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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 없음은 어려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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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량 작성일17-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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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생각하면 사심 없다는 말의 의미는 명료하고,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는데, 이를 어렵게 생각하는 분들이 종종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평가되고 비교되는 현실 세계에서, 책에서 말하는 사심 없는 마음도 질적 완성도에서, 여러 의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진-미-선에 대한 의식이나 실천이나 체험이 저울로 재거나 평가될 수 없듯이, 사심 없음도 각자가 최선을 다하는 한도 내에서 최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축구 경기를 하는 선수들처럼 선의의 경쟁을 벌리는 특별한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사심 없음을 비교하며 서로 독려할 수 있지만, 3편 글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심 없는 마음과 삶의 실천은 대비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심 없음은, 우주 아버지의 전지-전재-전능의 속성으로 펼쳐지는 최극 통치를 적극 수용한다는 의미라서, 누구나 쉽게 실천하고 체험될 수 있는 것들이며, 매일의 삶에서 누구나 맛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그러한 실천을 행할 수 있는, 각종 어려운 상황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겠지요. 일상에서 아무런 문제를 만나지 않는다면, 어려움이나 난관도 닥칠 일이 없고, 실패나 좌절도 있을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삶에서 부딪치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부딪치는 자세에서 사심 없음은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3 :5.138. 사심 없음─자아를-잊도록 하는 영(靈)-이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필사 사람은 인정받음과 명예를 위하여 끊임없이 외치는 피할 수 없는 자아의 함성과 마주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은 만일 버리고자 하는 자아-일생이 없었다면 신성한 일생을, 역동적으로 선택할 수가 없다. 만일 선(善)을 드높이고 그와 차별할 수 있는 어떤 대비로서의 잠재 악(惡)이 없다면 사람은 결코 정의(正義)위에 그 구원이 되는 발판을 놓을 수가 없다

 

일상에서 체험할 바람직한 9 가지 중에서. 용기가 1 번째이고, 위의 사심 없음은 8 번째입니다. 모두 일상적인 일임에도, 종종 사심이 없는 것과 사심을 버리는 것을 혼동하는 것 같습니다. 비슷하게 들리겠지만 의식이나 마음의 동기는 다릅니다.

 

사심 없음은 자기희생이 아닙니다. 사심 없음을 양보나, 헌신같이 자신의 욕심을 잠시 잊거나, 버리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곤 합니다. 비록 헌신적인 자기희생이, 사심 없는 삶의 가장 고귀한 하나일 수 있겠지만, 모든 자기희생이 항상 사심 없음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사심 없음은 "인정받음과 명예"를 얻을 상황이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능력으로 "표창을 받고 명예를 얻을" 절호의 기회가 있어야만 합니다. 자기 내부에서 "어서 빨리 인정을 받고 널리 뽐내라"는 이기적 함성이 울릴 수 있는 상황이어야만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비로소 사심 없음을 드러내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인정이나 명예"가 확실시 되는 아무런 상황이 없는 경우에, 양보하거나 헌신하는 것은 그냥 겸손이고 선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인정이나 명예와 관계없는 일상에서, 자아가 갈등을 일으키고 함성을 외친자면, 그것은 "인정이나 명예"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단순한 "물질적 욕심과 만족"을 포기하라는 외침일 것입니다. 그렇게 욕심을 내려놓는 일반적인 양보나 헌신은, 사심, 곧 자기 욕심을 버리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분해 본다면, 사심을 버리는 것은 사심이 없는 것과 다르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사심을 버리는 일은 자아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맨 나중에는 모든 욕심을 버리고 고분고분 타인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고 양보하는 삶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선한 마음에서 나오는 소극적인 자세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사심을 없애는, 도전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책에서 말하는 사심 없음에는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이고 도전적으로 바치는 것이 요구됩니다. 사심 없음은 자신의 힘으로 "명예와 인정"을 획득할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상대방, 가족, 집단,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자아가 외치는 이기적 함성을 이겨내야 얻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항상 인정을 받고 명예를 얻을 일이 벌어진다면, 그 사람은 뛰어난 능력으로 엄청난 지위에 오른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극히 적고, 대부분은 마땅히 해야 할 인간의 도리와 본분을 하려고 하는 데, 그럴 때에도, 종종 자아의 함성과 마주치게 됩니다. 도리와 본분을 다하려고 작은 욕심을 버리는 일도, 일종의 사심 없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작은 사심 없음을 자기희생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사심 없음은 자아희생이 아닙니다.

