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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2 편
종교적 신앙의 기초
102:0.1
(1118-2)
믿지 않고 있는 물질주의자에게는 사람은 단지 하나의 진화적인 우연한 현상에 불과하다. 그의 생존의 희망은 필사자 상상이 만든 허구에 매달려 있다; 그의 두려움과 사랑과 열망과 믿음은 기껏해야 물질에서의 생명 없는 특정한 핵들의 우발적인 병렬 배치의 반응일 뿐이다. 그 어떤 에너지의 전시나 신뢰의 표현도 무덤을 넘어서 그를 데려갈 수 없다. 사람들 중에서 최상자가 보여주는 헌신적인 수고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재능들은 죽음 곧, 영원한 잊혀짐과 혼 소멸의 길고도 외로운 밤에 의하여 사라지도록 숙명 되어있다. 이름도 없는 절망이 필사자 실존에서의 현세적 태양 아래에서 영위하는 삶과 고역에 대한 사람의 유일한 보상이 될 것이다. 일생의 매일 매일이 무자비한 숙명의 손아귀, 냉담하고 혹독한 물질의 우주가 선포해 온 인간의 아름답고 고귀하며 고상하고 선한 욕망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더할 나위없는 모욕이 될 것이라는. 그 숙명의 손아귀를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조이고 있다.
102:0.2
(1118-2)
그러나 그러한 것이 사람의 끝이나 그리고 영원한 운명이 아니다; 그러한 광경은 영적 흑암 속에서 길을 잃게 된, 그리고 물질적 철학의 기계론적 궤변의 얼굴과 모습으로 용감하게 투쟁하는, 복잡한 배움에서의 혼돈과 왜곡으로 말미암아 눈이 멀어있는 그러한 일부 헤매고 있는 혼이 외치는 절망의 함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이러한 흑암의 숙명과 모든 이러한 절망의 운명은 이 땅에서 가장 비천하고 배우지 못한 하느님의 자녀들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신앙에서의 단 한번 뻗어주는 용감한 손길로 말미암아 영영토록 일소되는 것이다.
102:0.3
(1118-3)
이러한 구원하는 신앙은, 필사자의 체험 안에서 인간적 가치들이 물질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으로,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신성한 것으로, 시간으로부터 영원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사람의 도덕적 의식이 실현할 때, 인간의 가슴속에서 태어난다.
1. 신앙의 확신
102:1.1
(1118-4)
생각 조절자의 활동은 의무로 여기는 인간의 원시적이고 진화적인 감각이, 더욱 높고 더욱 확실한 신앙, 계시에서의 영원한 실체들에 대한 신앙으로 전환됨을 설명하는 요소가 된다. 최극 달성에 이르는 신앙의 행로들을 깊이 이해하는 수용력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가슴 속에서 완전함을 이루려는 갈망이 있어야만 한다. 어떤 사람이라도 신성한 뜻을 행하기를 선택하기만 한다면, 그는 진리의 길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적인 것들은 사랑받으려면 알려져야만 하지만, 신성한 것들은 알려지려면 사랑받아야만 한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그러나 정직한 의심과 진지한 질문은 죄가 아니다; 그러한 태도들은 완전함 달성을 향한 진보하는 여행에서 단지 늦어짐이 있음을 철자할 따름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가 하늘로 상승하여 이르는 왕국 안으로 사람이 입장하는 것을 확보하지만, 그러나 진보는 전적으로, 충만하게-성장한 사람의 튼튼하고 확신하는 신앙에서의 활기찬 실행에 달려 있다.
102:1.2
(1119-1)
과학에서의 이성은 시간의 관찰 가능한 사실에 바탕을 둔다; 종교에서의 신앙은 영원에서의 영 계획으로부터 주장을 펼친다. 지식과 이성이 우리를 위하여 할 수 없는 것을, 참된 지혜는 종교적 통찰과 영적 변형을 통하여 신앙이 성취하도록 허용하라고 우리를 타이른다.
102:1.3
(1119-2)
반란에 의한 고립 때문에, 유란시아에서 진리의 계시는 부분적이고 과도기적인 우주론들의 진술과 너무나도 자주 뒤섞여 왔다. 진리는 세대에서 세대로 변함없이 남아 있지만, 물리적 세계에 대한 연관된 가르침들은 날마다, 해마다 바뀐다. 어쩌다가 영원한 진리가 물질세계와 연관되는 진부한 관념들과 나란히 짝을 이루어 발견된다고 해서,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너희가 과학에서 점점 많은 것을 알수록, 너희는 점점 더 확신이 줄어들 것이다; 너희가 종교에서 점점 많은 것을 가질수록, 너희는 점점 더 확실해질 것이다.
102:1.4
(1119-3)
과학에서의 확실성은 전적으로 지능으로부터 나아간다; 종교에서의 확신은 총체적 개인성의 바로 그 기초들로부터 솟아 나온다. 과학은 마음의 납득력에 동의를 호소한다; 종교는 몸, 마음, 그리고 영의 충성과 헌신에 동의를 호소하며, 심지어 전체 개인성에게까지 동의를 호소한다.
