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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4 편
예수의 유년기 후기
124:0.1
(1366-2)
예수가 비록 학교 교육을 위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다면 갈릴리에 있던 것보다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겠지만, 최소한의 교육적 인도를 받으면서 자신의 일생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그토록 훌륭한 환경을 누리는 동시에 문명화된 전 세계의 모든 지역으로부터 몰려오는 여러 계층의 수많은 남녀 사람들과 빈번하게 접촉할 수 있는 엄청난 혜택을 누리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만약 그가 알렉산드리아에 남아 있었더라면, 그는 유대인들에 의하여 오직 유대 계통의 교육밖에는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는 나사렛에서, 이방인들을 납득하는 데 더욱 수용적으로 그를 준비시키는 교육을 확보하였고 훈련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로 하여금 히브리 신학에 대한 동방 또는 바빌로니아적 시각과 서방 또는 그리스적 시각이 어떤 상대적인 장점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더 뛰어나고 균형 잡힌 관념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1. 예수가 9살 되던 해(서기 3년)
124:1.1
(1366-2)
예수가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그는 이 해에 자신의 남동생과 아기 여동생과 함께, 어린아이들이 흔히 앓는 사소한 병을 앓기도 하였다.
124:1.2
(1366-3)
학교 교육은 계속되었고, 그는 여전히 한 달에 한 주일 가량은 해방을 즐길 수 있는 혜택을 누리는 학생이었고, 아버지와 함께 이웃 도시로 여행을 하는 일과 나사렛 남쪽에 있는 삼촌의 농장에 머무는 일 그리고 막달라 지역으로부터 낚시 여행을 나가는 일에 자신의 여가 시간을 똑같이 할애하기를 계속하였다.
124:1.3
(1366-4)
형상들과 초상화들 그리고 그림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우상이라는 카잔(선생)의 가르침에 대하여 예수가 감히 도전하려고 하였던 이 해 겨울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학교에서 발생하였다. 예수는 경치를 그리는 일 뿐 아니라 질그릇을 만드는 흙으로 매우 다양한 물체들을 만들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그러한 행위들은 모두 유대인의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지만, 이때까지 그는 그의 부모들의 반대를 어느 정도 무마시켜 왔기 때문에 그의 부모들은 그가 이러한 활동들을 계속할 수 있도록 용납하였다.
124:1.4
(1366-5)
그러나 예수가 목탄으로 학교 마루에 선생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철없는 학생들 중 하나가 발견하게 되자, 학교에서 이 문제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그림은 낮에 있었던 그대로 그곳에 있었고, 여러 명의 장로들이 그것을 본 후에, 그 위원회는 요셉을 방문하여 그의 장남이 그러한 불법적인 일을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하였다. 요셉마리아가, 다재다능하고 활동적인 자기 아들의 행동에 대하여 처음 듣는 불평은 아니었지만, 이번의 경우는 그를 향하여 심하게 쏟아 부어졌던 모든 비난들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었다. 예수는 뒷문 바로 밖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앉아서, 자신의 예술 작품에 대한 비난에 한동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나쁜 짓이라고 취급받는 자신의 행위 때문에 자기 아버지가 그들로부터 책망을 받는 것에 대해 분개하였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걸어가서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 대담하게 마주 섰다. 장로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몇몇 사람들은 재미있고 웃어넘기는 에피소드로 넘기려고 하였지만, 한 두 사람은 그 소년을 불경스럽거나 아니면 무엄한 아이라고 생각하는 듯하였다. 요셉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마리아는 화를 냈지만, 예수는 그의 말을 들어달라고 주장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되자, 용기 있게 자기 관점을 옹호하였으며, 이 일뿐만 아니라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다른 모든 일들에 있어서 자기 아버지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더할 나위 없는 자아-통제를 보이면서 발표하였다. 그러자 그 위원회의 장로들은 아무 말 없이 떠났다.
124:1.5
(1367-1)
마리아예수가 학교에서는 이러한 미심쩍은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조건으로 집에서만큼은 흙으로 모형을 만들 수 있도록 허락해 주라고 요셉을 설득해 보고자 애썼지만, 그는 율법의 두 번째 계명에 대한 랍비들의 해석을 따라야만 한다고 고집하였다. 그래서 이날 이후로 예수는 자기 아버지 집에서 사는 동안에는 어떤 물체와 비슷한 모양으로 물건을 만들거나 그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한 일이 그릇되었다는 것에 수긍이 가지 않았으며, 본인의 어린 시절에 큰 고난을 주는 원인 중 하나이기는 하였지만 자신이 즐기는 그러한 놀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도 수긍할 수 없었다.
124:1.6
(1367-2)
6월 하순, 예수는 자기 아버지와 함께 다볼산 정상에 처음으로 올라갔다. 맑은 날씨였으며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이것은 아홉 살 난 그 소년에게, 인도아프리카 그리고 로마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전 세계를 응시한 것과 같았다.
124:1.7
(1367-3)
예수의 둘째 여동생인 마르다는 9월 13일 목요일 밤에 태어났다. 한동안 집에 머물러 있었던 요셉마르다가 태어난 지 3주가 지난 후 자기 집에 덧붙여서 작업장 겸 침실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는 예수를 위하여 작은 작업대를 만들어 주었고, 예수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연장들을 갖게 되었다. 예수는 여러 해 동안 틈나는 대로 이 작업대에서 일을 하였고, 멍에를 만드는데 상당한 숙련자가 되었다.
