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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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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7-24

본문

성격


신성한 성격
하느님의 성격 - 첫째근원과 중심

chracter.jpg 우리는 계속해서 하느님의 이 신비에 직면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의 무한한 선, 끝없는 자비, 비할 데 없는 지혜, 숭고한 성격의 끝없는 진리의 장관(壯觀)이 더욱 더 펼쳐지고 있음에 당혹하고 있다.
[1:4.4]

하느님에 대한 사람의 최고 가능한 개념이 시원적이고 무한한 개인성(個人性)으로 인간의 관념과 이상 속에 포옹될 때, 신(神)의 성격을 구성하고 있는 신성한 본성의 어떤 특징들을 배우는 것이 무방하고, 도움이 될 것이다. 하느님의 본성은 네바돈의 미가엘이 그의 여러 가지 가르침들 속에서 그리고 육신으로의 그의 훌륭한 필사 삶에서 보여주었던 아버지에 대한 계시로 가장 잘 납득될 수 있다. 또한 만일 사람이 스스로를 하느님의 자녀로 생각하고, 낙원천국 창조주를 참된 영적 아버지로 우러러 본다면 신성한 본성은 사람에 의해 더 잘 납득될 수 있다.
[2:0.1]

하느님의 시원적 완전성은 어떤 가정되는 정의(正義)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의 신성한 본성인 선천적 선(善)의 완전성에 들어 있다. 그는 최종적이고 완벽하고 완전하다. 그의 의로운 성격의 아름다움과 완전성에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 그리고 공간의 세계들에서 살아있는 실재들의 전체 기획이 아버지의 낙원천국 완전성을 공유하는 체험인 높은 운명을 향해 모든 의지창조체들을 들어 올리는 신성한 목적에 집중되어있다. 하느님은 자아-중심이지도 않고 자아-억제이지도 않으며; 그는 광대한 우주들의 우주의 모든 자아-의식 창조체들에게 자신을 증여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다.
[2:2.5]
영원한 하느님은 이러한 인간 감정들의 감각에서 그리고 사람이 그러한 반응들을 납득하는 것처럼, 분노하거나 화를 낼 수는 없다. 이러한 감상들은 비열하고 경멸적이며; 그것들은 인간적이라 불릴 가치가 없고 , 신성이라고는 더욱 할 수 없으며; 그러한 태도들은 우주 아버지의 완전한 본성과 자비로운 성격에는 전혀 맞지 않는다.
[4:3.2]
그러나 유란시아의 거주민들은 우주 아버지의 본성에 관한 이러한 고대의 실수들과 이교적 미신들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하느님에 관한 진리의 계시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인류는 사람의 아들과 하느님의 아들로서 유란시아에 머물렀던 창조주 아들에 의해 그토록 숭고하게 묘사되었던 성격의 아름다움과 속성들의 사랑스러움으로 우주 아버지를 모두 알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4:5.7]
아버지의 사랑은 현재와 그리고 영원한 시대의 끝없는 순환에 두루, 우리를 따라온다. 너희가 하느님의 사랑하는 본성을 숙고할 때,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타당하고도 자연스러운 개인성 반응이 있다: 너희는 너희 조물주를 점점 더 사랑하게 되겠고; 자녀들이 이 세상의 부모에게 바치는 것과 비슷한 애정을 너희가 하느님께 그렇게 드리게 되는데; 이는 아버지, 실제 아버지, 진정한 아버지가 자기 자녀를 사랑하듯이, 그렇게 우주 아버지는 그의 피조 아들들과 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복지를 언제까지나 추구하기 때문이다.
[2:5.9]


