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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선을 택해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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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새 작성일18-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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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면서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힘을 합쳐 더 찬란한 문명을 함께 이루어가는 것을 이상 사회라고 한다. 이러한 이상 사회를 이루어가기 위하여 인류의 각 시대마다 많은 사상가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제시했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 등은 선조들이 추구했던 수단과 방법과 지혜를 배우면서 시대마다 나타나는 장애물을 예방하고 극복하면서 이상향을 달성하기 위하여 나아가게 된다. 이것이 인류의 정상적인 삶의 모습이다.

이상 사회가 무엇인지 모르면 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할 수가 없고 반시회적 인간으로 구분하여 격리시켜야 이상 사회는 성취할 수 있다. 정상적인 사람은 자기 혼자의 힘보다는 집단과 사회와 국가와 인류 전체가 힘을 합해야만 각각 추구하는 이상 사회의 모든 것이 하나씩 성취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기꺼이 그 대열에서 열정을 바치며 일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고통이 심하여, 개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두기도 하지만, 인내와 자비로 질서를 해치는 행위를 선천적으로 거부하는 도덕적 본성을 결코 잃지 않는다.

그러나 반사회적인 사람은 질서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아무리 애써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친절과 자비와 사랑을 악용하려 한다면 사회의 일원으로 여길 수가 없다.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사회 안에서 정상인들의 자연적이고 당연한 도움이나 선의를 유도하고, 그것을 사욕에 악용한다면 그는 영악한 사람이다. 그런 행위는 발전을 위해 서로 힘을 합치려는 사회를 오염시키고 결국에는 붕괴시킨다.

이상 사회를 위한 개인과 집단의 힘을 이렇게 지나친 사리사욕으로 소진시키는, 반시회적 사람들은 격리해야 정상적인 인간이 추구하는 건강하고 이상 사회로 나아갈 수가 있다. 문명이 발달하는 선진 국가일수록 반사회적 인격을 지닌 사람을 엄격하게 다루고 격리한다. 그것이 참된 문명사회가 발전하는 모습이다. 그것은 인간미가 사라진 냉혹한 사회가 아니라, 정상인과 그 자녀들을 보호하려는 사랑 넘치는 인간애에서 나오는 눈물겨운 모습이다.

어른들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꿈과 이상을 심어주고 이루지 못한 이상 사회를 계속 이루기를 기대하며 이상이 무엇인지 가르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힘을 모으고 지혜를 짜내어 이상 사회를 성취하라고 자극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이상 사회가 무엇인지, 인류가 성취해야 할 참되고 끝없는 이상이 어떤 것인지 확고한 신념을 지니도록 교육하는 것은 가정과 사회의 핵심 기능이다.

어린아이들이 학교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이상에 대하여 무엇을 배우는지, 인류가 성취해야 할 이상 사회의 참된 모습을 어떻게 배우는지에 따라서 그 나라의 운명이 결정된다. 요즘 우리나라의 어린아이가 이상 사회가 무엇인지 올바르게 배우고 있다면, 우리나라도 얼마 안 가서 인류의 목표인 이상 사회를 성취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상 사회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과거의 현자들이 사용했던 수단과 방법을 평가하고 그 잘못된 부분을 고쳐서 사회를 개선시키는데 애쓰라고 가르치고 있다면, 이상은 사라지고 잘못만 가득한 사회에서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악에 피해를 당하고, 일생을 망치는 것을 보고 악을 미워한다.. 악을 미워해야 할 근원적인 이유는 그것이 정의롭고 이상적인 사회를 위해서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지혜를 발휘하여 법과 질서를 만드는 것은 반사회적인 사람들을 격리시키기 위함이지, 악을 처벌하는 복수의 쾌감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다. 법과 질서가 반드시 필요하기만 그것으로 정의와 평등과 사랑 넘치는 이상 사회가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악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반사회적 사람과 행동과 현상들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격리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 응징할 대상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 때문이 아니다. 그러한 현상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도덕성이 오염되어 그런 경우도 있고, 혹은 빛이 사라지고 어둠에 짙게 깔린 주변 환경에서 머물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모두 악이 파괴와 보복의 대상으로 둔갑되고 엄연한 실체로 드러나게 된다. 오히려 당장에 성취해야 할 참된 진실과 선을 잊게 만들고 결국에는 영영 벗어나게 전혀 알아차릴 수 없도록 이끈다.

 

132:2.10
 
악의 가능성은 도덕적 선택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재성은 아니다. 그림자는 단지 상대적으로 실제이다. 실재적인 악은 하나의 개인적 체험으로서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잠재적인 악은, 영적 발전의 낮은 차원들에서 이루어지는 도덕적 진보의 영역 안에서 결단을 이루는 하나의 자극제로 똑같이 잘 작용한다. 악은 오직 도덕적 마음이 악을 선택했을 때에만, 하나의 개인적 체험의 실체가 된다.

   

참된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빛을 가로막고 악을 실체로 내세우면서, 오히려 악을 타파하자고 외치면서 실상은 악을 식별하지 못하도록 감추고 부추기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을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벗어나려는 의지만 있으면 악에서 벗어나기 쉽다. 악은 대체로 달콤한 본능을 자극하고 위장하기 때문에 즐거움에서 벗어나기 힘들도록 만들지만, 그러나 참된 진실의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작은 의지와 행동만으로도, 누구나 빛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악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지 결코 사회에 악에 넘치는 것은 아니다. 악은 단지 완전에 대비되는 불완전이라는 그림자라서, 우주 상승의 모든 상대적 위상에서는 필연적으로 잠재되어 있다.

