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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4] 고별 강연
[04/06] 최후의 만찬
[04/07] 십자가 죽음

두려움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7-24

본문

두려움

fear.jpg 예루살렘에서의 첫째 날에 예수는 한때 높은 사제이었고 세베대의 부인 살로메의 친척이며 자신의 옛날 친구인 안나스를 방문하였다. 안나스는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는데, 예수가 그 높은 사제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거리감을 가지고 그를 대했다. 예수가 안나스의 냉정함을 눈치 채시고 곧 바로 그 집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씀하였다: “두려움이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주범이고 자만심이 그것의 가장 큰 약점이며; 당신은 자신을 배반하여, 기쁨과 해방을 파괴하는 이 두 가지 모두의 노예가 되고자 하는가?” 그러나 안나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주(主)는 그가 사람의 아들을 심판하는 자리에서 그의 사위와 앉아 있기 전까지는 그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
[142:0.2]

인간 삶의 영 지배 의식은 영으로 인도되는 그러한 필사자의 삶 반응에서 영의 특징들의 증가되는 출현으로 수반된다. “왜냐하면 영의 열매들은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선(善), 신앙, 온유함, 그리고 절제이기 때문이다.” 영으로 인도되고 신성하게 조명을 받는 그러한 필사자들은, 그들이 아직 고생의 초라한 길을 걷고 인간적 성실에서 그들의 세상 과제의 임무들을 수행하는 반면, 영원한 삶의 빛들이 다른 세계의 멀리 떨어진 해안에서 희미하게 깜박일 때 그것들을 이미 식별하기 시작하였다; 영감을 주고 위안을 주는 진리, “하느님의 왕국은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고 성령 안에서의 정의(正義)와 평강과 기쁨에 있다”는 것의 실체를 그들은 이미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모든 시험에 두루 그리고 모든 고단함의 현존에서, 영으로 태어난 혼들은 하느님의 사랑이 신성한 영의 현존에 의해 모든 가슴속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모든 두려움을 초월하는 그 희망에 의해서 지탱된다.
[34:6.13]
자신들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신앙에 따라 당당히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유 없는 두려움은 진화하는 필사자 혼에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지능적 기만의 지배자이다.
[48:7.4]
너무나도 종종, 아주 너무나도 종종, 너희는 너희 마음을 불성실로 훼손시키고 부당함으로 상처를 입히며; 너희는 그것을 동물적 두려움에 굴복시키고 쓸데없는 걱정으로 왜곡시킨다. 그래서 마음의 근원은 신성하지만, 상승하는 너희 세계에서는 너희가 잘 아는 것처럼 마음은 위대한 찬미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찬양이나 경배는 더 더욱 될 수없다. 미성숙하고 비활동적인 인간 지성의 깊은 사색은 오직 겸허함의 반응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9:5.7]
영속하는 삶의 길을 시작하였으며, 임무배정을 받아들였고 전진하라는 너희의 절차들을 받았음으로, 인간의 잊어버리는 위험과 필사자의 변덕스러움을 두려워하지 말고, 실패하리라는 의심이나 비틀거리는 혼란으로 괴로워하지 말며, 너희의 지위와 위치에 의심하지도 머뭇거리지도 말라, 왜냐하면 어두운 매 순간마다, 앞으로 나아가는 투쟁의 길목에서, 진리의 영이 항상 “이것이 그 길이다”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34:7.8]
너희 종교는 실제적인 것이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두려움에 대한 노예 그리고 미신의 속박으로부터 창발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의 철학은 교리와 전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투쟁한다. 너희들의 과학은 진리와 잘못 사이에서 오랫동안 투쟁하는 한편 추상적 속박, 수학의 노예, 그리고 기계적 물질주의의 상대적 무지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싸운다.
[12:9.5]
그 천사들은 그들의 인간 동료들을 향한 영구적인 애정을 발전시키며, 만일 너희가 그 성(聖)천사들을 볼 수만 있다면, 너희도 그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갖게 될 것이다. 물질적인 육신을 떠나 영 형태가 주어지게 되면, 너희는 개인성의 많은 속성들 속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그 천사들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너희의 감정들 대부분을 공유하며 다른 부가적인 것들도 체험한다. 그들에게는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너희에게 작용하는 유일한 감정은, 유란시아에 거주하는 평균적인 사람들의 정신생활 속에서 매우 크게 증가하는 동물적 두려움의 유산이다. 그 천사들은 왜 너희들이 너희의 보다 높은 지적 힘으로 하여금, 그리고 심지어는 너희의 종교적인 신앙마저도, 두려움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그토록 끈질기게 허용하는지, 공포와 불안이라는 경솔한 당황감에 의해 그토록 속속들이 혼란이 되는지 납득하기가 거의 불가능함을 실제적으로 발견한다.
[113:2.5]
그들로 부터 너희는 안정성과 확실성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법; 신실하고 정직하며 그 위에 쾌활하게 되는 법; 불만 없이 도전을 받아들이고 두려움 없이 어려움과 불확실성에 맞서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만일 너희가 실패한다면, 너는 새로 시도하기 위해 굽히지 않고 일어설 것인가? 만일 너희가 성공한다면, 물질적 타성의 족쇄를 부수기 위한, 영 실재의 자유를 달성하기 위한 긴 투쟁에 두루, 모든 노력에서 균형 잡힌 평형─안정되고 영성화된 태도─을 유지할 것인가?
