화를 계속 체험한다. 그들은 또한 영적 우주를 계속적으로 상승하는 과정 속에서 자아신분의 진보를 여전히 자각하며, 지적 조화우주에 대한 깊어지는 이해와 반응 속에서 의식의 성장을 여전히 인식한다. 오직 완전성, 조화 그리고 의지의 일치 안에서만 창조체는 창조자와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창조체가 자신의 유한한 개인적 의지를 항상 창조자의 신성한 뜻에 맞춤으로써만 시간 속에서나 영원 속에서 계속 살아가면서 신성의 상태를 그렇게 얻을 수 있고 유지할 수 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욕구는, 상승하는 하느님의 아들의 혼 속에서 언제나 최극이어야 하며 그의 마음을 지배해야 한다.
130:4.4
(1434-3)
눈이 하나 밖에 없는 사람은 결코 원근(遠近)을 감지하고자 하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눈밖에 갖지 못한 물질적인 과학자나 영적 신비가나 우화(寓話) 작가는, 우주 실체의 진정한 깊이를 정확하게 감지하고 이해할 수 없다. 창조 체험의 모든 진정한 가치들은 인식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
130:4.5
(1434-4)
마음이 없는 원인성은 조잡하고 단순한 상태로부터 세련되고 복잡한 상태로 진화할 수 없으며, 또한 영(靈)이 개재되지 않은 체험도 시간에 사는 필사자들의 물질적 마음으로부터 영원히 생존되는 신성한 성격으로 진화할 수 없다. 무한한 신(神)의 특성을 매우 배타적으로 나타내는 우주의 한 가지 속성은, 진보적 신(神) 달성 속에서 생존될 수 있는 개인성의 이러한 끝없는 창조적 증여이다.
130:4.6
(1434-5)
개인성은 조화우주 자질이고, 우주적 실체의 현상이며, 그것은 무제한한 변화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동시에 그리고 그 후로 언제까지나 그러한 모든 변화들의 바로 그 현존 속에 그 정체성을 간직하는 것이다.
130:4.7
(1434-6)
생명은 우주 상황들의 요구와 가능성들에 대한 기원적인 조화우주 원인성의 적응이며, 그것은 우주 마음의 행동과 영이신 하느님의 영적 불꽃의 활동에 의해 존재 안으로 들어온다. 생명의 의미는 그 적응성에 있다; 생명의 가치는─하느님-의식의 높이까지 이르는─그 진보력에 있다.
130:4.8
(1434-7)
우주에 대한 자아-의식적 생명의 잘못된 적응은 조화우주 부조화를 가져온다. 우주들의 경향으로부터의 개인성 의지의 최종적 일탈은 지적인 고립, 개인성의 격리로 종결된다. 내주하는 영 인도자의 상실은 실존의 영적 단절이 잇따라 일어난다. 그래서 지능적이고 진보하는 생명은, 그 자체로서 그리고 저절로, 신성한 창조자의 뜻을 표현하고 있는 목적을 지닌 우주가 실존하고 있음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이 생명은, 우주 아버지를 그 최종적인 목표로 삼으면서, 총합 안에서, 더 높은 가치를 향해 투쟁한다.
130:4.9
(1435-1)
지능에서의 좀 더 높은 준(準)-사명봉사-직무로부터 따로 떨어져 별개로 한다면, 사람은 기껏해야 동물 차원에서 등급을 넘어선 마음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동물들은 (경배와 지혜를 가지지 않기 때문에) 초(超)-의식, 곧 의식에서의 의식을 체험할 수가 없다. 동물적인 마음은 기껏해야 객관적인 우주만을 의식할 뿐이다.
130:4.10
(1435-2)
지식은 물질적인 또는 사실-식별하는 마음의 구체다. 진리는 하느님을 알고있음을 의식하는 영적으로 자질로서 부여된 지성의 권역이다. 지식은 실증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진리는 체험되는 것이다. 지식은 마음의 소유물이디; 그러나 진리는 혼, 진보하는 자아의 체험이다. 지식은 비(非)영적 차원의 기능이다; 한편 진리는 우주들의 마음-영 차원의 한 위상이다. 물질적 마음의 눈은 사실적인 지식의 세계를 감지한다; 그러나 영성화된 지성의 눈은 참된 가치들의 세계를 식별한다. 동조되고 그리고 조화되는 이들 두 관점들이 실체의 세계를 드러내며, 바로 그곳에서 지혜는 진보하는 개인적 체험에 의하여 우주의 현상들을 해석한다.