영원 아들의 성격 - 둘째근원과 중심

아들의 성격을 올바르게 알기 위하여, 너희는 아버지의 신성한 성격에 대한 계시를 연구해야만 한다; 그들은 영원히 그리고 뗄 수 없는 하나이시다. 신성한 개인성으로서, 그들은 비교적 낮은 계층의 지능존재에게는 실질적으로 분별될 수 없다. 신(神) 자신들의 창조적 활동 안에서 기원한 자들에게는, 그들을 따로 인식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중앙우주와 낙원에서 태어난 존재들은 아버지와 아들이 우주적 조정의 한 개인적 합일체일 뿐 아니라 우주 관리의 한정된 권역(權域) 안에서 기능하는 두 개의 분리된 개인성임을 식별한다.
[6:8.2]
영원 아들은, 신성한 실체, 분별불가의 영, 그리고 절대 개인성에 대한 낙원 아버지의 우주적이고 무한한 개념의 영적(靈的) 개인성구현이다. 그리고 이로서, 아들은 우주 아버지의 창조자 정체성(正體性)에 대한 신성한 계시를 조성한다. 아들의 완전 개인성은, 아버지가 실제로 영적이고, 의지적이며, 목적이 있으며, 그리고 개인적인 모든 의미와 가치의 영원하고 우주적인 근원임을 드러낸다.
[6:0.3]
영원 아들은 영원한 하느님 말씀이시다. 그는 온통하느님과 같으시며; 사실, 영원 아들은 우주들의 우주에 개인성으로 드러낸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영원 아들과 그리고 모든 합동 창조주 아들에 대한 이 말은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리고 영원토록 진실이다;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6:2.2]
하느님의 성격은 무한하게 초인간적이며; 따라서 신성의 그러한 본성은, 신성한 아들들 안에서처럼, 그것이 사람의 유한 마음에 의해 신앙-파악될 수 있기 전이라도, 개인성구현되어야만 한다.
[4:3.7]
낙원 중력이 만물을 거기에서 함께 잡아두는 물리적 우주와 나란히 평행하여, 영적인 우주는 거기에서 아들의 말씀이 하느님의 생각을 해석하고 그리고 "육신이 되어" 연합된 창조주들의 병합된 본성인 사랑하는 자비를 명시한다. 그러나 이 물질적 그리고 영적인 창조 전체 안에 그리고 그것들에 두루, 무한 영과 그의 영 자손들이 그들이 협동으로 고안하고 만든 지능적 자녀들에게 신성한 부모들의 병합된 자비, 인내심 그리고 영구적인 애정을 보여주는 광대한 무대가 존재한다. 마음에 대한 영구적인 소명봉사는 영의 신성한 성격의 본질이다. 그리고 공동행위자의 모든 영 자손은 소명봉사에 대한 이 열정, 봉사하고자 하는 이 신성한 충동에 참여한다.
[8:4.1]
영원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신성의 성격과 영성(靈性)의 속성을 소유한다. 아들은 개인성과 영에서 하느님의 절대성의 충만함이며, 그리고 이 아들은 이러한 본질특성을 우주들의 우주의 영적 정부에 대한 그의 개인적 경영에서 드러낸다.
[6:2.5]
영원 아들은 모든 창조체에게 위대한 자비의 소명봉사자(使役者)이시다. 자비는 아들의 영 성격의 본질이다. 영원 아들의 통치는, 그것들이 둘째 근원이며 중심의 영 순환회로들을 건너 나아갈 때, 자비의 격조로 맞추어진다.
[6:3.2]
영원 아들은 진실로 자비로운 소명봉사자이시고, 신성한 영이시며, 영적 힘이시고, 참 개인성이시다. 아들은 우주에 현시된 하느님이 만드신 영적이고 개인적인 본성-비개인적이고, 신성함을 벗어나고, 비(非)영적이고, 그리고 순수한 잠재적인 모든 것을 벗겨낸 첫째근원이며 중심의 전체이자 본체-이다. 그러나 영원 아들의 숭고한 개인성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말로써 인간 마음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주 아버지를 가려서 희미하게 이끄는 모든 것이, 거의 똑같은 영향력을 가지고, 영원 아들에 대한 개념적 인식을 막는다. 너희는 너희의 낙원 달성을 기다려야만 하며, 그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왜 유한한 마음이 납득하도록 이 절대 개인성의 성격을 묘사할 수 없었는지, 납득하게 될 것이다.
[6:7.3]


