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영적 관계와 영적 치유 요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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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새말 작성일1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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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치유와 영적 권능

비록 명확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치유를 성장의 관점에서 극도의 비정상적인 불완전함이나 부조화 상태의 해소로 여긴다. 유란시아서에서는 우리는 예수가 적어도 다섯 가지의 독특한 방법을 사용해 치유를 행하는 것을 보게 된다.

  1. 첫째, 우리는 예수가 병자들에게 그들의 당면한 육체적 고통을 덜어 줌으로써 그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그들을 도와주는 사역에 필요한 하나의 보완적 수단으로 사용했음을 본다. 이것은 당시로써는 새로운 것이었다.
  2. 둘째, 우리는 예수가 특정한 질병이나 상태에 실용적인 물질 요법에 대해그가 갖고 있는 초인간적인 지식을 적용했음을 본다.
  3. 세번째 범주는 그가 의도하지 않은 상태의 접촉에서 치유를 구하는 신자의 믿음이 예수의 동정과 권능과 어울릴 때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물리적 치유가 발생하게 되는 경우이다.

 

[149:1] 벳세다의 야영지가 해산될 무렵에는 예수의 명성, 특히 병 치유자로서의 명성이 팔레스타인 전 지역을 위시하여 시리아와 주변 모든 지방들에 퍼져 나갔다. 그들이 벳세다를 떠난 후 수주일 동안에도 병자들이 계속하여 그곳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주(主)를 만나지 못했을 때, 다윗으로부터 주(主)가 계신 곳을 알아낸 후 그를 찾아가곤 하였다. 이 여행에서 예수는 의도적으로 소위 기적이라고 불리는 치유를 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 받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로 하여금 치료를 간구하도록 한 끈질긴 신앙의 재활의 힘의 결과로 인하여 건강과 행복을 되찾게 되었다.

이 무​렵에─그리고 예수의 나머지 이 세상 일생을 통하여 계속하여─이상하고도 설명되지 않는 치유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세 달 동안의 여행에서 유대, 이두미아, 갈릴리, 시리아, 티레, 시돈 그리고 요단강 너머에 있는 지방에서 온 100명이 넘는 남녀들과 아이들이 예수에 의해서 무의식적인 치유의 혜택을 입었다. 그리고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예수의 명성을 더욱 높였다. 예수가 무의식적인 치유가 일어날 때마다 혜택을 본 자들에게 직접 “아무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였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소문을 내고 다녔다.

이러한 자연발생적이고 무의식적인 치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한다. 몇 번의 경우에서 단지 “기세가 나로부터 나간 줄을 내가 안다.”라고 그가 말씀했던 것을 제외하면, 주(主)는 한 번도 이러한 치유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지를 사도들에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한 번은 병든 아이가 그에게 손을 대자 “생명이 나로부터 나간 줄을 내가 안다.”라고 주(主)가 말씀하였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치유의 성질에 관하여 주(主)가 직접적인 말씀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해서 일어났었는지를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주제 넘는 일인 줄 알고 있지만, 그러한 모든 치유의 현상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기록하는 것은 허용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예수의 이 세상 사명에서 일어났던 이러한 뚜렷한 치유의 기적은 다음 세 가지의 강력하고 효력 있고 연합된 영향이 공존했던 결과인 것 같다:

  1. 순전히 육체적인 회복보다는 영적 은혜를 위해 그러한 치유가 갈구되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끊임없이 고침 받기를 갈망하는 인간존재의 가슴 안에 내재해 있던 강하고 지배적이고, 살아있는 신앙이 있었던 점.
  2. 거의 무제한적이고 무시간적인 창조적 치유의 능력들과 특권들을 그의 개인 안에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육신화하고 자비가-지배하는 하느님의 창조주 아들의, 그러한 인간의 신앙과 공존하는, 큰 동정심과 연민의 실재.
  3. 창조체의 신앙과 창조자의 일생과 더불어 또한 이 하느님-사람이 아버지의 뜻의 개인화(個人化)된 표현이라는 점도 주목해야만 한다. 만약에 인간 필요의 접촉과 신성한 능력이 만날 때, 아버지의 반대만 없었으면 그 두 가지는 하나가 되었고, 치유는 인간 예수에게는 무의식적인 가운데 일어났지만, 그의 신성한 본성으로는 즉각적으로 인지되었다. 이러한 많은 치유의 경우들은 우리가 오래 알아 온 하나의 위대한 법칙, 창조주 아들이 원하고 영원한 아버지가 뜻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법칙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예수의 개인적 현존 안에서는, 인간의 어떤 형태의 심오한 신앙이, 어떤 창조적 기세와 그리고 그 당시에 사람의 아들과 밀접하게 연합된 우주의 개인성들에 의한, 문자 그대로의 진정한 치유를 일으키도록 강요하였다는 것이 우리의 의견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자주 그의 현존 앞에서 그들의 강렬한 각자의 신앙으로 자신들의 병이 고쳐지도록 사람들을 견뎌내었다는 것은 사실의 기록이 된다.