102:1.5
(1119-4)
하느님은 너무나도 모든 것이 실제적이고 절대적이기 때문에, 증명할 수 있는 어떤 물질적 표징이나 또는 소위 기적이라 불리는 그 어떤 실증도 그의 실체에 대한 증언으로 제공될 수 없다. 우리는그를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그를 알 수 있는 것이며, 그리고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전적으로 그의 무한한 실체에 대한 신성한 현시활동들 속에 우리가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102:1.6
(1119-5)
내주 하는 생각 조절자는, 오직 조절자의 신성한 근원인 하느님과의 교제로만 적절하게 만족될 수 있는 그러한 멀리-미치는 호기심과 더불어, 사람의 혼 속에 완전함을 향한 참되고 그리고 찾아나서는 긂주림을 어김없이 불러일으킨다. 사람의 굶주린 혼은 살아 있는 하느님에 대한 개인적 실현에 미치지 못하는 것에는 그 어떤 것이건 만족되기를 거부한다. 하느님이 높고 완전한 도덕적 개인성보다 얼마나 더한 것인지에 상관없이, 우리의 굶주린 그리고 유한한 개념 안에 있는 그보다 못한 그 어떤 것도 될 수는 없다.
2. 종교와 실체
102:2.1
(1119-6)
관찰력이 예민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과 식별력 있는 혼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동료들의 삶 속에서 종교를 발견할 때 그것을 알게 된다. 종교는 어떤 정의(定義)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그것의 사회적, 지적, 도덕적, 영적 열매들을 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종교가 인간 종족의 자산이라는 사실로부터 자라나며; 그것은 문화의 소산이 아니다. 정말로, 종교에 대한 어떤 사람의 인식은 여전히 인간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무지의 속박, 미신의 포로, 억지 이론의 속임, 그리고 잘못된 철학의 환상에 종속된다.
102:2.2
(1119-7)
참된 종교적 확신의 특유한 특징들 중의 하나는, 그것이 확언하는 바의 절대성과 그것의 태도의 억제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나타내는 영이 너무나도 침착하고 조절되어서 자아-주장 또는 자기본위적인 도취라는 인상을 조금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종교적 체험의 지혜는 그것이 인간적으로 기원되는 동시에 조절자의 유도를 받는다는 면에서 역설적인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다. 종교적인 효력은 개별존재의 개인적 특권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지혜의 영속하는 근원과 사람의 숭고한 동반자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참되고 순수한 종교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은 모든 깨우친 필사자들에게 어쩔 수 없이 명령적인 것이 된다.
102:2.3
(1119-8)
종교적인 체험을 정체성 확인하고 분석하는 일은 어렵지만, 그러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마치 이미 영원한 존재의 현존 안에 있는 것처럼 살면서 나아가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다. 믿는 사람들은 마치 불멸성이 이미 그들의 소유라도 된 듯이 이 현세적 삶에 반응한다. 그러한 필사자들의 삶 속에는, 오직 세상의 지혜만을 빨아들여 온 그들 이웃들의 삶들로부터 그들을 언제까지나 분리시키는 정당한 기원성과 자연발생적 표현이 있다. 종교인들은 일시적인 현재의 시간 속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변천들의 고통스러운 압박과 괴롭게 만드는 성급함으로부터의 효과적인 해방을 영위하는 듯이 보이다; 그들은 생리학과 심리학 그리고 사회학의 법칙들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 개인성의 안정과 성격적 평온을 나타낸다.
102:2.4
(1120-1)
시간은 지식의 달성에서 변할 수 없는 요소이다; 은혜 가운데에 성장하는 중요한 요인들도 있긴 하지만, 종교는 그러한 수여자질들이 종교적 체험의 모든 위상 안에서 명백한 전진에 즉시 쓰여 지도록 만든다. 지식이란 영원한 탐구이다; 너희는 항상 배우고 있지만, 너희는 결코 절대 진리에 대한 충만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지식 자체 속에는 절대적 확실성이 결코 있을 수 없다, 오직 어림잡음의 가능성이 증가될 뿐이다; 그러나 영적 빛을 받은 종교적 혼은 알고 있으며, 바로 지금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심오하고 적극적인 확신성은, 그러한 건전한-마음을 지닌 종교인으로 하여금, 느리게-움직이는 과학의 발전에 그 물질적 끝이 있는 처지에 묶인, 인간 지혜의 진보에서 생기는 상승과 하강 안에서, 흥미를 잃는 그 어떤 것이 일어나도록 인도하지도 않는다.
102:2.5
(1120-2)
심지어는 과학이 발견하는 것들조차도 그것들이 해명되고 상호 관계성을 가지기 전에는, 그 관련 사실들이 마음의 생각 흐름 안에서의 순회를 통하여 실재적으로 의미가 되기 전에는 인간 체험의 의식 안에서 진정으로 실재가 아니다. 필사 사람은 자신의 물리적 환경조차 마음 차원에서, 곧 그것의 정신 심리적 기록부에서의 전망으로부터 바라본다. 그러므로 사람이 우주에 관해 고도로 통합된 해석을 하려고 하고 그런 다음 이러한 자신의 과학적 에너지 합일체를 자신의 종교적 체험에서의 영적 합일체와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애쓰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마음은 합일체이다; 필사자의 의식은 마음 차원에서 존재하며 마음 자질의 눈을 통하여 우주적 실체들을 지각한다. 마음 투시도가 실체의 근원인 첫째근원이며 중심의 실존적 합일을 산출하지 않지만, 최극존재로서 그리고 그 안에서 에너지와 마음과 영의 체험적 합성을 사람에게 묘사할 수 있고 또 가끔 그렇게 한다. 그러나 마음은 만일 그러한 마음이 물질적 사물, 지능적 의미, 그리고 영적 가치들을 확고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실체의 다양성에서의 이 통일을 결코 이룩하지 못한다; 오직 기능적 실체의 삼원일체(三元一體)의 조화 속에서만 합일체가 있으며, 오직 합일체 속에서만 조화우주 불변성과 일관성의 실현에서의 개인성 만족이 있다.