[48:6.24]
종교적인 의미들은 자녀가 전능(全能)함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자기 부모로부터 하느님께로 돌릴 때 자아-의식 속에서 진보를 이룩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녀의 종교적인 체험 전체는 주로 두려움 또는 사랑 중에 어떤 것이 부모-자식 관계를 지배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노예들은 주인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하느님-사랑의 개념으로 바꾸는 데 있어서 큰 어려움을 항상 체험한다. 문명과 과학 그리고 진보된 종교들은 자연 현상들에 대한 공포심에서 발생된 이러한 두려움들로부터 인류를 구출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더욱 확대된 계몽이, 신(神)과 교제를 나누는 데 있어서 중간 매개물에 의존하는 모든 현상으로부터 교양 있는 인간들을 구출해 내야만 한다.
[92:7.7]
영적 분투의 시기. 진화하는 필사자들이 육체적, 지적, 그리고 사회적 발달 단계를 지나갔을 때, 그들은 그들로 하여금 영적인 만족과 조화우주 납득을 추구하도록 재촉하는 개인적 통찰력의 차원들을 곧 달성한다. 종교는 두려움과 미신의 감정적 권역들로부터 조화우주 지혜 그리고 개인적인 영적 체험의 높은 차원에 이르는 향상을 완성해 간다. 교육은 의미들의 달성을 열망하고 문화는 조화우주 관계들과 참된 가치들을 잡으려고 한다. 진화하는 그러한 필사자들은 진정으로 문화화 되었고, 참으로 교육되었으며, 지극하게 하느님을 안다.
[50:5.9]
믿음은 의심을 이겨내거나 두려움을 견뎌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앙은 항상 의심을 이겨내고 승리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긍정적이고 또한 동시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보다, 진리가 실수보다, 체험이 이론보다, 영적인 실체가 시간과 공간의 고립된 사실들보다 언제든지 우월하다. 영적인 이 확실성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는, 그러한 신자들, 신앙인들이 참된 이 영적 체험의 결과로 맺힌 영의 사회적 열매 속에 있다.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 이웃을 사랑한다면,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다.”
[102:6.7]
조절자는 정신을 온통 파괴하지 않는 한, 모든 질병에 두루 그리고 모든 재난들 속에서도 너희와 변함없이 함께 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온 이 경이로운 선물을 위해 마련된 이 땅에서의 장막인 물질 몸체를 고의적으로 오염시키거나 또는 불결하게 하는 것은 얼마나 악의적으로 가혹한 것이겠는가. 모든 물리적 독물은 물질 마음을 드높이려는 조절자의 노력을 심하게 저지하며, 한편으로 두려움,노여움, 질투심, 투기,의심, 그리고 편협함 같은 정신적 독물은 진화하는 혼의 영적 진보를 엄청나게 방해한다.
[110:1.5]
계시된 진리, 개인적으로 발견된 진리는, 인간 혼의 최극의 기쁨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마음과 내재하는 영이 공동으로 창조한 것이다. 진리(眞)를 식별하고 아름다움(美)을 사랑하는 이 혼의 영원한 구원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하느님을 찾으며 그를 닮아가려는 단 한 가지의 목적만을 개발하도록 이 필사자를 인도하는 선(善)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에 의하여 확인된다. 진정한 지식과 진리 사이에는 아무 충돌이 없다. 지식과 인간 신념들, 편견으로 채색되고, 두려움에 의해 변형되고, 물질적 발견이나 영적 진보의 새로운 사실들에 대처하는 것을 두려워함으로써 지배를 당하는 신념들 사이에서는 아마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132:3.4]
튼튼한 성격들은 그릇된 일을 행하지 않는 것에서 유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제로 올바른 행동을 함에서 유래된다. 사심 없음은 인간 위대함의 상징이다. 최고의 자아-실현은 경배와 봉사로서 달성진다. 행복하고 효력적인 사람은 그릇된 행위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올바른 행위에 대한 사랑에 의해 동기가 유발된다.
[140:4.6]
3. “온유한 자들은 행복할 것이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온유함은 두려움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오히려 하느님께 협조하려는 사람의 태도─“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이다. 그것은 인내와 참음을 포옹하며 합법적이고 우호적인 우주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앙에 의해서 동기가 부여된다. 그것은 신성한 인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모든 유혹들을 물리친다. 예수는 유란시아에서 가장 이상적인 온유한 사람이었으며 광대한 하나의 우주를 상속받았다.
[140:5.11]
3. “화평케 하는 자들은 행복할 것이니, 저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평화가 아닌 무력으로 해방시켜줄 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말씀하는 평화는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재판과 박해에 직면하였을 때 예수는, “나의 평강이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너희는 가슴에 파란이 일게 하거나, 두려워하지도 마라."라고 말씀하였다. 이것은 파괴적인 갈등을 미리 방지하는 평화이다. 개인적 평화는 개인성을 집대성한다. 사회적 평화는 두려움과 탐욕과 분노를 막는다. 정치적 평화는 인종적 반목과 민족적 의심 그리고 전쟁을 막는다. 화평케 하는 것이 불신과 의심을 막는 길이다.
