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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믿음 - 전통 종교와 유란시아 계시

페이지 정보

작성자 불새 작성일17-11-29

본문

사실이나 진리가 순수하게 옳고 고귀해서, 받아들여 어떤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으로 간직된다면, 그것을 신앙이라 부른다.

 

신앙이란 말에는, 종교적 의미가 들어 있어서 어떤 복종 의식이나 반이성적인 행동을 보이는 원시적 행태 때문에, 신앙은 때로는 지능이 모자라고 판단력이 결여된 무지한 사람들이, 그저 맹목적으로 따르는 마음이나 행위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이에 반하여, 유란시아 책에서 말하는 신앙은 가장 고귀하고 신성한 의미가 담긴 말로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높은 정신세계의 하나를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책에서 설명하는 신앙의 역사적, 철학적, 신학적 발전과 미래의 운명을 이해해야만, 신앙이라는 말에 담긴 진정한 의미와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조잡하고 열등한 무속신앙의, 거의 동물적인 율동 행위와 중얼거리는 낭송을 신앙의 현장에서 목격했거나 생생한 체험을 했던 사람들에게는, 신앙이라는 말은 아무리 정화시키고 승화시켜도, 유란시아 책에서 말하는 참된 신앙의 의미를 파악하기까지 상대적으로 좀 힘들 것이다. 신앙을 오염된 모습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계시에서, 신앙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할 때마다, 아마도 거의 본능적으로 반감이나 혐오감이 일어날 수도 있다.

 

왜곡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신앙은 두렵거나, 부끄러운 말로 들리지만, 반면에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신앙은 고귀한 말이다. 불교나 기독교 혹은 민족 종교 같은 특정 종교에서 믿음의 생활을 하는 신자들이라면, 신앙을 원시적이거나 오염된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인이 그런 구시대적 시각으로 신앙을 해석하는 것을 어이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신앙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신들이 가숨속에 간직하고 있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광스럽고 찬란한 절대적 실체를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본인에게 아무리 고귀한 신앙도, 제삼자에게는 왜곡된 모습으로 지탄받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신앙의 절대적 대상에 대한 정의와 개념이 순전히 인간의 지적 능력에서 이루어지는 한계성 때문이다. 지능이 발달되면서, 어떤 절대적이고 객관적 신앙이 점점 인간이 정의하는 주관식 신앙으로 변질되고, 그러다 보니, 절대성을 보호하려고 복종을 강요하고, 때로는 배교와 이단을 용서 없이 응징하게 되는 것이다. "변론은 담겨있는 진실에 반비례한다"는 책의 말이 딱 어울리는 현상이다. 요즘의 현실은, 종교마다 신앙의 절대성을 고집할수록 자신들이 주장하는 절대적 대상에 대해, 실제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점점 더 반증하는 듯하다.

 

자유게시판에서 독자분들이 설명하였듯이, 계시를 전해준 천사들이나 초인간 존재들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인간 존재도 하느님이나 절대자나 무한자에 대한 이야기를 감히 할 수가 없다. 더구나 인간의 몸으로,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말에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신성모독이다. 권위는 주장한다고 인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는, 가장 높은 차원의 한 분인 신성한 조언자가 자신이 하는 말을 설명하면서 권위에 대해 간접적으로 한번 이야기하는 것이 고작이다. 유란시아 계시에 권위가 있는지는 계시자들도 직접 주장하지 않으니, 아무도 책의 권위를 나서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독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이 글의 권위에 대하여 부정하지 않는다.

 

1:7.9
[...나는 하느님의 본성과 속성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이 글을 후원하도록 위임받았는데, 왜냐하면 거주하는 어떤 세계든지 그러한 목적을 위해 가능한 정보의 최고 근원을 내가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일곱 초우주들 모두에서 신성한 조언자로 일해 왔었고, 오랫동안 모든 사물들의 중심인 파라다이스에 거주해 왔다. 나는 우주 아버지의 즉각적인 개인적 현존 안에서 머무는 최극의 기쁨을 여러 번 누려왔다. 나는 도전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아버지의 본성과 속성에 대한 실체와 진리를 묘사한다; 나는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현존하는 종교가 지닌 한계는,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우주 아버지에 대한 실체성을 제시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그 한계에서 신앙에 대한 절대성을 지키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숭배 대상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복종과 경배를 자의적 혹은 타의적으로 강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식으로 믿음을 최우선적으로 강조할 수밖에 없다.