124:1.8
(1367-4)
같은 해 겨울과 그 다음해 겨울은 나사렛에서 수십 년 만에 가장 추운 날씨였다. 예수는 산 위에 덮인 눈을 보았었고, 나사렛에도 몇 번 눈이 오기도 하였으나 땅위에는 오래 남아있지 않았었는데; 이 해에 그는 처음으로 얼음을 보게 되었다. 물이 고체나 액체, 또는 기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소년으로 하여금 물리적인 세계와 그 구조에 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하였는데, 그는─끓는 주전자에서 증기가 새어 나오는 것을 보고 오랫동안 골똘히 생각했었다─; 성장 과정에 있는 이 소년 안에서 체현하는 개인성은 아직 이것이 전부였지만, 한편 광활한 우주의 모든 사물의 실재적인 창조자이자 조직자였다.
124:1.9
(1367-5)
나사렛의 기후는 혹독하지 않았다. 1월은 가장 추운 달이었고, 평균 기온은 화씨로 50도 정도였다. 7월과 8월은 가장 더운 달로, 평균 기온은 75도에서 90도 정도였다. 팔레스타인에는 산으로부터 요단강과 사해에 이르기까지 한대(寒帶)와 열대(熱帶)기후가 두루 분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전 세계의 다양한 모든 기후 조건에서도 어느 정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124:1.10
(1367-6)
가장 무더운 여름철 동안에도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는 서쪽으로부터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매번 시시때때로 동쪽의 사막으로부터는 뜨거운 바람이 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불어왔다. 이 뜨거운 바람은 대개 우기(雨期)가 끝날 무렵인 2월부터 3월까지 불어왔다. 우기에 해당하는 11월부터 4월 사이에는 시원한 소나기가 내렸고 비가 끊임없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팔레스타인에는 여름과 겨울, 우기와 건기(乾期)의 두 계절만 있었다. 1월에는 꽃들이 피기 시작하였으며, 4월말이 되면 전 지역은 꽃들이 만발한 정원이 되었다.
124:1.11
(1367-7)
같은 해 5월 예수는 그의 삼촌의 농장에서 처음으로 곡식을 거두는 일로 도움을 주었다. 13세가 되기 이전에 그는 쇠를 다루는 일을 제외하고는 나사렛 주변에 있는 남자와 여자들이 종사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실천적인 모든 것들을 어느 정도 터득하게 되었으며, 자기 아버지가 죽은 후에는 몇 달 동안 대장간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124:1.12
(1368-1)
작업이 없거나 카라반들의 행렬이 드물 때에는, 예수는 자기 아버지를 따라 가까운 곳에 있는 가나, 엔도르, 나인 등으로 여러 차례 취미 여행 또는 출장 여행을 하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사렛으로부터 서북쪽으로 3마일 남짓 떨어져 있는, 세포리에 자주 갔으며, 그곳은 기원 전 4년부터 서기 25년까지 갈릴리의 수도이자 헤롯 안티파스의 거처였다.
124:1.13
(1368-2)
예수는 육체적, 지적, 사회적, 영적으로 계속 성장하였다. 그가 집을 떠나 여행함으로써 자기 가족을 더욱 잘 납득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때부터는 그의 부모마저도 그를 가르치는 것만큼, 그로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예수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시원(始原)적인 깊은 사색가(思索家)였으며, 능숙한 선생이었다. 그는 소위 “구전(口傳)되는 율법”이라는 모든 것을 항상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그는 언제나 가족의 실천 관행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자기 나이 또래의 아이들과도 잘 지냈으나 그들의 느린 정신적 반응 때문에 자주 실망하곤 하였다. 그가 10살이 되기 전에, 그는 7명의 소년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이들은 보다 많은 것을 습득한 훌륭한 어른─육체적, 지적, 그리고 종교적으로─이 되기 위하여 스스로 모인 모임이었다. 이러한 소년들에게 예수는 많은 새로운 놀이들과 개선된 다양한 육체적 오락 방법들을 잘 소개하였다.
2. 10살 되던 해(서기 4년)
124:2.1
(1368-3)
7월의 첫 번째 안식일이었던 7월 5일, 아버지와 함께 시골길을 산책하던 예수는, 자기 일생의 사명의 비상한 본성에 대하여 자아-의식적이 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감정과 관념을 처음으로 표현하였다. 요셉은 자기 아들의 중대한 말들을 주의 깊게 들었을 뿐 그것에 대해 거의 대꾸하지 않았다; 참고가 될 만한 말을 자진해서 해주지는 않았다. 그 다음 날 예수는 자기 어머니와 비슷한 이야기를 좀 더 오랫동안 하였다. 마리아도 그 소년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으나 그녀 역시 참고가 될 만한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예수가 자기 개인성의 본질과 이 세상에서의 자기 사명의 성격에 관하여 자신의 인식 속에서 점점 더 증가되는 이 계시를 그의 부모에게 다시 언급한 것은 거의 2년이 지난 후였다.
124:2.2
(1368-4)
그는 8월에 회당에 소속된 상급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는 학교에서 질문을 그치지 않음으로써 계속적으로 문제를 야기했다. 그는 점점 더 나사렛 온 동네에 다소간의 소동을 일으켰다. 그의 부모는 걱정스럽게 하는 그의 질문들을 그치게 하는데 지쳤으며, 그의 담임선생은 그 소년의 호기심과 통찰력, 그리고 지식에 대한 열망에 대하여 크게 흥미를 갖게 되었다.