무한 영의 성격 - 셋째근원과 중심

무한 영은, 모든-사랑의 아버지와 모든-자비의 아들의, 시간과 공간의 모든 세계에 있는 진리를-사랑하는 모든 혼들을 자신들에게로 이끄는 그들 공동 투영의 실행을 위한, 유능한 대리자다. 영원 아들이 우주들의 창조체가 완전성 달성이라는 그의 아버지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 상승 투영이 아버지-아들 계획이 되는 순간, 무한 영은 그들의 결합된 그리고 영원한 목적의 실행을 위해 아버지와 아들의 공동 관리자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함에 있어서 무한 영은 신성한 현존에 대한 그리고 영 개인성들에 대한 자신의 모든 자원들을 아버지와 아들에게 바친다; 그는 생존되는 의지창조체들을 낙원 완전의 신성한 경지로 드높이는 엄청난 계획에 모든 것을 헌신해 왔다.
[8:3.5]
무한 영의 현저한 속성은 전재(全在)이다. 모든 우주들의 우주에 두루 만물에-스며드는 이 영이 어디에나 현존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주적이고 그리고 신성한, 마음의 현존과 너무나도 비슷하다. 신(神)의 둘째개인성체 그리고 셋째개인성체 모두는 그들의 항상-현존하는 영들에 의해 보든 세계에서 나타내진다.
[8:5.1]
낙원 중력이 만물을 거기에서 함께 잡아두는 물리적 우주와 나란히 평행하여, 영적인 우주는 거기에서 아들의 말씀이 하느님의 생각을 해석하고 그리고 "육신이 되어" 연합된 창조주들의 병합된 본성인 사랑하는 자비를 명시한다. 그러나 이 물질적 그리고 영적인 창조 전체 안에 그리고 그것들에 두루, 무한 영과 그의 영 자손들이 그들이 협동으로 고안하고 만든 지능적 자녀들에게 신성한 부모들의 병합된 자비, 인내심 그리고 영구적인 애정을 보여주는 광대한 무대가 존재한다. 마음에 대한 영구적인 소명봉사는 영의 신성한 성격의 본질이다. 그리고 공동행위자의 모든 영 자손은 소명봉사에 대한 이 열정, 봉사하고자 하는 이 신성한 충동에 참여한다.
[8:4.1]
무한 영의 창조 가족의 비교적 낮은 계층의 사랑하는 그리고 지침이 없는 소명봉사를 사람이 더 많이 배울 때, 그는 우주 아버지와 영원 아들의 병합된 행동의 초월적 본성과 비할 데 없는 성격을 훨씬 더 찬양하고 찬미할 것이다. 정말로 이 영은 "항상 정의(正義)를 바라보는 주(主)의 눈"이며 "그들의 기도를 항상 듣고 있는 신성한 귀"이다.
[8:4.8]
각각의 지역우주에서 신성한 사명활동자는 낙원천국의 일곱 주(主)영들 중의 하나에 구현된 무한 영의 본성과 고유 특징들에 따라 기능한다. 모든 우주 영들은 기본적인 균일성 있는 반면, 일곱 주(主)영들 중의 하나를 통한 그들의 기원에 따라 결정된 기능의 다양성도 또한 존재한다. 이러한 기원의 차이는 다른 초우주들에서 지역우주 어머니 영들의 기능상 다양한 기법들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모든 본질적인 영적 속성들에 있어서 이 영들은 서로 동일하며, 초우주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똑같이 영적이고 전적으로 신성하다.
[34:2.3]


