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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 반신론 거짓된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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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새 작성일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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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사람들은, 과학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의 지능과 자신의 능력에 신념을 가지고 있다. 지성으로 교묘하게 자신과 남을 속이고 있다.

 

하느님을 알 수가 없어서 부인한다면 무지 때문에 자신에게 속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존재성을 들었는데도 그런다면 자기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잘 구별되진 않지만, 속는 것과 속이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개선의 가능성이 남아 있지만, 후자는 없다. 외형적인 삶이 어떠하건 내적 성장은 기대할 것이 없다.  

 

속는 것과는 달리, 속이는 것은 대부분 질서를 파괴하고 관계를 끊는 것이다. 그래서 문명 세계에서는 범죄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속이는 것은 자기 내면의 질서와 관계를 파괴하는 자멸 행위이다. 스스로 자멸하는데 무슨 지옥과 같은 형벌이 추가로 필요하겠는가. 불신자는 지옥간다 선전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유란시아 책에서는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다. 지옥이 없어야 우주 질서에 맞다.

 

현대인들은 점점 복잡하고 세밀한 세계에서 살아간다. 한편 고대의 경전, 철학자들의 고뇌와 깨달음을 짧은 시간 안에 집중적으로 파악하는 혜택도 누린다. 심오한 선현들의 가르침이, 몇 번의 클릭으로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제공되는 세상이다. 그러한 정보를 맘대로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으니, 게으르지만 않다면 지적 욕구에 관한 한, 불만족이 없어진 시대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지성의 정점에 서 보는 만족을 즐긴다. 그런 지식의 절정에 도취하다 보면, 하느님도 자기가 깨달은 지식으로 해석하고 정의하려는 생각이 싹틀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설명하는 하느님은, 아무리 숭고하고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찬사가 따라붙어도, 인간의 지성과 깨달음과 감상에서 나오는 인간 해석일 뿐이다. 인간에게서 인간 이상의 것을 기대한다는 것도 앞 뒤가 안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러나 아무리 인간 한계에서 벗아날 수 없다 해도, 적어도 하느님을 어떤 절대자나 초월적 대상으로 설정하려고 한다면, 최소한도 그러한 개념이 착상될 수 있는, 긍정적인 믿음은 전제되어야만 시작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은 하느님 실체에 대한 개념에 철저하게 실패한다. 실체화가 싹트고 자라나는 최초의 개념이,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진정한 시작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이 초인간적인 깨달음에 닿으려면, 일단은 초인간적 실체와 깨달음이 존재한다는 믿음에서 시작되어야 마땅한데도, 그런 바탕이 없다. 하느님의 실체성은 믿음의 바탕에서 차츰차츰 영적 성장에 따라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걸 모른다.

 

요즘 들어서, 무신론을 넘어 반신론이 많아지고 있다. "하느님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증거를 찾아내며 역설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배경이야 각각 다르지만, 어느 분의 지적처럼 '신이 인간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고, 그래야 신으로 존재한다'는 얘기를 자랑스레 떠벌리기도 한다.

 

태산도 아니고 작은 언덕과도 같은, 코딱지 만한 지성을 정복하면서, 하늘보다 더 높은 곳에 시원자로 계시는 하느님을 설명해 보겠다고 덤벼든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고금을 통하여 소위, 최고 지성이라고 불리는 자가, 하느님을 해석하며 정의하려고 했던 사례가 한 둘이 아니다.

 

영적으로는 제정신이 아닌 미친 사람들이다. 이것이 유란시아 책이 경고하는 물질 주의자들이다. 이들이 내미는 증거는 인간 능력으로 확인되는 과학, 정신작용, 그리고 우주 에너지의 법칙과 운행에 관한 사실들이다. 거기에는 시원적 원천이 존재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무신론도 나름대로 순수했고 단순했다. 원인은 각양각색이지만, 절대자 하느님이 있다면 왜 세상의 죄악과 불의를  내버려두고 방치하는가, 그러니까 인간이 믿고 복종할 수 있는 완전한"하느님은 없다"는 생각에서 단순하지만 당당하게 말했다. 요즘 나타나는 무신론은 당당하지도 않고, 뒤따르는 설명도 지루하기만 하다. "변론의 길이는 담겨있는 진실과 반비레 한다"는 유란시아 진리가 잘 증명되고 있다.

 

하느님을 부정하는 이러한 주장에서, 일부 진화심리학자는 물론이고, 자연주의 유신론자들은 거의 반신론에 가깝다. 특히 지적 자만에 스스로 마취되어 아주 교묘하고도 잔혹하게 하느님의 진리를 파괴하는 사람을 주목해야 한다. 무신론과는 달리 이러한 반신론자들은 인간과 동물의 구분 지점에서 이미 동물의 세계로 들어섰다는 점에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동물의 왕국에서 지성을 자랑하려고 지적으로 무지한 자들을 교묘하게 유혹하여 끌어들이며 정복자 노릇을 즐기고 있다. 인간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진리를 이해할 감각이 사라진 동물로 봐야한다. 그러한 지적 정복에 말려들어 희생당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는데, 대체로 같은 부류이다.

