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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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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새 작성일17-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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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의식 세계는 보수에 속한다. 최빈국에 가까웠던 나라가 경제발전을 이루었던  역사를 어느 정도 실감하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물질적인 성장에만 그친 것이기는 하지만, 몸과 마음에서 성취에 대한 어떤 긍지를 실질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면, 지나온 시간을 의미 있게 기억하고 성과를 중시하는 것이 당연하다. 진보는 이것을 과거의 덫에 걸린  보수의 강요라고 생각한다. 

 

보수의 문제점은 과거를 실제보다 더 찬란하게 포장하려는 자만심 섞인 유혹 때문에, 과정에서 탄생된 부작용과 실패를 아예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진보의 문제는 과거에 뿌리를 둔 현실의 여러 병폐들을 타파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식 때문에, 성취를 이룬 과거의 역동성을, 무분별한 힘이 합의 없이 경쟁 사회를 부추긴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모두 의식에서 전환이 있어야만 한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선천적인 약점이 있다. 보수는 과거 문제점을 필연적이고 자연스런 부산물로 당연시하고, 진보는 성취의 찬란함도 약육강식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승자들의 자화자찬이라고 백안시한다. 각자 입장에서는 백 번 맞는 말이다. 그래서 신념을 버리지 않는 한, 충돌하면 타협 불가능이고, 비난이 나올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갈등 에너지는 좀 수그러든다. 시간은 공평하게 모든 걸 온화하게 감싸고, 하나의 에피소드로 담담하게 흔적을 남길 뿐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각자 주장이나 의식은 낮아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갈등이 조금씩 희미해지기를, 보수와 진보가 서로 기다리면 되겠지만, 시간에 맡길 만큼 사람이 그렇게 오래 살지도 못할 뿐더러, 현실은 너무 급박하다. 사실은 서로 급박하고 절박하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생각은 변하지 않으면서, 현실의 갈등을 소 닭 보듯이 여기는 경우가 많다. 서로 자기 현실 삶을 열심히 살아야 하니, 본질적인 의식 갈등이 잠시 앙금처럼 가라 않지만, 이런 자세는 사실 보수나 진보나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사회적 무기력증을 깊게 만들 수 있다.  

 

사람들은 그런 소극적인 자세로 돌아서면서, 스스로 사회적 양보, 이해, 배려, 화합, 갈등해소라는 말로 포장하지만, 바탕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솔직히 어림없는 얘기일 것이다. 상대의 주장을 적극 수용해보려는 일말의 의지도 없는 한, 그런 얘기들은 본인 의지의 나약함을 감추려는 말일 수도 있다. 

 

이렇게 스스로 갈등을 잠재우면서, 사회적 현실감각에 기력이 낮아질 때, 그 약한 틈을 기민하게 파고드는 세력들이 있다. 바로 약육강식에 능수능란한 전문 집단들인데, 자기의식이 남아 있다면 모를까, 이미 힘이 빠진 상태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휩쓸리기 마련이다.

 

암튼 심각한 문제는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에는 급박한 현실 세계가 녹녹치가 않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물 안에서 우리만 살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물리적 정신적 생존은 축복이 아니라, 투쟁과 경쟁으로 쟁취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빛과 생명의 시대가 세월이 되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오기 전에 이미 스스로 빛을 발견할만한 시력을 갖추어야 하고, 끈질기고 힘찬 생명력을 키울 기법을 알고 있어야만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시대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소멸과 도태와 답습뿐이다. 그 어떤 탄생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문제 지적이 아니다. 유란시아 책에 나오는 가르침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결점을 찾아내거나, 질문을 던지거나, 반대 주장을 제기하는 것에는 그 어떤 아무런 지성의 깊은 통찰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 질문에 대답하고 이들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에는 마음의 눈부신 재기(才氣)가 요구된다." 

 

현실을 지적하고 탄식하는 글들은 아무나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무의식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무의식에 대한 동서양의 역사적, 철학적 배경이나 정신심리학적 발전 상황을 자세하게 정리한 글이라서, 공감을 한 적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초등학교 6학년생이 만든 숙제 과제였다. 이젠 지식이나 학식으로, 현실을 분석하고 문제점을 찾아 날카롭게 지적하는 일은, 초등학생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이다. 

 

그런데도 요즘 현자로 자부하는 사람들의 글이, 문제를 분석하고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러고는 결론으로는 해결책을 빨리 찾아야 한다고 절박하게 외치는 것으로 끝마친다. 막상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똑같은 내용이 초등학생이 만든 건지, 현자들의 이야기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워진다.고함소리가 크면 똑똑하고 지혜로운 것으로 여기려 한다. 이런 분들은 유란시아 책을 봐야 한다.

 

보수와 진보에 대한 생각도, 인터넷 검색만 잘 하면 초등학생도 문제의 핵심을 지적하고 비평할 수 있다. 고함만 외치는 것은,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오랜 세월을 살아도, 소리만 커질 뿐 별 도움은 안 된다. 그런 어리석은 일에서 벗어나려면 외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유란시아 책을 꼭 봐야 한다. 유란시아 책에만 모든 문제와 해결의 근원적이고 완벽한 해결책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란시아 책에는 갈등이나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길이 나와 있다. 무슨 눈부신 재기가 없어도, 찾아낼 수 있고, 한 가지 방법이 아니라, 저마다의 시각과 방향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물론 그 정점은 이 책이 전하는 사랑과 진리일 것이다.