[140:5.18]
물리적 우주에서 우리는 신성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지적 세계에서 우리는 영원한 진리를 식별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선함은 오직 개인적 종교 체험의 영적 세계에서만 발견된다. 그것의 참된 본질에 있어서, 종교는 하느님의 선함에 대한 신앙-신뢰이다. 철학적으로 볼 때, 하느님은 위대하고 절대적이며 심지어는 지능적이고 개인적 일 수 있지만, 종교적으로 볼 때 하느님은 또한 도덕적임에 틀림없다; 그는 선하심에 틀림없다. 사람은 위대한 하느님은 두려워했겠지만, 그러나 사람은 오직 선하신 하느님만을 신뢰하고 사랑한다. 하느님의 이 선함은 하느님의 개인성의 일부분이며, 그것에 대한 그 충만한 계시는 오직 하느님의 믿는 아들들의 개인적 종교 체험에서만 나타난다.
[2:6.1]
진화하는 종교들의 도덕은 하느님 탐구에 있어서 두려움이라는 원동력에 의해 사람들을 앞으로 몰아간다. 계시의 종교들은 사랑의 하느님을 찾도록 사람들을 유도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그처럼 되기를 열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는 단순히 "절대적 의존"과 "생존의 보장"이라는 소극적인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성 봉사에 근거를 두는 신성 달성의 살아있고 역동적인 경험이다.
[5:4.1]
“너희의 선조는 하느님의 강하심과 신비로움으로 인해 그를 두려워하였다. 너희는 그를 찬미할 것이니 이는 그가 사랑에서 비할 데 없고, 자비에서 충만하며, 그리고 진리에서 영광스럽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힘은 사람의 가슴속에서 두려움을 일으키지만, 그의 개인성에서의 고귀성과 정의로움은 공경, 사랑, 기꺼이 경배를 하게 만든다. 충실하고 애정 어린 자녀는 막강하고 고귀한 아버지일지라도 그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다. 내가 두려움의 자리에 사랑으로, 슬픔의 자리에 기쁨으로, 공포의 자리에 자신감으로, 노예적인 억압과 무의미한 의식(儀式)의 자리에 사랑의 봉사와 감사의 경배로 바꾸어 놓기 위하여 이 세상에 왔다. 그러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 된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그러나 빛이 좀 더 충만하게 비추었을 때, 하느님의 자녀는 그가 행하신 일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기보다는, 그가 그 이신 것 때문에 무한자를 찬양하도록 인도된다.
[149:6.5]
진화 종교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두려움, 알려지지 않고 설명할 수 없으며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 앞에 직면한 인간 마음속으로 파도처럼 밀려오는 두려움으로부터 탄생되었다. 종교는 모든-힘을 지닌 사랑, 우주의 아들들에 대한 우주 아버지의 무한한 애정에 대한 개념에 눈을 뜨게 되었을 때 인간의 혼을 통하여 불가항력적으로 휘몰아치는 사랑에 대한 몹시 단순한 깨달음을 결국에는 성취하게 된다. 그러나 종교적 진화의 시초와 성취 사이에는, 오랜 기간 동안의 무당들의 시대가 끼어 있는데, 그들은 중개자과 통역자 그리고 조정자로서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 서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90:0.3]
계시된 종교를 가르치는 학교. 이 분야는 기능을 발휘하는 데 있어서 속도가 느렸다. 유란시아의 문명은 정말로 두려움이라는 망치와 필요성이라는 모루 사이에서 연마됨으로써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 집단은, 배반으로 인한 격변에 따라 부수적으로 발생된 후대의 혼란에 의해서 그들의 노고가 중단되기 전에 창조체의 두려움 (유령 경배) 대신에 창조주에 대한 경외심으로 대치시키려고 하는 그들의 시도에 있어서 상당한 진전을 이룩하였다. 이 협의회의 수장(首長)은 합이었다.
[66:5.13]
원시인 존재들은, 단순한 개인 단위들의 집합보다는 집단이 훨씬 더 훌륭하고 강하다는 것을 일찍부터 배우게 되었다. 100명의 남자들이 결합하여 힘을 합쳐 일하면 거대한 돌도 움직일 수 있으며; 잘 훈련된 다수의 평화 수호자들은 흥분한 군중을 자제시킬 수 있다. 그리하여 사회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개개인들의 단순한 연합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능적인 협동자들의 조직을 이룬 결과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협동은 사람의 자연적인 특색이 아니며; 처음에는 두려움을 통하여 협동하는 것을 배웠고, 나중에는 시간적인 어려움들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장차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들을 방지함에 있어서 그것이 가장 유익한 것임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68:1.4]
본래의 사람에게 있는 집단 본능은, 유란시아에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러한 사회적 조직의 발전을 이룩할 정도로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선천적인 집단적 성향이 인간 사회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하더라도, 사람의 사교성 대부분은 습득되는 것이다. 인간 존재들이 초기에 연합을 이루는 데 있어서 가장 크게 영향을 주었던 두 가지 요소는 양식에 대한 열망과 성(性)적인 사랑이었으며; 이러한 본능적인 충동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동물 세계와 공유하도록 강요하였다. 인간 존재들로 하여금 억지로 함께 있도록 하고 그들을 하나로 묶었던 두 가지 다른 감정들은 공허함과 두려움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귀신에 대한 두려움이 심하였다.
