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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7e516e1b2bc1a995716ddca5e25c00_1574590 그러나 그렇더라도, 어떤 몰락한 영도 하느님의 자녀들의 마음을 침투하거나 혼을 괴롭히는 힘을 갖지 못하였다. 사탄뿐만 아니라 칼리가스티아도 하느님의 신앙적 아들들에게 손을 대거나 접근할 수 없었으며; 신앙은 죄와 사악에 대항하는 효력적인 무기이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자는 자신을 지키며, 사악한 자가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는 말은 사실이다. [53:8.8]

 

기도의 효능에 관하여, 신성한 근원들로부터의 도움과 인도를 추구하려고 하는 항상 존재하는 충동과 과학적인 의구심을 조화시키는 일이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행복과 개별적인 자아-조정과 사회적인 조화와 도덕적인 진보 그리고 영적인 달성을 위하여 신앙으로 하는 진지한 기도가 강력한 힘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91:6.3]

 

영원한 구원을 위해 오직 신앙만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마라. [93:4.8]

 

신앙이 오직 이상적인 가치들에 대한 파악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신앙이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의 증거이고 바라는 것들의 실체라고 선언하는 신약 성서의 정의에 의해 잘 묘사되고 있다. [99:5.8]

 

이성은 과학의 수단이고; 신앙은 종교의 수단이며; 논리는 철학이 시도하는 기법이다. 계시는 마음의 중재에 의한 물질과 영의 실체와 관계들에 대한 이해에서 합일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의 기법을 제공함으로써 모론시아 관점의 부재(不在)를 보정한다. 그리고 참된 계시는 결코 과학을 반(反)자연적인 것으로, 종교를 비이성적으로, 또는 철학을 비논리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101:2.2]

 

참된 종교는 실체에 이르는 통찰력이고 도덕적 의식의 신앙-자녀이며, 독단적 교리들로 이루어진 어떤 몸체에 대한 단순한 지적 찬동이 아니다. 참된 종교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영 자체가 우리의 영에게 증거 하는” 체험 속에 존재한다. 종교는 신학적인 명제들 속에 존재하지 아니하고 영적 통찰력과 혼이 가진 신뢰의 숭고함 속에 있다. [101:2.13]

 

믿음은 그것이 삶에 동기를 부여하고 삶의 양식을 실현할 때 신앙의 차원을 달성해 왔다. 가르침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믿음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신앙은 확신도 아니고 신념도 아니다. 마음의 상태는 그것이 실제적으로 삶의 양식을 지배할 때에만 신앙 차원을 달성한다. 신앙은 참된 개인적 종교 체험의 살아있는 속성이다. 사람은 참된 것(眞)을 믿고 아름다움(美)을 동경하며 선한 것(善)을 숭상할 수 있지만, 그것들을 경배하지는 않는다; 구원하는 신앙에서의 그러한 태도는, 이들 개인화되고 그리고 더욱 더 무한하게 되는 그 모든 것이신 오직 홀로이신 하느님에게 중심을 두고 있다. [101:8.1]

 

신앙은 창조적인 상상력을 속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연구에 의한 발견들을 향하여 불합리한 선입관을 보이지도 않는다. 신앙은 종교에게 생기를 불어넣으며, 그 종교인들로 하여금 용맹스럽게 황금률을 지키도록 강요한다. 신앙의 열정은 지식에 의거하며, 그것의 분투는 장엄한 평화의 전주곡이다. [101:8.4]

 

믿음은 의심을 이겨내거나 두려움을 견뎌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앙은 항상 의심을 이겨내고 승리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긍정적이고 또한 동시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보다, 진리가 실수보다, 체험이 이론보다, 영적인 실체가 시간과 공간의 고립된 사실들보다 언제든지 우월하다. 영적인 이 확실성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는, 그러한 신자들, 신앙인들이 참된 이 영적 체험의 결과로 맺힌 영의 사회적 열매 속에 있다.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 이웃을 사랑한다면,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다.” [102:6.7]