124:2.3
(1368-5)
예수의 놀이 친구들은 그의 행위에서 초자연적인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친구들과 같았다. 학업에 대한 그의 관심은 평균이상이었으나 아주 특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질문을 하였다.
124:2.4
(1368-6)
그에게 가장 특이하고 눈에 띄는 특색이 있었다면, 아마 그것은 그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는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나이에 비해 몸집이 좋은 아이였기 때문에, 그가 불공정을 당하였거나 개인적 모독을 당하는 경우일지라도 자신을 방어하려 하지 않는 것은 그의 놀이 친구들에게 이상하게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벌어질 때, 그는 자기보다 한 살 더 많은 이웃 친구 야곱 덕분에, 이 특색으로 인한 곤란을 크게 겪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석공(石工)이었는데, 요셉의 사업상 연관-동료였다. 야곱예수를 무척 탄복하였으며, 예수가 육체적으로 싸우는 것을 싫어하는 것을 이용하여 그를 괴롭히려는 아이들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을 자기 일로 여겼다. 나이가 많은 거친 아이들이 예수가 온순하다는 평판을 믿고, 여러 차례 그를 공격하였지만, 그의 자아-임명한 투사이며 언제든지 방어할 준비가 되어있는 석공의 아들 야곱의 재빠르고 정확한 반격에 그들이 오히려 항상 당하곤 하였다.
124:2.5
(1369-1)
예수는 그들의 시절과 세대의 더욱 높은 이상들을 대표하는 나사렛 아이들의 우두머리로서 널리 인정받았다. 그는 공정할 뿐 아니라 또한 사랑으로 보이면서도 분별 있는 열정에 가까운 드물지만 납득하는 동정심을 갖고 있었기에, 그는 그의 유년기 연관 동료들로부터 실제로 사랑을 받았다.
124:2.6
(1369-2)
이 해부터 그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연상(年上)의 사람들과 문화, 교육, 사회, 경제, 정치, 그리고 종교적인 문제에 대하여 대화 나누기를 좋아하였으며, 그의 깊은 추리력과 예리한 관찰력 때문에 어른들이 매료되어 언제든지 그를 만나고 싶어 하였다. 그가 가정을 부양할 책임을 갖게 되기까지, 그의 부모는 그가 선호하는 것처럼 자기보다 나이가 많고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보다는, 같은 나이이거나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과 어울리게 하려고 꾸준히 노력하였다.
124:2.7
(1369-3)
같은 해 말경에, 그는 자기 삼촌과 함께 갈릴리 바다에서 두 달 동안 고기를 잡는 체험을 하였으며, 아주 훌륭하게 해냈다. 그는 어른이 되기도 전에 이미 능숙한 어부가 되어 있었다.
124:2.8
(1369-4)
그의 육체적인 성장은 계속되었고; 그는 학교에서는 남들보다 앞서 있고 특권을 누리는 학생이었다; 그는 바로 밑에 있는 동생보다 3살 반이나 많은 이점에도 불구하고 어린 동생들과 집에서 아주 잘 어울려 지냈다. 그는 몇몇 우둔한 아이들의 부모들로부터 건방지다고, 아이답지 않고 겸손한 구석이 없다는 말을 듣는 것을 제외하고는 나사렛에서 좋은 평을 듣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또래 모임과 놀이를 할 때, 많이 생각하고 진지하게 하는 방향으로 유도해 보려는 경향(傾向)을 점점 더 많이 현시했다. 그는 태생적으로 선생이었으며, 놀이를 할 때에도 단순하게 그러한 태도를 억제하지 못함을 보였다.
124:2.9
(1369-5)
요셉은 산업이나 교역에 비해서 농업이 유리하다는 점을 일찍부터 예수에게 설명하면서, 살아가는 다양한 방법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갈릴리유대 지방보다 더 아름답고 번영하였으며, 생활비는 예루살렘이나 유대 지방의 4분의 1정도면 충분하였다. 그곳은 농업에 종사하는 마을들과 날로 번창하는 산업 도시들이 있는 지역이었으며, 5,000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성읍이 200개가 넘었고, 15,000명이 넘는 성읍도 30개 이상 있었다.
124:2.10
(1369-6)
그가 아버지와 함께 처음으로 갈릴리 바다의 어업 현장을 관찰하러 왔을 때, 예수는 어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으려 하였었지만; 자기 아버지의 직업에 가까이 있었던 영향으로 목수가 되었고, 후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영향력이 작용하여 새로운 계층을 가르치는 종교적인 선생이 되는 최종적인 선택을 하도록 인도되었다.
3. 11살 되던 해(서기 5년)
124:3.1
(1369-7)
이 해에 그 소년은 자기 아버지와 집을 떠나 여러 차례 여행을 하였지만, 그의 삼촌의 농장도 자주 방문하였고, 때로는 막달라로 가서 그 도시 근처에 본거지를 만들어 둔 삼촌과 함께 고기를 잡았다.
124:3.2
(1369-8)
요셉마리아는 가끔씩 예수를 특별히 편애(偏愛)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가 언약의 아이, 운명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누설하고 싶은 유혹에 자주 빠졌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둘 모두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매우 현명하고 영리하게 처신하였다. 아주 미약한 정도이기는 하였지만,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를 편애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적이 몇 번 있었을 때마다, 그 소년은 이러한 특별한 배려를 즉각 거절하였다.
