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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 (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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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7-24

본문

아름다움 (美)

beauty.jpg 물리적 우주에서 우리는 신성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지적 세계에서 우리는 영원한 진리를 식별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선함은 오직 개인적 종교 체험의 영적 세계에서만 발견된다. 그것의 참된 본질에 있어서, 종교는 하느님의 선함에 대한 신앙-신뢰이다. 철학적으로 볼 때, 하느님은 위대하고 절대적이며 심지어는 지능적이고 개인적 일 수 있지만, 종교적으로 볼 때 하느님은 또한 도덕적임에 틀림없다; 그는 선하심에 틀림없다. 사람은 위대한 하느님은 두려워했겠지만, 그러나 사람은 오직 선하신 하느님만을 신뢰하고 사랑한다. 하느님의 이 선함은 하느님의 개인성의 일부분이며, 그것에 대한 그 충만한 계시는 오직 하느님의 믿는 아들들의 개인적 종교 체험에서만 나타난다.
[2:6.1]
최극 아름다움을 식별함은 실체의 발견 그리고 집대성이다: 영원한 진리 안에 있는 신성한 선(善)을 식별함, 그것은 궁극의 아름다움이다. 인간 예술의 매력조차도 그 합일성의 조화 속에 있다.
[2:7.8]

빛과 생명 속에 정착된 세계들은 진리와 아름다움 그리고 선(善)에 대한 이해와 매우 충분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이 본질특성 가치들이 시간과 공간의 영역들에 대한 신(神)의 계시를 포옹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진리의 의미들은 필사자 사람의 지적 그리고 영적 본성들에게 어떤 병합된 호소를 한다. 우주적 아름다움은 조화우주 창조의 조화로운 관계들과 박자들을 포옹 한다; 이것은 더욱 분명한 지적 호소가 되고 그리고 물질적 우주의, 통합되고 동조적 이해를 향하여 이끈다. 신성한 선(善)은 유한 마음에게 무한한 가치들의 계시를 대표하는데, 그것은 그 안에서 인간적 이해에서의 영적 차원의 바로 그 문턱까지 감지되고 높아진다.
[56:10.9]
아름다움의 실재는 진보하는 진화의 사실이 최극 마음의 지배임을 나타냄에 따라서 그만큼 확실하게, 깊이 이해하는 창조체 마음이 현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아름다움은 현상적 실체의 멀리-퍼지는 다양성의 조화로운 시간-공간 합성에 대한 지적 인식이며, 그 모든 것이 선재(先在)하고 영원한 하나 됨에서 유래된다.
[56:10.11]
“그러나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이자, 인간 의지의 단순한 기세를 통하여, 최상의 욕망이라 생각되는 그런 것으로 대체하려는 노력에 의하여, 유혹을 이겨내겠다고 나서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나는 경고한다. 만일 너희들이 진정으로 저급한 본성의 유혹을 이기고자 한다면, 너희는 영적인 혜택이 있는 곳으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곳은 바로 너희가, 너희 마음이 낮고도 보잘 것 없는 이상적 형태의 저들 행실 습관 즉, 너희가 유혹으로서 인지하는 행실 습관을, 더욱 높고 좀 더 이상적인 행실 습관으로 갈아 치우려고 갈망하는, 너희가 실질적으로 관심을 일으키고 사랑하고자하는 바로 그러한 행위성에서의 더욱 높고 이상적인 형태를 실제로 그리고 진정으로 발현시킨 곳이다. 너희는 이러한 방법으로, 필사 욕망에 대한 그럴듯하게 속이는 억압으로 인하여 점점 증가되는 짐을 지는 것 대신에, 오히려 영적 변환을 통하여 해방될 것이다. 낡고 저급한 것들은 사랑 안에서 새롭고 보다 우월한 것에 의하여 잊혀 갈 것이다. 진리의 사랑으로 빛을 받은 자들의 가슴속에서는 언제나 아름다움이 추악함을 이긴다. 새롭고 진지한 영적 사랑의 밖으로 요동하는 에너지 안에는 막강한 힘이 있다. 다시 말하겠는데, 악에 지지 말라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겨라.”