 

물론 믿음에는 무속 종교의 공포에서 시작된 원시적 믿음도 있고, 행복과 기쁨을 얻는다는 희망찬 보상적 믿음도 있다. 자기가 믿는 진리는 행복과 기쁨을 주는 것이기에 어떤 속박도 없고, 자유롭다 느낄지 모르지만, 그런 자유는 그 종교 안에서만 가능한 한정된 자유이다. 그것은 종교 안에 삶이 갇혀 있는 것이지, 종교를 벗어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결코 참된 해방이 아니다.

 

유란시아 책에서는 참된 신앙을 자세하게 말해주고 있는데, 물론 믿음으로 시작된다.

 

원시 신앙이나 현대 신앙이나 신앙과 믿음은 깊은 연관이 있다. 일상적인 의미의 신앙은, 어떤 대상을 깊이 받아들이어 자신과 특정한 관계를 맺도록 만드는 것인데,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원시 시대부터 이러한 신앙이 나타났다. 그러다가 그 대상에 대한 지적 동의로 진화하면서 믿음으로 불렸고, 이 믿음을 바탕으로 다시,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종교적 형태의 신앙이 나타났다. 유란시아 책에서는 원시 신앙이 믿음으로 변하는 과정과 다시 종교적 신앙으로 자리 잡는 과정이 낱낱이 설명되고 있다.

 

101:8.1
믿음은 그것이 삶에 동기를 부여하고 삶의 양식을 실현할 때 신앙의 차원을 달성해 왔다. 가르침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믿음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신앙은 확신도 아니고 신념도 아니다. 마음의 상태는 그것이 실재적으로 삶의 양식을 지배할 때에만 신앙 차원을 달성한다. 신앙은 참된 개인적 종교 체험의 살아있는 속성이다. 사람은 참된 것(眞)을 믿고 아름다움(美)을 동경하며 선한 것(善)을 존경할 수 있지만, 그것들을 경배하지는 않는다; 구원하는 신앙에서의 그러한 태도는, 이들 개인화되고 그리고 더욱 더 무한하게 되는 그 모든 것이신 오직 홀로이신 하느님에게 중심을 두고 있다.


아무리 심오한 신앙도, 그것이 단순한 믿음이라면, 사실적 실체가 있거나 없거나, 자기 성장과 행복을 위한 혜택을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뿐이다. 그런 자세는 형식만 현대적으로 바뀌었을 뿐, 원시적 신앙과 그 본질이 같다. 위 문단과 이어지는 글에서, 계시자는 참된 신앙은 그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고귀한 이상과 빛나는 영광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다.

 

이 문장은 101편 8장의 "신앙과 믿음(Faith and Belief)"의 첫번째 문장이다. 믿음(belief)은 물론이고 확신(certainty)과 신념(conviction)도 결코  신앙(faith)이 아니라고 정의하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정확한 개념을 설명해 나가고 있다. 믿음은 확신이나 신념으로 쉽게 확장되고 큰 차이도 없지만, 신앙으로는 쉽게 확장되지가 않는다.

 

문장에서 보듯이, 신앙은 원시 시대부터 삶의 동기를 일으키는 요소로서, 동물적 본능인 인간에게 진화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첨단 시대의 현대인에게 나타난다 해도, 그것이 지적 본능이건 영적 본능이건, 단순하게 삶의 동기를 일으키고 양식을 변화시키는 역할만 한다면, 여전히 원시적 신앙에 머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원시 형태의 신앙에서 좀 진화된 모습이 어떤 가르침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비록 진리의 개념이 포함되기는 하지만, 단지 본능적 신앙에 지적 동의가 더해지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믿음의 정확한 개념이다. 아마도 우리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믿음이라는 말은, 대체로 이런 의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단순한 지적 동의에서 나오는 믿음이, 참된 것(眞)을 믿고 아름다움(美)을 동경하며 선한 것(善)을 존경하는 그러한 어떤 실체적 차원으로, 마음에 착상되는 개념을 신념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신념도 신앙은 될 수없다. 왜냐하면 신앙에는 반드시 "종교적 체험"이 들어 있어야만 하고, 그 체험에는 필연적으로 "경배"하고 싶은 자발적인 충동이 늘 꿈틀거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믿음이나 신념이나 소신이나 확신이나 신조에는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 기도와 경배의 장소와 때를 찾는 것은, 하느님을 개인화된 실체적 존재로 받아들이려는 영적 본능과 충동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 생생한 체험은 단순한 지적 동의나 존경하는 마음과 의식 상태로는 성취할 수가 없다. 예수님은 믿음에서 시작되어 신앙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거듭 강조하셨다.