 

탐욕이 가득한 사람이 아니라면, 도리와 본분은 당연한 일이라서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자신의 역할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심 없음을 체험하는 가장 초보적인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출세와 명예를 위하여 열심히 뛰는 축구 선수는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의 명예나 영광을 생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고, 팀을 위해 땀을 흘리는 자세가 일종의 사심 없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심 없는 마음과 행동은, 크거나 작거나, 완전하거나 불완전 하거나, 많거나 적거나, 올바른 자세이거나 잘못된 방법이거나,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탐욕이라면 버리고 취하는 것에서 크거나 작은 것이 화제가 될 수 있겠지만, 명예와 인정이라면, 경기에 나선 축구 선수가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땀을 흘리지 않듯이, 사심 없음은 화제로 삼을 대상이 아닙니다. 본분과 도리를 하려는 사람에게도, 사심 없음은 비교와 평가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심의 크기나 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사심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심 없음은 개인적 "명예와 인정"을 얻는 결과와 직결되어 있어서, 자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에게도 있는지 없는지 쉽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출세를 위해 일생을 바치기 보다는, 헌신적인 신성한 삶에 자신을 바치는 것이, 최고의 사심 없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심 없음은 단순한 자기 포기나 봉사라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역동적인 선택이라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신성이 진-미-선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신성한 삶의 역동적인 선택은, 사심 없음의 가장 완벽한 전형일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수시로 고개를 내미는 교묘한 악의 유혹에 굴하지 않고, 고난을 헤쳐 나가면서 선(善)을 이루려 애쓰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심 없음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전지전능의 하느님이 만드신 우주에서 살아가면서, 누구나 부딪치는 상황에서, 9 가지의 필연적인 선택으로 얻는 바람직한 체험에 용기, 애타심, 소망, 신앙, 진리에 대한 사랑, 이상주의, 충성심, 사심 없음 그리고 기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을 발견하고 행하려는 가장 기초적인 의지 활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사심 없음은, 용기나 희망과 마찬가지로, 일상의 소소한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는 바람직한 실체들입니다. 의지를 가진 평범한 사람이라면 각 상황에서 누구나 선택할 수 있고, 의식 안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선천적으로 의지가 약하거나 아니면 어떤 불가피한 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하게 삶에 이끌려가야 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에 대한 최종적 의지의 포기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진리를 믿는 마음은 언젠가는 모든 무기력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며, 9 가지 모두가 개인적 성취로서, 영원한 생명을 위한 체험적 재산으로 남을 것입니다.

 

용기와 기쁨은 누구나 이룰 수 있고, 또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나 사심 없음도 누구나 이룰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의 신앙이나 사심 없음을, 마치 아무나 할 수 없는, 현세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이야기 하거나, 그렇게 여기도록 만드는 일은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 활동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역동적인 의지활동에도 방해되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려는 노력이나 진미선의 성취는, 자신의 경우가 어떠하든지 관계없이, 다른 사람의 노력이나 도전이나 성취를 언제나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더욱 활발하게 도전할 수 있도록 서로를 돕는 것이 마땅한 자세일 것입니다.

 

신앙이나 진리 추구는 전적으로 개인의 일이기 때문에, 각자 체험의 깊이와 높이는 아무도 알 수도, 참견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 전혀 그릇된 방향이 아니라면, 상대방의 신앙이나 진리 의식을 사소하게 여기거나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상대에게는 물론이고 자신에게도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최극 통치 안에서 체험적으로 성취하려고 선택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부정적으로 여길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사심 없음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거나, 양이나 질이나 정도를 개입시키는 일은 스스로의 의지 포기를 회복할 기회도 사라지게 할 것이고, 다른 사람의 성취도 가로막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초라해 보이는 성취도, 부인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고 책에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더불어,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의 체험은 누구나 배울 점이 많다는 사실을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심 없음은 용기와 기쁨과 마찬가지로, 일상에서 성취할 수 있는 그런 바람직한 것입니다.

 

댓글목록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수행을 통해서 인간은 결국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하면서, 그 깨달음이 인간이 달성할 최고의 진리라 결론내리고 편하게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인간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고 여기니, 무슨 얘기를 해도 우습게 생각하고, 진리도 먹히질 않습니다.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소크라테스 말을 통달한 현자의 말로 믿고, "아는 척하는 사람은 자신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며 측은하게 봅니다.

세상만사를 하찮게 여기니 본인은 아주 맘 편하고 행복하게 지내지만, 사실은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유란시아 책의 진리 계시도 인간능력으로는 제대로 알 수 없다고, 마치 인간의 한계 능력을 가진 사람처럼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분은, 겉으로는 대단한 겸손으로 보이지만, 안으로는 교묘한 자만심이나, 아니면 세상에 대한 비웃음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유란시아를 읽은 분들이라면 그런 생각을 안하겠지요.

여량님의 댓글

여량댓글의 댓글 작성일

지인 중에 틈만 나면 산행을 다니시는 분이 있는데, 인간이 보잘 것 없다는 말을 종종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대자연의 웅장함을 온 몸으로 느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진지한 얘기 같아서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말하는 의미는 상황마다 아주 달라서, 진솔한 얘기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 정직한 탄식을 자만심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사심없음을 자기극복, 포기, 무조건 헌신으로 아는 사람이 많아요. 목표가 잘못되어서 책 내용도 이해하지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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