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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0 편
인간 체험 속의 종교
100:0.1
(1094-2)
역동적인 종교 생활의 체험은 평범한 개별존재를 이상적인 힘을 가진 개인성으로 변환시킨다. 종교는 각 개인의 진보를 조성함으로써 전체의 진보를 충족시키며, 각 개별존재의 진보는 전체의 성취를 통하여 증강된다.
100:0.2
(1094-2)
영적인 성장은 다른 종교인들과의 긴밀한 관계적-연합에 의하여 서로 자극을 받는다. 사랑은 종교적 성장─주관적인 충족 대신 객관적인 매력─에 토양을 제공하며 더욱이 그것은 최극의 주관적 만족을 가져온다. 그리고 종교는 일상적인 생활의 진부한 고역을 고상하게 만든다.
1. 종교적 성장
100:1.1
(1094-3)
종교가 의미들의 성장과 가치들의 증진을 가져오지만 한편으로, 전적으로 개인적인 평가들이 절대차원으로 들어 오를 때는 반드시 악(惡)이 귀결된다. 어린이는 즐거움의 내용에 따라서 체험을 평가한다; 성숙은 개인적인 즐거움을 보다 높은 의미들로 치환된 양(量), 여러 가지 생활환경과 조화우주적 관계들의 가장 높은 개념들에 대한 충성심에 비례한다.
100:1.2
(1094-4)
어떤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성장하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고착되는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다. 의미들의 성장을 위한 준비가 서로 다른 시대들에, 계속되는 문화들 속에서, 그리고 발전하는 문명의 발생 단계들 속에 이루어져야만 한다. 편견과 무지가 성장을 억제하는 주된 것들이다.
100:1.3
(1094-5)
발달하고 있는 모든 어린이에게 그 자신만의 종교적 체험이 성장할 기회를 주어라; 이미-만들어진 어른의 체험을 그에게 기세로서 밀어붙이지 말라. 이미 확립되어있는 교육 체제를 통하여 두루, 한해 한해 진보하는 것이 필요로 하는 지적 진보를 뜻하지 않음을, 영적 성장은 더더욱 아주 적다는 것을 기억하라. 어휘의 확대가 성격의 발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장은 단순한 산출 결과에 의해서 진실로 가리켜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보에 의해서 표시된다. 실제 교육적 성장은 이상의 향상, 가치의 증가된 깊은 이해, 가치의 새로운 의미 그리고 최극 가치에 대한 증강된 충성에 의해서 가리켜진다.
100:1.4
(1094-6)
어린이들은 오직 자신들의 어른 연관-동료들의 충성심에 의해서만 영구적으로 감명을 받는다; 교훈이나 본보기조차도 계속 이어지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충성스런 개인들은 성장하는 개인들이다; 성장은 감명을 주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실체이다. 오늘을 충성으로 살라─성장하라─그러면 내일은 저절로 따라오게 될 것이다. 올챙이가 개구리로 되는 가장 빠른 길은, 매 순간마다 올챙이로서 충성스럽게 사는 것이다.
100:1.5
(1094-7)
종교적 성장을 위한 핵심적인 토양은 자아-실현의 진보적인 일생, 자연적 성향의 조화-협동, 호기심의 발동과 타당한 모험의 즐김, 만족함의 느낌의 체험, 주목하기와 알아차림에의 두려워하는 자극의 기능작용, 경이로움의-매혹, 그리고 작고 빈약함의 정상적 의식, 즉 겸손, 이 모든 것을 전제로 한다. 또한 성장은 자아-비판으로 완수되는 자아신분의 발견─곧 양심에 근거를 두는데, 이는 양심은 실제로 사람이 자기 자신의 가치-습관들, 곧 개인적 이상들에 의한 자기자아에의 비판이기 때문이다.
100:1.6
(1095-1)
종교적인 체험은 육체적인 건강과 타고난 기질 그리고 사회 환경에 의해 현저하게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현세적 조건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에 바쳐진 혼에 의해 이루어지는 내면의 영적 진보를 막지 않는다. 정상적인 모든 필사자들 속에는 만일 그들이 특별히 억압하지만 않으면 기능을 발휘하는 성장과 자아-실현에 대한 어떤 타고난 본능적 욕구들이 존재한다. 영적인 성장의 잠재를 갖는 이 구조적 자질을 육성하는 확실한 기법은 최극 가치들에 대해 전심으로 헌신하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100:1.7
(1095-2)
종교는 증여되거나, 받아들이거나, 빌리거나, 배워지거나, 또는 잃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최종적인 가치들을 향하여 자라가는 탐구에 비례하여 성장하는 개인적 체험이다. 그래서 우주적 성장은 의미들의 누적과 가치들의 계속 확대되는 상승의 결과로 수반된다. 그러나 숭고함 그 자체는 항상 무의식적인 성장이다.
100:1.8
(1095-3)
사고(思考)하고 그리고 행동하는 것에서의 종교적 습관들은 영적 성장의 섭리에 기여한다. 사람은 영적 자극, 곧 일종의 조건에 따른 영적 반영에 호의적인 반응을 하는 쪽으로 종교적 성향을 개발할 수 있다. 종교적 성장을 도와주는 습관들에는 신성한 가치들에 대한 세련된 감수성,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인 삶 인식, 조화우주 의미들에 대한 깊은 명상, 경건한 문제 해결, 자신의 영적 삶을 다른 동료들과 나눔, 이기심의 극복, 신성한 자비를 부정적으로 이용하지 않음, 하느님의 현존에 있는 것처럼 살기 등이 있다. 종교적 성장의 요소들은 계획적일 수 있지만 성장 그 자체는 반드시 무의식적이다.
