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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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삶

 

 

a07e516e1b2bc1a995716ddca5e25c00_1574588 진리의 영이 모든 육신에게 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이 영은 기능과 힘의 면에서 증여 아들의 임무 전체와 본질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사람의 개인적 수용에 의해 거의 전적으로 제한된다. 성령은 인간 태도로부터 부분적으로 독립되며 사람의 의지의 결정과 협동에 의해 부분적으로 제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사명활동은 신성한 인도에 더욱 충분히 복종하는 그 필사자들의 내적(內的) 삶의 성화(聖化)와 영성화에 점점 더 효력을 나타내게 된다. [34:5.5]

 

종교가 전적으로 개인적인 영적 체험─하느님을 아버지로 아는 것─인 반면 이 체험의 필연적 결과─사람을 형제로 아는 것─는 자아를 조절하여 다른 자아들에게 맞추게 하며, 그것은 종교적 삶의 사회적 또는 집단적인 측면을 포함한다. 종교는 먼저 내적 또는 개인적 조절이며, 그 다음에는 사회적 봉사 또는 집단적 조절의 문제가 된다. 사람에게 사교성이 있다는 사실은 종교적 집단들이 실재하도록 필연적으로 결정한다. 이러한 종교 집단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하는 것은 지능적 지도력에 의해 매우 많이 영향을 받는다. 원시적인 공동체에 있어서 종교적 집단은 경제적 또는 정치적 집단들과 항상 매우 다르지는 않았다. 종교는 항상 도덕을 보존하고 사회를 안정화시키는 존재였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현대 사회학자들과 인본주의자들의 반대되는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함없는 사실이다. [99:5.1]

 

하나의 관념은 행동을 위한 이론적 계획에 지나지 않으며, 반면에 적극적 결정은 행동의 정당화된 계획이다. 고정관념은 정당화 없이 승인되어진 행동의 계획이다. 종교의 개인적 철학을 세우게 하는 물질들은 개별존재의 내적 체험과 환경적 체험 둘 모두로부터 도출된다. 사회적 지위, 경제적 조건, 교육적 기회, 도덕적 경향, 제도적 영향, 정치적 발달, 인종적 경향, 그리고 어떤 사람의 시대와 장소에 따른 종교적 가르침은 모두 종교의 개인적 철학을 조성하는 요소들이 된다. 심지어는 선천적 기질과 지적 소질도 종교적 철학의 원형틀을 두드러지게 결정짓는다. 직업, 결혼 그리고 혈족 관계는 모두 삶에서의 사람의 개인적 기준의 진화에 영향을 준다. [101:7.1]

 

혼과 내주하는 영의 개념은 유란시아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행성의 다양한 믿음 체계들 속에서 자주 모습을 드러내어 왔다. 동양의 많은 신앙과 서양의 어떤 신앙들은 사람은 유전성에서 인간일 뿐만 아니라 유전적으로 신성하다는 것을 이해해왔다. 신(神)의 외적인 전재(全在)에 더하여 내적인 현존의 느낌은 유란시아의 많은 종교들의 한 부분을 오랫동안 형성하여 왔다. 사람들은 일시적인 삶의 짧은 기간을 넘어서서 지속하도록 운명되어진 생사에 관한 어떤 것, 인간 본성 안에 자라나고 있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오랫동안 믿어 왔다. [111:0.2]

 

참된 문명의 진보들은 모두 인류의 이 내적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참으로 창조적인 것은 오직 내적인 삶뿐이다. 문명은 어떤 세대의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흥미와 에너지를 감각적 또는 외적 세계의 물질가치적인 추구에 쏟을 때에는 거의 진보하지 못한다. [111:4.3]

 

인간 체험의 영적 영역에 부딪침에 따른. 오로지 초의식적 마음의 높은 차원에서만, 너희는 보다 낫고 보다 영구적인 문명의 건설에 기여할 효과적인 주(主) 원형틀과 연합하여, 저들 높은 개념들을 발견할 수 있다. 개인성은 선천적으로 창조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처럼 오직 개별존재의 내적 삶 속에서만 기능한다. [111:4.5]

 

행복과 즐거움은 내적인 삶에서 기인한다. 너희는 너희 혼자서는 진정한 즐거움을 체험할 수 없다. 자기 혼자 지내는 삶은 행복에 치명적이다. 가족이나 국가들조차도 그들이 그것을 남들과 나눌 때 삶을 더욱 즐길 수 있다. [111:4.7]

 

사람의 이 내적 삶이 참으로 창조적이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는 이 창조성이 자연발생적이고 전혀 우연한 것이 되게 하든지 아니면 조정되고, 지시되고, 건설적인 것으로 되게 하던지 그에 따른 선택의 책임이 주어져 있다. 그것이 기능하는 무대 위에 선입관, 미움, 두려움, 분노, 복수심, 편협한 신앙들로이미 가득 차 있다면 창조적인 상상력이 어떻게 훌륭한 자녀들을 출산할 수 있겠는가? [111:4.9]

 

관념은 외부 세계의 자극 안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이상은 오직 내적 세계의 창조적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다. 오늘날 세계의 국가들은 많은 관념을 소유한 사람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지만, 그들은 이상에 있어서는 매우 가난하다. 그것이 바로 가난, 이혼, 전쟁, 종족적 증오에 대한 설명이다. [111:4.10]