102:2.6
(1120-3)
합일체는 인간 체험 속에서 철학을 통하여 가장 잘 발견된다. 그리고 철학적 생각의 본체가 반드시 물질적인 사실들 위에 항상 기초를 두는 반면, 참된 철학적 원동력의 혼과 에너지는 필사자의 영적 통찰력이다.
102:2.7
(1120-4)
진화적인 사람은 원래 어려운 일을 좋아하지 않도록 태어났다. 증대되는 종교적 체험의 강제적인 충동들과 밀려오는 요구들에 대하여 삶의 체험 속에서 보조를 맞추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영적 성장과 지적 확대, 사실적 확장, 그리고 사회적 봉사 안에서의 끊임없는 활동이다. 매우 활동적인 개인성과 상관이 없는 실제적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나태한 사람들은 진부한 종교적 신조들과 독단들의 거짓된 피난처로 은거하는 휴양을 통하여 일종의 교묘한 자아-기만 형식으로, 참다운 종교적 활동에서의 엄중함으로부터 도망치려고 찾아나서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참된 종교는 살아있다. 종교적 개념들의 지적 결정화(結晶化)는 영적 죽음과 마찬가지다. 너희가 관념이 없는 종교를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종교가 일단 오직 하나의 관념으로 축소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일종의 인간 철학이 되었을 뿐이다.
102:2.8
(1121-1)
다시 말하지만, 삶의 짜증나는 요구들로부터 탈출하는 하나의 큰길로 종교의 정서적인 관념들을 이용하려는 불안정하고 거의 단련 되지 않은 혼들의 다른 유형들이 존재한다.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어떤 필사자들이 진화적인 삶의 끊임없는 압박으로부터 피하려고 시도할 때, 종교는 그들이 그것을 이해하는 것처럼 가장 가까운 피난처, 가장 좋은 탈출 큰길을 제시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사람으로 하여금 용감하게 그리고 심지어는 영웅적으로 삶의 변천에 대처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 종교의 사명이다. 종교는 진화적인 사람이 천부적으로 가진 최극의 자질인데, 그로 하여금 “보이지 아니하시는 그 분을 보는 것처럼 인내하고” 계속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아무튼, 신비주의적 신앙은, 인간적 사회와 교제라는 열린 경기장 안에서 종교적 삶을 사는 보다 더 강건한 활동들을 즐기지 않는 그 인간들이 영위하는 삶으로부터 도피한 어떤 것인 경우가 종종 있다. 참된 종교는 반드시 행한다. 사람이 실재적으로 종교를 가질 때, 또는 오히려 종교가 그 사람을 지배하도록 정말로 허용되었을 때, 행위는 그것의 결과가 될 것이다. 종교는 단순한 사고(思考) 또는 행함이 없는 느낌에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102:2.9
(1121-2)
우리는 종교가 때로 어리석게 그리고 심지어는 종교와는 상관없이 행동한다는 사실을 우리도 알고 있지만, 그것은 적어도 행한다. 종교적인 신념의 탈선은 피로 얼룩진 박해를 가져오지만, 종교는 항상 그리고 무언가를 한다; 그것은 역동적이다!
3. 지식, 지혜, 그리고 통찰력
102:3.1
(1121-3)
지식의 부족이나 교육의 결핍은 보다 높은 종교적 달성을 불가피하게 장애가 되는데 왜냐하면 영적 본성에서의 그러한 허약한 환경은 과학적 지식의 세계와 철학적으로 접하는 주요 통로를 종교로부터 빼앗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종교에서의 지적 요소들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의 과도한 발달은 심하게 장애가 되고 곤란하다. 종교는 반드시 역설적인 필요성 밑에서 계속적으로 수고하여야만 한다: 그것은 곧 생각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도록 만드는 필요성과 한편으로는 그와 동시에 모든 사고의 영적인 봉사가능성을 깎아내리는 필요성이다.
102:3.2
(1121-4)
종교적인 사색은 필연적이기는 하지만 항상 해로우며; 사색은 변함없이 그것의 대상을 왜곡한다. 사색은 물질적이거나 또는 인본주의적인 어떤 것으로 종교를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그리하여 논리적인 생각의 명료성을 직접적으로 방해하는 반면, 간접적으로는 종교가 현세적인 세계, 그것이 영속적으로 대조를 이루어야만 할 바로 그 세상에서의 하나의 기능인 것처럼 나타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항상 역설적인 특성을 갖게 될 것인데, 그 역설은 우주의 물질적 차원과 영적 차원─모론시아 모타, 진리 식별과 합일체 인식을 위한 초이성적 감수성─사이의 체험적 연결이 결핍됨으로 인하여 발생된다.
102:3.3
(1121-5)
물질적인 느낌, 인간 감정은 물질적인 행동, 이기적 행동에 직접적으로 이끈다. 종교적인 통찰력, 영적 동기는 종교적인 행동, 사회적 봉사의 사심-없는 행동 그리고 이타적 박애심에 직접적으로 이끈다.
102:3.4
(1121-6)
종교적 욕망은 신성한 실체를 갈구하며 탐구하는 것이다. 종교적 체험은 하느님을 발견하고 있음에 대한 의식(意識)의 실현이다. 그리고 어떤 인간 존재가 하느님을 발견할 때는, 그 존재의 혼 안에서는 함께 체험되는 것이 있으니, 발견에서 나오는 승리의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격정이 너무나 일어나서, 그는 자신보다 덜 계몽된 자기 동료들을 찾아내어 사랑 넘치는 봉사-접촉을 추구하려고 재촉되는데 , 그것은 그가 하느님을 찾아냈음을 드려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동료들을 새롭게 하고 그리고 고귀하게 하려고 자신의 혼 안에서 영원한 선함이 넘쳐흐르게 허용하는 그러한 체험이다. 실제적인 종교는 증가되는 사회 봉사로 이끈다.