 

논리는 철학의 기법, 그것의 표현 방법이다. 참된 과학의 권역 안에서, 이성은 진실한 논리에 항상 복종할 수 있으며; 참된 종교의 권역 안에서, 신앙은 내부적 관점의 원칙으로 볼 때 항상 논리적인데, 그러한 신앙이 과학적인 접근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관점에서 볼 때 극히 근거가 없는 것으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외부로부터 안을 들여다보면, 그 우주는 물질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며; 안에서 밖으로 보면, 동일한 그 우주는 온통 영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성은 물질적인 깨달음으로부터 자라나고 신앙은 영적인 깨달음으로부터 자라나지만, 논리는 계시에 의해 강화된 철학의 중재를 통하여 안쪽으로의 관점과 바깥쪽으로의 관점 둘 모두를 확립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여 과학과 종교의 안정에 효력을 미친다. 그래서 철학의 논리와 평범하게 접촉함을 통하여 과학과 종교는 서로에 대하여 점점 더 관대하게 되고 회의(懷疑)가 점점 줄어든다. [103:7.6]

 

이성은 에너지와 물질의 물리적 세계 안에서의 그리고 그 세계와의 체험에 관한 인식의 결정을 인식하는 행동이다. 신앙은 영적인 의식(意識)─다른 인간적 증명이 불가능한 어떤 것─의 정당성에 대한 인식 활동이다. 논리는 신앙과 이성의 합일이 이루는 종합적인 진리-추구 진행이며, 필사 존재들의 구조적인 마음 자질들, 사물들과 의미들과 가치들에 대한 선천적 인식에 기초한다. [103:7.13]

 

불교는 그 기원 형태에 있어서 유란시아의 진화 역사에 두루 일어났던 하느님 없이 이루어진 최상의 종교들 중의 하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앙이 발전됨에 따라 그것은 하느님이 없는 상태로 머물지 않았다. 신앙이 없는 종교는 하나의 모순이며; 하느님이 없는 종교는 하나의 철학적인 불일치이고 지적인 모순이다. [103:9.3]

 

그러나 진리는 신앙의 실천 없이는 절대로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조금도 틀리지 않는 것은, 사람의 생각들과 지혜 그리고 윤리와 이상들이 그 자신의 신앙, 자신의 최고의 희망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참된 신앙은 심오한 반영과, 진지한 자아-비판, 그리고 타협하지 않는 도덕적 의식 위에 세워진다. 신앙은 영성화된 창조적 상상력의 영감이다. [132:3.5]

 

예수는 유대인들이 가르쳤던 소위 선행이라는 것의 회개와 왕국에 들어가기 위한 값으로 치르기를 요구하는 신앙에 의한 마음의 변화─새로 태어남─사이의 차이점을 자기 사도들에게 명백하게 설명하였다. 그는 신앙만이 아버지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한 유일한 요구 사항이라는 것을 사도들에게 가르치셨다.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그리하여 다가오는 진노로부터 피하라.”라고 그들에게 가르쳤다. 예수는 “믿음은 현존하시고, 완전하시고, 영원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들어가기 위한 열려있는 문”이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 온 선지자처럼 말씀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권한 있는 자로서 자신이 직접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수는 그들이 기적을 추구하기보다는, 그들에게 내재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영과 구원의 은총을 만족하고 확신하는 실제적이며 개인적 체험을 통하여 찾도록 그들의 마음을 바꾸려고 애쓰셨다. [138:8.8]

 