124:3.3
(1370-1)
예수는 카라반들을 상대하는 상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전세계에서 온 많은 여행자들과 대화를 함으로써, 그의 나이를 고려할 때 매우 기이하게 보이는 국제적 관련사들에 대하여 많은 정보들을 얻었다. 이 해는 그가 무척 자유롭게 놀면서 아이로서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던 마지막 해였다. 이때로부터 이 소년의 일생에는 많은 어려움과 책임이 급속도로 배가(倍加)되었던 것이다.
124:3.4
(1370-2)
서기 5년 6월 24일, 수요일 저녁, 유다가 태어났다. 이 일곱 번째 아이의 탄생과 함께 여러 가지 일들이 함께 생겼다. 마리아요셉이 집에 머물러 있었던 몇 주 동안 매우 심한 병을 앓았다. 예수는 자기 아버지가 시키는 심부름과 어머니의 심각한 병으로 인하여 많은 일들로 매우 바쁘게 지냈다. 이 소년은 더 이상 어린 시절의 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맏아들에게 일반적으로 이러한 임무가 맡겨지는 시기가 되려면 아직도 1년 내지 2년 더 있어야 했지만, 그의 어머니가 아프기 시작할 때부터─그가 열 한 살이 되기 직전─,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일들을 도맡아 해야 하게 되었다.
124:3.5
(1370-3)
매주 하루 저녁은 카잔이 예수와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그가 히브리 경전에 숙달되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자기 학생의 향상되는 실력에 매우 흥미를 가졌으며; 그러므로 여러 가지로 그를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 이 유대인 선생은 자라나는 이 심성에 큰 영향을 주었으나, 예루살렘으로 가서 박식한 랍비들 밑에서 학업을 계속하라는 자신의 모든 권고에 대해 예수가 왜 무관심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124:3.6
(1370-4)
5월 중순경, 예수는 자기 아버지와 함께 데카폴리스 지방의 주요 그리스 도시이며, 베스쉬안 지역의 고대 히브리 도시인 스키토폴리스로 사업차 여행을 하였다. 이 여행 중에 요셉예수에게 사울 왕과 필리스틴 사람, 그리고 이스라엘의 계속적인 사건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예수는 소위 이방인 도시라고 불리는 이 도시들의 깨끗한 모습과 잘 정돈된 배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노천극장을 보고 매우 놀랐으며, “이방” 하느님들에게 바쳐진 아름다운 대리석 신전들을 보고 감탄하였다. 요셉은 이 아이가 이것들을 이토록 좋아하는 것에 대해 당황하였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전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칭찬함으로써 예수의 이러한 감정을 바꾸어 보려고 하였다. 예수는 이미 나사렛의 언덕에서 이 그리스 도시들을 신기한 듯이 바라본 적이 종종 있었고 대규모의 공공 사업들과 화려한 건물들에 대하여 여러 차례 질문을 하였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항상 대답을 회피하려고 했었다. 그들은 이제 그 이방인 도시의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고, 요셉예수의 질문을 더 이상 무시할 수가 없었다.
124:3.7
(1370-5)
바로 이 때, 데카폴리스 지방에 있는 그리스 도시들이 대중들 앞에서 서로 육체적인 용맹을 실증하고 연례적으로 경쟁하는 시합이 스키토폴리스의 원형극장에서 진행되고 있었으며, 예수는 자기 아버지에게 그 시합을 보여 달라고 졸랐고, 그가 너무 끈질기게 우겼기 때문에 요셉은 그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 소년은 그 시합에 몹시 감동되었고, 육체적인 발달과 경기 기술들을 시범으로 실증하는 영에 열광적으로 매료되었다. 요셉은 자기 아들이, “이방”의 허영심으로 들떠 있는 이러한 시범경기들을 열광적으로 관람하는 것을 보고 매우 충격을 받았다. 모든 시합들이 완결된 후에, 예수가 그것들을 용납할 뿐만 아니라 나사렛에서도 사정이 허락한다면 젊은 사람들이 이러한 건전한 야외 육체 운동을 하면 좋겠다는 그의 말을 듣고 요셉은 기절할 정도로 놀랬다. 요셉은 이러한 실천 관행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에 대해 예수와 오랫동안 진지하게 이야기하였으나, 그는 그 소년이 설득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24:3.8
(1371-1)
예수는 아버지가 자기에게 화내는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게 되었는데, 그 날 밤 여관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아직까지도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잊고 있었던 그 소년이, 집으로 돌아가면 나사렛에 원형극장을 짓자고 제의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요셉은 맏아들이 이렇게 비유대적인 정서에 젖어서 하는 이야기를 듣고, 평소의 온순한 성품을 잊은 채 예수의 어깨를 잡고 화난 음성으로, “아들아, 네가 살아있는 동안 다시는 그러한 악한 말을 내 앞에서 하지 마라.”라고 소리쳤다. 예수는 자기 아버지가 흥분된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매우 놀랐으며; 그 전에는 자기 아버지의 분개로 인하여 개인적 고통을 느껴본 적이 없었으므로 말문이 막힐 정도로 몹시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단지 “아버지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후로 요셉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소년은 시합이나 다른 운동 경기에 대해 조금이라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124:3.9
(1371-2)
그 이후, 예수예루살렘에서 그리스 식으로 지은 원형극장을 보았고, 이러한 것들이 유대인의 관점에서 왜 그토록 혐오스러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일생 동안에 건전한 오락에 대한 관념을 자신의 개인적 계획들 속에 도입해 보려고 시도하였으며, 유대 실천 관행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그의 12명의 사도들을 위한 후일의 정규 활동 계획에 이것을 포함시키려고 시도하였다.