130:4.11
(1435-3)
잘못(악)은 불완전성의 대가이다. 불완전한 본질특성이나 부적당한 적응의 사실들은, 비판적 관찰과 과학적 분석에 의해 물질적 차원에서 드러나고, 인간 체험에 의해 도덕적 차원에서 드러난다. 악의 현존은 마음의 부정확함과 진화하는 자아의 미성숙함에서 그 증거가 드러난다. 따라서 악은 우주 해석에서의 불완전성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오류를 범할 가능성은 지혜의 획득 속에 즉,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부터 완벽하고 영원한 것으로 또한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것으로부터 최종적이고 완전한 것으로 나아가려는 계획 속에 선천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잘못은 사람이 파라다이스의 완전성으로 상승하는 우주 길목에서 반드시 마주쳐야 하는 상대적인 미완성에서의 그림자이다. 잘못(악)은 실재하는 우주의 본질특성이 아니며, 그것은 단순히 최극자궁극자의 상승하고 있는 차원들에 대한 미완성 유한자들의 불완전의 관계맺음 안에서 상대성이 관찰되는 것에 불과하다.
130:4.12
(1435-4)
비록 예수는 이 모든 것을 그 젊은이가 이해하기에 가장 적합한 언어로 그에게 말하였지만,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이 되자 가니드의 눈은 무거워졌고 곧 잠에 떨어졌다. 그들은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배를 타고 크레테 섬에 있는 라시아로 갔다. 그러나 그들이 출항하기 전에, 그 젊은이에게는 악에 관한 의문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었으며, 예수는 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130:4.13
(1435-5)
악은 하나의 상대성 개념이다. 그것은 무한자의 영원한 실체들에 대한 우주 표현의 살아있는 빛을 가리고 있는 그러한 조화우주에서처럼, 그렇게 유한한 사물과 존재의 유한 우주로 인하여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 나타나는, 불완전성들에 대한 관찰에서 발생한다.
130:4.14
(1435-6)
잠재적 악은, 무한과 영원이 시간-공간-제한을 받으면서 표현되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계시의 필요되는 미완성 안에 선천적으로 들어있다. 완벽함의 현존 안에 부분적인 것이 있다는 사실이, 실체의 상대성을 구성하고 지적 선택에 대한 필요성을 창조하며 영 인지와 반응이라는 가치 차원들을 수립한다. 일시적이고 한정된 창조체의 마음이 파악하는, 무한자에 대한 미완성이고 유한한 개념은, 그 자체로서 저절로 잠재적 악(惡)이다. 그러나 이들 기원적으로 선천적인 지적 부조화와 영적 불충분함에 대한 이치에 맞고 합당한 영적 정화에서, 정당화되지 않는 결함을 증강시키는 잘못은, 실재적 악의 실현과 동등한 것이다.
130:4.15
(1436-1)
모든 정적인, 죽어있는 개념들은 잠재적으로 악이다. 상대적이고 그리고 살아있는 진리의 유한한 그림자는 계속 움직인다. 정적인 개념들은 변함없이 과학, 정치, 사회, 종교 등의 발전을 지체시킨다. 정적인 개념들은 어떤 지식을 표방하기는 하지만, 지혜가 부족하고 진리가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상대성의 개념이 너희를 지나치게 잘못 인도하여 너희가, 조화우주 마음의 지도 아래에 있는 우주의 조화-협동, 그리고 최극자의 영과 에너지로 말미암아 안정되는 통제를 인식하는 것에, 실패하도록 허용하지는 말라.
5. 크레테 섬에서
130:5.1
(1436-2)
이 여행자들은 섬을 산보하거나 등산하면서 단지 즐기려는 목적만을 가지고 크레테로 갔다. 당시의 크레테 주민들은 그들의 인근 지역으로부터 부러워 할 만한 아무런 평판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니드는 많은 혼들을 더 높은 차원의 생각과 삶으로 인도하였고, 이것은 후일 예루살렘으로부터 첫 설교자들이 도착하였을 때 복음의 가르침에 대한 빠른 수용을 가능하게 한 토대가 되었다. 바울은 후일 자신들의 교회들을 재조직하기 위해 타이투스를 그 섬으로 보내면서 이들에 관해서 가혹한 말을 하였었지만, 예수는 이 크레테 주민들을 사랑하였다.
