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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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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경곤 작성일18-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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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기념일은 성탄절과 부활절입니다.

금년 4월 1일도,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는 행사도 하면서 믿음을 다지고 있습니다.

 

교리나 성경 해석이 달라도 부활은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로 통일되어야만 하는데,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소위 파스카 논쟁이라는 충돌로 불럈던 해묵은 갈등 때문에, 기독교 종파에 내분과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었던 것이지요.,

 

부활절은 영어로는 이스터인데. 봄의 여신인 이스터를 위한 축제일을 기독교가 표절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폄하하는 사람들에게, 미트라교의 교리와 적당히 짜 맞춘 각색된 이야기라고 조롱을 당하기도 하지요.

 

전통적인 성경 해석에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삼일 만에 죽음을 이겨내고 부활하신 것으로 부활절을 설명하지요.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다는 점을 부활의 가장 큰 의미로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부활은 예수님의 영원한 승리의 상징이며 죄로 인해 멸망하는 인간을 티 없이 깨끗한 몸으로 살리시는 하나님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는 부활은, 예수님 이외에도 구약과 신약에 여러 번 나옵니다. 새로운 생명을 주는 부활에 대한 진리는 예수님 부활 이전에도 이미 증명되고 있었고, 더구나 그러한 부활들이 모두 믿음으로 부활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부활은, 눈으로 볼 수 있었기에 믿을 수 있다는 예수님 부활의 사건 보다도, 훨씬 순수하고 헌신적인 믿음이라고 볼 수도 있지요.

 

예수님의 부활을 영광과 축복과 은혜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그것은 물리적 사실이나 정황에서 믿음의 순수성을 따져볼 때, 다른 부활의 사건에 비해서는 오히려 너무 작위적으로 하느님을 포장하는 억지처럼 보입니다. 과부의 아들과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권능은, 이미 믿음으로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죽음을 이긴 예수님의 부활이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셈이지요.

 

마치 억지로 영광을 부여하는 부활의 의미에서는, 또 하나의 곤혹스러운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기 전에 무덤 속에서 잠들어 있는 자들이 모두 깨어났다는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예수님 부활 이전에 죽은 사람들이 먼저 모두 깨어나서 하늘에 올라가려고 기대렸다는 이야기를 비중있게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사건이라서, 믿기에는 좀 허술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정직하게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다른 여러 부활의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는 일은 자기모순에 빠지게 만들지요.

 

유란시아 책이 이런 근원적인 혼란을 해결해 줍니다. 죽음을 이기고 몸이 다시 사는 그러한 부활은, 생존자를 위한 우주 아버지의 우주 법칙이라서 특별히 강조할 이유가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부활이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필사자를 위해 마련한 우주의 법칙이라고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에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엄중하게 전하면서, 우리가 깨어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20 :6.5
(229-4)
미가엘들과 아보날들의 필사자-증여 생애들은, 대부분의 측면에서 비교될 만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치안법관 아들은 결코, 너희 창조자 아들이 육신으로 유란시아에서 했던 것처럼, “아들을 본 자는 누구든지 아버지를 이미 보았다”라고 선포하지 않는다. 그러나 증여된 아보날은 “나를 본 자는 누구든지 이미 하느님영원한 아들을 보았다.”라고 선언한다. 치안법관 아들들은 우주 아버지로부터 직접 태어난 존재들이 아니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육신화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항상 파라다이스영원한 아들의 뜻에 따라 파라다이스 아들들로서 자신들을 증여한다.
20 :6.6
(229-5)
증여 아들들, 창조자 또는 치안법관이 죽음의 입구에 도달하였을 때, 그들은 제3일에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너희는 1,900년 전에 너희 세계에 머물렀던 그 창조자 아들이 당했던 비극적인 종말을 그들이 항상 맞이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사렛 예수가 당하였던 색다르고 유별나게 잔인한 체험은 유란시아가 “십자가의 세계”로서 지역적으로 알려지게 하였다. 그러한 비인간적 취급이 하느님아들에게 주어질 필요는 없으며, 거의 대부분의 행성들은 사려 깊은 접수를 그들에게 잘 제공하여 왔으며, 그들에게 폭력적인 죽음을 부과하지 않고 그들의 필사자 생애를 완결하고, 그 시대를 종결하고, 잠자는 생존자들을 심판하고, 새로운 섭리시대를 시작하도록 하였다. 증여 아들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여야 하고, 영역들의 필사자들의 실재적 체험 전체를 통과해야만 하지만, 그 죽음이 폭력적이거나 비정상적이어야 하는 것은 신성한 계획의 요구조건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부활의 이야기를 토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하느님의 영광이요 자비라고 말하는 것은, 보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그러한 믿음의 본질에서 이해한다면, 부활을 스스로 치장하는 작위적인 인간의 해석일 따름입니다.

 

예수님을 비롯하여 하느님의 아들인 아보날들도 모두 증여의 삶에서는 자연스러운 죽음을 거친 후, 삼일 만에 다시 나타납니다. 왜 다시 나타나는지는 우리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지만, 부활의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그동안의 해석은, 오히려 의식적으로 강요해야만 하는, 허약한 믿음에 대한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책에서 밝히는 부활의 가장 큰 의미는 진리의 영이 부어지는 사건입니다. 그해서 진리의 영이 부어졌다면, 진실이 무엇인지 부활 자체의 사건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하겠지요.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스스로 만든 황홀감에 도취되는 것은 진리의 명을 받은 사람들이 깨닫는 진실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의 영으로 참된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포기하고 깨어나기를 거부하는 것이지요.

 

더구나 부활과 더불어 십자가의 피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한다는 이야기는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할 수 없었던 우매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설명인데도, 여전히 그것이 신앙의 대가라고 믿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에 상응하는 돈을 바쳐야만 비로소 효과가 있다는 동물적 믿음으로 이끌면서, 경쟁적으로 규모를 키우기도 합니다.
 

188 :4.3
(2016-8)
필사 사람은 최고 사기꾼들의 소유물이 결코 아니었다. 예수는 변절한 통치자들과 구체들의 타락한 영주들의 손아귀로부터 몸값을 지불하고 사람을 구출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조상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필사자 혼을 파멸시킬 만큼 우둔한 불공정성을 마음에 품으신 적이 결코 없으시다. 뿐만 아니라, 인류가 하느님께 갚아야 될 빚을 지불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하나의 희생물로서 주(主)가 죽으신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의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에게 진리의 영이 부어지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진리의 영을 부여받은 모든 사람이 저절로 깨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깨어나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수많은 장애들이, 우리들 자신에게 그리고 탐욕이 가득한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기 떄문에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많은 장애를 넘으려는, 진실을 보려는 아무런 적극적인 의지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고난을 겪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과 세상에서 진실을 발견하고 찾아서 그 실체를 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그러한 뜻만 가진다면, 누구든지 참된  진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의미를 새롭게 부활시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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