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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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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새 작성일19-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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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외면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이 진리를 외면하는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워서 진리와 자신에 대하여 정당성을 찾으려고 온갖 창의성을 발휘하기도 한다. 

 

가장 많은 정당성이 자신들은 결코 진리를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많은 사실들을 내세워서 입증하는 것이다. 

 

진리라는 말에는, 절대적 참과 거짓에 관한 영적 의미가 있어서 얼른 실감이 안 갈 수도 있다, 현실적인 감각이 살아나질 않는다. 그러나 이 말을 진실과 거짓, 정의와 불의, 정직과 위선으로 바꾸어서 이야기하면 아주 생생하게 이해가 될 것이다. 현실 세계가 이러한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자신은 결코 진리를 거부한 적이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은 결고 진실과 정직과 정의를 거부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과연 그럴까? 정말로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라면, 자신 있게 결단코 그러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리는 말이나 삶의 증거로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132:3.2
 
진리는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삶에 의해서만 정의(定意)되어질 수 있다. 진리는 항상 지식 이상의 것이다. 지식은 관찰할 수 있는 사물들과 관계되지만, 진리는 그러한 순전히 물질적인 차원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지혜와 조화롭게 어울리고 그리고 인간 체험처럼 그렇게 가치를 달아볼 수 없는 것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영적인 그리고 삶 실체들까지 포옹한다. 지식은 과학에 근원을 두고 있다; 지혜는 진정한 철학에 근원을 두고 있다; 진리는 영적 삶의 종교적 체험에 근원을 두고 있다. 지식은 사실들을 다룬다; 지혜는 관계들을 다룬다; 진리는 실체 가치들을 다룬다.

 

하느님의 진리를 아는 사람은,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진리에 비추어서 자신이 진실하고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능력은 선천적으로는 잠재되어 있겠지만, 실제로는 삶의 체험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종종 하느님 앞에서 정직해야 한다는 첫번째 진리 앞에서 자신은 죄가 있다고 고백하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자신을 되돌아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진실하고, 정의롭고 정직하다고 스스로 믿는다. 진실은 누구에게나 분명한 것인데, 왜 사람들은 진실을 앞에 놓고 그렇게 서로 다투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일까. 

 

여기에는 대체로 4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사람들은 진실, 정의, 정직 그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러한 어떤 본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눈 앞에 벌어진 현상으로 그 말을 서로 사용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사람들은 오직 상대방을 공격하고 흠을 찾아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려고 그 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짓, 불의, 위선을 증명하는 언어적인 도구로서 그 말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셋째로 사람들은 그러한 것에 담겨있는 실제 내용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이 관심이 가는, 자신에게 흥미를 주는 내용만을 가지고, 편견에 스스로 빠져들면서 자신의 생각만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넷째로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을 자신하면서, 현재 드러난 것을 바꾸어 해석하는 왜곡을 기꺼이 즐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적어도 드러난 어떤 진실, 정의, 정직을 자신이 판단하고 분류하는 위치에 서 있다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 한다.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진실보다 자신의 기쁨이 더욱 절실한 것이다. 

 

유란시아 책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오로지 진실, 정직, 정의만이 문장마다 담겨 있는 책이다. 이를 거부하거나 비평하거나 가볍게 보는 경우가 많이 있을 것이다. 내용에 담겨있는 모든 것을 발견하기보다는, 내용이나 계시자를 평가하거나 판단하거나 비평하거나 견주는 즐거움에 빠져드는 경우도 많이 있을 것이다.

 

진리나 진실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정정당당하게 마주하면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두려움을 스스로에게 감추기 위하여 가장 용기 있고 가장 용감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전시하려고 애쓰게 되는 것이다. 용감한 행동은 거의 없고 용감에 대한 설명만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9:5.7
 
너무나도 종종, 아주 너무나도 종종, 너희는 너희 마음을 불성실로 훼손시키고 불의로 마음을 그슬리게 한다; 너희는 그것들을 동물적 두려움에 굴복시키고 쓸데없는 걱정으로 왜곡시킨다. 그러므로 마음의 근원은 신성하지만, 상승하는 너희 세계에서는 너희가 잘 아는 것처럼 마음은 위대한 찬미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찬양이나 경배는 더 더욱 될 수 없다. 미성숙하고 비활동적인 인간 지성에 대한 깊은 사색은 오직 겸손의 반응으로 이끌어야만 한다.


평소에는 두려움을 감추려고 가장 앞에 나서서 온갖 열정을 다 보이지만, 정작 위기 상황이 닥치면 가장 먼저 사라지고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사람들이 많다. 일상에서 그러한 위기 상황은 거의 닥치지 않기 때문에,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 조차 그들의 거짓된 주장에 동조하게 된다.

 

이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편견이나 왜곡 없이 진실과 거짓, 사실과 허위, 정의와 불의, 정직과 위선을 현실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비록 해석하는 것은 각자의 판단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실에 드러난 그 실체를 뒤바뀌는 것은, 의도적으로 악을 발견하여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참된 진리의 길에서 각자 주어진 삶을 완성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확실한 길은 삶에서의 혁신이다. 삶의 모든 현장에서 진리의 영이 활발하게 그리고 역동적으로 우리의 에너지 원천이 되도록 마음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부어주신 진리의 영, 우리의 문 앞에서 우레에게 들어오려고 언제까지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진리의 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댓글목록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유란시아 책에서도 인간의 나약함을 안타까워하는 글이 종종 나옵니다. 운명 수호천사가 남긴 글을 보면, 어쩔 수 없는 본능적 욕구 때문에 진리인 줄 안면서도 선택하기를 거부하는 여러가지 사연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생존이라는 영원한 삶이라는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겠지요.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생각합니다. 실천은 못 하더라도, 나 자신이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에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도 언젠가는 벗어날 수 있겠지요. 이기심만 버린다면,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네오님의 댓글

네오 작성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기준으로 세상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어서, 신성한 참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유란시아 마저도 그렇게 자기 기준으로 선을 긋고, 소위 말하는 내로남불 식으로 다른 사람의 해석을 평가함으로써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할 겁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그 참 뜻을 알고 그에 따라 겸허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모든 위험 중에서 자만심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그걸 날마다 조금씩 내려놓는 것이 진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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