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왜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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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그네 작성일1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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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실체를 믿는 것은 체험과 깨달음이기 때문에 증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 증거는 더욱 찾기 힘듭니다. 모른다고 해서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요.

 

눈에 보이면 분명히 존재합니다. 냄새나 귀를 통하여, 아니면 피부를 통하여 느낄 수 있어도 존재를 믿습니다. 그러나 감각으로 느끼지 못해도, 존재를 믿는 경우는 더욱 많습니다. 그것은 경험과 논리적 추론과 지적 판단에서 나오는 믿음이지요. 이와는 달리 마음으로 확신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설명될 수 없는 체험으로 믿게되는 경우도 있고요.

 

우선, 감각으로 확인되는 실체들은 물리적 존재입니다. 감각에 의존하여 존재를 판단하는 것은 모든 동물의 본성이며 동물적 판단입니다. 인간을 물리적 감각으로만 그 존재를 인식하고 다루는 것은 사람을 물건으로 여기는 인륜을 거역하는 죄가 될 수도 있지요. 감각으로만 상대를 인정하는 것은 저열한 삶입니다.

그 다음, 지적 능력으로 확인되는 지적 존재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세종대왕의 존재는 감각기관으로 느낄 수 없지만, 누구도 의심하지 않지요. 족보를 아는 사람은 자신의 4대조 할아버지의 이름을 보고, 그 존재를 믿습니다. 지적 믿음입니다. 만난 적도, 아무 느낌도 없다고해서 역대 조상을 의심할 수 없겠지요. 기록과 증언과 이야기로 그 분들의 실체를 확신합니다. 이처럼 지적 믿음은 알기만 한다면, 모두 실체라고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모르면 믿을 수 없지요.

 

그 다음으로는, 마음으로 증명되는 존재들이 있는데, 이들이 살아있는 존재들이며 실제로 우리의 삶을 힘들게도 하고 행복하게도 하는 참된 실체입니다. 실제로 감각기관으로 느낄 수도 없고 아무런 지식도 없지만, 마음에 어떤 실질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그 상대는 분명히 살아있는 실체입니다. 이것이 마음에서 믿음으로 증명되는 것이며 지혜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마음의 교감에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실체들은 서로 마음을 주고 받는 통로가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그 실체가 증명되지 않습니다.

4대조 할아버지는 지적 존재이지만, 친할아버지는 이 세상에 없어도 마음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참 존재입니다. 무엇이든지 그것이 마음 속에 살아있으면,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특징이 있지요. 세상을 떠난 사람도 마음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다면, 진정한 실체임이 증명되는 것이지요. 물질존재나 지적존재는 인간에게 고통이나 행복을 주는 주인공이 될 수 없지만, 마음에서 증명되는 존재들은 삶에 영향을 끼치는 주역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생사에 관계없이 여전히 마음으로 확신할 수 있는 진정한 실체들이지요.

 

만약 인간에게 무한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러한 하느님이 지금 이 순간 실재하고 있다면, 물질 존재나 지적 존재일 수가 없습니다. 틀림없이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고 마음으로 확인될 수 있는 존재일 것입니다.

 

사실 자기 존재를 아들의 감각 기관으로 믿게 하려고, 몸으로 나서는 아버지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자식에게 자신을 설명하며 지식으로 아버지임을 증명하는 아버지도 없습니다. 하찮은 동물도 자식에게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훨씬 초월하는 분이, 자기 자신을 피조물에게 증명하려고 알몸으로 나서거나, 지적 수단을 준비하거나, 강제로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이루어질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기대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능력으로 확인하기에는 너무나 위대하고 높으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빛으로 몸을 두르고 계시며 그 빛은 무한히 신성하고 강력하여 인간의 앞에 나설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자신을 가리면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며, 그에 대한 믿을만한 증거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하늘도 무심하다'는 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에는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질서와 순리가 있음을 믿는 증거입니다. 물질이나 지식은 몸과 머리에 반응을 일으키지만, 사람의 마음속에 즉시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오직 마음 뿐입니다. 달이 움직이면 바닷물이 움직이고, 바닷물이 1도 만 올라가도 생태계가 변합니다. 우주가 조금만 흔들려도 이 세상은 존재할 수 없지요. 우주의 절묘한 운행과 질서가 우연히 이루어졌고, 생명체도 우연히 이루어졌다고 믿기에는 그 정교하고 경이로움이나 무한한 잠재력을 생각할 때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늘에 어떤 질서나 도리가 있다고 마음에 반응하는 것은 그것은 하늘에 어떤 마음 현상이 있다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주 마음은 우주적 실체가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연다면 서로 마음을 주고받을 대상이, 우주 어딘가에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만든 것은 아니건만 시대나 민족을 초월하여 인간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할 질서와 순리가 있다면 하느님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존재에 회의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겠지요.

 

마음으로 교감하지 못해도,  특별한 삶의 체험이나 계기를 통하여 하느님의 존재를 확신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체험은 모든 설명을 초월합니다.  물리적 체험도 말로 설명될 수 없는데, 영적 체험은 더더욱 설명될 수 없습니다. 체험은 감각이나 지식이나 지혜도 초월합니다.  물은 불에 잘 타는 산소와 수소로 구성되어 있지만, 물이 갈증을 없애주고 불을 끌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추론이나 지혜로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체험만으로 증명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과학적인 방법이나 논리로 설명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높은 지식이나 순수 이성을 동원해도 그 실체는 증명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생생하게 실체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마음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차츰차츰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과학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느님의 존재는 과학에서 너무나 완벽하게 증명됩니다. 우주와 생명과 물질 현상의 근원에 들어갈수록 더욱 더 확실하게 증명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철학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하느님이 단순한 가정이 아닌 실체라는 사실은 철학에서 너무나 완벽하게 증명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알고자 믿고자 종교를 찾는 모든 개개인의 마음속에서 믿음을 통하여 그 실체가 증명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적 지식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느님의 실체는 마음을 움직이는 하느님의 실체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현세에서 개인으로 존재하며 나타날 수 있었던 개인성이 새롭고도 영원한 삶으로 다시 이어갈 수 있다는 소망을 이루어주는 것입니다.

 

개인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실체가 살아 있다고 느끼는데,  무슨 근거로 그것이 아니라고 반박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존재는 사실이며 그것은 체험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은 마음을 여는 자에게만 가능합니다.

(이 글은 유란시아 본문 [글 1편 6.7] [글 1편 2.3] [글 1편 2.4]에 함축되어 있는 내용의 일부를, 알기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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