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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독자 게시판

기독교의 하느님과 다른 종교의 신(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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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경곤 작성일18-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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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간 존재들은 천사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인간과 가장 가깝다는 중도자만 해도 그들이 태어난 이후로 지금까지 인간의 모든 삶과 인류의 모든 일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중도자들은 길게는 50만 년 전부터, 짦게는 아담과 이브가 왔던 3만 7천 년 전부터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아마 우리들 자신보다도 우리를 더 잘 이해하고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겠지요.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하느님과 영적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어려움과 혼동을 겪는 것도, 그리고 서로 충돌하고 전쟁을 벌려왔던 배경이나 결과도 가장 정확하고 자세하게 알고 있을 것입니다. 믈론 중도자와 천사는 생각하는 시각과 차원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문제의 원인도 다르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요. 우리와 가까운 중도자는 보다 실질적이고 즉시 해결되는 해답을 줄 수 있고, 천사들은 좀 더 핵심적은 본질적인 해답을 주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유란시아 계시자들 중에서 가장 높은 하늘 존재는 신성한 조언자입니다. 신성한 조언자가 어떤 문제의 원인을 말한다면, 아마도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해답을 말해주겠지요.

 

머리말은 천상의 존재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신성한 조언자가 작성했는데, 처음 한 말이 지금의 인류가 혼란을 겪는 이유 중의 하나가 하느님과 신성과 신(神)을 개념적으로 혼동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힘으로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신성한 조언자가 알려준 모든 문제의 원인은, 중도자나 천사들이 말하는 그 어떤 해답보다도 훨씬 심오하고 근원적인 해결 잭이 되겠지요.

 

0:0.1

유란시아─이는 너희 세계의 이름이니─이곳의 필사자 마음속에서는 하느님, 신성(神性), 신(神)과 같은 그러한 용어들의 의미에 관하여 큰 혼동이 존재한다. 인간 존재들은, 이들 수많은 호칭으로 지칭되는 것 때문에, 신성한 개인성(個人性)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더욱 혼동이 되고 그리고 불분명하다. 그토록 많은 관념화에서의 혼동과 연관된 이 개념적 빈곤 때문에, 나는 오르본톤의 진리 계시자 무리단이 유란시아의 영어라는 언어로 옮기도록 허락받은 이 글에서 앞으로 사용될, 특정 단어 상징에 반드시 따라붙어야 할 의미에 대한 해설로서, 이 머리말을 쓰도록 지도를 받아왔다.

 

신성한 조언자의 이 말에는, 원시시대의 인간이나 지금의 인간이나, 하느님, 신성, 신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 왔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백만 년에 걸친 파란만장한 인류의 진화 역사를, 한순간의 사건으로 여기는 신성한 조언자의 시각에서는, 원시인의 개념이나 현대인의 개념이나 혼동을 겪는 본질은 거의 같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로 직접 말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원시인이나 현대인이나 이들 개념에 대한 혼동은 여전하다는 것이지요.

 

정말로 원시인 필사자도 하느님, 신성, 신을 알았는데 그 개념적 혼란 때문에 모든 문제가 일어났었고,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라면 진지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겠지요. 만약 그렇다면 우선, 원시인은 하느님과 신성과 신을 어떻게 혼동하였고,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혼동하고 있는지 비교해 봐야 합니다.

 

4번의 계시를 거치면서, 행성 영주 이전의 원시시대, 아담과 이브의 시대, 멜기세덱 시대, 그리고 예수님 이후 시대를 각각 새롭게 열어 놓았지만, 하느님과 신에 대한 혼동이 사라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면, 원시시대의 하느님 개념과 신 개념이 지금까지도 뒤섞여서 내려오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원시시대의 개념 혼란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야만 합니다. 이에 대해 상세한 내용이 3부 유란시아의 역사에 있습니다.

 

하느님, 신성, 신에 대한 개념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을 다스리는 초인간 존재가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되는 개념입니다. 원시 종교의 태동기를 보면, 이들 개념이 자연을 두려워하면서 싹트고 있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실체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하느님 개념도 나타나고, 신성에 대한 개념도 등장하고, 또 신에 대한 개념도 나타나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개념 자체가 양적으로 확장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고, 질적으로 확장되는 것도 인류 전체를 기준한다면, 진화 과정이라서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쉽게 말해서 10만 년 전이나 3만 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구원받을 사람은, 모론시아에서 다시 깨어납니다. 결국 개념적 혼동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지, 개념 자체의 양적, 질적 확장이나 성장은 긴 진화의 고리에서 볼 때, 큰 의미는 없다고 볼 수 있지요.  하느님, 신성, 신의 개념이 혼동되지 않는다면, 참된 진리와 쉽게 하나가 되고, 실천이 되는 것이겠지요.
 
원시 시대에도, 영적 지도자나 선각자들은 나름대로 하느님, 신성, 신 개념을 잘 구분하였고, 그래서 후대에 이에 대한 진리를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후대의 사람들이 혼동을 가졌던 것이지요.
 