[68:2.4]
원시적인 욕망들은 기원적 사회를 형성시켰다, 그러나 귀신에 대한 두려움이 사회를 묶게 하였고 그 실재에 관한 인간 외적인 양상을 전해주었다. 일반적인 두려움은 생리적으로 기원된 것인데 즉: 육체적인 고통, 만족되지 못한 열망, 또는 이 세상의 어떤 재난에 대한 두려움이지만, 귀신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의 새롭고도 심한 종류의 공포였다.
[68:3.1]
fear2.jpg 영적으로 암흑 시대였던 이 기간 동안,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인류 문화는 가장 낮은 차원에 도달해 있었다. 네안데르탈인들은 정말로 조잡스러운 미신 이상(以上)의 종교를 갖지 못하였다. 그들은 구름에 대하여, 그리고 특별히 이슬비와 안개 현상에 대하여 극단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자연 현상의 기세에 대한 두려움으로 생긴 원시적 종교가 점점 더 발전되었고, 반면에 동물을 경배하던 현상은 도구들이 발달되면서 점차 퇴보되었으며, 사냥감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이 종족은 양식에 대한 염려 없이 살 수 있었고; 사냥에 대한 성(性)적 보상으로 인하여 수렵 기술이 크게 발달되는 경향이 있었다. 두려움의 이 새로운 종교는 이들 자연 요소들 뒤에 있는 눈에 안 보이는 기세들을 달래려는 시도로 이끌었고, 나중에는 눈에 안 보이는 이들 미지(未知)의 물리적 기세들을 진정시키려고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인간 제물의 이 끔찍한 관습은, 유란시아의 좀 더 뒤떨어진 민족들에 의해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왔다.
[64:4.12]

이러한 귀신의 요소를 제외한다면, 모든 사회는 근본적인 필요성들과 기본적인 생물학적 충동들 위에 새워졌다. 그러나 귀신에 대한 두려움은 문명에 하나의 새로운 요소, 각 개별존재의 기본적인 필요들로부터 밖으로 뻗어 나가고 멀리까지 퍼지는 그리고 그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보다도 훨씬 심각하게 떠오르는 하나의 두려움을 제공하였다. 죽은 시체로부터 떠난 영들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의 새롭고도 놀라운 형태의 두려움, 무시무시하고 강렬한 공포심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그것은 초기 시대의 산만한 사회 계층이 더욱 속속들이 질서가 잡히도록 기여하였고 고대의 원시 집단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교육단련 하도록 기여하였다. 이러한 어리석은 미신은, 그 중의 일부는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데, 비(非)존재적이고 초자연적인 미신적 두려움을 통하여, 후대에 “지혜의 근원인 주님께 대한 두려움”을 발견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주었다. 진화에 대한 근거 없는 두려움들은, 계시에 의하여 영감을 받는 신(神)에 대한 외경심으로 대체되도록 되어 있다. 귀신을 두려워하는 초기 예식은 강력한 사회적 속박이 되었고, 그 후로 먼 훗날까지 인류는 영성(靈性) 달성을 위해 어느 정도 분투해왔다.
[68:3.3]
죽음은 진화하는 사람들에게 최극의 충격이었으며, 우연과 신비가 가장 복잡하게 얽힌 것이었다. 생명에 대한 존엄성 대신에 죽음에 대한 충격이 두려움을 불어넣었고 그리하여 효과적으로 종교를 조성시켰다. 야만적인 민족들 사이에서 죽음은 대개 폭력에 의해 발생되었기 때문에, 비폭력에 의한 죽음은 점점 더 신비한 것으로 여겨졌다. 자연적인 그리고 예상되는 삶의 종말로서의 죽음은 원시적 사람들의 의식에 의해 명쾌하게 파악되지 않았으며, 그것의 필연성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소요되었다.
[86:3.1]
생각조절자가 내주하는 모든 필사자들은 잠재적 경배자들이다; 그들은 “참 빛에 의해 비추어져”왔고, 그들은 신성과의 상호보답적인 접촉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시인의 초기 또는 생물학적 종교는 주로 무지로 인한 두려움과 부족적 미신이 가미된 동물적 두려움의 연속이다. 유란시아 종족들 속에 미신이 살아 있는 것은 물질적 진보 안에서의 너희들의 다른 훌륭한 성취들과 양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너희들의 진화적 발달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초기의 이 두려움의 종교는 이 원시적 창조체들의 불같은 기질을 진압하는 데 있어서 매우 가치 있는 역할을 감당한다. 그것은 행성영주와 그의 사명활동자들에 의해 계시된 종교의 씨앗들을 나중에 심기 위한 토양이며 문명화의 선구자이다.
[52:1.7]
이러한 개념들의 창발과 함께, 항상 화를 내는 영들을 달래기 위한 오랫동안의 낭비적인 투쟁, 진화적인 종교적 두려움에 노예처럼 속박된 상태가 시작되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인간은 무덤들과 신전(神殿)들과 희생 제물들 그리고 사제 제도들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을 낭비하였다. 그것은 혹독하고 무시무시한 대가였지만, 그 만큼의 가치가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으로부터 사람이 상대적인 옳고 그름에 대한 자연적인 의식을 성취하였기 때문이며; 인간의 윤리가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86:6.7]
귀신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세계적 종교의 근원이었으며; 여러 시대에 걸쳐서 많은 부족들이 같은 종류의 귀신들에 대한 옛 믿음을 고수하였다. 그들은 귀신이 즐거울 때 사람에게 행운이 따라오고 귀신이 화날 때 불운이 임한다고 가르쳤다.