102:3.5
(1122-1)
과학, 지식은 사실 의식으로 이끈다; 종교, 체험은 가치 의식으로 이끈다; 철학, 지혜는 조화-협동 의식으로 이끈다; 계시(모론시아 모타의 대용품)는 참된 실체의 의식으로 이끈다; 반면에 사실과 가치 그리고 참된 실체에 대한 의식의 조화-협동은, 바로 그 개인성의 생존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함께, 개인성 실체, 존재의 최고점에 대한 인식을 구축한다.
102:3.6
(1122-2)
지식은 사람들을 배치하도록, 사회적인 계층과 특권계급을 창설하도록 유도한다. 종교는 사람들을 섬기도록, 그리하여 윤리와 이타심이 생성되도록 유도한다. 지혜는 각 사람의 동료들과 관념들 둘 모두에 대한 더 높고 더 나은 교제로 인도한다. 계시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영원한 모험 여행을 시작하게 한다.
102:3.7
(1122-3)
과학은 사람들을 분류하고; 종교는 사람들을 너희 자신처럼 사랑한다; 지혜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공의를 행하지만; 계시는 사람을 찬미하고 하느님과 동반자가 될 수 있는 그의 역량을 드러낸다.
102:3.8
(1122-4)
과학은 문화의 형제신분을 이루기 위하여 헛되이 분투한다; 종교는 영의 형제신분이 이룩되게 한다. 철학은 지혜의 형제신분을 위해 분투한다; 계시는 영원한 형제신분인 파라다이스 최종의 무리단들을 묘사한다.
102:3.9
(1122-5)
지식은 개인성의 사실에서 자부심을 산출한다; 지혜는 개인성의 의미에 대한 의식이다; 종교는 개인성의 가치에 대한 인식의 체험이다; 계시는 개인성 구원에 대한 확신이다.
102:3.10
(1122-6)
과학은 무한한 조화우주의 분할된 부분들을 정체성 확인하고 분석하며 분류하려고 추구한다. 종교는 전부로서의-관념, 전체 조화우주를 파악한다. 철학은 전부로서의 영적-통찰력 개념과 과학의 물질적 부분들을 정체화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에 있어서 철학이 실패하는 그 점에서, 계시는 성공을 거두는데, 조화우주 순환계가 우주적이고 영원하며 절대적이고 무한함을 확언한다. 무한자 스스로 이신이의 이 조화우주는 그렇기 때문에 끝이 없고 무한하며 모든 것─시간이 없고 공간이 없으며 제한이 없음─을 포함 한다. 그리고 우리는 무한자 스스로 이신 이가 또한 네바돈 미가엘아버지이시며 인간을 구원하는 하느님이심을 증언하는 바이다.
102:3.11
(1122-7)
과학은 신(神)을 하나의 사실로 표시한다; 철학은 하나의 절대자관념을 제시한다; 종교는 하나의 사랑하는 영적 개인성으로 하느님을 그린다. 계시는 신(神)의 사실, 절대자의 관념 그리고 하느님의 영적인 개인성의 합일을 단언하며, 더 나아가서는 이 개념을 우리의 아버지─실존에서의 우주적 사실, 마음에서의 영원한 관념, 생명에서의 무한한 영─로 나타낸다.
102:3.12
(1122-8)
지식의 추구는 과학의 구성 요소이다; 지혜 탐구는 철학이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종교이다; 진리에 대한 굶주림이 계시이다. 그러나 실체의 느낌을 조화우주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영적 통찰력에 덧붙여 주는 것은 내주하는 생각 조절자이다.
102:3.13
(1122-9)
과학에서는, 관념이 그 실현에서의 표현보다 앞서며; 종교에서는, 실현의 체험이 관념에서의 표현보다 앞선다. 진화하는 믿고자-하는-의지와, 깨우친 이성, 종교적 통찰력, 계시의 산물─믿고 있는 의지─사이에는 광대한 차이가 있다.
102:3.14
(1122-10)
진화에 있어서, 사람이 하느님에 대한 개념을 창출하도록 종교가 인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계시는 진화하는 하느님의 사람 자신에 대한 현상을 나타내는 반면, 그리스도 미가엘이 이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 하느님이 자기 자신을 사람에게 계시하시는 현상을 우리는 목격하였다. 진화는 하느님을 사람과-같음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계시는 사람을 하느님과-같음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102:3.15
(1122-11)
과학은 단지 최초의 원인으로, 종교는 최극 개인성으로, 철학은 합일로서 만족된다. 계시는 이러한 세 가지가 하나이며, 그 모든 것들이 선하다는 것을 확언한다. 영원한 실제는 우주의 선(善)이며 공간 악에서의 시간 환상이 아니다. 모든 개인성들의 영적인 체험 속에서는, 실제가 선이고 선이 실제라는 사실이 항상 진리이다.
4. 체험에서의 사실
102:4.1
(1123-1)
생각 조절자의 너희 마음속에 있는 현존 때문에,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 신비로운 일이 아니듯이, 인간적이든지 초인간적이든지 다른 어떤 존재의 마음을 안다는 의식(意識)의 확신은 너희에게 신비로운 일이 아니다. 종교와 사회적 의식은 이러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그것들이 다른 존재가 염두에 두는 것에 대한 의식에 입각한다는 점이다. 너희가 다른 존재들의 관념을 마치 너희 것인 양 받아들이게 하는 기법은,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던 마음을 너희 속에 품어라”고 할 수 있는 기법과 같다.