 

이것이 문제이다: 만일 자유의지 사람이 내적 사람 속에 창조성의 힘을 자질로서 부여받았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의지 창조성이 자유의지 파괴성의 가능성도 포옹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창조성이 파괴성으로 바뀔 때, 너희들은 죄와 악─억압, 전쟁, 그리고 파괴─의 참상과 직면한다. 악은 분열과 궁극적 파괴의 방향으로 기울어진 창조성에서의 편파성이다. 모든 다툼은 그것이 내적 삶의 창조적 기능을 억제한다는 점에서악하다─그것은 개인성 안에서 일어나는 내란의 일종(一種)이다 [111:4.11]

 

내적 창조성은 개인성 집대성과 자아신분 통합을 통하여 성격이 고귀하게 되도록 기여한다. 이것이 언제까지나 참이다.: 과거는 바뀔 수 없고; 오직 내적 자아의 현재 창조성의 사명활동에 의하여 미래만이 바뀔 수 있다. [111:4.12]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내적인 삶을 하느님─내적 의미-가치가 가능한 그러한 창조체의 삶을 만든 바로 그 하느님─과 기꺼이 나누겠다는 창조체의 표현에 불과하다. 나눈다는 것은 하느님 같은─신성한─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영원 아들 그리고 무한 영과 나누시며, 그들은 다시, 모든 것들을 신성한 아들들과 우주의 영 딸들과 차례로 나눈다. [111:5.1]

 

물질적 지식의 확대는 관념들의 의미와 이상들의 가치에 대한, 더욱 큰 지적인올바른 이해를 마련해준다. 인간 존재는 그의 내적 체험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는 진리에 대한 그의 개인적 발견을 일상생활의 냉혹한 실질적 요구들에 적용하기 위하여 사실들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필요하다. [111:6.7]

 

어느 정도까지는, 물질적 육체-형태의 출현이 개인성 정체성의 성격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물리적인 육체는 제한된 정도 내에서 개인성의 타고난 본성의 어떤 것을 반영한다. 모론시아 양식은 더욱 더 그러하다. 육체적인 삶에 있어서, 필사자들은 내부적으로는 추할지라도 외부적으로는 아름다울 수도 있으나; 모론시아 삶에서, 그리고 계속적으로 그것의 더 높은 차원들에서, 개인성 형태는 내적 개인의 본질에 따라서 직접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영적인 차원에 있어서는 외부적 형태와 내부 본성이 완벽한 정체화달성에 접근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점점 높아지는 영적 차원에 따라 점점 더 완전하게 자라간다. [112:6.3]

 

멜기세덱의 선교사들은 어디를 가든지 유일신에 대한 가르침을 전파하였다. 일신교를 숭상하는 이러한 교리의 대부분은, 이전에 있었던 다른 개념들과 함께, 힌두교의 후대 교훈들 속에 포함되었다. 예수와 가니드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발췌하였다: [131:4.4]

 

2. 정치적 태도. 예수는 사도들에게 그 당시 로마정부와 유대민족 사이에 존재하던 긴장된 관계에 대해 말할 때 신중을 기할 것을 경고하였으며; 그들이 이러한 어려운 관계에 어떤 식으로든지 개입하는 것을 금하였다. 그는 언제나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고 말씀하면서, 자기를 해치려는 이들의 정치적 함정을 항상 조심스럽게 피하였다. 그는 새로운 구원의 길을 확립하는 자신의 사명에서 옆길로 빠지기를 원치 않았으며; 그 일 이외의 다른 어떤 일에도 자신의 주의를 돌리기를 거부하였다. 자신의 개인적 일생에 서는, 모든 법과 규칙을 항상 준수했으며, 공개적인 가르침에서는 시민적, 사회적, 경제적 영역을 무시하였다. 그는 자신이 오로지 사람들의 내면적이고 개인적 영적 일생의 기본원리들에만 관심을 둔다고 세 사도들에게 말씀하였다. [140:8.9]

 

“너희 동료를 용서하려는 기꺼운 마음이 불가능하거나 혹은 무능력함은 너희의 미숙함을 가늠하고, 그리고 어른다운 동정심, 납득 그리고 사랑을 달성하는 데에 대한 너희의 실패를 가늠하는 척도이다. 너희 자녀와 너희 동료들의 참된 소망과 내적 본성을 알지 못하는 너희의 무지함에 정비례하여, 너희는 그만큼 원한을 품고 그리고 앙갚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란 생명의 신성하고 내적인 충동이 밖으로 나와 일하는 것이다. 그것은 납득함에 기초를 두며, 이기심이 없는 봉사로서 양육되고, 지혜안에서 완전하게 된다.” [174:1.5]

 

오늘날의 물질주의적 사회학자들은 공동체를 조사하고, 곧바로 그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그리고 그가 사람들을 발견했던 그대로 사람을 내버려둔다. 1,900년 전에, 배움이 없는 갈릴리인은, 사람의 내적 체험에 대한 영적 기여로서, 자신의 생명을 주시고 있는 예수를 조사하였고, 그러고 나서는 밖으로 나갔고, 그리고 로마제국 전체를 뒤집어버렸었다. [19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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