넷째로, 예수는 자발적으로 치유를 연속적으로 행했는데 이는 신자 개인들의 영적 성장과 봉사 능력을 키워 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152.0.3] 예수가 이 말을 들으시고 그 여자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시며 말씀하였다: “딸아, 네 신앙이 너를 온전케 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그녀가 온전하게 된 것은 그녀가 그에게 손을 대어서가 아니라 그녀의 신앙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의 이 세상 생애에서 일어 난, 보기에는 기적 같은 많은 치유의 좋은 예인데,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그가 의식적으로 뜻한 것이 아니었다. 이 여인이 그녀의 질병에서 실제로 고쳐진 것은 시간의 흐름이 실증하였다. 그녀의 신앙은 주(主)의 개인 안에 거하는 창조의 힘에 직접 대어보겠다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었다. 그녀가 가진 신앙으로는, 단지 주(主)의 개인 앞으로 다가가는 것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았었고, 그것은 단순히 그녀의 신앙에서 가지고 있던 미신적인 부분이었다.

예수는 케자리아-빌립보의 베로니카라는, 이 여인을 자기 앞으로 불러서 그녀의 마음속에, 혹은 이 치유를 목격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간직될 수도 있는, 두 가지의 실수를 바로 잡고자 하였다. 예수는, 베로니카가 자신의 고침을 몰래 받으려 시도했다는 것에 그녀가 두려워하거나, 혹은 그의 옷자락을 만진 것과 관련되어 자신이 치유 효력을 얻었다는 그녀의 미신에 잡힌 생각을 지니고 그곳을 떠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치유를 가져 온 것은 그녀의 순수하고 살아있는 신앙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였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그의 창조자 아들로써의 권능과 권위를 사용해서 치유를 구하지 않는 사람이나 또는 치유의 혜택을 믿음을 통해서 일으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 치유를(또는 나사로의 경우처럼 부활을) 베풀었다. 이런 경우에 예수의 목적은 폭넓은 군중들에게 아버지를 게시하거나 예수의 비상한 동정과 자비와 연관되었든 것처럼 보인다.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모범을 따라서 사역하기를 원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70인 교사의 경험이 과연 그들이 “신경 장애”를 치유할 수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163:6.2] 70인이 자기들에게 어떻게 “귀신들까지도 복종”하였는가를 이야기하면서, 신경 장애에 걸린 사람의 경우에 자기들이 일으킨 놀라운 치료를 언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는 실제로 악령에 사로잡혔다가 이 사자들에 의해 놓여난 경우가 몇 번 있었으며, 예수는 이것들에 대하여 말씀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쩍이면서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으니, 이 불순종의 미숙한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너무 기뻐하지 마라. 왜냐하면 소수의 이 잃어진 영들이 불행한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도록, 내가 내 아버지께로 돌아가자마자 우리가 우리의 영들을 사람들의 바로 그 마음속에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사람들과 힘을 체험한 것에 대해 나도 기쁘지만, 이 체험 때문에 교만하지는 말고 오히려 너희 이름이 하늘의 두루마리에 기록된 것과, 그리하여 영적으로 정복해 나갈 끝없는 생애로 나아가게 된 것을 기뻐하라.”

동시에 예수 자신의 치유 행위는 분명히 그의 개인적이고 육신적인 현존에 따라서 일어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신성의 영적 에너지나 혹은 그의 명령에 다른 하늘 존재들의 사역을 이끌어 내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도들이 희망햇던 것, 기대했던 것 그리고 사도들에게 가능했던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샤펫의 야고보와 그의 귀신들린 간질병 아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158: 4,5,6] 

우리는 어떤 요소가 아이를 고치는데 실패게 만들었는지를 배우기 위해서 이를 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이런 것들이 치유에 여향을 미치는지 알아야 한다. 분명히 그들은 영적이 아닌 자기 중심적인 태도로 시작했으며 무모함과 무분별하였다. 그렇지만 계속 이어진 기도와 명상마저도 치료를 가능하게 하지 못했다. 예수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의심하는 불신’을 장애로 지적했다. 그리고 치유를 구하는 그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을 떠보았다. 그 아버지의 믿음을 보강한 뒤에 예수는 하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치유를 이루어 냈다. 이 치유는 육페적이며 영적인 것이었다.

그날 저녁 그 이후에 예수는 사도들의 실패의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158:6] 그 설명의 요약은 사도들의 실패를 분석할 때 그의 치유 사역에 있어서 세가지 원칙을 확인해 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 목표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일 경우 자연현상의 시간 단축도 잠재적으로 가능하다.
  2. 영적 권능이 현존할 때 영적인 일의 수행이 잠재적으로 가능하다.
  3. 이런 잠재력의 의도적인 실현은 살아 있는 믿음의 경험에 달려 있다.

어떤 점에서는 이것은 아버지에 의해 의도될 때 진정한 자녀의 소망이 반드시 이르게 되는 원칙의 결과이다. 이 원칙들은 나중의 70인의 영적 사역에서의 성공에서 보여진 바와 같이 예수의 추종자들에게 적용된다. 만약에 사도들이 영적으로 더 준비가 되고 성장했었더라면 그들은 그들의 시도에서 실패하지 않았었을 것이다.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3-08-28 독자 리뷰에서 복사 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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