인간의 성격
봉사에 담긴 사랑

용기─성격의 강한 힘─가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사람은 어려움에 부딪치고 실망에 반응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어떤 환경 속에서 자라지 않으면 안 된다.
[3:5.6]
진화하는 혼의 영적 힘의 척도는 진리 안에 있는 너희들의 신앙과 사람들에 대한 너희들의 사랑이다. 그러나 인간 성격의 강한 힘의 척도는 악한 감정이 지속되는 것을 이겨내는 너의 능력과, 그리고 깊은 슬픔과 만났을 때 그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을 견디어내는 너의 능력이다. 좌절은 너희들의 모습을 솔직하게 정직하게 비춰볼 수 있는 진정한 거울이다
[156:5.17]
성숙을 향한 노력에는 일을 필요로 하며 그리고 일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는 힘이 어디로부터 오는가? 물질적인 것들이 당연히 생각되겠지만, 주(主)께서 바로 말씀하였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수 없다.” 정상적인 육체와 상당히 좋은 건강을 받았더라도, 우리는 또한 사람의 잠자는 영적 기세를 깨우도록 자극할 그 애착들을 찾아야 한다. 예수는 하느님께서 사람 속에 살아 계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사람을 설득하여 이러한 신성과 무한의 혼에-묶여진 힘을 풀어줄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사람들을 하느님, 그가 솟아올라 우리자신의 혼을 일깨워 새롭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밖을 향해 이동하며 그리고는 수 없이 많은 다른 혼들을 깨우치고, 향상시키고, 축복하려는 목적으로 봉사할지도 모를, 그러한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도록 설득할 수 있겠는가? 너희들의 혼속에 동면하고 있는 이 잠재 힘들을 내가 어떻게 깨우면 최선책이 되겠는가? 내가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감정적인 흥분은 이상적인 영적 자극이 아니라는 것이다. 흥분은 에너지를 증대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마음과 육체 모두의 힘을 소모시킨다. 그렇다면 이 큰 일들을 할 수 있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가? 너희들의 주(主)를 바라보자. 우리들이 여기에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언덕에 오르셔서 힘을 취하고 계시다. 이 모든 문제의 비밀은 영적 교제, 경배 속에 감추어져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연합된 명상과 휴식이다. 명상은 마음과 영이 접촉하도록 한다; 휴식은 영적인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능력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렇게 약한 것을 강한 힘으로, 두려움을 용기로, 자아의 마음을 하느님의 뜻으로 교체하는 이것이 경배를 이룬다. 적어도 이것이 철학자가 그것을 보는 길이다.
[160:3.1]
특별한 솜씨를 들어내는 것이 영적 능력의 소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영리함이 참된 성격을 대신하지 않는다.
[48:7.3]
진화적인 세계들에서 이따금씩 널리 퍼져는 놀랄만한 행운의 여건들 중의 어떤 것들은 점진적으로 창발 하는 최극자의 현존, 그의 미래 우주 활동들을 미리 맛보는 것 때문일 수도 있다. 필사자가 섭리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대부분의 것은 그렇지 않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그의 판단은 삶의 환경들의 참된 의미에 대한 깊은 통찰력의 부족으로 많은 장애를 받는다. 필사자가 행운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아마도 불운이 될 것이다; 노력 없이 얻는 휴양을 베풀어주고, 공을 들이지 않고 얻는 부유함을 베풀어주는 그러한 행운의 미소가 인간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재난이 될 수도 있다; 어느 고통 받고 있는 필사자에게 시련이 겹치는, 심술 굳은 운명의 외견상 냉혹함이 실제로는, 미성숙한 개인성이라는 물렁한 쇠를 참된 성격을 갖는 단단한 쇠로 변질시키는, 담금질하는 불길일 수도 있다.
[118:10.9]
사랑은 개인성들 사이의 유익한 연합의 비밀이다. 너희는 단 한 번의 접촉의 결과로 어떤 사람을 실제적으로 알 수 없다. 너희는 음악이 수학적인 어떤 형태의 리듬이라 하더라도 수학적 추론을 통해서는 음악의 진가를 알 수 없다. 전화 가입자에게 배정된 번호는 그 가입자의 개인성을 어떤 방법으로도 증명하거나 그의 성격에 관해 어떤 의미도 나타내지 않는다.
[12:9.2]
신뢰의 엄숙. 신용은 의지적 창조체들에 대한 결정적 시험이다. 믿을 수 있음은 자아-극복, 성격에 대한 참된 측정이다. 이 2품천사들은 초우주들의 섭리에 있어서 이중적 목적을 성취한다: 그들은 모든 의지적 창조체들에게 신용의 의무와 신성함 그리고 엄숙함의 의미를 묘사한다. 동시에 그들은 지배하는 권세자들에게 신뢰 또는 신용을 위한 어떤 후보자의 정확한 신용 상태를 정확하게 반향한다.
[28:6.13]
너희의 성격이 이 추가된 임무들을 품위 있게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개발되는 속도에 맞추어서 너희를 증진된 신용으로 진보시키는 것이 너희 상관들의 계획이지만, 개인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는 일은 오직 재난을 초래하고 실망감을 안겨줄 뿐이다. 그리고 책임을 사람 또는 천사에게 시기상조로 감당케 하는 오류는 시간과 공간에 속한 개인들의 신용 수용력에 대한 오류가 없는 이 평가자들의 소명봉사를 활용함으로써 피할 수 있다. 이 2품천사들은 높은 권한자들을 항상 대동하며, 이 집행자들은 그들의 후보자들이 2품천사 저울에 달리고 “모자람이 없다”라고 선언될 때까지 임무배정을 결코 하지 않는다.