 

구원받는 신앙은, 보잘것없는 원시 신앙에서 시작되어, 지적 동의인 믿음을 거쳐, 확신과 소신과 신념을 거쳐, 실체적 절대 존재로서 존경하고 이해한 다음에, 그와의 관계를 깨달아 진지하게 경배하려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세우는 신앙이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속속들이 깨닫고 의식의 중심에 두는, 그러한 신앙의 경지가 새롭게 계시되고 있는 새로원 차원의 참된 신앙이다.

 

신앙이라는 말의 무게에 억눌려, 혹은 오염된 과거의 망령에서 도망치려고, 믿음이라는 편안한 말에 안주하거나 애매한 말로 새로운 개념의 신앙을 흐리게 하지 않아야 한다. 인류 역사 속에서 왜곡되었던 모습을 용기 있게 마주 보고, 이제 참된 신앙의 모습으로 새롭게 탄생되어야만 한다.

 

수많은 압박과 상처를 주었던 믿음이나 신앙의 무게에서 벗어나, 새롭고도 눈부신 날개를 달아, 창공 위에서 높이 빛나는 그러한 신앙을 가져야만 한다. 본능에서 나오는 이기적이고 때로는 원시적인 종교가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도록, 일상의 삶에 신앙의 빛을 비춰야 한다.

 

신앙이라는 말에서 우주 아버지를 즉시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실패할 수가 없다. 그 아버지가 하느님으로서 우리 몸안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스쳐 지나간다면, 우리의 삶은 즉시 획기적으로 변할 것이다.

 

기독교나 불교나 그 어떤 종교적 신앙도 유란시아 계시로 새로운 신앙의 날개를 달 수 있다.
 

댓글목록

코너킥님의 댓글

코너킥 작성일

원시 신앙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나 신을 "모신다"는 원시 신앙을 비웃는 지식인들이, 하느님을 지적 탐구의 최고봉으로 여기고, 더 이상의 의식 확장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아서,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차원으로 "모신다"는 개념에 가슴을 열어야만 신앙을 올바르게 말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해결해야 하는 것은 예전에 설명하신 개인성이신 하느님과 신에 대한 개념적 혼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에 대해 자의적 해석으로 구분할 뿐, 진화적 개념이나 종교적 개념으로 정리가 안 되다 보니, 실체로 받아들이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지요. 개념의 혼란은 신앙이나 경배 이전에, 믿음의 대상으로 세우는 데에도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라서, 기본 교리를 놓고 다투게 만듭니다.

종교를 경시하며 믿음의 초보적인 지적 수준에서 신앙을 분석하는 분들은, 진리를 바탕으로 하느님을 "모신다"는 새로운 경지로 들어가야 하는데, 실체적 개념도 힘들고, 더구나 "모신다"는 의식을 비웃다 보니, 족쇄가 되어 신앙의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다가 끝나는 것이지요. 유란시아를 지성이나 지적으로 이해하면, 영적 열매는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댓글의 댓글 작성일

옳으신 말씀입니디만 구습에 젖어서인지 '모신다'라는 말은 잘 다가오지가 않습니다. 유란시아에서 하느님이 우리 몸안에서 우리와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낙원천국에 계시는 하느님을 경배하는 영적 성장을 동시에 말하고 있어서요. 우주 아버지의 실체성을 깨닫고 구체적으로 사실화하는 것이 책에서 말하는 우주아버지를 중심에 두는 경배이고, 새로운 신앙의 경배이자 한 모습이라고 봅니다. 그렇다고해서 모신다는 의식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겠지만요.

우현님의 댓글

우현 작성일

신앙심을 가진 분들이 괴로움이나 걱정에서 벗어나려고 교회나 사찰을 찾는 것이지만, 그런 분들에게 모든 근심에서 벗어나도록 영원한 진리를 전파하는 것은 종교를 전파하는 분들의 몫입니다. 종교마다 진리가 있지만, 진리가 새로운 활력소가 되지 못하고 그저 일시적인 위로의 용도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유란시아 책에서 사랑을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주는 에너지로 소개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진리를 삶을 바꾸는 활력소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모든 것이 우주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닫지 못했거나, 아직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도, 준비도 안된 것이지요. 이기심과 자만심이 방해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거나 비교하고 평가하지 말고, 새로운 이상과 진미선에 관심과 열정을 돌리기만 하면 되는데, 그런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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