102:4.2
(1123-2)
인간의 체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활동적이고 호기심 많은 자아와, 그리고 다른 어떤 활동적인 외부 실체 사이의 상호작용에 불과하다. 체험의 질량은 개념의 깊이와, 여기에 더해진 외부자의 실체에 대한 인지의 전체성으로 결정된다. 체험의 운동은 기대하는 상상의 기세와, 여기에 더해진 접촉되는 실체의 외부 본질특성에 대한 감각적 발견에서의 예민함과 동등하다. 체험의 사실은 자아-의식과 다른-실존들─다른 사물존재성, 다른 마음존재성, 다른 영(靈)존재성─을 합한 것 안에서 발견된다.
102:4.3
(1123-3)
사람은 자신이 세상에서 또는 우주 안에서 외로운 존재가 아님을 매우 일찍부터 인식하게 된다. 자아신분의 환경 속에서, 다른-마음작용에 대한 자아-의식이 자연 본성적으로 저절로 발달된다. 신앙은 이러한 자연적 체험을 종교, 하느님다른-마음작용에서의 실체─근원, 자연, 그리고 운명─로서 인지하는 것으로 전환시킨다. 또한 그러한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언제라도 그리고 항상 개인적 체험의 실체이다. 만약에 하느님이 개인성이 아니시라면, 그는 인간 개인성이 겪는 실제 종교 체험의 살아있는 부분이 될 수가 없을 것이다.
102:4.4
(1123-4)
인간의 종교적 체험 속에 나타나는 실수의 요소는, 우주 아버지에 대한 영적 개념을 오염시키는 물질주의의 내용물에 직접적으로 비례한다. 영-이전(以前)의 사람의 우주 안에서의 진보는, 순수하고 참된 영의 실체와 하느님의 자연본성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관념들을 떨쳐버리는 체험 속에 존재한다. 신(神)은 영(靈) 이상(以上)이지만, 영적인 접근만이 상승하는 사람에게 가능한 유일한 것이다.
102:4.5
(1123-5)
기도가 종교적인 체험의 한 부분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현대 종교인들에 의해 잘못되게 강조되어 왔는데, 더욱이 경배라는 더욱 근본적인 교제가 너무 무시되어 왔다. 마음의 반영하는 힘은 경배에 의해 결정되고 확장된다. 기도는 삶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 반면 경배는 운명을 밝혀준다.
102:4.6
(1123-6)
계시된 종교는 인간 실존에서 통합을 이루게 하는 요소이다. 계시는 역사를 통합하고, 지질학, 우주론, 물리학, 화학, 생물학, 사회학, 그리고 심리학을 조화-협동시킨다. 영적 체험은 사람의 조화우주의 실제 혼이다.
5. 목적이 있는 잠재의 최극위
102:5.1
(1123-7)
믿음이라는 사실의 확립이, 믿어지는 것에 대한 사실을 성립시키는 것과 일치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성의 지위를 향하는 단순한 삶의 진화적인 진보는, 시작할 수 있는 개인성 잠재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실증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존재하는 우주들에서는, 잠재가 항상 실재보다 최극이다. 진화하는 조화우주에서의 잠재는 앞으로 이루어질 어떤 것이며, 앞으로 이루어질 어떤 것은 신(神)의 의도적인 지시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102:5.2
(1124-1)
그와 동일한 의도적 최극위는, 원시적인 동물적 공포심이 계속적으로 깊어지는 하느님에 대한 존경으로 그리고 우주에 대한 점점 더 심화되는 경외심으로 전환될 때, 마음 관념작용의 진화 속에서 나타난다. 원시인은 신앙보다 더 종교적인 두려움을 가졌었으며, 실재적인 마음을 지배하는 잠재적 영의 최극위는 비겁한 이 두려움이 영적인 실체들에 대한 살아있는 신앙으로 전환될 때 실증되어 진다.
102:5.3
(1124-2)
너희는 진화 종교를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영적으로 기원되는 개인적-체험의 종교는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도덕성이 가치들을 깨달을 수 있지만, 오직 종교만이 그러한 가치들을 보존하고 증진시키며 영성화(靈性化)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들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감정적으로 취급되는 도덕성 이상의 어떤 것이다. 사랑이 의무를 가져오듯이, 아들관계가 예속성을 가져오듯이, 본질이 실체를 가져오듯이, 종교는 도덕성을 가져온다. 도덕성은 전능의 통제자, 섬김을 받으실 신(神)을 드러내며; 종교는 모든-사랑이신 아버지, 경배를 받으시고 사랑을 받으실 하느님을 드러낸다. 그리고 다시 말해서 이것은 종교의 영적인 잠재성이 진화의 도덕성이 갖는 실재성 의무를 지배한다.
6. 종교적 신앙의 확실성
102:6.1
(1124-3)
종교적 두려움을 철학적으로 제거하는 것과 그리고 꾸준한 과학의 발전은 잘못된 하느님들을 사라지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사람이 만든 신(神)들이 이렇게 사라짐으로써 영적인 선견지명을 일시적으로 흐리게 하더라도, 그들은 결국에는 영원한 사랑의 살아 계신 하느님을 그토록 오랫동안 불분명하게 만들었던 그 무지와 미신을 타파할 것이다. 창조체와 창조자 사이의 관계는 하나의 살아있는 체험, 명확한 경계에 속박되지 않는, 하나의 역동적인 종교적 신념이다. 삶의 일부를 고립시키고 그것을 종교라고 부르는 것은 삶의 집대성을-해체시키고 그리고 종교를 왜곡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경배를 받으시는 하느님께서 모든 충성이 아니면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시는 바로 그 이유이다.