[28:6.15]
위대함에 대한 측정은 구체(球體)마다 다르다. 위대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위대함의 본질특성은 전적으로 선(善)의 내용에 의해 결정되므로, 심지어는 너희의 현재 인간적 정황에 있어서도, 만일 너희가 은혜를 통하여 선하게 될 수 있다면, 너희는 그것에 의해 위대하게 되어가고 있다. 너희가 확고하게 더 바라볼수록, 그리고 너희가 더욱 끈덕지게 추구할수록, 신성한 선(善)의 개념은 위대함에 있어서, 진정한 생존적 성격의 참된 고결함에 있어서 너희로 하여금 더욱 분명하게 자라게 할 것이다.
[28:6.22]
아무리 고귀한 종교적 교리라도, 죽은 이론은 인간 성격을 변환시키거나 필사자 습성을 조정할 힘이 없다. 오늘날의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너희 옛 선생들이 외쳤던 이러한 진리이다: “말에 있지 않고 오직 힘과 성령 안에 있다.” 신성한 영이 진리의 형체들에게 숨을 불어넣고 정의(正義)의 법칙들을 소생시킬 때까지 그리고 그렇게 되기 전에는 이론적인 진리의 씨는 죽어있고, 고귀한 도덕적 개념은 효력이 없다.
[34:6.6]
히브리 종교의 큰 오류는 과학의 사실적 진리들과 예술의 매력적인 아름다움을 하느님의 선함과 연합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문명이 진보됨에 따라, 그리고 종교가 진리를 상대적으로 배제하고 아름다움을 무시하도록 하느님의 선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어리석은 길을 일관되게 추구한 이래로,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고립된 선(善)에 대한 추상적이고 분열된 관념으로부터 돌아서려는 경향이 점점 더 생겨났다. 많은 20-세기의 사람들의 헌신과 충성을 붙잡는데 실패한, 현대 종교의 지나치게 강압적이고 고립적인 도덕성은, 만일 그 도덕적 명령에 추가하여 과학과 철학과 영적 체험의 진리들을, 물질 창조의 아름다움 , 지적 예술의 매력, 그리고 진정한 성격 성취라는 웅장함과 똑같이 배려한다면, 그 스스로 회복될 것이다.
[2:7.9]
참된 종교는 매일 매일의 삶에서의 진부한 실체들과 역동적으로 직면하며 살아가는 것의 의미가 넘쳐나는 길이다. 그러나 만일 종교가 성격의 개별적 발전을 자극하여 개인성의 집대성을 증대시키고자 한다면, 종교는 결코 표준화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에 종교가 체험의 평가를 자극하여 가치-유혹물로 봉사하려면, 결코 틀에 박히어서는 안 된다. 만약에 종교가 최극 충성심을 촉진하려면, 그것은 결코 정형화 되어서는 안 된다.
[99:4.3]
발달하는 각각의 어린이에게 그 자신의 종교적인 체험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이미 만들어진 어른의 체험을 그에게 강요하지 마라. 확립된 교육 체제를 통하여 매년 진보되는 것이 반드시 지적인 진보를 의미하지 않으며, 영적인 성장에서는 더욱 그렇지 않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라. 단어를 많이 아는 것이 성품의 발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장은 단순히 결과들에 의해서 정확하게 표시되지 않고 오히려 진행되는 정도로 표시된다. 참다운 교육적 성장은 이상(理想)들의 향상과 가치들에 대한 증대된 이해와 가치들에 대한 새로운 의미들 그리고 최극의 가치들에 대한 증대된 충성심에 의해 표시된다.
[100:1.3]
많은 더 높은 학교들에서 채택된 방법들은 진리를 가르치는 기술에 대한 인간적 개념을 능가하지만, 전체 교육 체계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성격은 계몽된 체험에 의해 얻어진다. 교사들은 계몽을 제공한다; 우주 정거장과 상승하는 자의 지위는 체험을 위한 기회를 제공한다; 이들 두 증대된 성격의 현명한 활용은 개인성을 증대시킨다.
[37:6.3]
아벨의 행위성을 관찰해 볼 때 환경과 교육이 성격 발달에 얼마나 중요한 요인이 되는지를 시사해 준다. 아벨은 그의 모든 성격 저변에 이상적인 유전자와 자질을 갖고 있었지만, 열악한 환경은 결국 이 훌륭한 기질을 중화시켜 버렸다. 아벨은 특별히 그의 어린 시절 동안 좋지 않은 주위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가 25세나 30세까지 살았다면, 그는 아마 전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인데, 그의 훌륭한 유전자가 결국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환경이 비천한 유전자의 성격적 결함을 극복하는데 실제적으로 큰 공헌을 할 수 없는 반면에, 나쁜 환경은 뛰어난 유전자를 매우 효과적으로 망칠 수가 있으며, 적어도 어린 시절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좋은 사회적 환경과 적절한 교육은 좋은 유산을 최대로 발휘시키는데 필수적인 토양과 공기가 되는 것이다.
[76:2.6]
유란시아에 있는 보통 수준의 필사자들이, 나사렛 예수가 육체 속에 머무른 동안 달성하셨던 성격의 높은 이상에 다다르게 되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예수의 개인성의 완전해진 계통들을 따라서 하나의 강력하고 통일된 개인성을 개발하는 것은 모든 필사자 신자들에게 전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주(主)의 개인성의 독특한 모습은 그것의 완전성보다는 오히려 그 균형, 그 섬세함 그리고 지극하고 치우치지 않은 통일성이었다. 예수에 대한 가장 효력적인 소개는 어떤 사람이 자기를 고소하는 자들 앞에 서 계신 주(主)를 향하여 손짓하며 “이 사람을 보라!”고 말하였던 본보기에서 볼 수 있다.
[100:7.1]