 

책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성취에 긍지를 가지는 보수의 주장이나, 현실을 혁파하자는 진보의 주장이나 전적으로 옳다. 모두 나름대로 진미선이 간직된 우주적 실체이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판단하면, 현실을 혁파하는데 보수의 긍지가 파괴될 이유가 없고, 긍지를 지키는데 진보의 혁파가 무효화될 이유가 없다. 보수와 진보의 긍지와 혁신은 실체이기에, 계속 자라나는 속성을 그 자체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유란시아에서 말하는 실체와 그림자의 한 단면일 것이다. 

 

그런데도 보수가 혁파를 방해하고, 진보가 긍지를 쓰레기 취급한다고 오해한다. 그런 의식의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서 잘못을 없애야만 한다. 실체를 보지 못하도록 각자의 눈을 가리는 무언가를 찾아서 없애야 한다. 

 

악은, 간단히 말해서 불완전을 선택하는 행위라는 말에서, 불완전 하도록 우리 눈을 가리는 것을 분별해야 한다. 자신을 성찰하면 그 불완전의 요인을 스스로 깨닫겠지만, 아마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유란시아 책에서는, 편견이나 자만에서 불완전의 잠재적 악이 움직이기 시작되고 성숙되지 못한 인간 본성, 동물적 본능에 자신의 의지를 맡길 때, 잠재 악은 비난, 원망, 분노, 파괴라는 악으로 자란다고 말한다. 결국 모든 원인은 편견과 자만이고, 편견과 자만의 근원은, 사회적 자아-영속, 자아-유지, 자아-충족에 대한 갈망과 이에 반대되는 두려움이다. 

 

책에는 자세한 이야기가 엄청난 깊이로 펼쳐지고 있지만, 한 두 구절만 인용해도, 갈등의 본질을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지, 현실의 목적과 운명을 어떻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지 알려주고 있다. 사회를 비롯하여, 모든 발전에는 경쟁이 있고, 그에 따라 우열의 계층이 생길 수밖에 없다. 

 

70:9.7그러나 이러한 평등 관념은 문명의 산물이다; 평등은 자연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문화조차도 스스로 그 안에 들어있는 바로 그 사람들의 불평등한 수용능력으로 말미암아, 결론적으로는 사람들의 선천적인 불평등을 명시하고 있다. 가상되어진 자연본능적 평등을 갑작스럽고 비진화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문명화된 사람을 원시 시대의 거칠고 험한 관습으로 신속하게 내동댕이 칠 것이다. 사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권리를 제공할 수 없지만, 각자의 서로 다양하게 지니는 권리를 공정하고 동등하게 관리하기를 약속할 수 있다. 자연본성의 아이에게 자아-유지를 추구하고, 자아-영속에 참여하며, 그러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의 자아-충족을 즐길 수 있는, 곧 인간 행복을 구성하는 모든 세 가지의 총합을 위한, 공정하고 평화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사회가 할 일이며 의무이다.

 

한편 우리는 소외되는 사람들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충족시키고, 유지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주는 자들에게는 엄격한 자기 절제의 잣대가 있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깨우치지 못한다면, 사회 규약으로 강제할 수밖에 없다. 그와 동시에 약한 사람들도 충분히 설득해야만 한다.

 

70:9.6약하고 열등한 사람들은 항상 동등한 권리를 주장한다; 국가가 강한 자들과 우수한 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강제적으로 공급하도록 항상 집요하게 요구하고, 그밖에도 그들 자신의 무관심과 게으름 때문에 발생된 그러한 결핍을 보충하도록 요구한다.

 

약한 자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불행하다는 의식과 벗어날 수 없다는 두려움이다. 인류 진화의 바탕은 두려움이고, 그것이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이끌고, 사회적 결속을 다지는 동기도 되었지만, 반드시 발전의 동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발전 대신에 자신을 방어하려는 자극제로 두려움이 사용되면 안 된다. 두려움은 결국에는 하느님을 찾도록 만들었지만, 현실 삶에서는 자기 발전과 창의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그러한 사실을 증명해주어야만 한다. 

 

국가, 사회집단, 회사, 가정, 개인 사이에 경쟁이 사라지는 경우는 없다. 언제나 비교되고 적자생존의 야만성도 내재되어 있다. 열등한 의식에서는 여전히 약육강식의 야만성이 자신을 지키는 강력한 법이라고 믿지만, 거의 대부분의 인류는 법과 질서가 자신을 지켜준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것이 미숙과 성숙과 차이일 것이다. 