 

어떤 진화 역사학자가 쓴 사피엔스라는 제법 두꺼운 책이 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장황하게 풀어 쓴 책이다. 인식의 바탕이 진화론이니, 뻔한 얘기겠지만, , 인간은 지능에서 상상력이 가능했기 때문에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고 말했었다. 상상력이 가능한 인지작용의 지능이 인간의 유일한 특징이라는 주장이다.

 

어떤 동굴에서 발견된 7만 년 전의 사자머리를 가진 인간의 모습의 상아 조각을, 인류 역사의 획을 긋는 결정적 증거라도 주장한다. 그리고 동물 세계의 객관적 실체와는 달리 추상적 실체를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위대한 것이고, 그게 모두 인간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자 인간의 유물은, 무시무시한 맹수들을 신성시하고 동경했던 원시인들의 습성에서 탄생된 자연스런 주물이라고 생각하는 개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사람의 생각일 것이다. 상상력이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유일한 능력이라니, 자신이 주장하는 상상력마저도 병든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갈 지경이다. 소설처럼 풀어놓는 이야기가 가관이었던 기억이 난다. 유란시아 독자가 본다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정말 동물의 수준에서 쓴 한심한 책이다. 그러나 반신론을 부추기는 이러한 책을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협력하고 성취하는 것이 모두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고, 앞으로 점점 더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추상적 실체가 사람을 지배할 것이라고 공언한다. 그래서 협력과 조화를 통하여 공동의 상상의 실체를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인간 진화의 법칙이며 끝없이 전진하는 미래라는 것이다. 나아가 하느님도 상상력 안에서 인간과 우주 만물과의 관계를 협력의 과정을 통하여, 점점 확실하게 조화되는 추상적 실체가 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인간은 상상력으로 절대자를 만들어 스스로 복종하는 과정을 통하여 진화했고, 앞으로는 더욱 휘황찬란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과정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상상력의 부산물일 뿐 신이 실제로 존재할 이유는 없다는 식이다. 상상력으로 하느님까지 만들어내는 철저한 반신론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정도로, 실제로 이런 책을 읽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이 현실이다. 들춰보자니 시간이 아깝지만, 허접한 책이라고 그냥 웃어넘길 수도 없다. 이런 어이없는 주장들이 우리 주변에는 끊임없이 난무한다.

 

한동한 과학과 종교를 접목시킨답시고 궤변을 늘어놓다가 인간성을 의심받고 쫓겨난 과정 신학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최근까지도 화이트 해드의 과정 철학을 진화론자의 얼치기 시각으로 이해하고 날뛰는 사람도 있다. 더구나 신학을 공부하는 정통 신학자들 중에서도 종교적 유연성을 기른답시고, 유기체 철학을 기웃거리는 경우도 있었다. 막상 화이트헤드의 과정의 의미는 개뿔도 모르면서,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만 기억하고 난리를 부리던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이름조차 기억하지 않지만, 기독교가 화엄경이나 물리학의 카오스 이론까지도 수용할 수 있다고 헛소리 치던 얼뜨기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

 

몰락한 채 사라진 과거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미래도 없고 현실의 의미도 가치도 찾지 못하는 선천적인 결함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하느님을 조롱하는 논리로 이러한 얼치기 과정의 이야기가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과정신학을 제대로 이어온 일부 뛰어난 제자들은 이제 하느님과 예수님의 신성을 말하고 있지만, 절대적 주체에 대한 애매한 논리를 버리지 못한다. 그러한 논리적 진리는 개인의 종교적 체험이 아닌, 자기만족의 지적 체험이며, 죽어있는 진리이다.

 

103:9.2
종교는 사고뿐만 아니라 느낌과 행동 그리고 삶으로 행해야만 한다. 사고는 물질적 삶과 더욱 가깝게 관계되며, 온통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주로 이성과 과학의 사실들에 의해서 지배되어야하고 그리고, 영의 영역을 향하는 그러한 비물질적 뻗침에서는 진리에 의하여 지배되어야 한다. 사람의 신학이 아무리 착각이고 잘못되더라도, 사람의 종교는 전적으로 진실 되며 영속적으로 참될 수 있다.

 

사실 과정을 중시한 과정 신학은 신학이라 부를 가치도 없는, 생명이 끝나면 저절로 사라지는 철학이며 일시적 착각이다.