[87:4.1]
옛날에는 권한을 가진 주물 낱말이 두려움을-일으키는 교리였는데, 사람들을 노예로 삼는 모든 폭군들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교리적인 주물은 필사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배반하여 편협한 신앙, 광신, 미신, 불관용, 그리고 가장 지독한 야만적인 학대의 족쇄를 채우게 하였다. 지혜와 진리에 대한 현대의 존중은, 주물을-만드는 경향으로부터 보다 높은 사고(思考)와 이성(理性)의 차원으로 올라가는 최근에 탈출하였을 뿐이다. 여러 종교가들이 성스러운 책으로 여겼던, 축적된 맹목적 숭배 기록들에 관해서는, 책 속에 있는 것이 진리일 분 아니라, 모든 진리가 그 책 속에 있다고 사람들이 믿었다. 만일 이들 성스러운 책 중에서 하나가 공교롭게도 지구가 평면이라고 말한다면, 오랜 세대 동안, 다른 한편으로는 온전한 남녀들이 행성이 둥글다는 분명한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88:2.7]
운(運)에 대한 두려움과 불행에 대한 공포는, 이러한 재난들을 막는 대비책으로 여겨지는 원시적인 종교를 창안하도록 문자 그대로 사람을 내몰았다. 종교는 마술과 귀신들로부터 진화하여 영들과 주물들의 단계를 거쳐 금기 사항들로 진화하였다. 원시적인 모든 부족들 각각은 금지된 열매의 나무, 글자 그대로는 사과나무이지만, 수천 개의 가지에는 온갖 종류의 금기 사항들이 무겁게 주렁주렁 달려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금지된 나무는 언제나 “이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89:2.1]
기도는 확립된 관습이 될 수도 있으며;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기도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정기적인 기원을 드리지 않으면 무서운 어떤 일이 발생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기도한다.
[91:8.3]
신비와 힘은 언제나 종교적 느낌과 두려움을 자극해 온 반면, 감정은 항상 그것들의 발전에 있어서 강력한 조절 요소로 기능하였다. 두려움은 언제든지 근본적인 종교적 자극제가 되어 왔다. 두려움은 진화 종교의 하느님들을 형성하였고 원시적인 신앙인들의 종교적 경배를 유발시켰다. 문명이 발전되자, 두려움은 경외심과 찬양과 존경심과 동정심에 의해 수정되었고, 그 다음에는 양심의 가책과 회개에 의해서 더욱 조절되었다.
[92:1.4]
종교는 언제든지 주로 종교예식, 예전(禮典), 계율, 예식, 교리의 문제였다. 그것은 대개 끊임없이 이간질하는 실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착각에 의해서 오염되게 되었다. 마법, 통찰력, 계시, 속죄, 죄 값, 회개, 중재, 희생 제물, 기도, 고백, 경배, 죽은 뒤의 생존, 성례, 예식, 면죄, 구원, 대속, 계약, 불결함, 정화, 예언, 원죄의 주요한 종교적 개념들─그것들은 모두 초기 시대의 귀신에 대한 원시적인 두려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92:3.2]
사람의 가장 큰 영적 위험은 부분적인 진보, 완성되지 않은 성장의 곤궁한 상태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의 계시 종교를 즉각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채 두려움의 진화 종교를 버리는 것이다. 현대 과학 특히 심리학은 두려움과 미신 그리고 감정에 거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그 종교들만을 약화시켜 왔다.
[99:4.8]
하나의 인간 체험으로서, 종교는 진화하는 야만인의 원시적 두려움의 노예 상태로부터, 영원한 하느님의 아들관계를 당당하게 의식하는 문명화된 필사자의 숭고하고도 웅장한 신앙 해방에 이르기까지 걸쳐있다.
[101:0.1]
너희가 신앙에 대한 그러한 변환을 체험할 때, 너희는 더 이상 수학적 조화우주의 노예와 같은 일부가 아니며 오히려 우주 아버지의 해방된 의지를 가진 아들이다. 그러한 해방된 아들은 일시적인 실재의 종말이라는 냉혹한 운명에 대항하여 더 이상은 홀로 싸우지 않는다; 더 이상은 모든 자연 현상, 자기에게 절망적으로 대항하는 불평등과 싸우지 않는다; 어쩌면 자신이 희망 없는 환상을 신뢰하거나 또는 상상력이 풍부한 실수에 자기 신앙을 고정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무력하게 만드는 두려움에 의해 더 이상 비틀거리지 않는다.
[101:10.8]
종교적 두려움을 철학적으로 제거하는 것과 그리고 꾸준한 과학의 발전은 잘못된 하느님들을 사라지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사람이 만든 신(神)들이 이렇게 사라짐으로써 영적인 선견지명을 일시적으로 흐리게 하더라도, 그들은 결국에는 영원한 사랑의 살아 계신 하느님을 그토록 오랫동안 불분명하게 만들었던 그 무지와 미신을 타파할 것이다. 창조체와 창조주 사이의 관계는 하나의 살아있는 체험, 명확한 경계에 속박되지 않는, 하나의 역동적인 종교적 신념이다. 삶의 일부를 고립시키고 그것을 종교라고 부르는 것은 삶을 분해시키고 종교를 왜곡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경배를 받으시는 하느님께서 모든 충성이 아니면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시는 바로 그 이유이다.