100:1.9
(1095-4)
그렇지만, 종교적 성장에서의 무의식적인 본성은, 어찌되었건, 그것이 인간 지능의 무의식적 영역이라고 가정되는 곳에서, 기능하는 활동이라고 신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필사자 마음의 초(超)의식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적인 활동들을 신호한다. 무의식적인 종교적 성장에서의 실체의 실현에 대한 체험은, 초월의식의 기능적 실존에 대한 하나의 명확한 증거이다.
2. 영적 성장
100:2.1
(1095-5)
영적인 발전은, 첫째로, 참된 영적 기세와 살아있는 영적 관계를 유지함에 있으며, 두 번째는, 영적 열매를 계속해서 맺어가는 것이다; 자신의 동료에게 자신의 영적 은인으로부터 받아들였던 것을 사명활동으로 결실을 거두어가는 것이다. 영적인 진보는 완전함에-굶주림의 자아-의식, 하느님을 알고 그리고 그와 같이 되려는 욕망,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전심전력의 목적과 짝을 이루고 있는, 영적 빈곤의 지능적 인지위에 근거를 두고 있다.
100:2.2
(1095-6)
영적 성장은 먼저 필요에 대한 각성이며, 다음에는 의미들에 대한 인식이고, 그 다음에는 가치들의 발견이다. 참된 영적 발전의 증거는 사랑에 의해 출발되고, 사심-없는 사명활동에 의해 활성화되며, 신성(神性)의 완전 이상들에 대한 전심으로의 경배에 의하여 지배되는 개인성의 표현 속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체 체험은 단순히 신학적인 믿음과는 대조적으로 종교의 실체를 구성한다.
100:2.3
(1095-7)
종교는 그것이 우주에 대하여 영적으로 반응하는, 깨우치고 그리고 현명한 기법이 되는 체험의 차원으로 발전할 수 있다. 영화롭게 된 그러한 종교는 인간 개인성의 3가지 차원 즉: 지적 차원, 모론시아적 차원, 영적 차원; 마음 위에, 진화하는 혼속에, 내주하는 영과 함께 기능할 수 있다.
100:2.4
(1096-1)
영성(靈性)은 사람이 하느님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그리고 동료 존재에게는 한 존재로서 얼마나 쓸모가 있는지를 한번에 즉시 가늠하는 지도계이자 척도가 된다. 영성은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의미에서 진리를 깨닫고 가치에서 선을 발견하는 능력을 강화시킨다. 영적 발달은 영성을 담을 수용력으로 결정되며 또한 사랑에서 이기적 본질특성을 얼마나 제거 하느냐에 직접적으로 비례한다
100:2.5
(1096-2)
실재적인 영적 지위는 신(神) 달성, 조절자가 동조된 정도와 같다. 영성(靈性)의 최종 성취는 실체의 최고점 달성, 하느님과-같음을-이룸의 최고점과 일치한다. 영원한 삶은 무한한 가치들에 대한 끝없는 추구이다.
100:2.6
(1096-3)
인간 자아-실현의 목표는 물질적이 아니라 영적이어야만 한다. 분투할만한 가치를 갖는 유일한 실체들은 신성하고 영적이며 영원한 것들이다. 필사 사람은 육체적인 즐거움을 누리고 인간 애정에서의 만족을 누릴 권리가 있다; 또한 인간 관계적-연합들과 그리고 현세적 제도에 충성함으로써 은혜를 누린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공간을 초월하고 시간을 극복하며 신성한 완전성과 최종자의 봉사에 대한 영원한 운명을 성취해야만 하는 불멸의 개인성을 세울, 영원한 기초가 아니다.
100:2.7
(1096-4)
예수하느님을 아는 필사자의 깊은 확실성을 묘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였다: “하느님을 알고 왕국을 믿는 자들이라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무너진들 그것이 무슨 대수로운 일이 되겠느냐?” 현세적인 안전은 무너지기 쉽지만, 영적인 확실성은 흔들리지 않는다. 인간적인 역경과 이기심과 사악함과 증오와 원한과 시기심의 밀물이 필사자의 혼을 휩쓸 때, 너희는 하나의 내적인 요새, 절대적으로 무너질 수 없는 영의 성채가 존재한다는 확신 속으로 안전하게 피할 수 있다; 이것은 적어도 내주하고 있는 영원하신 하느님의 영에게 자신의 혼을 맡기는 것에 전념해 온 모든 인간 존재들에게 진실이다.