124:3.10
(1371-3)
11살이던 이 해가 끝날 무렵까지는, 예수가 생기 있고, 잘 성장하고, 적당히 유머가 있고, 그리고 상당히 밝은 심성을 가진 소년이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깊은 묵상과 진지한 깊은 사색에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는 자기 가족을 부양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향한 자신의 소명에 충실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명이 유대 민족을 향상시키는 것에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
4. 12살 되던 해(서기 6년)
124:4.1
(1371-4)
이 해는 예수의 일생에서 사건 많은 한 해였다. 그는 학교에서 계속하여 진보를 이루었고, 자연에 대한 공부는 지칠 줄 몰랐으며, 동시에 그는 사람들이 삶을 만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공부도 점점 더 추진하였다. 그는 자기 집에 있는 목공소에서 정기적으로 일하기 시작하였으며, 자기 수입을 직접 관리할 수 있게 되었는데, 유대인의 가정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같은 해에 예수는 그러한 문제들에 관하여 가정 안에서 비밀을 지키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전에 마을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던 그 원인에 대하여 인식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는 자기 동료들과 다르게 보일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숨기면서 점점 더 사려 깊은 사람이 되어갔다.
124:4.2
(1371-5)
그 한 해 동안, 그는 자신의 사명의 본질에 대하여 실재적으로 의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의 불확실성을 체험하게 되었다. 자연적으로 성장한 그의 인간 마음으로는 자신의 이원적(二元的)인 본성의 실체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단일 개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의식으로 하여금 바로 그 개인성과 연관된 그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이중적 기원을 갖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124:4.3
(1371-6)
이때부터 그는 자기 형제자매들과 더욱 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점점 더 재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들의 번영과 행복에 대하여 항상 연민을 갖고 특별히 배려하였으며, 자신이 대중을 위한 사명활동을 시작하기 바로 전까지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좀 더 설명하자면: 그는 야고보, 미리암, 그리고 더 어린(아직 태어나지 않은) 두 동생인 아모스과 더없이 친하게 지냈다. 그는 언제나 마르다와 잘 지냈다. 그가 집에서 가졌던 문제는 주로 요셉유다의 충돌에서 야기되었는데 특히 유다 때문이었다.
124:4.4
(1372-1)
요셉마리아에게 있어서, 인간성과 신성을 복합적으로 갖춘, 전례가 없는 이런 아이를 양육하는 임무는, 하나의 괴로운 체험이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어버이로서의 자신들의 임무를 매우 성실하고 성공적으로 이행했다는 것을 크게 신임받아 마땅하다. 예수의 부모들은 자기들의 맏아들 속에 초인간적인 어떤 존재가 들어있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닫게 되었지만, 그들은 이 약속의 아이가 정말로 그리고 참으로 이 지역우주의 사물과 존재들을 창조한 실재적인 창조자라는 사실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였다. 요셉마리아는 자기들의 아들 예수가 정말로 필사자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내려온 우주 창조자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죽었다.
124:4.5
(1372-2)
같은 해에, 예수는 음악에 전보다 더 많은 관심을 보였고, 집안에서는 그의 남동생과 여동생들을 계속해서 가르쳤다. 예수의 사명에 대한 본질에 관하여 요셉마리아의 관점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그가 예민하게 알게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는 부모들의 서로 다른 의견에 대하여 매우 숙고하였고, 자기가 깊이 잠든 줄로 생각하면서 이야기하는 부모들의 대화를 종종 들어보기도 하였다. 그는 점점 더 아버지의 관점을 따르게 되었고, 따라서 그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일생을 통해 체험해야 할 문제들에 있어서 자신의 지시를 점점 더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현됨으로써 상처를 입을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해가 거듭될수록, 그들의 생각의 차이는 더 넓어졌다. 마리아예수의 사명의 의의(意義)에 대해 점점 더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훌륭한 이 어머니는 자기가 총애하는 아들이 자신의 맹신적인 기대들을 만족시켜주지 않는 것을 보면서 점점 더 상처를 입게 되었다.
124:4.6
(1372-3)
요셉예수의 사명의 영적 본질에 대해 점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다른 이유로 인하여, 불운하게도 그는 예수가 이 세상에 증여된 것에 대한 자신의 개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까지 살아있지 못하였다.
124:4.7
(1372-4)
학교에 다니던 마지막 해에, 그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예수는 문설주에 못으로 박아 놓은 양피지 문서에 집안을 드나들 때마다 손끝을 대고 다시 그 손가락에 입을 맞추는 유대인의 관습에 대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항의하였다. 이러한 의식의 일부분으로서 사람들은, “주님께서 우리가 드나드는 것을 이제로부터 그 언제까지라도 보호해 주시리라.”라고 말하는 것이 관례였다. 요셉마리아는 전에 예수에게 아무것도 그리거나 만들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수차례에 걸쳐 가르치면서, 그러한 작품들은 나중에 우상을 숭배하는 목적에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었다. 예수는 그들이 형상이나 그림을 만드는 것을 왜 금지시키는지 충분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모순되지 않는 하나의 높은 개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기 아버지에게 문설주의 양피지 문서에게 습관적으로 경의를 표하는 행위에도 근본적으로 우상숭배의 요소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요셉예수의 이러한 항의를 받은 후에 문설주에서 그 양피지 문서를 제거하였다.