자연에 대한 두려움에서 종교적 의식이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데, 특정한 자연 환경을 개인성으로 인식하면서 두려운 하느님이라는 개념이 탄생되었고, 두려운 자연의 하느님이 점차 개념적으로 영성화하면서 신성으로 이해하는 능력이 생긴 것이지요. 이 영성화된 권능의 실체적 중심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신에 대한 개념이 나타나면서 원시 종교가 출현되는 것입니다.
 

86:0.2

종교가 생기기 전에 사람이 처음으로 가졌던 자연의 기세에 대한 두려움은, 자연이 개인성구현되고, 영성화 되고, 결국에는 인간 의식(意識) 속에서 신(神)화 됨에 따라, 점차적으로 종교적 성향을 갖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원시적 유형의 종교는 진화하는 동물 마음들의 심리적 타성으로부터 발생되는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결과인데, 그러한 마음들은 이미 한 때 초자연에 대한 개념을 간직한 이후에 일어난다.

 
구분될 수 있는 개념들로 나타나면서, 어떤 부족은 분노하고 심판하는 자연의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어떤 부족은 하느님의 신성을 구하려고 끔찍한 의식을 중시하게 되고, 또는 그때 그때 소원을 이루게 하는 각각의 특화된 화신들을, 신으로 모시면서 받들게 된 것이지요.

 

개인의 이해나 개념의 등장으로 본다면, 하느님은 개인성으로서 판단과 행동을 하는 분이었고, 신은 권능을 행사하고 부어주며 다스리는 존재적 실체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신성은 하느님과 신의 초월적 권능과 판단이나 개입으로 받아들였고요.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개념들이 혼동되었기 때문에, 올바른 진리 의식이 싹틀 수가 없었고 종교도 점차 정체되었던 것이지요.

 

예수님 이전의 멜기세덱도, 당시의 각 부족마다 서로 다른 두려움의 하느님들을 받드는 일과, 권능을 행사하는 잡다한 신을 믿는 관행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유일신 개념으로 이끄는 하느님과, 신과 신성을 깨우쳐주려고 했지만, 부족마다 자기 하느님을 포기하지 않고, 생명나무 신과 같이 은혜와 권능을 받으려는 특화된 신 개념을 타파할 수는 없었지요.

 

95:1.4

살렘 선생들은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하느님들의 숫자를 크게 줄였는데, 한 때는 주요 신(神)들을 일곱 개로 줄이기도 하였으며: 그것들은 벨, 샤마쉬, 나부, 아누, 에아, 마르덕, 그리고 등이었다. 새로운 가르침이 최고점에 달하였을 때, 그들은 이들 하느님 중에서 셋을 다른 것들보다 최극위에 올려놓았는데, 그것은 바빌로니아의 삼신(三神) 즉: 땅과 바다 그리고 하늘의 신인 에아 그리고 아누였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삼신들이 다른 지역에서 생겨났는데, 모두가 안드-사람들과 수메르인 들의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을 회상한 것이었고 그리고 세 개의 동심원으로 된 멜기세덱의 휘장을 믿은 살렘 사람들의 믿음에 기초를 두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서, 자기 부족의 하느님을 온 세상의 모든 부족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들에 으뜸이 되는 하느님으로 선포하였지만, 실제로 그러한 하느님에 대한 개념에서는, 두려움에서 기원된 하느님 개념, 우주의 신성한 권능으로서의 신성 개념, 가장 강력하고 엄격한 권능을 행사하는 신에 대한 개념이 뒤섞인 상태에서 자신들의 종교를 견고하게 한 것이지요. 개인성 개념을 제외한다면, 사실 이러한 유일신 개념은 인도 지방의 힌두교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즘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기독교의 근간이 되고 있지만, 그러나 구약에 담겨있는 하느님 사상만을 본다면, 거의 대부분이 원시적 하느님 개념과, 멜기세덱이 타협했던 창조적 권능의 신에 대한 개념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각 부족의 하느님들과, 두려워해야 할 하느님의 권능을 이야기하는 내용도 많고, 하느님의 권능을 자연 에너지와 연결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주 질서인 자연 에너지를, 하느님 은혜인 태양과 태음의 에너지로 말씀이 있는데, 동양 철학의 음양론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신명기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과, 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뜻과 말씀을 내리는 하느님 개념이 늘 중심을 이루지만, 자연 에너지를 부어주는 실체로는 멜기세덱 이전에 진화적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신의 개념도 많습니다. 이러한 개념에서의 혼용은 멜기세덱 이후,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히브리인들이 지녔던 혼동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예수님의 참된 진리가 당시 히브리인들에게 잘 이해가 안 되었고, 이후에도 공허한 구호가 된 것이지요.

