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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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법

 

 

a07e516e1b2bc1a995716ddca5e25c00_1574588 너희는 너희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함으로써 너희들의 짐을 가중시키고 성공의 가능성을 줄인다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이다. 너희 지위의 구체─이 세상 또는 다음 세상─의 일보다 더 앞설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매우 중요한 것은 더 높은 다음 구체를 위해 준비하는 일이지만, 너희가 실제적으로 살고 있는 세계에서의 일과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일은 중요하지만 한편, 자아는 그렇지 않다. 네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낌으로 느낄 때는, 너는 자기 존엄성의 마멸과 파헤침에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일을 할 에너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자아-중요함은 미성숙한 창조체들을 고갈시킨다, 일-중요함은 그렇지 않다; 고갈되어 가는 것은 자아 요소이지, 성취하려는 노력은 아니다. 너희는 너희가 만일 자아-중요함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중요한 일을 할 수 있으며; 만일 너희가 너희 자신을 탈피한다면 여러 가지 일들을 한 가지처럼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성은 평온을 주고; 단조로움은 지치게 하고 고갈시킨다. 매일 매일은 똑같이─올바른 삶이거나 또는 나머지 선택인 죽음이다. [48:6.26]

 

필사자의 두려움이 그 뒤에 따라오는 원시적 사람들의 모든 미신과 종교를, 환상과 무지에 대한 이러한 주요 전제(前提) 속으로 채워 넣었다. 이것은 계시 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사람의 유일한 종교였으며, 오늘날에도 세계의 많은 종족들이 이러한 미숙한 진화적 종교만을 신봉하고 있다. [86:6.3]

 

가난은 육신의 고행에 대한 예식의 일부분이었으며, 불행하게도, 많은 종교들 특히 그리스도교의 문헌들과 가르침들 속에 삽입되었다. 참회는 고행이라는 바보스러운 흔한 예식의 부정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미개인들에게 자아-조정을 가르쳤으며, 그것은 사회적 진화에 있어서 상당한 발전이었다. 자아-부정과 자아-조정은 초기의 진화 종교로부터 얻은 두 가지의 가장 큰 사회적 소득이었다. 자아-조정은 새로운 삶의 철학을 사람에게 제공하였고; 이기적 만족이라는 분자(分子)를 증대시키려고 항상 애쓰는 대신에 개인적인 욕구들이라는 분모(分母)를 낮춤으로써 삶이라는 분수(分數)를 증대시키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89:3.3]

 

삶에 있어서 큰 문제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삶의 성향들을 신비 감시자의 신성한 현존으로 개시되는 영적 충동의 요구들에 맞추는 일이다. 우주 또는 초우주 생애에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반면에, 유란시아에서의 너희들의 현재 삶 속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 주인을 강제적으로 섬겨야만 한다. 그가 오직하나의 주인에게 영적으로 충성하는 동안, 그는 계속적인 인간의 임시적 타협 기술에 반드시 숙달되어야만 하며, 바로 이것 때문에 그토록 많은 망설임과 실패가 진화적 갈등의 긴장감에 피로를 증대시키고 굴복하게 하는 이유이다. [109:5.4]

 

예수는 빠른 속도로 한 사람의 어른, 청년이 아닌 어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의무를 잘 이행하는 것을 배웠다. 낙심되는 경우를 당하였을 때 어떻게 계속 진행해 나갈 수 있는지를 알았다. 자신이 세운 계획이 어긋나고 목적이 현실적으로 무산되었을 경우에도 용기 있게 견디어 나갈 수 있었다. 불의를 당하였을 때에도 공정하고 의로울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이 땅에서의 실재의 실질적인 요구들에 자신의 영적 삶의 이상들을, 어떻게 적응시킬 것인지를 배워 나갔다. 그는 당장 시급한 필요를 달성하기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하면서, 동시에 보다 높고 먼 장래의 이상주의적인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계획하는 방법도 계속 배웠다. 그는 인간 상황의 평범한 요구들에게 자신의 큰 뜻을 맞추어 가는 기법을 꾸준히 연마하고 있었다. 그는 영적 충동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물질적인 성취에 대한 방향을 바꾸는 기능구조를 거의 완벽하게 터득하였다. 그는 이 세상에서의 실재를 영위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하늘의 일생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서서히 배워갔다. 그의 육신적인 가족에 속한 아이들을 보살피고 지도하는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동안,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궁극적인 안내에 더욱 더 의존하였다. 그는 실패의 문턱으로부터 기술적으로 승리를 이끌어 내는 데에 숙달되게 되었으며; 시간의 곤경으로부터 영원한 세계의 승리로 변환하는 방법을 계속 배워나갔다. [127:6.12]

 

인간의 생명은 세 가지의 큰 본능적 욕구─충동, 욕망, 애착─를 담고 있다. 강인한 성격, 당당한 개인성은 생명의 본능적 충동을 삶에서의 사회적 기술로 전향시킴으로서, 현재의 욕망을 영속적인 달성이 가능한 더욱 높은 소망들로 변환시킴으로서만 오직 얻어지며. 한편으로는 실재의 평범한 애착을 자신의 전통적이고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미(未)탐험 관념과 미(未)개척 이상에서의 더욱 높은 영역으로 옮겨져야만 얻어지는 것이다. [160:1.2]