100:2.8
(1096-5)
그러한 영적인 달성이 이루어지고 나면, 점차적인 성장 또는 특이한 분기점에 의해 야기되더라도, 개인성의 새로운 적응은 물론 가치들에 대한 새로운 기준들의 발달이 발생한다. 영으로-태어난 그러한 개별존재들은 삶에 다시 확실한 동기를 부여받기 때문에 자기들이 가장 좋아하는 열정들이 사라지고 가장 열망하는 희망이 무너지는 속에서도 태연하게 기다릴 수 있다; 그들은 그러한 큰 재앙들이 다만 새롭게 방향을 정해주는 대변혁이며. 그것은 우주적 달성에서의 새롭고도 더욱 웅대한 차원의 실체들로 이루어진 더욱 고귀한 그리고 참을성으로 견디어내는 뒤편에게, 준비단계로서 자신들의 현세적 창조계를 파괴하는 그러한 대 변혁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안다.
3. 최극 가치의 개념들
100:3.1
(1096-6)
종교는 정적(靜的)이고 행복한 마음의 평화 달성을 위한 기법이 아니며; 동적(動的)인 봉사를 위해 혼을 편성하는 추진력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돌보는 충성된 봉사 속에 자아신분의 전체성을 등록하는 것이다. 종교는 최극의 목표 달성, 영원한 보상에 필수 불가결한 모든 값을 지불한다. 최고로 숭고한 종교적 충성심 속에 신성시된 완성됨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충성심들은 사회적으로 효력이 있고 영적으로 진보적이다.
100:3.2
(1096-7)
종교인에게 있어서 하느님이라는 말은 최극 실체를 향한 접근과 신성한 가치에 대한 깨달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 된다. 인간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선과 악을 결정하지 않는다; 도덕적 가치들은 소망의 달성이나 감정적 좌절감으로부터 발생되지 않는다.
100:3.3
(1096-8)
가치에 대해 깊은 사색에 잠길 때, 너희는 가치 것과 가치를 갖는 것의 차이를 반드시 구분해야만 한다. 너희는 유쾌한 활동들과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인간 체험의 언제까지나 더욱 높고 높게 진보되는 차원 위에서의 의미깊은 집대성활동과 증진된 실현들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여야만 한다.
100:3.4
(1097-1)
의미는 체험이 가치에 덧붙이는 어떤 것이다; 가치를 올바르게 깊이 아는 의식이다. 고립되고 순전히 이기적인 즐거움은 의미에 대한 실질적 평가절하, 상대적인 악(惡)에 가까운 무의미한 향락을 암시할 수도 있다. 가치는 실체가 의미 있고 정신적으로 연관될 때, 그러한 관계들이 마음에 의해 감지되고 통찰될 때 체험적인 것이 된다.
100:3.5
(1097-2)
가치는 결코 정적(靜的)인 것이 될 수 없다; 실체는 변화, 성장을 뜻하는 것이다. 성장, 의미의 확장 그리고 가치의 고양이 없는 그러한 변화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잠재적인 악이다. 조화우주에 적응하는 본질특성이 더욱 위대할수록, 그 어떤 체험도 더욱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치는 개념적인 환상이 아니다; 그것들은 실제이며, 한편 항상 관계들에서의 사실에 의존한다. 가치는 항상 실재적이며 동시에 잠재적이다─예전의 어떤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의 무엇 그리고 앞으로 되어질 무엇이다.
100:3.6
(1097-3)
실재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의 관계적-연합은 성장, 가치에 대한 체험적 깨달음과 동일하다. 그러나 성장은 단순한 진보가 아니다. 진보는 반드시 의미를 갖지만, 성장이 없으면 상대적으로 무가치하다. 인간 삶의 최극 가치는, 가치의 성장과 의미의 진보 그리고 이 두 체험의 조화우주 상호-관련의 실현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은 하느님-인식에 상응한다. 그러한 필사자는 초자연적 존재는 아니지만, 정말로 초인간으로 되어가조 있는 것이다; 불멸의 혼(魂)이 진화하고 있다.
100:3.7
(1097-4)
사람이 성장을 일으킬 수는 없지만, 순조로운 조건을 제공할 수는 있다. 성장은 육체적, 지적 또는 영적에 상관없이 반드시 무의식적이다. 사랑은 그렇게 성장한다; 그것은 창조되거나 만들어지거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라나야만 한다. 진화는 성장의 조화우주 기법이다. 사회적인 성장은 법으로 보장될 수 없으며, 도덕적인 성장은 진보된 관리-행정으로 얻을 수 없다. 사람이 기계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것의 실제적인 가치는 반드시 인간의 문화와 개인적 깊은 이해에서 유래되어야만 한다. 성장에 대해 사람이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신의 개인성의 모든 전체 힘을 동원하는 것─살아있는 신앙─이다.
4. 성장의 문제들
100:4.1
(1097-5)
종교적인 삶은 헌신적인 삶이며, 헌신적인 삶은 창조적인 삶, 기원적이고 자발적인 것이다. 새로운 종교적 통찰력은 옛날의 열등한 반응 원형틀들 대신에 새롭고도 더 나은 반응 습관들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갈등들로부터 발생한다. 새로운 의미들은 오직 갈등 속에서만 일어나며; 갈등은 오직 우월한 의미들 속에 내포된 더 높은 가치들을 지지하기를 거부하는 현상에 직면하여서만 존속된다.