 

문제는 지금의 기독교입니다. 계시자가 지금의 우리를 위해 염려하는 것은 멜기세덱과 예수님이 우리에게 호소하였던 하느님 개념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신자들은 복종의 대가로 용서와 관용을 얻고, 헌신을 대가로 은혜의 에너지를 무한정받는 그러한 신의 개념으로 하느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하느님과 신을, 개념적으로 거의 또는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셈이지요.

 

신은 두려움의 자연 신에서 원시적 개념으로 시작해서, 최극 삼위일체에 이르는 유란시아 개념까지 , 권능과 에너지를 우주 법칙에 따라 신성으로 출현시키고 행사하는 실체적 존재를 모두 포함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아버지가 되고,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고 나와 함께 모든 것을 공유하기도 하는 분이고요. 기독교 내에서 하느님과 신을 구분하지 못하여, 무속의 신상을 무조건 파괴해야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증거라고 안심하려는 신앙은, 신과 하느님을 구분하지 못하는 혼동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그러한 혼동과 불안이 하느님의 진리에 다가가는 것을 오히려 가로막고 있어요.

 

자연의 질서를 하느님의 손길로 이해하려는 성경 해석으로는, 힌두교의 심오하고도 신성한 우주 차원의 영성과 신성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절대 자유와 영원한 평온과 무한 우주로 이어지는 깨달음의 도전도 이해하기가 힘들겠지요.

 

기독교는 다른 종교가 말하는 하느님을 부정하고 힌두교를 경원시하지만, 시대에 따라서 인종에 따라서 저마다 유일한 개인성으로 받아들여 성장해 온 하느님 개념은 확장성에서 차이가 있을 뿐, 개념적으로는 차별화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가 수많은 하느님 개념과 다양한 신 개념을 뚜렷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한, 혼란은 사라지기 힘들겠지요.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아버지로 경배하고 기도하고 뜻을 따르는 하느님 개념과, 신성한 손길에 감사하고 은혜의 에너지를 구하려는 하느님은 다릅니다. 유란시아 책은 그것은 진정한 하느님 개념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한 개념은, 끌어안고 복종하고 지켜야 하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포함. 종속 그리고 배제의 신 개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 개념은 멜기세덱이 쏟아부은 "창조적인 힘"이 바탕이 된 그러한 신 개념보다 오히려 후퇴된 것입니다.

 

96:0.1

신(神)을 착상하는 데에 있어서, 사람은 처음에는 모든 하느님들을 포함하고, 그 다음에는 모든 외국의 하느님들을 자기 부족의 신(神) 아래에 종속시키며, 마지막으로 최종적이며 최극 가치의 한 분 하느님을 제외한 다른 모두를 배제한다. 유대인들은 모든 하느님들을 이스라엘주님 하느님이라는, 자신들의 더욱 숭고한 개념 속으로 합성하였다. 마찬가지로 힌두인들은 자신들의 잡다한 신(神)들을 리그-베다에 묘사된 “하느님들에 대한 하나의 영성(靈性)” 속으로 병합하였고, 한편으로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자기 하느님들의 수를 벨-마르덕이라는 보다 집중된 개념으로 줄였다. 유일신론의 이들 관념은 마키벤타 멜기세덱팔레스타인에 있는 살렘에 출현한 이후, 오래 지나지 않아서 전 세계에 퍼졌다. 그러나 신(神)에 대한 멜기세덱의 개념은, 포함과 종속 그리고 배제의 진화적 철학에서의 그러한 개념과는 같지 않았다; 그것은 창조적인 힘에 배타적으로 기초를 두었고, 얼마 안 되어 메소포타미아인도 그리고 이집트의 가장 높은 신(神) 개념들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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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종교에서도 있었던 많은 하느님과, 환경에 따라 받들었던 다양한 신에 대한 개념을, 유란시아 계시 안에서 구분하고 받아들이면, 신성한 조언자가 염려한 혼동은 사라지고 새로운 영적 각성이 일어날 것입니다.  

댓글목록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진화 종교는 독선이 특징이에요. 진리가 껍질만 남은거구요.

디오니스님의 댓글

디오니스  작성일

아직은 유란시아 계시가 널리 확산되지 않아서, 진화 종교의 여러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타 종교를 비난하고 미워하게 되고, 오히려 자신들의 교리로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을 가두고 있지요.

물론 하느님의 진리나 뜻을 거스르고 자기 욕심에 종교를 이용하는 행태가 여전히 많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다른 종교를 경멸하거나, 원시 무속이라 질타하는 것은, 사랑과 관용과 지혜 안에서 다시 생각해야 하겠지요. 갑작스레 당장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계시가 확산되어 서서히 깨어나면서 유란시아 계시의 진리로 차츰차츰 오묘한 통합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책의 문장이 갑자기 생각나서 인용해 봅니다.

[http://www.urantia.or.kr/data/editor/1608/0ef6bb0642e63873e5ed77c4564ca615_1470373517_9537.jpg]

(독자게시판은 유란시아 본문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곳입니다. 다른 주제들은 자유게시판에서 공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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