130:5.2
(1436-3)
크레테에 있는 산기슭에서 예수는 종교에 관해 고노드와 처음으로 긴 대화를 가졌다. 그 아버지는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이렇게 말하였다. “저 아이가 당신이 하는 말을 무엇이든지 믿는 것은 당연하게 여겼지만, 저는 다마스커스에서보다도 오히려 예루살렘에 그런 종교가 있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고노드예수에게 자신들과 함께 인도로 돌아가자고 처음으로 제의한 것은 바로 이 섬에서 머무는 동안이었으며, 가니드예수가 그것에 동의하리라는 생각에 매우 기뻐하였다.
130:5.3
(1436-4)
어느 날 가니드예수에게 왜 대중을 위한 선생의 일에 헌신하지 않는지를 물었을 때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이야, 모든 것은 그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네가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아무리 많은 걱정도 또 그 어떤 조급함의 현시활동도 너를 성장하도록 도움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너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그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 시간만이, 나무에 달린 풋과일을 저절로 익게 한다. 시간이 흘러가야만, 한 계절이 지나간 뒤에 다음 계절이 오고, 해가 지고 난 후에 해가 뜨는 법이다. 나는 지금 너와 너의 아버지와 함께 로마로 가는 도중이며, 오늘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의 내일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손에 온통 달려 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가니드에게 모세와 그의 40년에 걸친 신중한 기다림과 꾸준한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130:5.4
(1436-5)
페어 항구를 방문한 날 가니드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일이 일어났는데; 이 에피소드에 대한 기억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고향 인도에 있는 특권계급제도를 바꾸기 위한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언제나 불러 일으켰다. 어떤 술 취한 주정꾼이 공공 큰 도로에서 노예 소녀를 괴롭혔다. 예수가 그 소녀의 곤경을 보았을 때, 그는 즉시 달려가서 그 소녀를 미친 사람으로부터 구해내었다. 겁에 질린 소녀가 그에게 매달려 있는 동안 그는 강한 오른팔을 내뻗어 그 사람을 떼어놓은 후, 그가 자신의 화난 주먹을 허공으로 휘두르다가 지칠 때까지 그를 잡고 있었다. 가니드예수에 도움을 주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지만, 그의 아버지가 그를 만류하였다. 비록 그들의 언어는 달랐지만, 그 소녀는 그들의 자비로운 행동을 알 수 있었으며, 그녀를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준 그 세 사람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시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예수가 육신을 입었던 그의 전 일생을 통하여 자신의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가장 가깝게 접촉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날 저녁 왜 술 취한 남자를 때리지 않았는지를 물어오는 가니드에게 설명해야할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었다. 가니드는, 적어도 그 남자가 소녀를 때린 만큼 그도 역시 매를 맞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6. 두려움에 찬 젊은이
130:6.1
(1437-1)
그들이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에, 예수는 두려움이 많고 풀이 죽은 한 젊은이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들과의 관계적-연합에서 위로와 용기를 이끌어내는데 실패함으로써, 이 젊은이는 깊은 산의 고독을 찾고 있었다; 그는 무력함과 열등감의 느낌을 가지고 성장해 왔다. 이 자연본성적 성향들은 그가 성장하면서 맞부딪친 수많은 어려운 현황에 의해, 특히 그가 12살 때 그의 아버지를 잃음으로써, 증강되었다. 그들이 만나게 되자 예수가 그에게 말하였다: “안녕하신가, 나의 친구여! 이처럼 아름다운 날 왜 그렇게 풀이 죽어 있는가? 무언가 너를 괴롭히는 일이 일어난 것이라면, 아마 나는 무언가의 방법으로 너를 협조할 수 있다. 아무리 작더라도, 그것은 내게 나의 봉사가 제공되는 실제 즐거움을 가져다줄 것이다.”