100:4.2
(1097-6)
종교적인 혼란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심리적인 갈등과 영적인 동요 없이는 성장이 있을 수 없다. 삶에 대한 철학적 기준의 체제는 마음의 철학적 영역 속에 상당한 소란을 가져온다. 갈등이 없이는 위대한 자와 선한 자와 진실한 자 그리고 고결한 자를 위한 충성심이 발휘될 수 없다. 영적 선견지명의 정화(淨化)와 조화우주 통찰력의 증진에는 노력이 뒤따른다. 그리고 인간 지성은 현세적 실존이 갖는 비(非)영적 에너지들에 의해 생존되는 상태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막아준다. 나태한 동물적 마음은 조화우주 문제 해결과 싸우는데 요구되는 노력에 반발한다.
100:4.3
(1097-7)
그러나 개인성이 가진 혼의 힘을 사랑, 건강, 정신적 효과 그리고 행복에서의 통치에 따라 통합해보려는 과업에 있는 그 종교적 삶에서의 가장 큰 과제는, 물리적 체계, 마음 체계 그리고 영의 체계의 통일이라는 것에서 생겨난다. 사람은 몸의 건강과 정신의 온전함은 많이 납득하지만, 그러나 행복에 대해 진정으로 깨달은 것은 거의 없다. 최고의 행복은 분리가 불가능하도록 영적 진보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영적 성장은 영구적인 즐거움, 모든 납득을 거치는 평화를 낳는다.
100:4.4
(1098-1)
육체적인 삶 속에서는 감각이 물체들의 실존들을 밝혀주며; 마음은 의미들에 대한 실체를 발견하지만; 영적인 체험은 개별존재들에게 알생에 대한 참된 가치들을 계시해 준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이러한 높은 차원들은 하느님의 최극의 사랑 속에서 그리고 사람의 사심-없는 사랑 속에서 성취된다. 만약에 너희가 너희 연관-동료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의 가치들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높은 가치를 두셨기 때문에 그들을 그토록 사랑하셨던 것이다. 너희는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너희 관계적-연합들 속에서 가치들을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너를 짜증나게 한다면, 화나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면, 너는 그의 관점, 그러한 불유쾌한 행위를 일으키게 한 그에게 있는 이유들을 식별하기 위하여 동정심을 가지고 노력해야만 한다. 만일 너희가 일단 너희 이웃을 납득하게 되면, 너희는 관대해 질 것이며, 이 관대함이 우정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고 사랑으로 익어갈 것이다.
100:4.5
(1098-2)
동굴 속에 살던 시대의 원시적인 너희 조상들 중의 하나에 대한 모습─키가 작고, 보기 흉하며, 불결하고, 으르렁거리는 사람 괴물이 선 채로 막대기를 들어 올리고 정면을 사납게 쳐다보면서 증오심과 악의에 가득 차 숨을 몰아쉬는─을 마음의 눈으로 상상해 보라. 그러한 모양은 인간의 신성한 존엄성을 거의 나타내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그림을 확대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바란다. 살아있는 이 인간 앞에 송곳니가 날카롭게 나있는 호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그 사람 뒤에는 한 여인과 두 아이들이 있다. 너희는 그러한 모습이 인간 종족 속에 있는 훌륭하고 고귀한 많은 것들을 보여주기 시작하는 것임을 곧 알게 되겠지만, 그 사람은 두 가지 그림 속에서 똑같은 주인공이다. 오직 두 번째 그림에서만 너희는 넓혀진 시야에 호감을 갖게 된다. 그 속에서 너희는 진화하는 필사자의 동기유발을 식별하게 된다. 그의 태도는 너희가 그를 납득하기 때문에 칭찬 받을 만한 것으로 바뀐다. 만일 너희가 너희 친구들의 동기들을 추측할 수만 있다면, 너희가 얼마나 그들을 더 잘 납득할 수 있겠는가. 만일 너희가 너희 연관-동료들을 알 수만 있다면, 너희는 결국에는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100:4.6
(1098-3)
너희는 단순한 의지에서의 행동으로는 너희 동료들을 참되게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너희 이웃의 동기와 정서를 속속들이 납득함으로써만 태어난다. 너희가 오늘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너희가 매일 인간 존재 또 한 사람을 사랑하도록 배우는 것이다. 너희가 매일 또는 매주마다 너희 동료들 중에 한 사람씩을 더 납득하게 된다면, 그리고 만일 이것이 너희 능력의 한계를 다한 것이라면, 너희는 너희 개인성을 확실하게 사회화 하고 있는 것이며 참되게 영성화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전염되는 것이며, 인간의 헌신이 총명하고 지혜로울 때에는, 사랑이 미움보다 더욱 잘 전염된다. 그러나 오직 진정한 그리고 사심-없는 사랑만이 참으로 전염을 일으키는 것이다. 만약에 각 필사자가 역동적 애정의 초점이 될 수만 있다면, 사랑의 이 고마운 바이러스는 인류애의 정서적인 감정-흐름에 곧 바로 스며들어가, 모든 문명이 사랑으로 감싸이게 되기까지, 그리고 사람의 형제신분의 실현이 되기까지 그처럼 확장될 것이다.
5. 전향과 신비주의
100:5.1
(1098-4)
세상은 길을 잃은 혼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들은 신학적인 감각에 있어서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방향적 의미에 있어서 길을 잃었고, 좌절감을 느끼는 철학 시대의 이론들과 예배종파들 속에서 혼돈하여 방황하고 있다. 종교적 권한 대신에 하나의 삶의 철학을 세우는 방법을 배운 사람들이 너무 적다. (사회화된 종교의 상징들도 성장의 경로들로서 무시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 둑은 강이 아니다.)
