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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충성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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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길손 작성일18-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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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잠시라도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기독교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독생자 아들로 올바르게 전파하고 그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씻어주기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나서 피를 흘렸다는 주장은 인간의 존엄성이 점점 깊이 인식되는 문명과 과학이 발달한 현대인에게는 잘 납득이 되질 않겠지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라는 지금까지의 기독교의 핵심 진리는 단지 "예수에 대한 종교"였다고 유란시아 책에서는 엄중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인류는 "예수의 종교"로서 진리를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종교와 예수님에 대한 종교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지금까지 기독교에서 알고 있는 예수님과 유란시아 책에서 설명하는 예수님의 차이일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의 독생자 아들이라고 말하지만, 유란시아 책에서는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말합니다. 칠중 하느님의 첫 번째 하느님이지만, 그러나 하느님 그 자체를 인간의 지성과 영성으로 계급과 정도를 평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에게는 절대자 하느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기독교를 비롯하여, 종교의 역할과 의미는 종교를 세속적인 잣대로 판단할 것인지, 초월적인 기준으로 바라볼 것인지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종교를 비난하고 피해를 지적하는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은 종교가 인간 삶에 끼치는 나쁜 영향을 기준 삼아 그렇게 말합니다. 일반 사람은 물론이고, 철학자도 그렇고 심지어는 신학자도 때로는 종교를 그런 기준으로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삶에 갇혀서 종교를 평가하고 가치를 매기고 진리를 해석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자신의 해석이 진리이고, 다른 사람의 해석은 거짓이라고 서슴없이 비난하기 마련입니다.

초월적인 기준으로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참된 진리가 왜곡되고 혹은 어둠 속에서 아무런 진리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참된 진리를 전파하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세속적인 권력이나 욕심이 원인이 되어 자신들의 절대자를 주장하며 전쟁이나 갈등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참된 진리만을 전파하는 경우에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인간의 세속적인 잣대로 정의할 수 없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면, 지적인 논쟁이나 세속적인 시각으로 다투는 일은 사라지겠지요.

기독교 안에서도 성경에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강조하지 말고, 예수님이 지녔던 신앙심을 배워야 한다는 새로운 각성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소개한 글을 보면 갈라디아서 2장 16절의 "그리스도를 믿음"은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객체가 되어 인간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체가 되어 인간이 따라하는 진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참되고 발전된 해석입니다. 그동안의 기독교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구원받는다는 그런 분위기에서 본다면, 엄청난 영적 각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발전된 깨달음마저도, 그리스도의 믿음을 세속적인 마음과 결심의 "아버지에 대한 충성"으로 이해하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지역우주의 창조자 하느님으로서 왜 인간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밝혀주는 유란시아 책의 진리를 모르고는 "예수님의 신앙"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겠지요. 더구나 유란시아 책을 통하여 예수님의 종교와 예수님의 신앙을 진리로서 깨닫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87:7.6]

결점들과 불리한 조건들에 상관없이, 진리에 대한 모든 새로운 계시는 새로운 예배종파 단체가 발생되게 하며, 심지어 예수의 종교에 대한 수정도 새롭고도 적절한 상징 표현을 발전시킬 것임에 틀림없다. 현대인은 자신의 새롭고도 확대하는 관념들과 이상들과 충성심들에 맞는 어떤 상징표현을 발견해야만 한다. 이러한 증진된 상징은 반드시 종교적인 삶, 영적인 체험으로부터 발생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보다 높은 문명의 높은 상징표현은, 하느님께서 아버지가 되신다는 개념에 입각해야만 하며, 사람의 형제신분에 대한 강력한 이상(理想)으로 가득 채워져야만 한다.


끝없이 변화하는 현실 세계에서 하느님의 참된 진리는, 예수님의 신앙이 그러하듯이 충성심마저도 계속 확대되고 성장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합니다. 비록 충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어떤 것으로도 깨어지지 않는 다이아몬드처럼 응고되어있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한 충성은 빛나고 아름답지만 생명력이 없지요. 예수의 종교와 예수의 신앙은 충성심마저도 모든 시대와 우주 공간에서 역동적으로 살아있습니다.

[99:5.3]

예수의 종교는 지금까지 인간 종족을 활성화시킨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역동적인 영향을 준다. 예수는 전통을 무너뜨렸고, 독단론을 파기하였으며, 인류로 하여금 시간과 영원 속에서 가장 높은 이상들을 성취하도록─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하게 되도록─부르셨다.

예수님의 신앙이 그처럼 그러한 역동적인 것은 충성심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우주 아버지에 대한 충성을 스스로 다짐하고 지키려는 그러한 내적 확신이나 신념이나 결심을 예수님은 결코 가지신 적이 없지요. 오히려 외부 현실 세계와 광활하게 펼쳐진 우주 질서에서 아버지에 대한 충성심이 저절로 성장하는, 그러한 신앙이 가슴 속에 싹이 텃고, 자랐고, 완성하신 것입니다.

[140:8.27]

세 사도들은 이 날 오후, 주(主)의 종교에는 영적 자기-반성에 대해 아무런 규정도 없음을 깨닫고 매우 놀랐다. 예수의 시절 이전과 이후에 있던 모든 종교는, 심지어 그리스도교에서도, 양심적인 자아-검증을 조심스럽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의 종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예수의 일생의 철학은 종교적 내면-성찰이 없다. 목수의 아들은 성격 형성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하늘의 왕국은 겨자씨와 같다고 선언하면서, 성격 성장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는 거만한 자기중심주의를 예방하는 수단으로서 하는 자아-분석을 금지하려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느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을 신앙의 핵심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모든 종교인이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종교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예수의 종교마저도 왜곡될 수 있듯이, 충성심이 딱딱하게 응고되어 있는 내면의 충성과 자기 완성이라면 참된 진리의 신앙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참되고 역동적인 예수님의 신앙을 지녀야만 합니다.

댓글목록

구름가듯님의 댓글

구름가듯 작성일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시지 않았고, 유란시아 책에서도 예수님의 신앙을 자세하게 설명한 글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진리 말씀 안에서 예수님이 지니신 신앙과 우주 아버지에 대한 충성을 각자 찾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는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철저하게 믿으신 것이 예수님의 충성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만, 99편 인용문을 보면서 그 충성심이 "시간과 영원 속에서 가장 높은 이상"을 담고 있다면 아마도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욱 높은 이상을 계속 새롭게 찾아 나서는 그런 충성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응고된 충성심은 상대적으로 잘못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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