 

문명이 더욱 복잡해질수록 삶의 기술은 더욱 어려워지게 될 것이다. 사회적인 관습의 변화가 더욱 빨라질수록 성격 개발의 과업도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만일 진보가 계속된다면 매 열 세대마다 생활의 새로운 기술은 배워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재능이 매우 발달하여 사회의 복잡성을 더욱 조속히 가중시킨다면, 삶의 기술은 다시 습득해야 하는 기간은 더욱 짧아져서 매 세대마다 그리해야 될지도 모른다. 만약에 삶의 기술에서의 진보가 실재(實在)의 기법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게 되면, 인간성은 다시 단순한 삶의 충동으로 조속히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성은 미성숙의 상태에 머무를 것이며; 사회는 충만한 성숙으로 자라가지 못할 것이다. [160:1.3]

 

동물들도 생명의 충동에 훌륭하게 반응하지만,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물적인 충동으로 사는 체험밖에 하지 못할지라도, 오직 사람만이 삶의 예술을 달성할 수 있다. 동물들은 다만 맹목적이며 본능적인 충동만을 알 뿐이다; 사람은 능히 선천적으로 작용하는 이러한 충동을 초월할 수 있다. 사람은 지능적 예술의 높은 경지, 심지어는 초월적 기쁨과 영적 황홀의 경지에서 살고자 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동물들은 일생의 목적에 대하여 질문하지 못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걱정이라는 것이 없으며, 자살하지도 않는다. 사람들 가운데에서의 자살은 그러한 존재들이 실재에서의 순전히 동물단계에서 솟아 나왔고, 그리고 좀더 나아가 그러한 인간존재의 탐구하려는 노력이, 필사 체험의 예술적 차원을 달성하는 데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동물들은 삶의 의미를 모르지만; 인간은 의미를 이해하고 가치를 인지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미들에 대한 의미도 인식한다.─인간은 통찰력을 자아-의식한다. [160:1.5]

 

성공적인 삶이란 공통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신뢰할만한 기법들을 습득하는 예술에 불과하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단계는 그 어려움을 알아내고, 그 문제를 분리시키며, 정직하게 그 본질과 비중을 아는 것이다. 가장 큰 오류는, 일생의 문제들이 우리의 깊은 두려움을 자극할 때,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어려움들을 시인하는 것이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해 왔던 자부심을 축소시키거나, 질투심을 용납하거나, 또는 뿌리 깊은 편견을 버리는 결과를 수반할 때, 보통의 사람들은 안전한 옛 환상과 오래-간직해 온 안심을 주는 잘못된 감정에 매달리기를 더 좋아한다. 오직 용감한 사람만이 진지하고도 논리적인 마음이 발견한 것을 솔직하게 수용하고 두려움 없이 마주한다. [160:1.7]

 

어떤 문제에 대한 현명하고 효력적인 해결은 마음이, 해결을 위해서 문제가 저절로 제시하도록 만들어 가는 실제적 요소들을 냉정하게 조사하는 것을 방해할지도 모를, 편견, 흥분, 그리고 모든 그 밖의 순전히 개인적 선입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것을 요구한다. 일생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는 용기와 성실성이 필요하다. 오직 정직하고 용감한 개별존재만이, 당황하게 하고 혼돈을 일으키는 인생의 미로를 통과하면서, 두려움 없는 마음의 논리가 인도하는 곳으로 용감하게 따라갈 수 있다. 마음과 혼의 이러한 해탈은 종교적 열정과 접해있는 지능적 열심의 추진력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어려운 물질적 문제들과 다양한 지능적 위험들이 괴롭히기 마련인 어떤 목표를 추구하는 데에서 사람을 기운차게 노력하도록 하려면 위대한 이상의 애착이 필요하다. [160:1.8]

 

너희들이 일생의 어려운 환경에 대처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무장되어 있다 할지라도, 너희들로 하여금 너희 동료들로 부터 가슴에서 우러난 지지와 협조를 얻게 만들, 그 마음의 지혜와 개인성의 매력으로 갖추지 않으면 너희들은 성공을 거의 기대할 수 없다. 동료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사람들을 어떻게 설복시킬 수 있는지를 배우지 못한다면 현실적이든지 종교적이든지 아무 일에도 너희들이 크게 성공할 희망은 없다. 너희들은 다만 재치와 관대함을 가져야만 한다. [160:1.9]

 

그러나 나는 너희들의 주(主)이신 예수로부터 가장 훌륭한 문제 해결 방법을 배웠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예수가 늘 행하고 또 너희들에게도 엄중하게 가르치셨던 것으로, 경건한 묵상을 위하여 고립되는 것이다. 자주 혼자 떠나셔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교제한 예수의 습관 속에서 그 기법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일상적인 삶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힘과 지혜를 모으는 것뿐만 아니라, 도덕적이며 영적 성질의 보다 높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에너지를 사용하는 기술이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정확하다 할지라도 본성적으로 타고난 개인성 손상을 보충하지는 않으며, 참된 정의에 대한 갈망의 부재(不在)를 보상하지도 않는다. [160:1.10]