130:6.2
(1437-2)
그 젊은이는 이야기하기를 사양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그의 혼에게 다시 접근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네가 사람들을 피해 이 산으로 올라온 것을 납득할 수 있다; 물론 나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나는 네가 이 언덕들의 길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 오솔길들의 방향을 알고 있다면, 혹시 피닉스로 가는데 가장 좋은 길을 좀 가르쳐 줄 수 있겠느냐?” 이 젊은이는 현재 이 산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피닉스에 이르는 길을 예수에게 말해주는 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그래서 모든 오솔길들을 땅바닥에 그리면서 각각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예수가 작별 인사를 마친 후 정말로 떠나려는듯 하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그는 깜짝 놀랐고 또한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나는 네가 울적하게 홀로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내가 피닉스에 이르는 가장 좋은 길을 찾도록 그런 관대한 도움을 너에게서 받아들였는데, 네가 이 산기슭에 서성이면서 가슴 속에서 간절하게 찾고 있는 운명의 목표에 이르는 가장 좋은 길에 대한 안내와 도움을 바라는 너의 청원에 대하여 내가 그 어떤 대답도 시도해 보지도 않고 별 생각없이 가버리는 것은 과히 잘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네가 여러 번 그 길을 지나다녀서 피닉스로 가는 가장 좋은 길을 잘 알고 있는것처럼, 나도 역시, 네가 지금 실망을 겪는 희망의, 좌절을 겪는 열망의 도시에 이르는 길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네가 나에게 도움을 원했으므로, 나는 너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젊은이는 거의 압도 당하여 더듬거림을 참으며, “하지만─저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았는데요.─”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젊은이의 어깨에 손을 부드럽게 얹고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아이야. 말로서가 아니라 너의 그 간절한 표정으로 나의 가슴에 요청하였다. 얘야, 자기 동료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너의 실의와 절망의 표정 속에 도움을 요청하는 강한 청원이 있음이 느껴진다. 여기 잠시동안 나와 함께 앉아서, 사람의 형제신분에서의 그리고 하늘에 계신 하느님에 대한 봉사에서의, 자아의 슬픔에서 사랑 넘치는 행동의 기쁨으로 인도되는, 봉사 오솔길과 행복 고속도로에 관한 내 이야기를 들어봐라.”
130:6.3
(1437-3)
이때가 되어서 젊은이는 예수와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매우 간절해졌으며, 그는 무릎을 꿇고 자신의 슬픔과 좌절의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보여 달라고, 자기에게 도움을 달라고 예수에게 간청하였다. 예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친구여! 일어나라! 남자답게 일어서라! 네가 조그만 적들에게 둘러싸이고 많은 장애물로 뒤처져 있을 수도 있지만, 이 세상과 우주에서 큰 것과 실제적인 것이 네 편에 있다. 태양은 매일 아침 떠올라 땅에서 가장 힘 있고 번영한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것과 똑같이, 너에게도 인사를 하지 않느냐? 보아라,─너는 튼튼한 육체와 강인한 근육을 갖고 있다.─너의 육체적 자질은 평균을 넘는다. 물론 네가 이런 산기슭에 앉아서 실제이거나 공상이거나 간에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육체는 단지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만약 위대한 일들이 이뤄지기를 기다리는 곳으로 서둘러 떠난다면, 너는 그 육체를 사용하여 위대한 일들을 이룰 수 있다. 너는 너의 불행한 자아로부터 달아나려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너와 너의 삶의 문제들은 실질적인 것이다; 네가 살아있는 한, 너는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네 마음이 맑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보아라. 너의 강인한 육체는 그것을 지도할 수 있는 지적 마음을 가지고 있다. 너의 마음을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제에 맞춰라; 너의 지성이 너를 위해 일하도록 가르쳐라; 생각 없는 동물처럼 두려움에 지배당하는 상태를 이제부터 더 이상 허용하지 마라. 네 마음이 네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그런 비열한 두려움에-노예로 그리고 속박된 하인으로 패배와 좌절에 끌려왔던 지금까지의 너의 상태에 계속 머무르게 하느니, 이제부터는 네 마음이 용감한 동맹군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모든 것에서 최고로 가치 있는, 너의 실제적인 성취의 잠재력은 네 안에 살고 있는 영이며, 이 영은 만약 네가 두려움의 족쇄에서 너의 몸을 해방시키고 그로써 살아있는 신앙의 힘-현존에 따라서 너의 영적 본성으로 하여금 비활성이라는 악에서 벗어나는 너의 해방을 시작하라고 허용한다면, 너의 마음을 촉발시키고 영감을 일으켜 스스로를 통제하고 몸을 활성화할 것이다. 그리고는 곧바로, 이 신앙은 네 가슴 안에서 탄생되는 네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의식 때문에, 네 혼을 넘쳐흐르기까지 즉시 온통 채우는, 새롭고도 모든 것을-지배하는, 너의 동료에 대한 사랑이라는 억누를 수 없는 현존에 따라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정복할 것이다.