종교적인 체험을 확인하고 분석하는 일은 어렵지만, 그러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마치 이미 영원한 존재의 현존 안에 있는 것처럼 살면서 나아가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다. 믿는 사람들은 마치 불멸성이 이미 그들의 소유라도 된 듯이 이 현세적 삶에 반응한다. 그러한 필사자들의 삶 속에는, 오직 세상의 지혜만을 빨아들여 온 그들 이웃들의 삶들로부터 그들을 언제까지나 분리시키는 정당한 기원성과 자연발생적 표현이 있다. 종교인들은 일시적인 현재의 시간 속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변천들의 고통스러운 압박과 괴롭게 만드는 성급함으로부터의 효과적인 해탈을 영위하는 듯이 보이며; 그들은 생리학과 심리학 그리고 사회학의 법칙들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 개인성의 안정과 성격적 평온을 나타낸다.
[102:2.3]
내적 창조성은 개인성 집대성과 자아신분 통합을 통하여 성격이 고귀하게 되도록 기여한다. 이것이 언제까지나 참이다.: 과거는 바뀔 수 없고; 오직 내적 자아의 현재 창조성의 사명활동에 의하여 미래만이 바뀔 수 있다.
[111:4.12]
사람 자신이 개인성 소유로서 자기와 함께 간직하고 있는 그것은. 그의 낙원천국으로 상승하는 과정에서 거대우주의 마음 그리고 영 순환회로들을 이용해 온 체험의 성격 결과들이다. 사람이 결정을 내릴 때, 그리고 그가 이 결정을 행동 속에 더할 나위 없는 이룰 때, 사람은 체험을 하게 되며, 이 체험의 의미들과 가치들은 유한으로부터 최종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원들에서 언제까지나 그의 성격의 한 부분이 된다. 우주적으로 도덕적이며 신성하게 영적인 성격은, 진지한 경배에 의해 조명되고, 지능적인 사랑에 의해 영화롭게 되며 형제간의 봉사 속에서 더할 나위 없이 이룩한 개인적 결정들로 이루어진 그 창조체의 주요한 축적물을 대변한다.
[117:5.13]
이러한 더할 나위 없는 행복들에 대한 신앙과 사랑은 도덕적 성격을 강화시키고 행복을 창조한다. 공포와 분노는 성격을 약화시키고 행복을 파괴한다. 이 감격적인 설교는 행복이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140:5.6]
인간의 생명은 세 가지의 큰 본능적 욕구─충동, 욕망, 애착─를 담고 있다. 강인한 성격, 당당한 개인성은 생명의 본능적 충동을 삶에서의 사회적 기술로 전향시킴으로서, 현재의 욕망을 영속적인 달성이 가능한 더욱 높은 소망들로 변환시킴으로서만 오직 얻어지며. 한편으로는 실재의 평범한 애착을 자신의 전통적이고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미(未)탐험 관념과 미(未)개척 이상에서의 더욱 높은 영역으로 옮겨져야만 얻어지는 것이다.
[160:1.2]
상호적인 자아-표현과 자아-납득. 훌륭한 많은 인간들의 추진력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죽어 버린다. 정말로, 혼자 있는 것은 사람에게 좋지 않다. 어느 정도 인정받고 존중받는 것은 인간 성격 개발에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집에서 참된 사랑을 받지 못하면, 어린이들의 정상적인 성격 개발은 온전히 성취될 수 없다. 성격은 단순히 마음이나 도덕보다도 더 큰 그 무엇이다. 성격을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사회적 관계들 중에서 가장 효력적이고 이상적인 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지적인 결혼생활에서의 서로간의 포옹 안에서 애정이 넘치고 그리고 납득하는 친구관계이다. 결혼은, 그 각가지 관계와 함께, 강한 성격을 개발하기에 필수불가결한 보다 높은 동기들과 귀중한 추진력들을 가져오도록 최상으로 설계되어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저하지 않고 가정생활을 찬미하는데, 왜냐하면 너희들의 주(主)께서 새로운 이 왕국 복음의 주춧돌로서 아버지-아이의 관계를 현명하게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시간의 가장 높은 이상들을 다정하게 포옹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 무엇에도 비길 데 없는 그러한 관계의 공동체는 너무나 가치가 있고 체험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에 그 소유를 위해서라면 어떤 값, 어떤 희생, 또는 어떤 대가(代價)라도 치러야 한다.
[160:2.6]
타협과 가장 작은 저항의 절충적인 길로 첫 발을 내딛었기 때문에, 베드로에게는 오직 결정했던 행위에 대한 길을 계속 갈 뿐이었다. 그릇되게 시작된 것에서 돌이켜서 올바른 길로 가는 일에는 위대하고 숭고한 성격이 요구된다. 사람 자신의 마음은 너무나도 흔히 한번 실수의 길로 들어서게 되면 그 길로 계속 가는 것을 정당화시키려는 노력을 한다.
[184:2.12]
왕국의 종교는 개인적이고 개별적이다; 그 열매, 그 결과는 가족적이며 사회적이다. 예수는 공동체에 대비하여 개별존재의 신성함을 항상 강조하였다. 그러나 주(主)는 사람의 성격이 사심 없는 봉사를 통하여 개발된다는 것과; 사람이 이웃과의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 자신의 도덕적 본성을 펼친다는 것을 또한 인지하였다.
[170:3.10]
세속적인 교육일지라도, 만약에 일생 설계와 성격 진보에 관여시키는 방법을 젊은이에게 가르치는 일에 좀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려 한다면, 이 위대한 영적 부흥에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교육의 목적은 일생의 최극 목표, 잘 균형이 잡히고 장엄한 개인성의 계발을 육성시키고 진행시키는 것이어야만 한다. 너무 지나친 자아-만족대신에 도덕적 교육단련에 대한 가르침이 대단히 필요하다. 그러한 기초 위에서 종교는 필사자의 생활을 확대시키고 풍성하게 하는, 그리고 심지어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고 강화시키는 영적 자극을 제공할 수 있다.
[195:10.17]