102:6.2
(1124-4)
원시인의 하느님들은 그들 자신의 그림자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상태였으며; 살아 계신 하느님은 신성한 빛이신데, 그것의 중단이 모든 공간의 창조 그림자들을 구성한다.
102:6.3
(1124-5)
철학적인 달성에서의 종교인들은 개인적 구원의 개인적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소유하며, 그것은 실체, 가치, 성취의 차원, 고양된 과정, 변형, 시간-공간의 궁극자, 이상화(理想化), 에너지의 개인성구현, 중력의 실존개체, 인간 구체적 투사 활동, 자아의 이상화, 자연본성의 상승, 선(善)함을 향한 경향, 진화의 나가려는 충동, 또는 숭고한 전제보다도 그 이상의 어떤 것이다. 종교인은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다. 사랑은 종교의 본질이며 우월한 문명의 원천이다.
102:6.4
(1124-6)
신앙은 그럴듯한 철학적 하느님을 변환시켜서 개인적인 종교 체험 속에서 확실성을 주는 구원의 하느님이 되게 한다. 무신론이 신학의 이론에 도전할 수 있지만, 개인적 체험의 신빙성에 대한 자신감은, 자라나서 신앙이 되고 있는 그 믿음에서의 진리를 확인한다.
102:6.5
(1124-7)
하느님에 관한 신념은 현명한 이성 작용을 통하여 도달될 수 있지만, 각 개별존재는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개인적인 체험에 의해서만 하느님을 알게 된다. 삶에 관계하는 한, 가능성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지만, 조화우주 실체와 접촉할 때에는, 그러한 의미들과 가치들이 살아있는 신앙에 의해 접근되면서 확실성이 체험될 수 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이 지식이 지적인 논리에 의해 전적으로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확신을 거부하는 불신자들에 의해 이의가 제기될 경우에도, “내가 안다”고 감히 말한다. 의심하는 그러한 각 사람에게 믿는 자는 오직 “내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당신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대답할 뿐이다.
102:6.6
(1125-1)
이성이 항상 신앙을 의심할지라도, 신앙은 항상 이성과 논리 두 가지를 다 보충할 수 있다. 이성은 신앙이 도덕적 확실성으로 그리고 심지어는 영적 체험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창조한다. 하느님은 최초의 진리이시고 최종적인 사실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진리는 그로부터 기원되는 반면, 모든 사실들은 그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하느님은 절대 진리이시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진리로 알 수 있지만, 하느님을 납득하려면─설명하려면─, 그는 반드시 우주들의 우주에 대한 사실을 탐구해야만 한다.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체험과 사실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무지 사이의 광대한 심해(深海)는 살아있는 신앙에 의해서만 연결될 수 있다. 이성 자체만으로는 무한한 진리와 우주적 사실 사이의 조화-협동을 이룰 수 없다.
102:6.7
(1125-2)
믿음은 의심을 이겨내거나 두려움을 견뎌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앙은 항상 의심을 이겨내고 승리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긍정적이고 또한 동시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보다, 진리가 실수보다, 체험이 이론보다, 영적인 실체가 시간과 공간의 고립된 사실들보다 언제든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영적인 이 확실성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는, 그러한 신자들, 신앙인들이 참된 이 영적 체험의 결과로 맺힌 영의 사회적 열매 속에 있다.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 이웃을 사랑한다면,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다.”
102:6.8
(1125-3)
과학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하나의 가능성이고, 심리학에 있어서는 바람직스러운 것이며, 철학에 있어서는 하나의 있음직한 것이고, 종교에게 있어서는 확실성, 종교적 체험이라는 하나의 실재성이다. 이성은, 있음직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는 철학이, 정확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고 또 발견하는 그 종교적 신앙을 매우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과학은 경솔한 믿음이라는 구실로 종교적 체험을 도외시해서는 안 되며, 사람의 지적 자질과 철학적 자질이 단계적으로 더 열등한 지성으로부터 창발하였다는 가정을 고집 하는 한 그들은 더욱 뒷걸음질 쳐서 결국에는 모든 생각과 느낌이 철저히 배제된 원시적 생명에서 기원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102:6.9
(1125-4)
진화의 사실들은, 하느님을 아는 필사자가 종교적 삶에서 얻는 영적 체험의 확실성이 지니고 있는 실체의 진리에 반하여 열거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지능적 사람들은 어린아이같이 따지는 것을 멈추어야만 한다, 그리고 사실의 관찰과 함께 나란히, 진리의 개념을 너그럽게 견디어내는 논리, 어른다운 일관된 논리를 적용하려고 시도해야만 한다. 과학적 물질주의는, 되풀이되어 일어나는 각각의 우주 현상에 부딪쳐서, 명백하게 우수한 것이 명백하게 열등한 것 속으로 되돌아감으로서, 그 현재의 결함들을 배상해 주려고 끈질기게 매달려 있을 때, 파탄되어 버린다. 일관성에는 목적을 가진 창조자의 활동을 인지해야 할 것이 요구된다.
102:6.10
(1125-5)
유기체의 진화는 하나의 사실이다; 목적 있는, 곧 진보적인 진화는 진리이며 한편으로는 그것이 진화들의 늘-상승하는 성취가 모순되는 현상을 일관성 있게 만든다. 어떤 과학자가 자신이 선택한 과학에 있어서 점점 더 높게 진보되어 갈수록, 그는 최극 마음의 통치에 대한 조화우주 진리를 위하여 물질주의적 사실의 이론들을 점점 더 포기하게 될 것이다. 물질주의는 인간의 삶을 값싸게 만든다; 예수의 복음은 모든 필사자 각자를 엄청나게 증진시키고 숭고하게 고양시킨다. 필사자 실존은 인간의 위로 뻗음과 신성한 동시에 구원을 이루는 아래로 뻗음이 만나는 실체의 실현이라는 호기심을 자극하고 매혹적인 체험 속에 존재하듯이 시각화(視覺化) 되어야만 한다.