124:4.8
(1372-5)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수는 가족 공동 기도와 다른 여러 관례들과 같은 종교적인 형식들에 대한 실천 관행들을 많이 변화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많은 일들은 그곳이 나사렛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는데, 왜냐하면 그곳에 있는 회당이 나사렛의 유명한 선생 호세와 같은 자유주의적 학풍을 따르는 랍비들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124:4.9
(1372-6)
이 해와 그 후 2년 동안 예수는 종교적인 실천 관행이나 사회적인 풍습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자기 부모의 이미 확립된 신앙과 조화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로 심한 정신적인 고통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고자하는 충동과 부모에게 의무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양심으로부터의 경고가 대립됨으로 인하여 혼란되어 있었다; 그의 최극의 갈등은 그의 어린 마음속에 최우선으로 있던 위대한 두 개의 명령사이에 있었다. 하나는 “진실과 정의(義)에 대한 너의 최고 신념의 명령에 충성하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에게 생명을 주었고 그 후로는 길러주었으니, 그들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는 자신의 인간의 신념에게 충실해야 하는 것과 가족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불가피하게 매 순간마다 조절해야 하는 의무를 기피한 적이 결코 없었으며, 충성심과 공정성 그리고 인내심과 사랑에 바탕을 둔 집단적 일체감의 뛰어난 개념 속으로 개인적 신념과 가족에 대한 의무감을 더욱 조화롭게 융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만족스러운 성취를 이루었다.
5. 13살 되던 해(서기 7년)
124:5.1
(1373-1)
이 해부터 나사렛의 그 소년은 소년기를 벗어나 청년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의 음성이 변하기 시작하였고, 몸과 마음의 다른 특징들도 곧 어른의 지위에 도달하려는 증거들을 나타나고 있었다.
124:5.2
(1373-2)
서기 7년 1월 9일 일요일 밤, 그의 남동생 아모스가 태어났다. 유다는 아직 2살이 안되었다, 여동생 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가 사고로 그 다음 해에 갑자기 죽게 되었을 때, 예수는 돌보아야 할 어린아이로 이루어진 꽤 큰 가족을 가져야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4:5.3
(1373-3)
2월 중순경에, 예수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람의 깨우침을 위하여 그리고 하느님의 계시를 위하여 사명을 수행하도록 운명되었다는 것을 인간으로서 확신하게 되었다. 장기적인 계획들과 함께 중대한 결정들이, 겉으로 볼 때 나사렛에 사는 보통의 유대인 소년으로 보이는 이 젊은이의 마음속에 형성되고 있었다. 이제 청년기를 맞이한 이 목수의 아들의 생각과 행동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네바돈 전체의 모든 지능 생명체들은 넋을 잃고 경탄하면서 지켜보았다.
124:5.4
(1373-4)
서기 7년 3월 20일 그 주일의 첫날, 예수나사렛의 회당과 관계되어 있는 그 지역의 학교에서의 훈련 과정으로부터 졸업하였다. 야심을 가진 모든 유대인 가정의 일생에 있어서 이 날은 가슴 벅찬 날이었으며, 그 날은 바로 맏아들이 “계명의 아들”로 그리고 이스라엘주님 하느님의 대속함을 받은 첫 아들, “지고자의 아이”로 그리고 모든 지상의 주님의 하인으로 선포되는 날이었다.
124:5.5
(1373-5)
지난 주 금요일에, 요셉은 이 기쁜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새로운 공공건물을 짓고 있던 세포리로부터 돌아왔다. 예수를 가르친 선생은 주의 깊고 부지런한 자기 제자가 어떤 눈에 띌만한 출세, 어떤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었다. 예수의 순응하지 않는 경향 때문에 발생하였던 모든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장로들은 이 소년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서 유명한 히브리 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게 할 계획을 이미 세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124:5.6
(1373-6)
이러한 계획이 토론되는 것을 때때로 들으면서, 예수예루살렘으로 가서 랍비들과 공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을 점점 더 확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만간 발생하게 될 비극적인 사건을 꿈도 꾸지 못하였으며, 그것은 당장에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5명의 남동생들과 3명의 여동생들로 구성된 대가족을 부양하고 이끌어 가는 책임을 자기가 맡아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계획은 포기되었을 것이 확실했다. 이 사건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데 있어서, 예수는 자기 아버지인 요셉에게 부과되었던 것보다 더 힘들고 긴 체험을 하였으며, 그는 자신이 나중에 스스로 부과한 기준 즉: 갑자기 슬픔이 몰아닥치고 예기치 않았던 죽음을 당하게 된 이 가족─자기 가족─에게 현명하고 참을성 있으며 납득함이 있고 효력적인 선생인 동시에 맏아들이 되기에 적합하였다.