[102:6.1]
fear3.jpg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옛 종교와 새 종교의 사이에 있는 차이를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 옛 종교는 자아-희생물을 가르쳤고; 새 종교는 오직 자아-망각, 연합된 사회봉사와 우주 이해 속에서의 증진되는 자아-실현을 가르친다. 옛 종교는 공포를 인식함으로서 동기를 일으켰다; 새 왕국 복음은 진리에 대한 신념, 영원한 우주적 진리의 영에 의해서 좌우된다. 그리고 경건이나 교리에서의 충성이 아무리 크더라도, 왕국을 믿는 자들의 일생의 체험 속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영으로-태어난 아들들의 특징인, 그러한 자발적이고 관대하며 진지한 우정이 빠져있는 것을 보상해 줄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전통이나 형식적인 경배의 의례적 체계도 자기 동료에 대한 진정한 연민의 모자람을 보상할 수 없다.
[180:5.12]

예수의 기원성은 억압받지 않았다. 그는 전통에 묶이거나 제한된 인습에 젖음으로써 방해를 받는 일이 없으셨다. 그는 확실한 자신감을 가지고 말씀하였으며 절대적 권한으로 가르치셨다. 그러나 그의 장엄한 기원성은 그로 하여금 그보다 전에 그리고 동시대에 있던 사람들의 가르침 속에 있는 진리의 보석들을 경시하도록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들 중에서 가장 기원적인 것은 두려움과 희생 제물 대신에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신 것이었다.
[100:7.5]
그의 용기는 장엄하였지만, 무모한 적이 전혀 없었다. 그의 표어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의 용감성은 고상하였고 그의 용기는 종종 영웅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용기는 사려 깊은 분별력과 연결되어 있었고 이성에 의해 조정되었다. 그것은 신앙으로 탄생된 용기였고, 무모하게 맹목적인 무모함이 아니었다. 그는 참으로 용감하였지만 결코 무모하지 않으셨다.
[100:7.15]
“내 아들아, 너는 오늘 다시 태어났다. 신앙과 용기의 사람, 하느님을 위해, 사람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는 사람으로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네가 네 속에 내재하는 생명에게 재조정되었을 때, 너는 또한 우주에 대해서도 재조정될 것이며; 너는 다시 태어난─영의 탄생─것이고, 그러므로 너의 모든 일생은 승리의 성취 속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근심거리는 너에게 활력소가 될 것이며; 낙심은 너에게 격려가 될 것이고; 난관은 너에게 도전이 될 것이며; 장애물은 너에게 자극물이 될 것이다. 젊은이여, 깨어나라! 굽실거리고 도망 다니는 겁쟁이의 일생에 작별을 고하라. 그리고 서둘러 너의 임무로 돌아가서, 육체를 가진 하느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서 필사자의 기품 있는 봉사에 헌신하고 영원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뛰어난 그리고 영원한 봉사에 운명된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바란다.”
[130:6.4]
이곳 로마에서, 한 우주의 창조주가, 길 잃은 아이를 그의 걱정하던 어머니에게 돌려주느라 몇 시간을 지체했던 감동스러운 사건이 발생되기도 하였다. 이 어린아이는 집으로부터 먼 곳까지 방황하였고, 겁에 질려 울고 있는 그 아이를 예수가 발견하였다. 그와 가니드는 도서관에 가는 길이었지만, 그 아이의 집을 찾아 주는 일에 전념하였다. 가니드는 예수가 하였던 다음과 같은 말을 결코 잊지 못하였다: “가니드야, 대부분의 인간들은 길 잃은 이 아이와 같단다. 이 아이가 집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같이, 사람들은 안전함과 보호를 바로 지척에 두고도, 많은 시간을 두려움에 울며 슬픔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정말로 사실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아는 확신을 누리면서 진리의 길을 아는 모든 자들은, 삶의 만족을 찾아 헤매는 자기 이웃들에게, 의무가 아닌 하나의 특권으로써, 안내자 역할을 해야만 한다. 이 아이에게 어머니를 찾아주는 이 일을 하면서 우리가 최극의 기쁨을 누리지 않느냐? 그러므로 사람들을 하느님에게 인도하는 자들은, 인간이 하는 일들 중에서 최극의 만족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가니드는 길 잃은 아이들을 찾아내어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자신의 여생동안 계속하였다.
[132:6.1]
“가니드야, 이러한 문제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너를 무척 혼란에 빠지게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으며,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도록 노력해 보겠다. 우선, 나의 개인에게 주어진 모든 공격에 대해서는, 그 가해자가 하느님의 아들─육신 속에 있는 나의 형제─인지 아닌지를 생각해 볼 것이며, 만약 그가 도덕적 판단과 영적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면, 나는 주저 없이 가해자에게 발생될 결과에 상관없이, 내 온 힘을 다하여 나 자신을 방어할 것이다. 그러나 정당방위라 할지라도, 나는 아들관계를 이룩한 지위에 있는 이웃에게는 그렇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를 향한 그의 폭행에 대해 판단을 하지 않은 채로 그리고 미리 그에게 응징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로 하여금 그러한 공격을 하지 않도록 예방하여 중지시킬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할 것이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에는 그 공격을 완화시키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가니드야, 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배려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으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로 헌신하였다. 진정한 해(害)가 나에게 미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으며; 나를 배척하는 자들이 나에게 가하려는 어떤 행동에 의해서든지 내 일생의 사명이 정말로 위태로워지리라고는 믿지 않으며, 두려워할 만한 어떤 폭행도 우리 친구들로부터 당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나는 우주 전체가 나에게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나는 모든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심에서 우러나오는 확신을 가지고, 모든-힘을 지닌 이 진리를 믿고자 한다.”