[156:5.5]
사람은 자연의 임시오두막 안에서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경우에는, 하느님과의 영적 교제에 대한 지능적 접근과 관련하여 인간의 감정이 최고로 일어나도록 그렇게, 단순함이 있으면서도 예술적인 장식으로 꾸민 아름답고, 성스러운 장소를 제공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진리(眞), 아름다움(美), 그리고 거룩함은 참된 경배를 힘차게 그리고 효력 있게 돕는다. 그러나 영적 교제가 단순한 거창한 치장으로 그리고 사람의 정교하고 허세부리는 예술로 과도하게 장식한 것에 의해서 촉진되지는 않는다. 아름다움(美)은 가장 단순하고 자연스러울 때 가장 종교적이다. 아름다운 모습이 빠져있고, 명랑한 기분과 영감을 주는 성스러움이 도무지 비어있는 차갑고 메마른 방에서 어린아이들이 대중경배에 대한 그들의 첫 번째 개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아이는 바깥의 자연에서 처음으로 경배에 들어가고, 나중에는 그가 매일 살고 있는 집과 같이 최소한 물질적으로 매혹적이고 예술적으로도 아름다운 건물, 종교적 집회가 열리는 공공 건물로 부모를 따라가야 한다.
[167:6.6]
아름다움, 리듬, 그리고 조화는 지적으로 연합된 것이고 영적으로 동족이다. 진실, 사실, 그리고 관계는 지적으로 분리될 수 없고 아름다움의 철학적 개념과 연합되어 있다. 선함, 정의로움, 그리고 공의(公義)는 철학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살아있는 진리 그리고 신성한 아름다움과 영적으로 함께 묶여 있다.
[44:7.2]
진리는 과학과 철학의 기본이며, 종교의 지적 근거를 제시한다. 아름다움은 모든 인간 체험의 예술과 음악 그리고 의미 있는 리듬들을 후원한다. 선(善)은 윤리와 도덕 그리고 종교─체험적 완전성-추구자─의 감각을 포옹한다.
[56:10.10]
이 시대의 종교적 도전은, 조화우주의 진리와 우주 아름다움 그리고 신성한 선(善)의 확대되고 절묘하게 집대성된 현대 개념들로부터 살아 나오는, 새롭고도 매력적인 생활철학을 과감히 구축하게 될, 그러한 영적 통찰력을 가진 선견지명이 있고 진취적인 남녀들을 향한 것이다. 그러한 도덕의 새롭고도 정의로운 시각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선한 모든 것을 끌어당기고 그리고 인간의 혼속에 있는 가장 좋은 그것에 도전하는 것이다. 진리(眞)와 아름다움(美)과 선(善)함은 신성한 실체들이며, 사람이 영적 삶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영원자의 이 최극 본질특성들은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서 점점 더 합동되고 통합될 것이다.
[2:7.10]
진리는 응집력이 있고, 아름다움은 끌어당기며, 선(善)은 안정을 이룬다. 실제적인 이러한 가치들이 개인성 체험 속에서 합동될 때, 그 결과는 지혜에 의해 조건이 갖추어지고 충성에 의해 자격이 갖추어지는 높은 계층의 사랑이다. 모든 우주 교육의 실제적인 목적은 세계들의 고립된 자녀가 그의 확대되는 체험의 더 큰 실체들과 더 나은 합동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실체는 인간 차원에서는 유한하고, 좀 더 높은 그리고 신성한 차원들에서는 무한하고 영원하다.
[2:7.12]
그러나 유란시아의 거주민들은 우주 아버지의 본성에 관한 이러한 고대의 실수들과 이교적 미신들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하느님에 관한 진리의 계시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인류는 사람의 아들과 하느님의 아들로서 유란시아에 머물렀던 창조주 아들에 의해 그토록 숭고하게 묘사되었던 성격의 아름다움과 속성들의 사랑스러움으로 우주 아버지를 모두 알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4:5.7]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선(善)에 기초하였으며;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에 기초하였으며; 두 종교가 모두 진리를 추구하였다. 예수는 사랑의 하느님을 계시하였고, 사랑은 진리, 아름다움 그리고 선(善)의 모든 것을 망라한다.
[5:4.6]
일곱 초우주의 진화 세계의 물질-마음을 가진 창조체들은 신(神) 합일을 오직 최극존재의 이 힘-개인성 합성으로 진화하는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실재 차원에서든지 하느님은 그러한 차원에서 사는 존재들의 개념적 수용능력을 넘어설 수 없다. 필사자 사람은 진리를 인식하고 아름다움을 깊이 받아들이고 그리고 선(善)에 대한 경배를 통하여,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 진화하고 그리고는 최극자에 대한 인식에 이르는 상승해가는 신(神) 차원들을 거치면서 진보해야만 한다. 신(神)은 그렇게 힘 안에서 통합되는 것으로서 파악되어지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창조체가 납득하고 달성하는 영으로 개인성구현 될 수 있다.
[56:6.3]
유한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진리와 아름다움 그리고 선함은 신성 실체의 전체 계시를 포옹한다. 신(神)의 이 사랑-이해가 하느님을-아는 필사자들의 삶 속에서 영적인 표현을 찾을 때, 이것들은 신성의 열매들: 지적 평화, 사회적 진보, 도덕적 만족, 영적 기쁨, 그리고 조화우주 지혜를 맺는다. 빛과 생명의 일곱 번째 단계에 있는 어떤 세계의 진보된 필사자들은 사랑이 우주 안에서 가장 위대한 것임을 이미 배웠다─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안다.