아버지는 아주 희미하게 깜박이는 신앙에도 항상 응답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그는 물질적이고 미신적인 원시인들의 감정들을 알아보신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이 너무 약하여 권위종교에 소극적인 찬성의 태도로서 지적으로 순응하는 것에 불과한 자의 그러한 정직하지만 두려움에 찬 혼으로, 자신에게 나아오려는 그러한 모든 미약한 시도까지도, 아버지는 언제나 귀중히 여기고 격려한다. 그러나 어두움에서 빛으로 불려나온 너희들에게는 전심을 다해 믿는 것이 기대된다. 너희들의 신앙은 몸, 마음 그리고 영의 통합된 태도를 다스려야 할 것이다. [155:6.17]

 

세상에는 생명의 빵을 바로 앞에 놓고도 굶주려 배고픈 혼들로 가득하다; 자기 안에 살아 계신 그 하느님을 찾다가 죽어 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신앙의 즉시 잡아 챙길 수 있는 거리에, 모든 것이 있는데도 간절한 가슴과 피곤에 지친 발로 왕국의 보물을 찾아다닌다. 신앙이 종교와 가지는 관계는 돛이 배와 가지는 관계와 같다; 그것은 힘의 증가이지, 결코 일생의 짐이 증가되는 것이 아니다. 왕국에 들어가는 자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투쟁이 있는데, 그것은 신앙의 선한 싸움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 오직 한가지의 전투가 있으니, 그것은 의심─믿지 않음─을 상대하는 것이다. [159:3.8]

 

왕국의 의가 달성되었음이 계시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는 방법을 감안한 경우이다. 신앙은 하느님의 가족에 들어가는 데 지불되어야 하는 값이다; 그러나 용서는 너희의 신앙을 입장료로 받은 하느님의 행동이다. 그리고 왕국을 믿는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것은, 명확하고도 실제적인 체험을 내포하며, 아래와 같은 네 가지 단계, 내적인 정의(正義)의 왕국 단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170:3.3]

 

“이와 똑같이 각각의 믿는 자는 피할 수 없고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자연적 죽음을 예상하면서 삶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는 자들 각 세대는 사람의 아들의 재림을 기대하면서 자신의 일을 경영해야 한다. 너희가 일단 신앙으로 너희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서 세우고 나면, 다른 어떤 것도 생존의 확실성에 대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라! 생존하는 이 신앙은 살아있는 신앙이며, 그것은 인간의 가슴속에 처음 임하였던 그 신성한 영의 결실들을 점점 더 명백하게 나타낸다. 하늘왕국 안에서 아들관계를 한 번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육신에서의 하느님 아들의 진보적인 영적 열매-맺도록 행하여야 한다는 진리를 알면서도 끈질기게 거절하는 너희를 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땅에서 아버지의 일에 나와 함께 하였던 너희들이 인류를 위해 아버지께서 제공한 그 길을 사랑하지 않고 있음을 발견한다면, 너희가 지금이라도 왕국을 버리게 될지 모른다. [176:3.3]

 

나는 너희에게, 사람들 속에서 너희가 해야 할 임무는 왕국 복음─하느님의 아버지신분의 실체와 사람의 아들관계의 진리─을 전파하는 것임을 기억하라고 충고한다. 단지 구원하는 복음의 일부분만이 아니라. 기쁜 소식의 전체 진리를 전파해라. 너희가 전해야 할 내용은 나의 부활 체험에 의해서 변경되지 않는다. 신앙으로 인하여 하느님과의 아들관계가 된다는 것은 여전히 왕국 복음의 구원의 진리이다. 너희는 하느님의 사랑과 사람의 봉사를 전파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세상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은: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들이고, 그들은 신앙을 통하여 이 고양하는 진리를 실제로 깨달을 수 있으며, 일상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나의 증여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 하는데 도움을 주겠지만, 만일 그들이 영원한 아버지의 살아있는 영의 아들들이라는 구원의 진리를 신앙으로 파악하는 일에 개인적으로 실패한다면, 그러한 지식만으로는 충분한 것이 못된다. 왕국 복음은 아버지의 사랑과 세상에서 그의 자녀들의 봉사에 관련된 것이다. [19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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