 

현실적 과정을 중시하는 경우처럼, 영원한 진리에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두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유전적으로 결함이 있는 열등한 혈통이 그 하나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보라색 종족의 혈종이 거의 주입되지 못한 경우이다. 이러한 사람들도 진리의 영이 부어진 현실에서는 진리 자체에는 다소 둔감하더라도, 최소한 선악을 구분할 능력은 발휘하기 마련이다. 동물적 본성에 사로잡히지 않는한, 진리의 영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유전적으로 결함이 없음에도 진리에 무감각한 경우이다. 사회적 혹은 개인적 이유로 진리에 반응하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이들은 의지 반응과 자연 반응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감각 반응을 따르는 것을 자신의 의지 작용이라고 여기고 있다. 삶이 현실 관계와 현실 반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한계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과정에 몰입하는 현실만이 유일한 위로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겉으로는 멀쩡해도 정신적으로는 퇴폐적인 삶을 산다. 인간이 이루러야 할 미래의 의미와 가치에 무감각하다. 진리의 자리에 설명과 논리가 대신하고, 세속적 즐거움과 조화를, 달성 가능한 최고의 인간의 목표로 삼는다.

 

132:3.2
진리는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삶에 의해서만 정의(定意)되어질 수 있다. 진리는 항상 지식 이상의 것이다. 지식은 관찰할 수 있는 사물들과 관계되지만, 진리는 그러한 순전히 물질적인 차원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지혜와 조화롭게 어울리고 그리고 인간 체험처럼 그렇게 가치를 달아볼 수 없는 것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영적인 그리고 삶 실체들까지 포옹한다. 지식은 과학에 근원을 두고 있다; 지혜는 진정한 철학에 근원을 두고 있다; 진리는 영적 삶의 종교적 체험에 근원을 두고 있다. 지식은 사실들을 다룬다; 지혜는 관계들을 다룬다; 진리는 실체 가치들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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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을 발견하는 사람들은 우연이건 필연이건, 하느님의 진리를 추구하려 의지를 바친 사람들이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우연히 눈에 띈 것이라면, 수호천사의 강력한 영적 자극과 강요로 우연처럼 발견한 것일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은 강력한 영적 강요였다면, 주체를 생존시키려는 수호천사의 마지막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바쁘다는 핑계로 유란시아 책을 소홀히 하면 안된다.

 

동물적 탐욕으로 자기만족을 추구하다가 좋은 먹잇감으로 이 책을 발견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도 수호천사가 있을 것이니, 천사의 힘에 의지만 한다면, 이 책은 동물적 본능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일 것이다. 극복하기 힘든 탐욕을 잠시라도 내려놓으려면, 자기 논리나 지식을 믿지 말고, 우선 진지하게 기도하는 시간부터 가져야만 한다.

 

과학 문명의 함정 속에서, 진리를 파괴하고 방해하는 궤변의 무차별적인 공격 앞에서, 지혜와 생각만으로 우리 자신을 지킬 수가 없다. 정신을 차린다고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실천하셨듯이, 기도는 약한 자가 힘을 얻으려는 틀에 박힌 형식이 아니다. 그리고 의지의 헌신이 없는 기도는 존재할 수 없고, 기도가 없이는 삶의 실천은 시작될 수 없다. 결심이나 신념이나 신앙도 기도를 대체할 수 없다.

 

하느님에 대한 참된 진리에 다가가는 것은 인간의 논리를 뛰어넘으려는, 초월적 세계와 접촉하려는 시도이다. 초월적 세계로 도약할 수 있는 에너지는 기도와 함께 우리의 내면에서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참된 기도는 상상이 아니고 실체에 접근하는 초월적 기법이다.

 

당신은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죄를 용서받는 비굴한 탄원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해방된 아들의 기쁨을 감사하는 표현을 할 것인가?

  

91:8.7
기도는 복수를 위한 성난 고함 소리가 될 수 있고 자기 적을 위해 자비를 간청​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하느님을 변화시키는 바램의 표현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기법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길을 잃었던 죄인이 필경 준엄하다 여겨지는 재판관 앞에서 움츠리면서 하는 비굴한 탄원일 수도 있고, 살아있는 그리고 자비로우신 하늘 아버지의 해방된 아들의 기쁨 넘치는 표현​일 수도 있다.

댓글목록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과학과 첨단기술의 발전이 빨라서 미처 소화하지 못하여 방황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점점 많아지고 있어서 계시가 나왔겠지만, 유란시아 책의 진가가 알려진다면 바뀔 수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반신론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자기 자신을 너무 과신하여 종교를 회의적인 시각으로 보시는 분들이 문제겠지요.

더 큰 문제는 무신론 반신론자들이 유신론을 가장하면서 진리를 가리는 현실이고요. 그런 분들이야 기도를 하지도 않고 할 줄도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기도를 하지 않도록 간접적으로 방해하거나, 아니면 잘못된 기도를 교육시키고 강요하고 있다면 심각한 일입니다.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동물은 침된 사랑을 몰라요. 음란한 세대들도 사랑을 최상이라 말하지만 정분과 쾌락과 기쁨만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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