100:5.2
(1098-5)
종교적 성장의 진보는 침체로부터 갈등을 거쳐 조화-협동으로, 불확실성으로부터 확신하는 신앙으로, 혼돈 된 조화우주 의식으로부터 개인성의 통일으로, 현세에서의 목적으로부터 영원한 것으로, 두려움의 속박으로부터 신성한 아들관계의 해방으로 이끈다.
100:5.3
(1099-1)
최극의 이상들에 대한 충성심의 고백─하느님-의식을 심리적으로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깨달음─이 자연스럽고 점진적인 성장이 될 수 있거나 또는 어떤 위기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시점에서 때때로 체험될 수도 있음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 사도 바울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그 사건 많은 날에 바로 그러한 갑작스럽고도 장엄한 회심을 체험하였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그가 홀로 앉아 최종 진리에 대한 신비를 꿰뚫어보고자 하던 그 밤에 비슷한 체험을 하였다. 많은 다른 사람들도 유사한 체험들을 하였으며, 갑작스러운 회심 없이 영적인 진보를 이룩한 참된 신자들도 많이 있었다.
100:5.4
(1099-2)
소위 종교적인 회심이라 불리는 것들과 연관된 극적인 현상들 대부분은 본성에서는 전적으로 심리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때로는 그 근원이 영적인 그러한 체험들이 분명히 일어난다. 심적 동원이, 영 달성을 향한 정신적 발돋움의 어떤 차원에서 절대적으로 모든 것이 되었을 때는, 신성한 관념에 대한 충성에서 인간 동기의 완전함이 존재하고 있을 때는, 내주하는 영이, 믿고 있는 필사자의 초(超)의식적 마음의 집중되고 성화되어 있는 목적에 동조하기 위하여, 갑자기 내려와-잡아채는 일이 매우 자주 발생한다. 그래서 종교적 회심은, 그처럼 지적이면서 영적 현상이 통합되는 그러한 체험이라서, 순수하게 심리적인 개입 위에서, 그리고 그것을 뛰어 넘는 요소들로서 구성되어 있다.
100:5.5
(1099-3)
그러나 감정 자체만으로는 잘못된 회심이다; 느낌뿐만 아니라 신앙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한 심리적 동기가 부분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인간적-충성심의 동기가 미완성(未完成)인 한, 회심의 체험은 그 정도에서 지적이고 감정적이며 영적인 실체가 혼합된 상태가 될 수 있다.
100:5.6
(1099-4)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의 이론적 잠재의식 마음을 통합된 다른 지적 삶 속에 있는 실천적으로 작용하는 전제로 이해할 마음이 있다면, 그는 초의식적 차원처럼 상승하는 지적 활동의 비슷하고 상응하는 영역, 내주 하는 영적 실존개체인 생각 조절자와 즉각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영역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이러한 모든 심리적 고찰 속에 있는 큰 위험성은 색다른 꿈들을 포함하여 환상들과 소위 신비로운 체험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인간 마음을 향한 신성한 교통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신성한 존재들이 하느님을 아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나타내어 온 것은, 그들의 신비로운 황홀경이나 병적인 환상들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현상들을 무시한 상태에서였다.
100:5.7
(1099-5)
전환을-추구하는 것과 대조해서, 생각 조절자와의 접촉이 가능할, 모론시아 지대에 더욱 잘 접근하는 길은 살아있는 신앙과 진지한 경배, 전심을 다하고 그리고 사심-없는 기도를 통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요컨대 인간 마음의 무의식적 차원에서 기억들이 용솟음쳐 오르는 것 가운데 너무 많은 것들이, 신성한 계시와 영이 인도하는 것으로 잘못 다루어져 왔다.
100:5.8
(1099-6)
종교적 백일몽의 습관적인 실천 관행과 연관되는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신비주의는 하나의 실체 기피의 기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때로 참된 영적 교제의 수단이 되어 왔다. 바쁜 삶의 현장으로부터 짧은 시기동안 물러나 있는 것이 심각하게 위험하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개인성의 장기간의 고립은 가장 바람직하지 못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망상적 의식에서의 황홀경과 같은 상태가 종교적인 체험으로 장려되어서는 안 된다.
100:5.9
(1099-7)
신비적인 상태의 특징은, 비교적 수동적 지능위에서 작용하는, 주의가 집중된 상태에서의 생생한 섬과 함께 하는 의식의 확산이다. 이 모든 것은 영적 접촉의 지대, 즉 초의식의 방향으로 들어가기보다는 오히려 잠재의식을 향하여 의식을 낮은 곳으로 끌어내리게 하는 것이다. 많은 신비주의자들은 자신의 정신적 분리작용을 비정상적인 정신적 현시활동의 차원까지 옮겨왔다.