 

너희들의 주(主)의 경배하는 습관은 마음이 새로워지도록 긴장을 풀어주며; 혼이 고무되도록 빛을 비추며; 자기 문제들에 과감하게 대처하도록 하는 용기를 주며; 쇠약하게 하는 두려움을 없애 주는 자아-납득을 가져오며; 사람이 감히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확신으로 그를 무장시켜 주는, 신성과의 결합을 의식하게 해 준다. 편안한 경배 또는 주(主)가 한 것과 같은 영적 교제는 긴장을 해소시키며, 갈등을 없애 주고, 개인성의 모든 자원들을 대단히 증대시켜 준다. 그리고 왕국 복음에 덧붙여진 이 모든 원리는 내가 이해하는 것과 같은 새 종교를 구성하고 있다. [160:1.12]

 

선입견은 혼이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눈을 가린다, 그리고 선입견은 자기 동료들의 모든 것이-포옹되고 모든 것이-포함되는 이유를 찬미하는 일에 혼을 진지하게 헌신해야만 없앨 수 있다. 선입견은 이기주의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선입견은 오직 자아-본위를 포기함으로서 제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아보다 클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성보다 큰 이유─하느님 추구, 신성의 달성─에 봉사하는 만족을 탐구하는 것으로 대치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개인성이 성숙하였다는 증거는 인간 욕구를 변환시켜서 가장 높고 가장 신성하게 실재하는 그 가치들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추구하는데 있다. [160:1.13]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 속에서, 사회 계층이 진화하는 중에, 확립되고 고정된 운명의 목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인성의 안정성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무한한 달성의 영원한 목적지로서 발견하고 터득하였던 사람들에 의해서만 체험될 수 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목적지를 유한한 시간으로부터 영원으로, 인간의 것으로부터 신성한 것으로 옮기는 데에는 그의 개심, 전환, 다시 태어남이 있어야 한다; 신성한 영의 자녀로 다시 창조되어야만 한다; 하늘의 왕국의 형제신분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이 개념들이 부족한 모든 철학들과 종교들은 아직 미성숙된 상태이다. 내가 가르치는 철학은 너희들이 전파하는, 장차 올 모든 세대들의 이상(理想), 그 성숙된 새로운 종교를 대표하는, 복음과 연결된다. 이러한 설명이 참된 것은 우리의 이상이 최종적이며 틀림없으며, 영원하며, 우주적이며, 절대적이며, 무한하기 때문이다. [160:1.14]

 

인간들 서로가 상징적인 교통을 하기 때문에 사회적 집단들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적으로 예정된 일이었다. 모든 사회적 집단 가운데 가장 효력적인 것은 가족인데, 그 중에도 특별히 두 부모들이다. 인간 애정은 이 물질적 연합들을 함께 묶어주는 영적 끈이다. 그러한 효력적인 관계는, 진정한 우정의 헌신에서 많이 설명되는 바와 같이, 같은 성(性)의 두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능하다. [160:2.4]

 

새로운 이 왕국 복음은 보다 높은 삶을 위하여 새롭고 풍부한 동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삶의 예술에 크게 기여한다. 그것은 새롭고 고귀한 운명의 목적지, 최극 일생의 목적을 제공한다. 그리고 실재의 영원하고 신성한 목표에 대한 이 새로운 개념들은 그 스스로가, 사람의 보다 높은 본성 속에 있는 바로 그 최선이 반응하는 것을 유발하는, 초월적인 자극이다. 지능적 생각의 모든 산꼭대기에는 마음을 위한 휴양, 혼을 위한 힘, 영을 위한 교제가 있다. 높은 삶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은 낮은 차원의 생각─염려, 질투, 시기, 원한, 성숙되지 못한 개인성의 자존심─으로 인한 물질적 고통들을 초월할 수 있다. 이처럼 높이 상승하는 혼들은 삶에 있어서의 사소한 일들의 수많은 대립 충돌로부터 자신을 구해주며, 그리하여 영 개념과 하늘 교통의 높은 흐름을 의식하는 것을 달성하려고 자유롭게 된다. 그러나 쉽고 과도기적인 달성을 추구하려는 유혹으로부터 일생의 목적이 세심하게 보호되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광신적인 위험한 조짐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160:3.5]

 

그러나 만일 너희들이 실패를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일생은 실재에서의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실패에는 고귀한 혼이 항상 습득하는 어떤 기법이 있다; 너희는 반드시 활기차게 잃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너희는 실망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실패를 인정하는 것에 주저하지 말라. 속이는 미소와 낙천적인 태도로 애써 실패를 감추려 하지 말라. 성공을 주장하는 소리는 항상 듣기 좋지만, 마지막 결과는 끔찍하다. 그러한 기법은 실체가 아닌 세계를 꾸며내고, 궁극적으로 환멸을 주는 필연적인 파멸로 직접 이끌어 간다. [16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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