130:6.4
(1438-1)
“아이야, 너는 오늘 다시 태어났다. 신앙의 사람, 용기의 사람 그리고 사람에 대한, 하느님을 위한 봉사에 헌신하는 사람으로서 다시-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네 속에 내재하는 생명에게 재조절 되었을 때, 너는 또한 우주에 대해서도 재조절 되는 것이다; 너는 다시 태어난 것─영의 탄생─이며, 그러므로 너의 전체 일생은 승리하는 성취 속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걱정은 너를 활기차도록 할 것이다; 실망은 너에게 박차를 가하게 할 것이다; 난관은 네가 도전하도록 할 것이다; 장애물은 네가 자극을 받도록 할 것이다. 젊은이여, 깨어나라! 굽실거리고 도망 다니는 겁쟁이의 일생에 작별을 고하라. 그리고 서둘러 너의 임무로 돌아가서, 육체를 가진 하느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서 사람에 대한 기품 있는 봉사에 전념하고 영원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뛰어나고 영원한 봉사에 운명지워진 필사자로서 살아가기 바란다.”
130:6.5
(1438-2)
그리고, 운이 좋았던 이 젊은이는 나중에 크레테그리스도교 영도자가 되었고, 크레테 신자들을 향상시키는 일에 있어서 타이투스에게 긴밀한 협력자가 되었다.
130:6.6
(1438-3)
그 여행자들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였고, 상쾌한 기분으로 어느 날 정오에 북아프리카카르타고를 향해 항해를 시작했으며, 키레네에서는 이틀을 머물렀다. 이곳에서 예수가니드는, 짐을 실은 소달구지에 받쳐서 부상을 입은 루푸스라는 젊은이에게 응급치료를 해주게 되었다. 그들은 그 젊은이를 그의 어머니와 그의 아버지 시몬에게 데려다 주었는데,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한 때 친절을 베풀었던 그 나그네의 십자가를 후일에 로마 병사의 명령에 의해 자신이 대신 지고 가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였다.
7. 카르타고에서─시간과 공간에 대한 강연
130:7.1
(1438-4)
카르타고를 여행하는 동안, 예수는 자기 동료 여행자들과 함께 사회와 정치와 상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으며; 종교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었다. 고노드가니드예수가 훌륭한 이야기꾼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하였고, 그들은 갈릴리에서 보낸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재촉하였다. 그들은 또한 그가 예루살렘이나 다마스커스에서가 아닌 갈릴리에서 성장한 것도 알게 되었다.
130:7.2
(1438-5)
가니드는 그들이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에게 매료되었던 점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을 친구로 만들 수 있는 비결을 예수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의 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또한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그들이 원한다고 네가 확신하는 일들을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라.” 그러면서 예수는 오래된 유대인 속담을 인용하였다. ─“친구를 가지고 싶은 사람은 먼저 친절을 베풀어야만 한다.”
130:7.3
(1439-1)
카르타고에서 예수미트라교의 사제 한 사람과 불멸에 관해서, 그리고 시간과 영원에 관해서 길고도 기억에 남을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페르시아인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었고, 예수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를 실제로 원하였다. 이 날 그의 많은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을 오늘날의 언어로 바꾼다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30:7.4
(1439-2)
시간이란 창조체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지는 현세적 사건들이 흘러내려가는 개울이다. 시간이란, 그것에 따라 사건들이 인식되고 분리되는 연속적-배열에 붙여진 하나의 이름이다. 공간의 우주는 시간-관련 현상으로서, 그것은 파라다이스의 고정된 거주지 바깥에 있는 어떤 내부적 위치로부터 조망되어진다. 시간의 움직임은 하나의 시간 현상이면서도 공간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어떤 것과 관계될 때에만 드러난다. 우주들 중의 우주 안에서 파라다이스와 그것의 신(神)들은 시간과 공간을 모두 초월한다. 인간이 사는 세계들에서, 인간 개인성(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영이 거주하고 그것에서 기원된)만이 오직, 일시적인 사건들의 물질적 순차를 초월할 수 있는 실체와 물리적으로 관계되어 있다.