100:5.10
(1100-1)
영적인 명상의 보다 더 건전한 태도는 사려 깊은 경배와 감사기도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육체 속에 있었던 예수의 일생 중에서 후기에 발생하였던 것과 같은, 자기 생각 조절자와의 직접적인 교제는 소위 신비적 체험이라고 불리는 것들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신비적인 교제의 개시에 기여하는 요소들은 그러한 심리 상태들의 위험성을 암시한다. 신비상태는 다음과 같은 것들에 의해 촉진된다: 그것은 육체적 피로, 금식, 심리적 분열, 깊은 심미적 체험, 생생한 성적 충동, 두려움, 불안, 분노, 격렬한 춤이다. 그러한 예비행사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물질적 것의 대부분은 잠재의식 마음에서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100:5.11
(1100-2)
그 조건들이 신비적 현상들에게 아무리 호의적이더라도, 나사렛 예수파라다이스 아버지와 교제하기 위하여 그러한 방법에 의존하지 않으셨음을 분명히 납득해야만 한다. 예수는 잠재의식적 망상 또는 초(超)의식적 환상을 이용하지 않으셨다.
6. 종교적인 삶의 징후들
100:6.1
(1100-3)
진화 종교와 계시 종교는 방법상에서 분명하게 다른 반면, 동기에 있어서는 매우 비슷하다. 종교는 삶에 있어서 하나의 명확한 기능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삶의 방식이다. 참된 종교는 그 종교인이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모든 인류를 위하여 최극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실체에게 전심으로 제공하는 헌신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들의 뚜렷한 특징은: 최극 가치들에 대한 의심하지 않는 충성심과 전심으로의 헌신이다. 최극 가치에 대한 이 종교적 헌신은 종교심이 없다고 생각되는 어머니의 자기 자식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에서 그리고 비종교인이 지지하는 이유에 대하여 보이는 열렬한 충성심 속에 나타난다.
100:6.2
(1100-4)
그 종교인이 용납한 최극의 가치는 열등한 것일 수 있고 또는 심지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종교적이다. 종교는 최극의 것으로 유지되는 그 가치가 정말로 참된 영적 가치를 갖는 조화우주 실체가 되는 바로 그 한도 내에서 참되다.
100:6.3
(1100-5)
종교적인 충동에 대한 인간 반응의 표시들에는 숭고함과 웅장함의 본질특성들이 있다. 진지한 종교인은 우주의 시민 됨을 의식하며 초인간적 힘의 근원들과 접촉하는 것을 인식한다. 그는 하느님아들들의 우월한 고상한 친교에 소속된다는 확신으로 감격하고 격려를 받는다. 자아-가치에 대한 의식은 가장 높은 우주적 목표들─최극의 목표들─을 향한 탐색의 충동에 의해서 증강된다.
100:6.4
(1100-6)
자아는 높아지는 자아-단련을 강요하고 감정적 갈등을 줄이게 하는, 그리고 필사자 삶을 정말로 가치 있는 삶으로 만들어주는, 모든 것을-포옹하는 동기의 흥미를 일으키는 충동에 몸을 맡기어 왔다. 인간적 한계들에 대한 과민한 인식은, 가장 높은 우주적 그리고 초우주적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한 도덕적인 결정과 영적인 열망에 연관되어서, 필사자의 결점들에 대한 자연 본성적 의식으로 바뀐다. 그리고 초인간적 이상들의 달성에 대한 열정적인 이 분투는 항상 증가하는 인내와 자제심과 꿋꿋함 그리고 관대함으로 특징 지워진다.
100:6.5
(1100-7)
그러나 참된 종교는 삶을 살아가는 사랑이며, 봉사하는 일생이다. 순전히 일시적이고 사소한 많은 것에서 벗어나는 종교인의 초연함은 결코 사회적 고립으로 이끌지 않으며, 또한 그것이 유머 감각을 파괴해서도 안 된다. 진정한 종교는 인간 실존으로부터 아무 것도 빼앗지 않고, 오히려 삶의 모든 것에 새로운 의미들을 더해 준다; 새로운 유형의 열정, 열의 그리고 용기를 발생시킨다. 그것이 십자군 전사의 영까지 불러 일으킬 수 있지만, 만일 영적 통찰력에 의해서 그리고 인간 충성심에서의 평범한 사회적 책무에 대한 충실한 헌신에 의해서 통제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위험한 정도가 아니고 그 이상이다.
100:6.6
(1101-1)
종교적인 삶의 가장 놀랄만한 특징들 중의 하나는 역동적이고 장엄한 평화인데, 그 평화는 모든 인간들을 납득시키는, 모든 의심과 혼란의 부재(不在)를 나타내는 조화우주 평형이다. 그러한 영적 안정성의 차원들은 실망의 원인을 제거해 준다. 그러한 종교인들은,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에 있는 것도 장차 도래할 것도 높음도 깊음도 그밖에 다른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에서 분리시킬 수 없음을 나는 확신한다.”고 말한 사도 바울과 같다.
100:6.7
(1101-2)
최극자의 실체를 파악하는 그리고 궁극자의 목표를 추구하는, 종교인의 의식 속에 내재하는, 승리를 거두는 영광의 실현과 연관된, 어떤 안전감에 대한 느낌이 있다.
100:6.8
(1101-3)
심지어 진화 종교도 충성심과 장대함에 있어서 이 모든 것이 해당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참된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시 종교는 참될 뿐만 아니라 지극히 훌륭하다. 증대된 영적 선견지명에 대한 새로운 충성심은 새로운 차원의 사랑과 헌신, 봉사와 교제를 창출한다; 사회적인 전망을 증진시킨 이 모든 것은 하느님아버지신분과 사람의 형제신분에 대한 의식을 확대시킨다.