7. 신성한 것에 대한 확신감
102:7.1
(1126-1)
자아-실존적이신 우주 아버지는 또한 자아-설명적이시다; 모든 이성적 필사자 속에 실재적으로 살아 계시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가 만일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에 관하여 확신할 수 없으며; 아들관계는 아버지신분을 확실하게 만드는 유일한 체험이다. 그 우주는 어디에서나 변화를 겪는다. 변화하는 우주는 종속적인 우주이다; 그러한 창조는 최종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유한(有限)한 우주는 궁극자절대자에게 온통 종속된다. 우주와 하느님은 일치되지 않는다; 하나는 원인이고 다른 하나는 결과이다. 그 원인은 절대적이고 무한하고 영원하고 변화가 없으며; 그 결과는 시간-공간이며 초월적이지만 영원히 변화하고 항상 성장한다.
102:7.2
(1126-2)
하느님은 한 분이고 그리고 우주 안에서 자아-원인이 되는 오직 유일한 사실이다. 그는 물체들과 존재들에 대한 전체 창조의 계층과 계획과 목적의 비밀이시다. 어디에서나 변화하는 우주는 절대적으로 불변하는 법칙들, 변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기질에 의해서 규제되고 안정된다. 하느님의 사실, 신성한 법칙은 변함이 없으며; 하느님의 진리, 그가 우주와 가지는 관계는 끊임없이 진화하는 우주에 언제까지도 적응할 수 있는 상대적 계시이다.
102:7.3
(1126-3)
하느님 없이 종교를 창안하려는 사람들은 나무 없이 과일을 모으려는, 부모 없이 자녀를 가지려는 사람들과 같다. 너희는 원인이 없는 결과를 소유할 수 없으며; 오직 스스로 이신 이만이 원인이 없으시다. 종교적 체험의 사실은 하느님을 내포하며, 개인적 체험의 그러한 하느님은 반드시 개인적 신(神)이어야만 한다. 너희는 하나의 화학 공식에게 기도하거나, 수학 방정식에게 탄원하거나, 가상적 추측을 경배하거나, 가설을 믿고 속을 털어놓거나, 일련의 수행과정과 교통하거나, 추상개념을 섬기거나, 또는 어떤 법칙과 사랑에 넘치는 우애관계를 가질 수 없다.
102:7.4
(1126-4)
사실, 겉으로 보기에 종교적인 많은 특색들이 비종교적인 근원으로부터 자라날 수 있다. 사람은 지적으로 하느님을 부정하면서도 도덕적으로는 선하고 충실하며 효심이 있고 정직하며 심지어는 이상적일 수도 있다. 사람은 자신의 기본적인 영적 자연본성 위에 순전히 인본주의적인 많은 가지들을 접목시킬 수 있지만, 그러한 체험은 생존되는 가치들, 하느님을 알아감과 하느님께로 상승함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한 인간적 체험 속에는 영적인 열매들이 아니라 오직 사회적인 열매들만이 맺힌다. 생존을 위한 자양물이 마음과 영 두 가지의 기원적인 신성한 자질의 뿌리로부터 흡수됨에도 불구하고, 그 접목이 열매의 본성을 결정한다.
102:7.5
(1126-5)
종교의 지적인 특징은 확실성이다; 철학적 특징은 일관성이고; 사회적인 열매들은 사랑과 봉사이다.
102:7.6
(1126-6)
하느님을 아는 개별존재는 현대 시대의 미신, 전통 그리고 물질주의적 성향의 미로들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어려움을 눈이 멀어 보지 못하거나 장애물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가 아니다. 그는 이러한 모든 방해물에 봉착해 왔고 그것들을 극복하였으며, 그것들을 살아있는 신앙으로 이겨내었으며, 방해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 체험의 고지(高地)를 달성한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깊이 확신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는 것에 대한 반대 주장들을 끌어 모으고 그 어려움을 증폭시키는 사람들의 그 다양성과 교묘함 때문에 확실성에서의 그 어떤 느낌들을 강력히 주장하기를 두려워한다. 결점을 찾아내거나, 질문을 던지거나, 반대 주장을 제기하는 것에는 그 어떤 아무런 지성의 깊은 통찰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 질문에 대답하고 이들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에는 마음의 눈부신 재기(才氣)가 요구된다; 신앙의 확실성은 그러한 모든 피상적인 논쟁들을 다루는 데에서 가장 위대한 기법이다.
102:7.7
(1127-1)
만약에 과학이나 철학 또는 사회학이 참된 종교의 선지자들과 논쟁하는 데 있어서 감히 독단적인 상태가 된다면,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나는 스스로 이신 이아들이기 때문에 내가 체험한 것을 안다”고 하면서 개인적인 영적 체험의 확실성에 대한 더욱 선견지명이 있는 독단적인 태도로 그러한 인정할 수 없는 독단적인 태도에 답변해야만 한다. 만약에 신앙인의 개인적인 체험이 독단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된다면, 체험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 신앙으로 태어난 이 아들은 도전할 수 없는 독단, 곧 자신의 우주 아버지에 대한 실재적 자녀관계를 선언하는 것으로 응답할 수도 있다.