[133:1.4]
마지막 시간이 임한 사형수에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형제여, 너는 악한 시대에 태어났다. 너는 길을 잃어버렸고; 범죄의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너와 대화를 나눈 결과, 나는 네가 이 세상의 생명을 대가(代價)로 지불해야 할 만큼의 악한 일을 계획적으로 저지르지는 않았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그러나 너는 그러한 악을 행했고, 너의 동료들은 너를 죄인으로 심판하였으며; 너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너나 나나, 국가가 선택한 방식인 이러한 자아-방어의 권리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방식으로는, 너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 부과된 벌을 피할 길이 없는 것 같다. 너의 동료들은 너의 행위에 의거하여 판단을 하였지만, 네가 용서를 구할 수 있는 하나의 심판관이 있는데, 그는 너의 진짜 동기들과 보다 나은 의도들에 의거하여 심판하실 것이다. 만약 너의 참회가 순수하고 너의 신앙이 진지한 것이라면, 너는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너의 실수로 인하여 사람에 의해 사형선고가 내려졌다는 사실이, 하늘에 있는 법정에서 네 혼이 공평하게 평가되고 자비를 누릴 가능성에 어떤 편견도 주지 않는다.”
[133:4.12]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쫓아, 영적으로 포로된 자들에게는 해방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는 기쁨을, 병든 이들에게는 치료함을 선포하도록, 내가 너희를 보내겠다. 절망 속에 있는 나의 자녀들을 보거든, 너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용기를 북돋아 주어라:
[140:3.2]
“그러나 누가 너희에게 나의 복음이 단지 노예들과 약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했느냐? 내가 선택한 사도들인 너희가 허약한 자들처럼 보이느냐? 요한이 약한 자처럼 보였느냐? 너희는 내가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았느냐? 이 세대에서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들이 자신들에게 전파된 복음을 소유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세상의 종교는 가난한 자들을 무시했지만, 나의 아버지는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게다가, 회개하라는 소명(召命)과 자녀 됨을 받아들이는 것에 이 시대의 가난한 자들이 제일 먼저 관심을 표하였다. 왕국의 복음은 모든 사람들─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인과 로마인, 부자와 가난한 자─에게 전파되었고 젊은이나 노인, 남자나 여자에게나 똑같이 부여되었다.
[143:1.5]
“옛날의 방법은 너희로 하여금 삶의 법규들에 의해 억제되고 그것에 복종하고 순응하기를 추구하게 하였으나; 새로운 길은 먼저 진리의 영에 의해 변환시키고 따라서 너희의 마음을 끊임없이 영적으로 새롭게 만들면서 너희 안에 있는 혼을 강건하게 하며, 그래서 너희는 인자하고 만족스럽고 그리고 완전한 하느님의 뜻을 확실하고 기쁘게 행하는 힘을 부여받게 된다. 너희가 신성한 본성의 참가자가 되는 것을 보증하는 것은, 매우 위대하고 귀중한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너희의 개인적 신앙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그렇게 해서 너희의 신앙과 영적 변환에 의해 너희는 실제로 하느님의 성전이 되며, 그의 영은 실제로 너희 안에 거한다. 만약에 그 영이 너희 안에 거한다면, 너는 더 이상 육신의 노예가 아니고 자유롭고 해방된 영의 자녀들이다. 새로운 영의 법이 자아-속박의 두려움과 자아-부정의 노예 관계라는 옛날의 법 대신에 자아-정복이라는 해방을 너희에게 준다.
[143:2.4]
“구원은 영(靈)의 다시 살아남으로 인한 것이며, 육신에서의 자아-정의 행위의 덕분이 아니다. 너희는, 육신에서의 두려움이나 자아-부정에 의해서가 아니고, 신앙에 의해서 옳다고 인정되며 인애(仁愛)에 의해서 동료관계로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으로 태어난 아버지의 자녀들은 언제나 그리고 항상 자아와 육신의 욕망에 대한 모든 것들의 주인들 이다. 너희가 신앙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하느님과 진정한 평화를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하늘의 평화의 길을 따르는 모든 이들은 영원한 하느님의 항상-진보하는 자녀들의 영원한 봉사로 신성화 되도록 운명되어진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완전함을 구하면서 모든 마음과 육체의 악으로부터 너희 자신을 씻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오히려 너희의 드높아지는 특권이다.
[143:2.6]
그 안식일은 예수의 지상(地上) 일생에서, 우주의 일생에서 중대한 날이었다. 모든 지역우주의 취지와 목적에 대하여 이 작은 유대 도시인 가버나움이 실제적인 네바돈의 수도였다. “증오는 두려움의 그림자이며; 복수는 비겁함의 가면이다.”라고 하였던 예수의 설교의 감격적인 결론을 듣고 있던 자들은 단지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소수의 유대인들뿐만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청중들은 “사람은 악마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이다.”라는 그의 축복의 말도 잊을 수 없었다.