사회를 위하여 악을 거부하자고 외치면서, 실제로는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선동하거나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는 반사회적 사람들이 지구촌 곳곳에 많다. 우리나라는 특히 더 많다. 정상적인 지능으로 조금만 생각해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참된 진실과 사실을 봐야 한다는 말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불편하다면, 이미 반사회적 분위기에, 몸과 마음이 상처를 입고 병들어 있다는 반증이다. 상처가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마취되어 있는 것이고, 오랫동안 그러하다면 질병이 만성이 되어 오히려 편하게 느끼는 것이다.

132:2.3
 
진리와 마찬가지로, 선이란 항상 상대적이며, 반드시 악과 대조된다. 이들 선과 진리의 본질특성에 대한 인식이 바로, 사람의 진화하는 혼이 영원한 생존에 필수 요소인 선택을 그러한 개인적 결정으로 내릴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선과 악에서 선택하는 것은 옵션이 아니라, 이 땅의 짧은 삶에서 동물과 구분되는 핵심 요소이다. 혼은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것이다. 선과 악에서의 선택의 능력이 없다는 것은 혼이 없다는 반증이고, 그것은 모습만 인간일 뿐, 참된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다. 악에 시달리는 것은 당연하다. 잘못된 판단으로 스스로 악을 선택하는 죄를 범할 수도 있고 죄를 즐기면서 반복하는 사악한 행동도 서슴없이 할 수도 있다. 그런 삶을 살았기에 진실과 사실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싶은, 생각도 의지도 능력도 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잠재된 능력은 누구도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아버지의 영과 아들의 영과 무한 영의 영이 감사고 돌보는 인간의 삶에서는, 인간의 능력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어떤 가능성이 삶이 끝날 때까지 살아있다. 언제든지 악에서 벗어날 기회가 있다. 그러나 악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선의 열매 영의 결실을 맺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말하신 추수는 씨앗이 아니라 열매이다. 반드시 열매만 추수하는 것이 이상 사회를 위한 우주의 질서이다. 당장에 열매를 추수하지 않고 잡초와 함께 놔두는 것은 잡초보다 초라하게 보이는 열매까지도 남김없이 추수하려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다. 모든 힘을 갖추었지만, 선이라는 씨앗을 선택하여 세월 속에서 가꾸고 피워 나지 않는다면,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도 도울 방법이 없다.

악이 왜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 왜 끈질기게 우리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선을 실천하는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는지는 예수님이 남기신 진리의 말씀에 상세하게 담겨 있다.  

 

위에서 일부 인용한, 유란시아 책 132편의 2장 선과 악에 대한 글을 차분하게 읽으면서 깊은 뜻과 가르침을 헤아린다면, 우리 모두는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악에서 벗어나. 새로운 빛의 세상에서 참된 선의 열매를 거둘 수 있다.


댓글목록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풍요로운 물질문명으로 세상이 발전하고 행복해질수록 사람들이 선과 악을 예리하게 살피는 일은 점점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아주 심각한 일은 물론이고 아주 사소한 일이라고 에도, 굳이 선택의 갈등에서 마음이나 감정이 머물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선과 악의 선택은, 행복을 모르는 일부 사람들의 딱하고 안타까운 현실일 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어질지도 모르지요. 이런 현상이 인류가 공멸하는 물질주의의 종말이라고 유란시아 책에서 경고합니다.

끊임없이 진미선을 추구하려는 각성이 없이는, 우주의 속성이 진보라는 진리가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면, 필사자라는 짧은 생애는 아무리 위대한 행복을 성취해도 공중에 흩어지는 먼지가 되어 우주 공간에서 사라지는 것이지요. 자동적으로 소멸됩니다. 영원의 진리를 깨달을 능력이 없거나, 미래에 대한 아무 소망이 생기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동안의 현실이 최고의 관심이라서, 자동적인 소멸에도 관심도 흥미도 가지지 않겠지요. 정도가 심한 분들을 영이 사실상 죽어있는 필사자라고 하는 데, 실제로 그런 분들이 없었으면 합니다.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약육강식은 우주 결과이고 본능이에요. 탐욕은 불타는 에너지이고 비록 재만 남기지만 없으면 안되요.

네오님의 댓글

네오댓글의 댓글 작성일

혹시 탐욕과 욕망을 혼동하신 게 아닌지요. 우주가 진보라는 대 명제 앞에서, 욕망은 없으면 안 되는 생존의 필수적 요소이지만, 탐욕은 있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탐욕은 자멸이고 결국에는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진다고 합니다.

꼴라쥬님의 댓글

꼴라쥬 작성일

좋은 말씀 멀리서 읽어보고 있습니다. 갑자기 악이 증가되거나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더라도, 사회가 발전되고 생활이 윤택하여 편한 생활에 젖다 보면 자연스레 판단력이 무디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영적인 목표가 없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남을 해치지 않고 스스로 자족하며 자신의 행복을 하늘에 감사하며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신이 바라는 안락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면, 진실과 거짓을 구분해야 할 이유가 없고 동기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요. 영원한 운명에 대한 소망을 잊거나,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나의 생각, 나의 판단, 나의 식견으로 나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 나 자신이 해석한 잘못된 진리를 참된 것으로 신봉하지 않아야겠지요.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게 쉽지는 않지만, 그것이 진리의 길에 들어서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악이 자라는 원흉은 이기심 때문이겠지요.

네오님의 댓글

네오 작성일


필연적인 어두움이라는 말이 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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