완전한 성격 - 나자렛 예수

character2.jpg 예수의 끊임없는 친절이 필사자들의 가슴에 감동을 주었지만, 신념이 굳은 그의 힘찬 성격은 그를 따르는 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참으로 성실하였으며; 그 어떤 아무런 위선도 그에게는 전혀 없었다. 그는 허식이 없었으며; 항상 매우 신실하게 진심이었다. 그는 결코 겉치레로 자신을 낮춘 적이 없었으며, 속임수를 쓴 적이 결코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가르쳤던 것과 똑같은, 진리로 사셨다. 그는 진리 그 자체였다. 그는 당대의 사람만을 구원하는 진리를 선포하도록 강요되었었고, 오히려 더 큰 괴로움을 때때로 일으켰지만 자신의 진지함을 선언하였다, 그는 모든 진리에 의심을 생각할 수 없는 충성을 바쳤다.
[100:7.2]

“먼저 왕국에 들어가기를 구하고 그래서 나의 아버지의 고상한 성격을 얻고자 분투를 시작하는 자는, 필요한 다른 모든 것도 곧 지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말하겠는데: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과 신뢰하는 의지를 가지고 왕국의 문을 들어가기를 구하지 않는 한, 아무도 그 안에 들어 갈 수 없을 것이다.
[137:8.8]