 

두려움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죽음이다. 그러나 이제는 군사력도 정복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상대에게 대항할 최소한의 힘을 갖추는 것으로 족한 세상이다. 승리자에게 엄청난 부담을 줄 수 있다면, 전쟁의 패배는 패배가 아니다. 지구촌에서 전쟁에 대항했던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구가 보잘 것 없는 유럽의 어느 나라가, 군사력으로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북한은 최악이지만,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되기도 한다. 국제사회와 고립되고 식량부족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살아있다. 가장 못 사는 나라로 전락되고 더 고립된다. 해도, 역시 살아있을 것이다. 온 세계가 비난하고 그들의 불행을 동정해도, 그들은 꿋꿋하게 비웃으며 나름 행복하다고 당당할 수도 있다. 그들이 누군가를 정복하려고 군사력을 키운다는, 그러한 유아적 생각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북한의 예에서 보듯, 최악의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된다 해도 미래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신념만 있다면 ​어제의 초라함은 화려함으로 태어날 수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언제까지나 교대로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사람은 잠재적 두려움을 스스로 실재적 공포로 키워가면서 오히려 남탓을 한다. 밝은 미래에 대한 믿음은 없고, 패배와 공포에 대한 믿음만 있다.

 

물질세계만을 추구하면 악한 영이겠지만, 악한 영도 물질을 지배하는 힘이 있다. "믿음이 있다면, 세상이 무너진들 그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 되겠는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을 믿는 자를 위한 복음이지만, 마귀를 믿는 자도 현실의 고통을 초연하게 대하는 정신력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다.  

 

악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현실 세계는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뉜다. 만약 현실을 냉혹한 물질계로만 본다면, 가해자는 없고 모두 상대적 피해자들뿐이다. 만약 현실을 사랑이 피어날 수 있는 물질계라고 본다면 가해자도 피해자도 사라진다. 평화를 사랑하고 공동의 번영과 이상 사회를 꿈꾸는 사람에게, 지금 당장의 냉혹한 현실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증가하는 온상으로 보이겠지만,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어제와 내일과 연결되어 있다는 물질적 유기체로 본다면, 그 어떤 현실적 문제도 파괴와 비난의 동기가 아니라, 발전과 의욕의 동기로 바뀔 수 있다. 

 

현실 문제를 당장 해결하려고 할 때, 전쟁과 승리의 지혜가 나타난다. 내일까지 해결하려고 할 때 창조적인 지혜가 일어난다. 보수나 진보나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면,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만 있을 것이다. 모든 과제는 내일이나 모레까지 차근차근 해도 안 될 것이 없다. 절박할수록, 그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이상과 목표에 대해, 의심과 불신이 크다는 것을 말한다.

 

보수나 진보나 충돌은 모두 자신들의 주장에 자신이 없다는 반증이다. 자신의 주장이 참된 실체임을 스스로 깨닫는 순간, 충돌의 동인은 사라질 수 있다. 주장이 참된 실체라면, 다른 것에 비교되거나 견주어서 진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옳은 것이다. 

 

보수나 진보나, 의식 안에 있는 목표나, 가치가 당장이 아니어도, 결국 이루어질 실체임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한다. 다른 사람이 인정해야 가치가 드러나고 빛이 난다면, 그것은 참 실체가 아니다. 그것이 그림자라면, 지킬 실체가 없으니 파괴할 대상도 없고, 공격하는 실체가 없으니, 지킬 이유도 없다. 

 

상대의 참된 실체적 가치를 받아들이는 의식의 전환, 나아가 상대의 실체적 가치를 이해하고 함께 성장하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의지만 있다면, 그러한 생각에는 각자에게 깃든 어떤 신비한 힘이, 틀림없이 무언가를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세상을 이기는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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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열심히 땀 흘리는 신흥개발국을 제외하고는 세계 젊은이들은 삶에 대한 새로운 도전의 모티브가 없어서인지 방황하고 있습니다. 문명의 파고에서 생기는 세계적 유행병 같기도 하고, 국가 간의 부의 평준화를 이루려는 행성 천사들의 손길인지도 모르지요.

방황과 분노는 원인이나 과정이 다르듯이 결과도 전혀 다르겠지요. 분노는 늘 파괴와 무질서의 허망함이 따라오고 야만성으로 퇴행을 겪는 것 같습니다.

신성한 도전정신 대신에, 집단적 패배의식에서 비롯되는 분노와 봉기의 용기를 부어주고 있다면, 일깨워주어야 하는데 일부 사람들이 강렬한 의지로 거부하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새로운 도전이 파괴의 용기로 변질되지 않도록, 집단 분노를 키우는데 에너지가 쓰이지 않도록, 분노와 증오의 고리를 끊어야겠지요. 시간이 지나도 의식 각성이 안 된다면 어쩌면 결단의 순간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시간이 얼마나 걸리건 간에, 영적 암흑의 시대는 공의가 나타나기까지,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화합이라는 공동체 의식으로 되돌아오도록,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결국 선이 악을 이긴다는 하느님의 진리는, 알곡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추수의 때까지 시대적 혼란과 고통은 필연적이라는 점을 말해 줍니다. 하나의 알곡도 잃지 않으려는 것이, 행성을 돌보는 천사들의 배려일 수도 있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의식이 바뀌는 분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겠지요.

영적 암흑시대가 5년이건 10년이건, 오래 방치되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현실에 실망하질 말고, 공의가 드러날 시대를 미리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겠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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