6. 예루살렘으로의 여행
124:6.1
(1374-1)
이제 막 청년기의 문턱에 이르렀고 회당 학교를 공식적으로 졸업한 예수는, 자기 부모와 함께 자신의 첫 번째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도록 분별화되었다. 이 해의 유월절 축제는 서기 7년 4월 9일, 토요일에 있었다. 여행에 동행할 많은 사람들(103)이 4월 4일 월요일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사렛을 떠날 준비를 완료하였다. 그들은 사마리아를 향하여 남쪽으로 여행하였지만, 예즈릴에 당도하였을 때 그들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동쪽으로 길을 바꾸어 길보아산을 돌아 요단 계곡으로 내려갔다. 요셉과 그의 가족들은 야곱의 우물과 베델을 지나 사마리아를 통과하고 싶었지만,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웃들과 함께 요단 계곡으로 지나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124:6.2
(1374-2)
무척 두려웠던 아캘라우스가 이미 왕에서 물러났고, 그들은 예수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헤롯 1세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던 때로부터 12년이 지났으며, 그 당시의 일과 눈에 띄지 않는 이 나사렛의 아이를 연결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24:6.3
(1374-3)
예즈릴 교차로에 도달하기 전, 그들은 여행을 계속한 후 곧 왼편에 있는 고대의 마을 슈넴을 지나가게 되었으며, 예수는 이곳에 살았던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처녀의 이야기와, 엘리사가 이곳에서 행하였던 놀라운 이적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되었다. 예즈릴을 지나면서 예수의 부모는 아합이세벨, 그리고 착취자 예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길보아산을 지나갈 때에는 그들은 이 산의 언덕에서 죽은 사울 왕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고, 다윗 왕과 기타 이 역사적 장소와 관계적-연합된 이야기들을 하였다.
124:6.4
(1374-4)
길보아산 밑을 돌아가면서 그 순례자들은 오른쪽에 있는 스키토폴리스라는 그리스 도시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멀리서 이 이방인 도시의 대리석 건축물들을 바라보았고 가까이 가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방인들에게 가까이 가서 그 자신들을 더럽히면,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있을 유월절 축제의 엄숙하고 거룩한 예식에 참여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마리아요셉예수 둘 모두 스키토폴리스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는 것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지난해에 그들 사이에서 있었던 언쟁에 대해 그들이 전혀 이 에피소드를 내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124:6.5
(1374-5)
길은 이제 곧장 열대성 기후의 요단 계곡으로 향하였으며 예수는 사해로 흘러 내려가면서 반짝거리고 잔잔한 시냇물과 함께, 굽어져 있고 항상 바람이 부는 요단 지역을 곧 감탄하면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열대 기후의 이 계곡을 따라 남쪽으로 여행할 때에는 겉옷을 벗었고, 북쪽으로 멀리 서있는 눈 덮인 장엄한 모습의 헤르몬 산이 역사적인 이 계곡을 위엄 있게 내려다보고 있는 가운데, 만발한 분홍색 꽃을 달고 있는 협죽도(夾竹桃) 나무들과 곡식이 맺힌 아름다운 들판을 보면서 즐거워하였다. 스키토폴리스 반대편으로부터 세 시간 남짓 여행을 한 후, 그들은 넘쳐흐르는 한 샘에 도착하였고, 별이 빛나는 하늘을 지붕 삼아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124:6.6
(1374-6)
여행을 시작한지 둘째 날, 그들은 얍복강이 동쪽으로부터 요단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역을 지나갔고, 강이 있는 이 계곡의 동쪽을 바라보면서 미디안-사람들이 이 지역을 침략하여 그 땅을 차지하려고 하였던 기드온 시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다. 둘째 날의 여정이 끝나갈 무렵, 그들은 요단강이 보이는 가장 높은 사르타바산 아래 부근에서 하루를 묵었으며, 이 산의 정상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요새가 자리 잡고 있었고 헤롯이 그의 아내들 중에서 한 사람을 가두었던 곳이고 그가 목 졸라 죽인 두 아들이 매장된 곳이었다.
124:6.7
(1375-1)
셋째 날, 그들은 헤롯이 최근에 건설한 두 개의 마을을 지나갔으며, 그곳들의 우월한 고안건축물들과 그곳들의 아름다운 야자수 정원들을 볼 수 있었다. 밤이 될 무렵에 그들은 여리고에 도착하였고, 다음 날까지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 날 저녁, 요셉마리아 그리고 예수는 1마일 반을 걸어가서 고대의 여리고 지역에 도착하였으며, 그곳은 유대의 전통에 따라 예수라는 이름을 따온 여호수아가 유명한 업적을 이룩한 장소였다.
124:6.8
(1375-2)
여행을 떠난 지 넷째 날과 마지막 날에는 이어지는 순례자들의 행렬로 길이 가득 채워졌다. 그들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는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꼭대기에 다가가면서 그들은 산들이 있는 너머로 요단 지역을 볼 수 있었고 남쪽으로는 잔잔한 사해의 물을 볼 수 있었다. 예루살렘에 반쯤 왔을 때, 예수올리브 산(그의 후반부 일생의 많은 부분을 보내게 될 지역)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으며, 요셉은 그에게 바로 그 산마루 너머에 거룩한 성(城)이 있다고 알려 주었고, 하늘에 계신 자기 아버지의 성과 집을 곧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쁜 기대감 때문에 그 소년의 가슴은 더욱 빨리 뛰고 있었다.