[145:3.4]
사도들은 예수가 공공연하게 그리스인의 많은 주장들에 찬성하는 태도 때문에 약간 당황하였지만, 예수는 나중에 사적(私的)으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였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그리스인의 철학에 관용을 베풀었다고 해서 놀라지 마라. 참되고 순수한 내적 확신은 외부적인 분석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또한 진리는 정직한 비판을 받는 것에 대해 화내지 않는다. 편협함은 자기의 믿음에 담겨있는 진실함을 스스로 은밀하게 의심하고 있음을 감싸 감추는 가면이라는 점을 너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이 온 마음을 다해 믿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완전한 자신감이 있을 때에는, 그는 어떤 경우에도 이웃의 태도 때문에 혼란스러움을 겪지 않는다. 용기는 자신이 믿는다고 고백한 그 일들에 대하여 철저하게 정직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진실한 사람들은 자신의 참된 신념과 숭고한 이상에 대한 비판적인 시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146:3.2]
“지능을 가진 자녀들은 자기 아버지로부터 좋은 선물을 받기 위하여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애정을 통하여 자신의 아들들과 딸들에게 나누어 준 풍부한 선물을 이미 가진, 이렇게 사랑을 많이 받은 자녀들은 그러한 한량없는 은혜를 인식함과 감사함으로 응답하면서 그들 아버지를 사랑하도록 이끌린다. 하느님의 선함은 회개로, 하느님의 은혜는 봉사로, 하느님의 자비는 구원으로 인도하며, 한편 하느님의 사랑은 지능적이고 걱정 없는 경배로 인도한다.
[149:6.4]
“오늘날 너희들은 이것이 너희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그러나 너희들은 시편 기자의 나머지 예언들이 이루어지는 것은 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사람의 아들과 이 땅에서의 그의 사명에 대해서는 틀린 관념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나의 왕국은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고, 자비 안에서 선포되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봉사로서 확립된다. 나의 아버지는 하늘에 앉으셔서 이교도들을 비웃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격노하지 않으신다. 아들이 소위 이교도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실제로는 무식하고 배우지 못한 그의 형제들)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약속은 사실이다. 나는 이 이교도들을 자비와 사랑의 손을 벌려 맞아들일 것이다. 승리의 아들이 이교도들을 쇠막대기로 쳐서 질그릇처럼 산산조각으로 깨뜨릴 것이라는 불행한 선언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 모든 자애로움이 소위 이교도라고 불리는 이들 위에 내릴 것이다. 시편 기자는 너희들에게 ‘주님을 두려워함으로 섬기라’고 훈계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에게 신앙을 통하여 신성한 아들관계라는 고귀한 특권을 갖도록 명령한다; 시편 기자는 너희들에게 떨며 즐거워하라고 명령한다; 나는 너희에게 확신을 갖고 즐거워하라고 명령한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그의 분노에 불이 붙을 때 너희가 멸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와 이제까지 함께 생활해 온 너희들은 분노와 노여움이 사람의 가슴속에 하늘의 왕국을 세우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시편 기자도 이 훈계의 말을 끝내면서 ‘이 아들을 신뢰하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함으로써 그 진리의 빛을 어렴풋이 보았다.
[155:1.2]
너희들은 나의 사도들이다. 따라서 너희들에게는 종교가 영적 진보와 이상적인 모험에 따르는 모진 현실에 맞서는 것이 두려워 피신할 수 있는 신학적 피난처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느님께서 너희들을 찾으셔서, 너희들을 높였으며, 고귀하게 만들어 주었으며, 영성화(靈性化)시키셨다는 것, 그리고 그런 식으로 너희들을 찾아 아들로 맞으신 하느님을 찾기 위한 영원한 모험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실제체험의 사실이 되어야 할 것이다.
[155:6.18]
참새 다섯 마리가 두 페니에 팔리지 않느냐? 그렇지만 이 새들이 먹을 것을 찾으려고 날아다닐 때,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아버지께 알려지지 않고서는 한 마리도 존재하지 못한다. 성(聖)천사 수호자들에게는 네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알려져 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너희들은 왜 너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닥쳐오는 많은 사소한 일들로 두려워하면서 사느냐? 너희에게 이르겠는데: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들보다 훨씬 더 귀중하다.
[165:3.4]
너희 적은 숫자의 무리이기는 하지만, 너희가 만일 신앙을 갖는 다면,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지 않는다면, 내 아버지께서 큰 기쁨으로 너희에게 이 왕국을 주실 것이라고 내가 단언한다. 돈주머니가 낡아지지 않는 곳, 도둑이 약탈할 수 없는 곳, 그리고 좀이 파먹지 못하는 곳에 너희 보물을 쌓아 두어라.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하였듯이,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그 곳에 너희 진심이 마땅히 있을 것이다.
[165:5.4]
“그러니 온 세상으로 나가서, 사람들이 서로 형제이고 하느님의 아버지신분의 이 복음을 모든 나라들과 족속들에게 전파하고, 인류의 서로 다른 종족들과 민족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제시하는 방법을 선택함에 있어서 항상 지혜롭게 하라. 너희가 이 왕국 복음을 대가없이 받았으니 모든 나라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대가없이 나눠주어야 할 것이다. 시대들이 끝날 때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니, 악한 세력의 저항을 두려워 마라. 그리고 내 평강이 너희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
[1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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