100:6.9
(1101-4)
진화된 종교와 계시된 종교 사이의 특징적인 차이는, 순전히 체험적인 인간적 지혜에 덧붙여진 신성한 지혜의 새로운 본질특성이다. 그러나 신성한 지혜와 우주적인 통찰력의 증가되는 증여를 그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역량을 발전시키는 것은 인간적인 종교들 속에서 갖는 체험과 그 종교들을 체험하는 것이다.
7. 종교적인 삶의 절정
100:7.1
(1101-5)
유란시아에 있는 보통 수준의 필사자들이, 나사렛 예수가 육체 속에 머무른 동안 달성하셨던 성격의 높은 이상에 다다르게 되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예수의 개인성의 완전해진 계통들을 따라서 하나의 강력하고 통일된 개인성을 개발하는 것은 모든 필사자 신자들에게 전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주(主)의 개인성의 독특한 모습은 그것의 완전성보다는 오히려 그 균형, 그 섬세함 그리고 지극하고 치우치지 않은 통일성이었다. 예수에 대한 가장 감동적인 소개는 어떤 사람이 자기를 고소하는 자들 앞에 서 계신 주(主)를 향하여 손짓하며 “이 사람을 보라!”고 말하였던 본보기에서 볼 수 있다.
100:7.2
(1101-6)
예수의 어김없는 친절이 필사자들의 가슴에 감동을 주었지만, 그의 건장하고 힘찬 성격은 그의 추종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참으로 성실하였다; 그 어떤 아무런 위선도 그에게는 전혀 없었다. 그는 허식이 없었다; 항상 매우 신실하게 진심이었다. 그는 결코 겉치레로 자신을 낮춘 적이 없었으며, 가식을 부리는 것에 안주한 적이 결코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가르쳤던 것과 똑같은, 진리로 사셨다. 그는 진리 그 자체였다. 그는 당대의 사람만을 구원하는 진리를 선포하도록 강요되었었고, 그에 대한 진지함이 때때로 고통의 원인이 되었지만 그렇게 하였다. 그는 의심하지 않고 모든 진리에 충성을 바쳤다.
100:7.3
(1101-7)
그러나 주(主)는 너무나 이성적이었고, 너무나 가까이할 수 있는 분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계획들이 그처럼 성스럽게된 상식으로 특징을 지니게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모든 사명활동에서 너무나도 실천적이었다. 그는 기형적이고 변덕스럽고 괴벽스러운 모든 경향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셨다. 그는 변덕스럽거나 별나거나 이성을 잃는 경우가 한 번도 없으셨다. 그의 모든 가르침 속에 그리고 그가 행한 모든 것들 속에는 항상 정교한 분별이 있었으며 그것은 예의를 갖춘 비범한 감각이 따르고 있었다.
100:7.4
(1102-1)
사람의 아들은 항상 매우 침착한 개인성을 유지하셨다. 심지어는 그의 적들도 그에게 건전한 존중을 나타냈다; 그들은 그의 현존을 두려워하기까지 하였다. 예수는 신성한 열심히 넘치게 채워져 계셨지만, 광신적으로 된 적이 결코 없었다. 그는 감성적으로 활발하셨지만 경솔한 적이 결코 없었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하셨지만 항상 실천적이셨다. 그는 삶의 실체들과 솔직하게 마주하셨으나, 흥미 없거나 둔감하신 적이 결코 없었다. 그는 용감하셨지만 무모하시지 않았다; 세심하시면서도 결코 심약하지 않으셨다. 그는 동정심이 깊으셨지만 정서에 빠지지 않으셨으며; 독특하셨지만 괴상하지는 않으셨다. 그는 경건하셨지만 경건한 척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는 매우 침착하셨는데 이는 그는 너무나도 완전하게 통합되었기 때문이었다.
100:7.5
(1102-2)
예수의 기원성은 억압받지 않았다. 그는 전통에 묶이거나 제한된 인습에 젖음으로써 방해를 받는 일이 없으셨다. 그는 확실한 자신감을 가지고 말씀하였으며 절대적 권한으로 가르치셨다. 그러나 그의 장엄한 기원성은 그로 하여금 그보다 전에 그리고 동시대에 있던 사람들의 가르침 속에 있는 진리의 보석들을 경시하도록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들 중에서 가장 기원적인 것은 두려움과 희생 제물 대신에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신 것이었다.
100:7.6
(1102-3)
예수는 매우 넓은 견해를 갖고 계셨다. 그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간곡히 타이르셨다. 그에게는 편협함이 없었다. 그의 동정적인 가슴은 모든 인류 그리고 우주까지라도 포옹하였다. 그의 초청의 말씀은 항상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내게로 오라”는 것이었다.
100:7.7
(1102-4)
예수께 있어서는 “그가 하느님을 신뢰하셨다”는 것이 정말로 맞는 말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가장 탁월하게 신뢰하셨다. 그는 어린아이가 자기 육신의 아버지를 신뢰하듯이 자신의 아버지를 신뢰하셨다. 그의 신앙은 완전하였지만 무례한 적이 결코 없었다. 잔인한 자연본성이 어떻게 나타나든지 또는 이 세상에서의 사람의 복지에 관계가 없을지라도, 예수는 자신의 신앙에서 벗어나신 적이 없었다. 그는 실망을 당할 염려가 없었으며 박해에 영향을 받지 않으셨다. 그는 외견상의 실패에 의해서 흔들리는 법이 없으셨다.