124:6.9
(1375-3)
올리브 산의 동쪽 비탈에 있는 베다니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 입구에서 그들은 휴식을 취하였다. 호의적인 마을 사람들이 순례자들에게 사명활동하기 위하여 몰려 나왔으며, 여기에서 요셉마리아 그리고 예수는 가까운 곳에 있는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 집에는 예수와 비슷한 또래의 세 아이─마리아, 마르다, 나사로─가 있었다. 그들은 나사렛의 가족을 쉬어갈 수 있도록 초대하였고, 여기에서 이 두 가족 간에는 일생동안 계속되는 우정이 싹트게 되었다. 그 후, 예수는 자신의 사건 많은 일생 동안에, 이 집에 여러 차례 머물렀다.
124:6.10
(1375-4)
그들은 길을 재촉하여 잠시 후 올리브 산의 경계선에 도착하였고, 예수는 (그의 기억으로는) 처음으로 거룩한 성과 거만하게 서 있는 저택들,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웅장한 성전을 보았다. 예수는 그의 일생 동안에, 4월이었던 이 날 오후에 올리브 산 위에 서서 예루살렘을 처음 바라보게 되었을 때, 그토록 완벽하게 그를 매혹시킨, 그러한 순전히 인간의 감격을 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 후에 예수는 같은 지점에 서서, 또 하나의 예언자, 하늘에서 보낸 선생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최종적인 그 선생을 거부하려는 이 도시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124:6.11
(1375-5)
그러나 그들은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갔다. 이제 목요일 오후가 되었다. 도시에 도착하자, 그들은 성전을 지나갔으며, 예수는 이처럼 많은 군중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어떻게 이러한 유대인들이 이름 있는 세계 도처에서 이곳으로 몰려드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124:6.12
(1375-6)
이윽고 그들은 유월절 주간에 머물기로 이미 약정된 곳에 도착하였으며, 이 큰 집은 마리아의 부유한 친족집이었고, 사가리아를 통하여 요한예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에 대해 조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다음 날은 예비일이였는데, 그들은 유월절 안식일을 기념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124:6.13
(1375-7)
모든 예루살렘이 유월절 준비로 떠들썩하는 동안, 요셉은 틈을 내어 예수를 데리고, 2년 후에 예수가 요구되는 나이인 15세가 되면, 그의 교육을 다시 시작하도록 그를 위해 이미 주선이 되어 있었던 학원을 방문하였다. 요셉은, 주의 깊게 마련된 이들 모든 계획에 대하여, 예수가 전혀 흥미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을 관찰하면서 참으로 어리둥절했다.
124:6.14
(1375-8)
예수는 성전과 모든 연관된 봉사들 그리고 다른 활동들로 인하여 심오하게 감명을 받았다. 4살이 된 이후로는 처음으로, 그는 자신만의 명상에 너무나 몰두되어서, 많은 질문을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왜 하늘 아버지가 그처럼 많은 죄 없고 어떤 도움도 없는 동물들을 도살하도록 요구했는지에 대하여, (전에도 여러 차례 했던 것처럼) 난처하게 만드는 몇 가지 질문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대답과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깊이-생각하면서 그리고 예리하게-추론하는 자기 아들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는 것을, 소년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으로 잘 알았다.
124:6.15
(1376-1)
유월절 안식일 전 날에, 영적 광채의 홍수와 같은 물결이 예수의 필사자 마음을 휩쓸고 지나갔고, 그리고 그의 인간 가슴을 옛적부터 내려온 유월절 기념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모여있는, 영적으로 눈먼 자들과 도덕적으로 무지한 대중들에 대한, 애정 깊은 동정심으로 넘쳐 흐르도록 채웠다. 이 날은 하느님의 아들이 육체를 입고 보낸 가장 비상한 날들 중의 하나였다; 그 날 밤, 그의 땅에서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임마누엘에 의해서 임명 받고, 구원자별에서 배정 받은 메신저가 그에게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때가 왔습니다. 이제 비로소 당신이 당신 아버지의 일을 시작할 시간입니다.”
124:6.16
(1376-2)
그리하여, 심지어 나사렛의 가족을 돌보는 무거운 책임이 그의 나이 어린 어깨에 내려지기도 전에, 아직 정확하게 열세 살이 채 안 된 이 소년에게, 우주의 책임을 재개하는 것을 시작할 때가 왔다고 상기시키려고, 천상의 메신저가 도착한 것이다. 이것은, 아들의 증여를 유란시아 위에서 완성함으로써 그리고 “인간적이고-신성한 그의 어깨 위에 우주의 정부”를 되돌리는, 여러 사건으로 이루어진 긴 하나의 연속물에서의 첫 번째 활동이었다.
124:6.17
(1376-3)
시간이 지나면서 육신화의 신비는 우리 모두에게 점점 더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이 나사렛의 소년이 네바돈창조자였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아가 우리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어떻게 하여 바로 이 창조자 아들의 영과 그의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영이 인류의 혼들과 연관되고 있는지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의 인간 마음은, 한편으로는 그가 그의 육신으로 일생을 살게 되었지만, 영으로는 그의 어깨 위에 한 우주의 책임이 놓여 있다는 것을 점점 더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었다.
124:6.18
(1376-4)
이렇게 하여 나사렛 소년에서의 생애는 끝나고, 그리고 청년기에 들어간 그 젊은이─점점 더 자아-의식적 신성한 인간─의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이제 그는 그의 부모의 욕망, 그리고 그의 가족에 대한 그리고 그의 날과 시대에서의 사회에 대한 의무를, 확대되고 있는 그의 일생의 목적과 집대성하려고 애쓰면서, 자신의 세상 생애에 대한 깊은 사색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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