[56:10.20]
하느님은 진리에 대한 증대된 계시와 아름다움에 대한 증진된 인식 그리고 선함에 대한 확대된 개념을 사람에게 제공하심으로써 그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기도는 주관적인 행동이지만, 인간 체험의 영적인 차원에 있는 강력한 객관적 실체들과 접촉을 이루며; 인간으로 하여금 초인간적인 가치들에 도달하게 하는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것은 영적 성장을 위한 가장 유력한 자극제이다.
[91:8.11]
영성(靈性)은 사람의 하느님에 대한 가까움을 가키는 지표임과 동시에 곧바로 동료 존재에 대하여 쓸모 있음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영성은 사물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하고 의미들 속에서 진리를 깨닫게 하며 가치들 속에서 선함을 발견하게 하는 능력을 증진시킨다. 영적인 발달은 그것을 위한 수용력에 의해 결정되며 사랑에서의 이기적인 본질특성을 배제하는 것에 직접적으로 비례한다.
[100:2.4]
선(善)은 살아있고, 상대적이며, 항상 진보하고, 변함없는 하나의 개인적 체험이며, 진리(眞)와 아름다움(美)을 식별하는 것과 영속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선은 영적 차원의 긍정적 진리-가치를 인지함으로서 그 안에서 발견되며, 그것은 인간의 체험 안에서, 부정적 복사본─잠재 악의 그림자─과 대비되지 않으면 안 된다.
[132:2.7]
삶에 대한 열심. 고립은 혼의 충전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경향이 있다. 동료들과의 연합은 삶에 대한 묘미를 새롭게 하는데 필수적이며 인간 삶의 보다 높은 차원으로 상승할 때 따라오는 그러한 투쟁들 속에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유지하는데 필수불가결하다. 우정은 기쁨을 크게 하고 일생의 승리를 더욱 영광스럽게 한다. 사랑이 있고 그리고 친밀한 인간 연합은 그 쓰라림의 많은 슬픔과 고초의 괴로움을 깨끗이 닦아 없애는 경향이 있다. 친구의 현존은 모든 아름다움을 돋보이고 모든 선을 드높인다. 사람은 지적인 상징들에 의해 친구들에 대한 감상 힘이 활성화될 수 있고 확대될 수 있다. 인간의 우정에 대한 최고의 기쁨 중의 하나는 상상력이 서로 동조될 수 있는 이 힘과 가능성이다. 조화우주 신(神)에 대해 서로 충실한, 하나의 공동 전선에 전심으로 바쳐진 의식 속에 엄청난 영적 힘이 선천적으로 내재해 있다.
[160:2.8]
선(善)과 아름다움(美) 그리고 진리(眞)에 대한 진지한 추구는 하느님께로 인도한다. 그리고 모든 과학적 발견은 우주 속에 자유와 균일성이 둘 모두 실재하고 있음을 실증한다. 발견자는 발견할 자유가 있었다. 발견된 사물은 실제이고 명백히 균일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물로서 알려질 수 없었을 것이다.
[195:6.17]
종교적 통찰력은 실패를 더 높은 염원과 새로운 결심으로 전환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우주 상승 시에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동기화이다. 그러나 진리(眞), 아름다움(美), 선(善)이 제외된 사랑은 단지 감상, 철학적 왜곡, 심리적 착각, 영적 기만이다. 사랑은 모론시아와 영적 진보의 연속되는 차원들에서 항상 다시 정의(定意)되어야 한다.
[196:3.29]
세계는 되도록 손을 거치지 않은 종교가 필요하다. 그리스도교─20세기의 종교 중에서의 최고─조차도 예수에 관한 종교일 뿐만 아니라, 더구나 너무도 많이 사람이 스쳐지나갔음을 체험하는 종교다. 그들은 그들의 인정된 종교적 교사들이 전해주는 대로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고 있다. 만일 실제로 이 세상에 사셨던 대로의 예수를 볼 수 있고, 생명을 주는 그의 가르침들을, 손을 거치지 않고, 알게만 된다면, 세계가 얼마나 큰 깨우침을 체험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사물을 묘사하는 말은 그것을 보는 것만큼 전율을 줄 수 없으며, 또한 교리적인 말도 하느님의 현존을 아는 체험처럼 사람의 혼에게 영감을 줄 수 없다. 그러나 기대하는 신앙은, 저 건너 세상들에서의 신성한 가치의 영원한 영적 실체가 들어오는 것을 위하여, 사람 혼의 소망의-문을 언제나 활짝 열어 놓을 것이다.
[19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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