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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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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너킥 작성일21-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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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삶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다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짧은 영상에서 상당히 유명한 스님의 삶의 철학이 잘 드러나 있다. 그분은 삶은 왜 사는가의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라고 깨우쳐 주면서,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 하루를 즐겁게 살 것인지 괴롭게 살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 인간의 삶의 본질이자 의무라고 주장했다.

이 스님은 인간이 왜 사는가에 하는 질문은 답이 없는 것이니 헛된 질문이라고 말한다. ​나라고 하는 ​인간은 질문하거나 생각하기도 한참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스님이니, 삶의 이유를 알 리가 없겠지만,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참으로 염치가 없는 말이다. 헛된 질문이 아니라, 헛된 가르침이다.

이미 살고 있는 것은 인간뿐이 아니고 세상 생명체가 모두 그렇다. 인간이 왜 사는지 모른다면, 알 필요가 없다면 식물이나 동물이나 인간이나 그저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목적으로 여기고 열심히 살면 된다는 것이다. 모습이나 살아가는 형식만 다를 뿐, 인간과 동물을 굳이 구분할 이유가 없다는 말도 된다.

창조자 하느님을 모르는 스님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크게 이상하지도 않고 별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말을 삶을 깨우치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공감을 한다는 것에서 문제는 심각할 수 있다. 사람들이 공감을 하는 것은 그러한 말에 위로를 받고 삶의 자세를 그렇게 가지겠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인간이 왜 동물과 구분되는 존재인지 그 참다운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포기하겠다는 선언과 같다.

자기 자신이 낳은 자녀와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이 모두 즐겁게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삶은 완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다면, 자식을 애완동물과 구분하지 못하는 부모일 것이다. 자신의 자녀에게 행복한 강아지처럼 재밌게 일생을 살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하는 부모는 있을 수 없다. 자신의 자녀가 살아가는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를 결국은 동물과 같다고 판단한다면, 인간은 모두 동물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에서, 단 한 걸음도 의식이 깨우나지 못한 동물적 인간의 삶이 되는 것이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진리 의식이 전혀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기대하고 있는지, 창조자가 인간을 왜 만들었는지 자녀들은 알 수가 없다. 모든 부모는 자녀에게 삶을 강요하는 대신,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오직 사랑을 쏟아부으면서 인간으로서의 위대한 모습을 성취하기를 원하며 기대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간을 동물과 다르게 창조하신 창조자도 그러할 것이다.
 

32:5.1
공간을 통과하는 우주들의 행진 속에는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목적이 있다. 너희 필사자들의 모든 투쟁은 헛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광대한 계획, 거대한 활동사업의 일부분이며, 어떤 한 시점에서 그리고 어느 한 삶의 기간에서 그것을 충분히 똑바로 알기가 불가능한 것은 떠맡고 있는 그 일의 광대함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들이 지휘감독하고 능히 다스리는 영원한 구체적 투사의 한 부분이다. 경이롭고도 우주적인 전체 기능구조는 위대한 첫째근원이며 중심의 무한생각과 영원목적의 박자로 이루어진 음악에 맞추어 공간에 두루 장엄하게 움직이고 있다.


인간이 삶의 여정에서 상처 입고 고통을 겪고 어둠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에는 그럴만한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역경도 스스로의 힘으로 헤어나지 못하는 역경은 없다. 개인의 능력은 무한하다. 개인이 저마다 주어진 그 무한한 능력을 사용하기를 거부할 때, 하느님은 천사를 통하여 아픔과 억압으로 자극을 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한 자극에서 깨어나 도전과 용기를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오로지 편안한 삶을 찾아서 도피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 동물로 살아가는 것이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은 빛을 거부하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진리의 빛이 비치어져 있다. 판단의 능력이 없어서 진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밝은 빛 아래에서 사물의 참된 모습을 보는 것이 불편하고 싫기 때문에, 빛을 거부하고 어둠 쪽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개인의 판단이자 개인의 책임이다.

다만, 그러한 어둠의 삶을 남에게 권하고 알리고 전파하는 일은 순진한 사람들을 어둠 속으로 이끄는 것이라서 빛을 지니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나서서 적극적으로 막아야만 할 것이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하느님의 진리를 널리 알려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것이 사랑의 실천일 것이다.

댓글목록

디오니스님의 댓글

디오니스 작성일

그냥 웃어 버린다는 노랫말에도 있듯이 왜 사는가 하는 질문은 사람이라면 아무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이겠지요. 스님이 자기는 모른다고 것을 비유적으로 답했으니, 그런 면에서 본다면 솔직하고 진지하게 답을 하셨네요. 하느님을 잘 알고 있다고 공언하는 기독교에서도 하느님의 참된 뜻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고 있으니, 스님이나 목사님이나 신부님이나 어떤 철학자 종교인도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답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들어있고, 하느님의 뜻을 인류에게 전하는 방법은 계시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계시된 진리가 점점 흐려지면서 유란시아 책이 등장하기 직전에 이르러서는 거의 사라진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유란시아 책이 주어진 것이지요. 인간의 운명과 운명을 달성해야만 하는 존재의 이유는 유란시아 책을 읽기 전에는 그 누구도 답할 수 없습니다.

슬기로님의 댓글

슬기로 작성일

열심히 바쁘게 살고 있을 때,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 넘칠 때는 현재가 영원하기를 바라기는 하지만 영원한 삶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고 원하지 않는 일들이 계속하여 일어날 때, 피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는 고난이 없고 행복만이 넘치는 영원한 삶을 상상해보게 됩니다.

이런 행복한 희망이 절실해지면 진정한 삶이나 하느님의 뜻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 순간이 영원한 삶과 인간의 운명을 알 수 있는 새로운 계기가 되는 것이지요. 천사들이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새로운 운명을 깨닫고 시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영원한 삶이 필요한 사람에게 영원한 세계가 열리고 그 세계를 알려주고 다가갈 수 있는 진리가 꽃을 피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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