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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유란시아 증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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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너킥 작성일17-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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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성탄절과 년말이 되면, 예수님이 육신으로 탄생하시어 이 땅에 오신 것을 생각하면서 신년을 맞이하고 있다.


사람마다 성탄절이 여러 의미로 다가서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이라고 듣고 있다. 믿거나 안 믿거나,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우쳐준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탄생은 인류에게 영원히 구원의 빛이 되고 있다.


구원이라는 말은 "죄에서의 구원"이라는 의미도 있고 "영원한 삶으로의 구원"이라는 의미도 있다. 기독교에서는 "죄로 부터 구원하여 영원한 삶"을 주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이 두가지 의미를 하나로 묶어서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책 유란시아에서는 절망이나 슬픔이나 고통에서의 구원은 있겠지만, "죄에서의 구원"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4부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아주 어릴 적부터 우주 아버지가 죄인을 벌하신다는 전통적인 유대인의 종교관을 전혀 믿지 않았고, 오로지 사랑이 가득하신 아버지로 받아들였다.


그런데도 왜 기독교에서는 죄인을 구하려고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셨다고 믿는 것인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의 마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하늘나라였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진리였다.

 

사람들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인간은 누구나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생각에 쉽게 공감하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나 불교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잘못을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하고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말끔히 정화하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본성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모든 사람이 필연적으로 만나는 현실 삶에서의 어떤 실패나 좌절감을 벗어나려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며,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새롭게 시작해보려는 열망이기도 하다.

 

과거가 어떠하든, 새롭게 시작하려는 열망은 진화하는 우주의 법칙이지, 특별한 본성은 아니다. 생물이나 무생물이나 시간과 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유가 성장과 진화이다. 그래서 “우주의 표어가 진보라는 것을 깨달을 수는 없겠는가?”라며 천상의 존재들이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의 과정에서 자신의 불완전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러한 일시적인 스스로에 대한 불완전을,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서 그렇다고 믿을 때,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과 우주의 법칙은 완벽하게 차단된다. 그러한 원죄 의식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의무만 있고, 의무를 이행하고 그 응답으로 사랑을 구걸하는 신앙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 어떤 선천적인 권리도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아들이라는 신분은 선천적인 권리이다. 행동이나 결과에 따라서 증여되는 권리가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부여되는 자격이다. 행동이나 결과에 따라서, 그 자격이 박탈되는 경우는 있을지언정, 조건에 따라서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는 그러한 경우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들이라는 신분이다. 다만 이 아들 신분은 믿음이 없으면 볼 수도 들을 수도, 확인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잠재적이다. 그것을 실체로 만들어주는 것이 진리이다.

 

전통 종교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무조건적인 아들의 자격을 믿기를 거부하도록 만든다. 그 대신에 사람은 선천적으로 아버지로부터 아들의 자격을 박탈 당한채로 집에서 쫓겨난 존재라고 믿도록 만든다. 사라진 아들의 자격을 다시 회복하려면, 죄를 용서 받으고 다시 태어나는 길 밖에 없으면, 그것을 연결하는 통로가 종교 진리이자 복음이라고 말한다.

 

잠재적인 것을 실체로서 모든 사람이 성취하도록 하는 진리와, 원래부터 없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진리는 겉으로는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길이 다르다. 하나는 아들로서의 권리를 하나씩 확인하며 아버지에게 감사하며 나아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성취하기까지는, 아들이라는 증명서를 받기 전까지는, 언제까지나 아들이 될 수 없는 길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회복할 이유가 없다. 박달당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 신분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선천적으로 무지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진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모르고 있다. 게다가 선천적으로 죄인이라는 얘기는 그런 신분을 깨달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예수님의 증여의 목적은 단 하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 신분이라는 복음이다.  

 

120:4.4미가엘의 증여의 최극 영적 목적이 하느님에 대한 계시를 증진시키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증여는 우주 아버지의 뜻이자 사랑을 눈에 보이는 사실로서, 인간과 모든 우주의 지능 창조체들에게 드러내 보여주신 우주의 장엄하고도 하나의 위대한 사건이다. 하느님은 어마어마한 기적이나 경이로운 현상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 아니다. 그런 방법으로 자신의 권능을 자랑하고 스스로 영광스럽게 하려는 분이 아니다.

 

120:4.6모든 이러한 특별한 체험에 두루 그리고 그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는일상적인 방법 안에서─언제나 신성한 행동의 일반적이고 자연적이며 믿을만한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를 선택하였다.

 

사랑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아버지는 자신의 권능을 자녀에게 자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구원자로서의 권능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사랑이 넘치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댓글목록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신성한 관계는 예수님 복음의 핵심이었으며, 유란시아 계시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4번째 계시인 예수님 복음이 제대로 인류에게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되살리는 의미로서 인류가 깨달을 수 없었던 진리를 바탕으로 새롭게 계시로 주어진 것이라 믿습니다. 

인간에게 조그마한 가능성이라도 남아 있는한, 천상의 개입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나네요. 예수님과 유란시아 사이의 2 천년의 기다림은, 인간의 능력으로 영적 진리가 빛을 발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의식함은 자아가 우주와 함께, 그리고 영적 실체의 가장 높은 차원에서 집대성을 이루는 것과 동등하다. 그 어떤 가치에서도 영적 내용만은 사멸될 수 없다. 인간의 체험에서도 진실하고, 아름답고, 그리고 선한 것은 사멸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으면, 생존하는 조절자가 사랑으로 태어나고 봉사 안에서 양육된 그 실체들을 보존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주 아버지의 일부분이다. 아버지는 살아있는 사랑이며, 아버지의 이 생명은 그의 아들들 안에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영은 그의 아들의 아들들─필사 사람들─안에 있다. 모든 것이 다 설명되고 완료된 지금, 아버지 관념은 여전히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가장 높은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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