100:7.8
(1102-5)
그는 사람들을 형제로서 사랑하셨으며, 동시에 그들이 타고난 자질과 후천적인 본질특성에서 매우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셨다. “그는 부지런히 선(善)을 행하셨다.”
100:7.9
(1102-6)
예수는 유별나게 쾌활한 사람이셨지만, 맹목적이고 불합리한 낙관주의자는 아니셨다. 그가 늘 훈계하신 말씀은 “명랑한 기분을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이러한 자신감 있는 태도를 유지하실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신념과 사람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항상 측은한 심정으로 이해하셨는데, 그것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믿으셨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대한 자신의 헌신에 있어서 숭고하게 확고하였고 자신의 신념에 대하여 항상 진실하셨다.
100:7.10
(1102-7)
주(主)는 언제나 관대하셨다. 그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욱 축복이 있다”고 말하시는 데에 결코 지치지 않았다. 그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나 거저 주어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한, 그의 한없이 관대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낭비적이거나 지나치신 적이 없었다. 그는 구원을 받기 위헤서는 너희가 믿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치셨다. “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받아들일 것이다.”
100:7.11
(1102-8)
그는 솔직하면서도 항상 친절하셨다. 그는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숨김이 없었지만, 항상 친근하셨다. 그는 죄인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죄에 대한 자신의 증오를 거리낌 없이 선언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솔직함 전체에 있어서 그는 틀림없이 공정하셨다.
100:7.12
(1102-9)
예수는 가끔 인간적인 슬픔의 잔을 깊이 들이마시기도 하였지만, 변함없이 쾌활하셨다. 그는 실존하는 실체들에 대담하게 대면하셨고, 더욱이 왕국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으셨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열심을 통제했다; 그것이 그를 통제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일”에 아낌없이 전념하셨다. 이러한 신성한 열정이 비(非)영적인 그의 형제들로 하여금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지만, 지켜보고 있던 온 우주는 그를 온전한 사람의 본보기로 그리고 영적 삶에서의 높은 기준에 대한 최극의 필사자 헌신의 원형틀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의 통제된 열심은 확 전염되었다; 그의 연관-동료들은 그의 신성한 낙관주의를 공유하는 것에 갇히게 되었다.
100:7.13
(1103-1)
이 갈릴리 사람은 슬픔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기쁨의 혼이었다. 그는 “기쁨을 향유하고 넘치도록 즐거워하라”고 항상 말씀하셨다. 그러나 의무가 요구될 때, 그는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를 기꺼이 용감하게 걸으려 하셨다. 그는 기쁨에 찬 사람이셨지만 동시에 겸손하셨다.
100:7.14
(1103-2)
그의 용기는 그의 참을성에 못지 않았다. 조급하게 행동하도록 강요받았을 때, 그는 오직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대답하곤 하셨다. 그는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그의 침착함은 숭고하였다. 그러나 그는 악에서는 자주 분개하셨고 죄를 참지 못하셨다. 그는 땅에 있는 자기 자녀들의 번영에 해를 끼치는 것에 저항하려고 자주 강력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죄에 대한 그의 분개가 죄인에 대한 분노로 이끈 적은 결코 없었다.
100:7.15
(1103-3)
그의 용기는 뛰어났지만, 그는 결코 무모한 적은 없었다. 그의 표어는 “두려워 말라”였다. 그의 용감성은 드높았고, 그의 용기는 자주 영웅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용기는 사려 깊은 분별력과 연결되어 있었고 이성에 의해 통제되었다. 그것은 신앙에서 탄생된 용기였고, 맹목적 추측에서의 무모함이 아니었다. 그는 참으로 용감하였지만 호기를 부린 적은 결코 없었다.
100:7.16
(1103-4)
주(主)는 존경의 원형틀이셨다. 그가 젊었을 때에도 그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로 시작되었다. 그는 자기 동료들의 그릇된 경배조차도 존중했다. 그러나 이것이 종교적 전통에 대해 공격 하거나, 잘못된 인간의 믿음에 대하여 공격을 하는 것을 가로 막지는 않았다. 그는 참된 성스러움은 존경하였지만, 자기 동료들에게는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인이라 확신하겠느냐?”라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
100:7.17
(1103-5)
예수는 자신이 선하셨기 때문에 위대하셨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린아이들과 형제우애관계를 가졌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삶에 있어서 온화하고 겸손하셨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우주의 완성된 사람이셨다. 그의 연관-동료들은 그를 자발적으로 주(主)라고 불렀다.
100:7.18
(1103-6)
예수는 완전하게 통합된 개인성이셨다. 그리고 갈릴리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오늘도 필사자의 체험을 통합하고 인간의 수고들을 조화-협동하는 것을 계속하시고 있다. 그는 일생을 통합하고, 성격을 고귀하게 하며, 체험을 단순화하신다. 그는 인간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높이 올리고, 변환시키고 그리고 변모시킨다. 다음의 이것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 안에 그리스도 예수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새로운 창조체이다; 옛 것들은 지나가고 있다; 보라,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되어가고 있다.”
100:7.19
(1103-7)
[네바돈멜기세덱에 의해 제시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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