130:7.5
(1439-3)
사람과는 달리, 동물들은 시간을 느끼지 못하며, 심지어는 사람에게서도, 그의 부분적이고 제한된 시야 때문에, 시간은 사건들의 연속으로 나타나지만; 그러나 사람이 좀 더 상승함에 따라, 좀 더 안쪽으로 깊이 들어감에 따라, 이 사건의 진행에 대한 넓어지는 시야는, 그것의 전체성 속에서 그것이 점점 더 식별되는 그러한 것이다. 처음에는 사건들의 연속체로 나타난 것이 그 다음에는 전체적이며 완전하게 관계된 순환으로 보일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한 때 사건들을 일직선적인 순차로 의식하였던 것은 점점 더 순환적인 동시성으로 바뀔 것이다.
130:7.6
(1439-4)
시간에 의해 조건 지워짐에 따라서 공간에 대한 개념은 일곱 가지로 달라진다. 공간은 시간에 의해 측정되지만, 시간은 공간에 의해 측정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공간의 실체를 인식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공간은 우주 대상물들의 관계성 속에 있는 변화에 대한 단순한 지적 개념이 아니다. 공간은 텅 빈 것이 아니며, 사람이 아는 유일한 것은, 공간을 부분적으로라도 초월할 수 있는 것이 마음이라는 점이다. 마음은 물질 대상들에 대한 공간과 관련된 개념과 관계없이 작용할 수 있다. 공간은 창조체 지위의 모든 존재에게 상대적이고 비교적 유한하다. 의식이 일곱 개의 조화우주 규모들에 대한 인식에 가까워질수록, 잠재적인 공간에 대한 개념은 더욱 궁극위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공간의 잠재는 절대 차원에서만 진정한 궁극이다.
130:7.7
(1439-5)
우주적 실체가 확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상승하고 있고 완전을 이루어가고 있는 조화우주 차원들에서 항상 상대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궁극적으로, 생존되는 필사자들은 일곱-차원의 우주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성취한다.
130:7.8
(1439-6)
물질적 기원을 가진 마음의 시간-공간 개념은, 의식적이면서 착상하고 있는 개인성이 우주들의 차원들로 상승함에 따라 연속적인 확대들을 겪도록 운명되어 있다. 사람이 실존에 대한 물질적인 평면들과 영적인 평면들 사이에 게재하는 마음을 달성할 때, 그의 시간-공간의 관념들은 인식의 본질특성과 체험의 양에서 둘 모두가 거대하게 확대될 것이다. 진보하고 있는 영 개인성의 확대되고 있는 조화우주 개념들은, 통찰력의 깊이와 의식의 범위 둘 모두의 증강 때문에 일어나는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개인성이 신(神)을-닮아가는 초월적 차원들에 이를 때까지, 위쪽으로 그리고 안쪽으로 계속 통과함에 따라서, 시간-공간 개념은 절대자들의 시간-없는 그리고 공간-없는 개념들에 점점 더 근접해 갈 것이다. 상대적으로, 그리고 초월적 달성에 따라서, 절대적 차원의 이들 개념은, 궁극 운명의 자녀들에 의하여 예견되어야 한다.
8. 나폴리와 로마로 가는 길에서
130:8.1
(1440-1)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서 첫 번째로 머문 곳은 말타 섬이었다. 여기에서 예수는, 낙심하고 위축되어 있는 클라우두스라는 이름의 청년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사람은 자살할 생각을 깊이 해왔었지만, 다마스커스의 서기관과 이야기를 마쳤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하나의 대장부로써 일생을 대처하겠으며; 내가 비겁자 노릇을 하는 것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나의 민족에게로 되돌아가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곧 견유학파의 열렬한 사제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베드로와 손을 잡고 로마나폴리에서 설교하였고, 베드로가 죽은 뒤에는 스페인에까지 가면서 복음 전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말타에서 자신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준 사람이, 후에 자신이 세상의 해방자라고 선포한 그 예수라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하였다.