102:7.8
(1127-2)
분별불가적인 유일한 실체, 절대는 감히 일관되게 독단적으로 될 수 있다. 독단적으로 되려는 자들이, 만약 일관성이 있다면, 머지않아 에너지에서의 절대자, 진리에서의 우주자, 그리고 사랑에서의 무한자의 품안으로 몰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102:7.9
(1127-3)
만약에 조화우주 실체에 대한 비종교적 접근이 그것의 입증되지 않은 상태를 이유로 하여 신앙의 확실성에 도전하려고 생각한다면, 영을 체험한 그 사람은 과학의 사실들과 철학의 믿음도 마찬가지로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것들에 대한 독단적 도전을 제기할 수 있다; 그것들도 마찬가지로 과학자와 철학자의 의식 속에 있는 체험들이다.
102:7.10
(1127-4)
우리는 모든 현존들 중에서 가장 불가피한, 모든 사실들 중에서 가장 실제적인, 모든 진리들 중에서 가장 살아있는, 모든 친구들 중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그리고 모든 가치들 중에서 가장 신성한 분이신 하느님을, 모든 우주 체험 중에서 가장 확실한 것으로 여길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8. 종교의 징표들
102:8.1
(1127-5)
종교의 실체와 효력에 대한 가장 높은 증거는 인간 체험의 사실 속에 들어있다; 말하자면, 자연본성적으로 두려움이 많고 의심하며, 자아-보존의 강한 본능과 죽음 이후의 생존 갈망을 태생적으로 자질로서 부여받은 인간은, 자신의 신앙에 따라 하느님으로 부르고 있는 그 힘과 개인의 보호와 지도에 대한 그의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가장 깊은 관심을 기꺼이 전적으로 신뢰하려 한다. 그것이 모든 종교의 하나의 중심적 진리이다. 그 힘 또는 개인이 이러한 보호와 최종적인 구원에 대한 보답으로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에 있어서 어떤 두 종교도 의견이 같지 않다; 사실 종교들은 모두 다소 의견이 다르다.
102:8.2
(1127-6)
진화적인 척도에서는 그 어떤 종교라도 지위에 관한 한, 도덕적 심판과 윤리적 기준에 의해 판결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 어떤 종교도 유형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것은 지속적으로 향상되는 사회적 도덕성과 윤리적 문화를 점점 더 북돋우고 그리고 또한 그것들에 의해 더욱 북돋아진다. 우리는 종교를 그에 수반되는 문명의 지위에 따라서 판결할 수는 없다; 한 문명에서의 종교가 갖는 순수성과 고결성에 따라서 실제적 본성을 추정하는 것이 더 좋았었다. 세상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종교적 스승들의 대부분은 실질적으로는 교육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영원한 실체를 믿는 구원하는 신앙을 실천하는 데에 세상의 지혜는 필요하지 않다.
102:8.3
(1127-7)
다양한 시대들의 종교들 속에 있는 차이는 도덕적 가치들과 윤리적 관계들 그리고 영적인 실체들에 대한 그의 상이한 이해에 따라서 그리고 실체에 대한 사람의 이해에 있어서의 차이점에 따라서 전혀 달라진다.
102:8.4
(1127-8)
윤리는 다른 방법으로는 관찰할 수 없는 내부적인 영적 그리고 종교적 발전의 진보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영원한 사회적 또는 인종적 거울이다. 사람은 자신이 알았던 최상의 용어, 가장 심오한 관념들과 가장 높은 이상으로 항상 하느님을 생각해 왔다. 심지어는 역사적인 종교도 그것의 하느님 개념을 가장 높게 이해된 그것의 가치들로부터 항상 창조해 왔다. 지성을 가진 모든 창조체들은 자기가 아는 최선의 그리고 최고의 것이 되도록 하느님의 이름을 부여한다.
102:8.5
(1128-1)
종교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언어로 축소될 때, 언제든지 문명과 진화적 발전을 윤리적 문화와 도덕적 진보에 대한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감히 비판하였다.
102:8.6
(1128-2)
개인적 종교가 인간 도덕의 진화를 앞서는 반면, 제도적인 종교는 인간 종족들의 천천히 바뀌는 사회관례보다도 변함없이 뒤쳐져 있음이 기록되고 있으니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다. 조직화된 종교는 보수적으로 뒤쳐지게 된다는 것이 증명되어 왔다. 선지자들이 보통 종교적 발전에서 민족을 이끌었다; 신학자들은 보통 그들이 뒤돌아 제자리에 있도록 붙들어 왔다. 종교는, 내적인 곧 개인적 체험의 문제이며, 결코 종족들의 지적 진화보다 훨씬 멀리 앞서서 발전할 수는 없다.
102:8.7
(1128-3)
그러나 종교는 소위 기적이라 불리는 것들에 호소함으로써는 결코 강화될 수 없다.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 원시적인 마술의 종교들을 돌이켜 불려내는 것이다. 참된 종교는 그들이 내세우는 기적들과 함께 행해지는 그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리고 계시된 종교는 결코 기적을 권위에 대한 증거로 지목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는다. 종교는 언제까지나 그리고 항상 개인적 체험에 뿌리를 두고 기초를 둔다. 그리고 가장 높은 너희 종교인 예수의 삶은 바로 그러한 개인적 체험이었다: 그는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사람, 필사 사람이었으며, 그리고 육신으로의 한 번의 짧은 삶 동안, 충만함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을 발견한 사람이었으며, 한편 마찬가지로 바로 그 인간의 체험 속에서, 무한한 최극위의 완전한 혼의 충만한 만족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찾아 나서고 사람을 발견하는 하느님이 나타났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가 땅에서 살았던 삶─그것이 종교이며, 나아가 지금까지 네바돈의 우주에서 계시된 최고의 종교이다.
102:8.8
(1128-4)
[네바돈멜기세덱에 의해 제시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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