그리고 이것은 모든 유대인들의 눈에 참으로 이상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는데: 의로운 성격과 고상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 비종교적이며 쾌락을 추구하는 세리들은 물론, 죄인들이라고 불리는 무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그들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시몬 젤로떼가 마태의 집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기를 원했으나, 앞으로 이루어질 왕국이 열심당의 운동과 혼동되는 것을 예수가 원치 않으리라는 것을 느낀 안드레가 어떤 공개적인 의견도 발표하지 못하도록 그를 말렸다.
[138:3.7]
베드로가 예수를 가장 존경하게 되었던 그의 특색은 뛰어난 친절함이었다. 베드로는 예수의 관용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결코 싫증나지 않았다. 그는, 그릇된 행동을 한 자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교훈을 절대로 잊지 못하였다. 그는 대제사장의 정원에서 경솔하게 예수를 부인한 직후에, 그 어둡고 우울했던 날들 동안 주(主)의 관용의 성격에 대해 자기가 받았던 인상들을 많이 회상하였다.
[139:2.5]
다른 사도들은 예수의 충만한 개인성의 어떤 특별하고 탁월한 특색 때문에 그를 존경하였지만, 도마는 비할 바 없이 균형을 갖춘 주(主)의 성격 때문에 그를 존경하였다. 도마는, 그렇게 정답게 자비스러우면서도 또한 확고하게 공정하고 공평한; 그렇게 엄하면서도 절대로 완고하지 않은; 그렇게 잔잔하면서도 절대로 무관심하지 않은; 그렇게 도움을 주고 그렇게 동정적이면서도 절대로 참견하거나 권위적이 아닌; 그렇게 강하면서도 동시에 그렇게 부드러운; 그렇게 긍정적이면서도 절대로 격렬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은; 그렇게 부드러우면서도 절대로 우유부단하지 않은; 그렇게 순수하고 순진하면서도 동시에 그렇게 꿋꿋하고, 적극적이고, 강력한; 그렇게 진정으로 용기가 있으면서도 절대로 경솔하거나 무모하지 않은; 그렇게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자연을 숭배하는 모든 경향으로부터 그렇게 자유로운; 그렇게 익살스럽고 그렇게 장난기가 있으면서도 경망스럽거나 천박하지 않은 예수를 점점 더 존경하였고 받들었다. 이렇게 비할 데 없는 균형 잡힌 개인성에 도마는 그토록 매료되었다. 그는 아마도 12명 중에서 누구보다도 더, 예수에 대한 최고의 지적 납득과 개인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즐긴 것 같다.
[139:8.7]
예수는 히브리의 선지자들이나 그리스의 도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공격하지 않았다. 주(主)는 이들 위대한 선생들의 많은 좋은 말들을 인정하였지만, 그는 추가적인 어떤 것을 가르치기 위해 이 땅에 왔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사람 의지의 자발적인 일치”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예수는 단지 종교적인 감정으로 가득 차 있고 오직 영적 자극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하나의 종교적인 사람을 만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한 번만이라도 그를 바라 볼 수 있었다면, 예수는 이 세상일들에 위대한 체험을 한 진정한 하나의 사람이었음을 단번에 알아 차렸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예수의 가르침들은 그리스도교 시대의 여러 세기들을 거치면서 비뚤어지고 잘못 전해져 왔다; 너희들도 역시 주(主)의 온유함과 겸손함에 대해서 잘못된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가 자신의 일생 속에서 목표했던 것은 장엄한 자아-존중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져야만 진정으로 높임을 받는다고 충고하였다; 그가 진정으로 목표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겸손이었다. 그는 성실함─순수한 진심─에 가장 큰 가치를 두셨다. 성실성은 그가 성품을 평가하는 기본 덕목이었으며, 반면에 용기는 그의 가르침의 핵심이었다. “두려워 말라”는 말은 그의 표어였고, 인내는 그의 이상적인 성품의 힘을 지탱해 주는 것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종교적 용기, 담력, 영웅적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가 자신의 개인적 대표로서 어째서 소박하고 씩씩하며 대부분 어부 출신인 평범한 사람들을 선택하였는지 하는 이유이다.
[140:8.20]
균형 잡힌 성격에 관한 그의 가르침보다는 예수 자신의 일생 자체가 그의 가르침의 훌륭한 모범이 되었다는 사실로서 그의 동료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압박감과 폭풍 속에서 살았지만, 결코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적들은 계속해서 함정을 놓았지만, 결코 그를 빠트릴 수는 없었다. 현자들과 박식한 자들이 그를 넘어뜨리려고 했으나, 그는 비틀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논쟁에 휩쓸어 넣으려고 했지만, 그의 대답은 항상 교화를 주는 위엄 있고 최종적인 것이었다. 그가 여러 종류의 질문으로 말미암아 그의 말이 중단되었을 때에도, 그의 대답은 항상 의의(意義)깊고 결론적이었다. 그는 그에 대한 공격으로 온갖 종류의 헛되고 부적당하며 불의한 방법을 주저 없이 동원하는 그의 적들의 계속되는 압력과 만나면서도, 절대로 명예롭지 못한 전략을 사용하지 않았다.
[149:4.5]
예수는 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지적인 주의를 집중시키고 붙잡아두는 기법으로 가르치셨다. 그는, 혼에는 참된 성격변환의 영구한 결과를 가지기 위하여 반드시 진리를 알아보고 복음의 영적 호소에 응답하는 사람의 영적 본성이 거하고 있고, 마음은 그 혼에 이르는 대문으로서 그렇게 깨어나고 되살아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152:6.4]
예수가 자신의 직업─목수─과 관련된 첫 번째이자 유일한 비유를 들려주신 것은 동일한 이 설교 도중에서였다. “영적 자질에서의 고귀한 성격의 성장을 위하여 기초를 튼튼히 세우라”는 그의 교훈을 주시는 도중에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영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너희들은 영으로 태어나야만 한다. 너희들이 동료들 사이에서 영으로 충만한 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너희는 영의 가르침을 받아야만하고 영의 인도에 따라야만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목수의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라, 그는, 그의 벌레 먹고 안이 썩은 나무를 반듯이 만들고, 치수를 재고, 매끄럽게 다듬으며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그 튼튼하지 못한 기둥에 모든 그의 수고를 증여하였는데, 시간과 폭풍의 강습을 견디도록 지으려는 건물의 기초로 사용해 보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므로 그것을 버릴 수밖에 없다. 확대되고 고귀해지는 영적 본성, 그렇게 필사자 마음을 변환시키고 그리고는 다시-창조된 그 마음이 연합되어 불멸의 운명인 혼의 진화를 달성하는, 그것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을, 그처럼 적절하게 지탱하는 성격의 지적 그리고 도덕적 기초들이 있는지를 모든 사람에게 확실히 하라. 너희의 영 본성─공동으로 창조된 혼─은 살아있는 성장이지만, 그러나 개별존재의 마음과 도덕은 그것으로부터 인간적 발달과 신성한 운명의 좀더 높은 이 현상들이 돋아나야 할 토양이다. 진화하는 혼의 그 토양은 인간적이고 물질적이지만, 이 마음과 영이 병합된 창조체의 운명은 영적이고 신성하다.”
[156:5.2]
예수는 계속적이고 근거 없는 모욕에 직면하여 위풍당당함을 나타내고 침착성을 나타낼 수 있는 유형의 인간 성격을 습득하였다. 그는 위협을 받으실 수 없었다. 안나스의 하인에 의해서 처음으로 공격을 받았을 때, 그에 대하여 올바르게 증언 할 수 있는 증인을 부르는 것의 타당성을 제안하였을 뿐이다.
[186:2.5]
이러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예수는 거의 말이 없었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사람이 하느님과 동반자관계로서 완전할 수 있는 인간 성격의 종류를 보여주고, 창조체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로 진심으로 선택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의 실제적인 아들이 됨으로서. 하느님이 창조체의 일생 속에 나타나실 수 있는 그 방법을 모든 우주에게 보여주기 충분할 만큼 말씀하였다.
[186:2.9]
그의 말씀을 들은 열 한 사도들은 서로 말했다; “보라, 그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한다. 주(主)가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자신이 왜 아버지께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말하는가?” 그리고 예수는 그들이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셨다. 이 열 한 사도들은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의 개념에 오래-젖어온 그들의 관념에서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으면 믿을수록, 이 땅의 왕국이 영광스럽게 물질적으로 승리하는 것으로 여기는 깊은-뿌리박힌 개념은 갈수록 더욱 문제가 되었다.
[18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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