130:8.2
(1440-2)
시라큐스에서 그들은 일주일 전체를 보냈다. 이곳에 그들의 멈춤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은, 예수와 그의 동행자들이 머문 여인숙의 주인이었던, 타락한 유대인에즈라의 갱생이었다. 에즈라예수의 접근에 매료되었고, 그리고는 자신이 이스라엘인의 신앙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도움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나는 아브라함의 참된 아들이 되고 싶지만, 하느님을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절망을 하소연했다. 예수는 말하였다: “만약 네가 참으로 하느님을 찾아내고 싶다면, 그 소망 자체가 이미 네가 그를 찾아냈다는 증거이다. 너의 문제는 네가 하느님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니, 이는 아버지께서 이미 너를 찾아내었기 때문이다; 너의 문제는 단지 네가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했던, ‘너희가 나를 전심을 다해 찾을 때, 너희는 나를 구하며 나를 만나리라.'라는 말을 읽지 않았느냐? 그리고 또 그 선지자가 다시, ‘나는 너희에게 나를 알 수있는 가슴을 줄 것이고, 그리하여 내가 너희의 주님이니, 그리하여 너희는 내 백성에 속하겠고, 그리하여 내가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임을 알도록 하겠노라,'라고 쓴 것을 읽지 않았는가? 또한 너는 성서에, ‘그가 사람을 내려다보며, 그리하여 혹시 누구라도 말하기를: 나는 죄를 지었고 그리고 옳은 것을 왜곡하였고,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유익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하느님은 그 사람의 혼을 어두움으로부터 구원할 것이고, 그리하여 그가 빛을 볼 것이라'라고 말하는 것을 읽지 않았느냐?” 그리고 에즈라하느님을, 자신의 혼의 만족에 이르기까지 찾아내었다. 후일에 이 유대인은 어느 부유한 그리스인 개종자와 관계적-연합하면서, 시라큐스에 첫 번째 그리스도교 교회를 건설하였다.
130:8.3
(1440-3)
메시나에서 그들은 단지 하루밖에 머물지 못하였지만, 이 기간은 과일 행상을 하는 한 어린 소년의 일생을 변화시키기에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으며, 예수는 그 소년에게 과일을 산 대신 생명의 빵을 주었다. 그 소년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고 친절하게 바라보면서 하였던 예수의 말을 결코 잊지 않았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잘 있어라. 나의 소년아. 자라서 어른이 되면서 훌륭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육체를 키우는 것을 배운 뒤에는 혼을 키우는 법을 배워라. 그리고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께서 너와 항상 함께 계실 것이며 너를 인도하실 것이다.” 그 소년은 미트라교에 들어갔다가 후일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돌아섰다.
130:8.4
(1440-4)
드디어 그들은 나폴리에 도착하였고, 자신들의 목적지인 로마가 멀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고노드나폴리에서 거래해야 할 많은 사업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는 통역하는 시간외에는 가니드와 도시의 여기저기를 방문하고 답사하는데 여가 시간을 보냈다. 가니드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는 데는 거의 명인이 되어갔다. 그들은 그 도시에 사는 많은 빈곤자들을 발견하였고 여러 번 구제금을 주었다. 예수가 거리의 한 걸인에게 동전 한 닢을 주었을 뿐, 그에게 잠시 멈추어 서서 평강의 따뜻한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로 떠나면서 한 그의 말의 의미를 가니드는 결코 납득하지 못하였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말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에게 무엇 때문에 말을 낭비해야 되겠는가? 아버지의 영은, 아들 된 신분의 힘을 갖지 못한 사람을 가르치거나 구할 수가 없다.” 예수가 의미했던 것은 그 사람은 정상적인 마음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에게는 영적 인도함을 따를 힘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130:8.5
(1441-1)
나폴리에서는 별다른 뚜렷한 체험을 하지 않았다; 예수와 젊은이는 도시 전체를 누비며 수많은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에게 많은 미소로써 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130:8.6
(1441-2)
이곳으로부터 그들은 카푸아를 거쳐 로마로 갔으며, 카푸아에서 사흘을 머물렀다. 그들은 짐을 실은 동물들을 이끌고 아피아 도로를 통하여 로마로 갔으며, 그 세 사람은 제국의 여왕이며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인 로마를 보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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