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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라 기독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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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너킥 작성일1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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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성직자나 이를 믿는 교인이나, 성경과 약간 다른 과학적 사실이나 증거가 나올 때마다, 예민하게 반응한다.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과학적 사실에도 이렇게 반응하는 분들이라서, 사실로 입증할 수도 없는, 색다른 교리나 종교적 주장이 나올때, 험하게 대응하며 비난과 험악한 말을 서슴지 않는 것은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는 일이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이단 주장을 그냥 그러려니 놔두면, 자신들의 하나님이 망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런 주장들 때문에, 그들이 기대하는 천국 문이 닫히기라도 한단 말일까? 그들이 만약 진정으로 성경의 말이 일획도 틀리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하나님 자신이 의인을 구하며 악인을 멸하리라는 진리를 확신해야만 마땅하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악인들이 날뛰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해서, 자신들이 대신 나서서 날뛰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쉬지도 않고 졸지도 않는다는 하나님은 대체 어디로 가신 것이란 말인가.

 

변명이나 반박은 담겨진 진리에 반비례 한다는 만고의 진리는 유란시아 책에서도 다시 강조하지만, 자신들의 종교와 대비되는 일에 극도로 예민해진다는 것은, 그 신앙이 극도로 허약하다는 반증이다. 기독교를 옹호하고 성경을 지키려는 맹렬한 투쟁심은 참된 믿음에 반비례 하는 법이다.

 

일부 어리석은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굳건히 지키면서 고수하는 것을 무슨 대단한 진리의 승리이며 하나님에게 칭찬과 은혜를 받는 영적 성취로 착각한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그런 행동을 순교라는 생각까지 한다. 아주 심각하다. 순교는 진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전파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진리를 딱딱하게 재정비하여 죽기 살기로 방어하는 행동을 용감한 행동으로 당당하게 으스대기도 한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세속의 전술을, 진리를 전하는 영적 투쟁에서 써먹는 모습이다. 예수님의 희생이, 사랑으로 진리를 전파하고 이웃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늘 외우고 외치면서도, 막상 행동은 정반대로 한다. 이단을 공격하여 승리의 월계관을 하나님께 드리자며,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을 서로가 서로를 부추기며 떼를 지어서 하기도 한다.

 

이웃을 사랑하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몸을 흔들어가며 외치면서도, 이웃으로 눈을 돌릴 때는 순식간에 도끼눈이 된다. 하나님은 이단을 가차 없이 응징하는 용사를 원하시며, 그로써 구원하신다고 믿으려 한다. 예수님은 이단에게 항복한 셈이니, 그런 논리라면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구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는 말인지. 앞뒤가 안 맞는 믿음과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다. 정신이 없다.

 

이단을 몰아내려는 행동이 어처구니없다 해도, 타 종교나 이단에서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행동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참된 진리를 깨우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그들은 불쌍하다. 여러 사정을 이해하고 안타깝게 여겨야만 한다. 영적 분노에 휩싸이는 모습도 차분하게 받아 주어야 한다. 맞대응으로 방어할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참된 진리의 길로 들어서도록 참된 진리로 자극을 주어야만 한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진리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태어났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진리의 영을 모든 사람에게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성경 진리를 가르치고 알려야 할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진리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서, 순진무구한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무조건 따르도록 두려움을 습득시키고, 그것이 전승이 되어 이어져 왔다면, 이들은 오히려 희생자들이다. 자신들이 두려움의 진리로 교육을 받고 무조건적인 믿음을 훈습하였으니, 신자들에게도 그렇게 두려움을 주입시킬 수밖에 없다. 악습이 되풀이되는 셈이다.

 

성경을 지키라고 교인에게 겁주고 경각심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많지만, 첨단과학 시대에서 컴퓨터에 의존하지 않고는 생활할 수 없는 요즘까지도, 디지털 바코드와 특정 숫자를 무슨 짐승과 악마의 상징으로 공포심을 심어주는 것도 그러한 것중의 하나이다. 젊은이들에겐 난감한 일일 것이다.

 

그 예에 666 이라는 숫자가 있다. 성경에 악마의 표시라고 나와 있어서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그런 숫자가 눈에 띄면 움찔하거나 심하면 질식한다. 666 에 반응하지 않으면, 성경을 모르는 무신론자로 여기고, 특별히 좋아하면 악마교에 속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유란시아 책을 읽고, 지적 생명체가 사는 수많은 행성 중에서, 우리가 사는 지구의 행성 번호가 606 번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행성영주가 루시퍼 반란에 적극 동참하여, 영적 나라에서 상당한 악명을 떨친 적이 있어서, 그런 사실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숫자 자체가 무슨 저주나 악마의 상징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을 믿는 사람은 아마도 666을 악마의 상징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고대 문서인 옥시린쿠스 파피루스(Oxyrhynchus papyri)를 판독한 최근의 캐나다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원래 성경에 기록된 악마의 숫자는 666이 아니라, 616 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616번이 우리의 행성 번호 606번과 유사성이 있다는 점에서, 성경 기록은 아마도 멜기세덱이나 예수님이나, 혹은 어떤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있었던 루시퍼 반란과 행성에서의 혼란을 사람들에게 계시로서 들려준 이야기를 반영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일명 도마 복음이라고 알려진 이 파피루스가 다른 성경 기록보다 훨씬 앞선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도 증명되는데도, 성경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이제 와서 666 에서 616으로 악마의 숫자를 바꿀 리가 없으니, 아무런 이유도 배경도 없는 그야말로 뜬금없는 가공의 숫자 666에 온 몸을 떨고 있는 셈이다. 마치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보고, 저 혼자 괜히 바짝 긴장하며 얼어붙는 모습이다. 

 

그러나 616 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고, 숫자에 연관된 여러 배경을 들어보려는 마음만 가진다면, 666 대신에 나타난 이 새로운 숫자는 두려움을 주는 것에서 벗어날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616이 행성번호와 연관된다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지 모르지만, 숫자에 속박된 신앙에서는 벗어나는 계기가 되리라 본다. 

 

유란시아를 읽은 독자들에게는, 606 이라는 숫자는 사타니아 체계의 우리 행성이 파란만장한 반역과 영적 혼란을 겪었다는 사실을 재인식하게 만들고, 한편으로는 606번 행성이 창조자이신 예수님이 직접 육신화하는 행성으로 선택되었다는 점도 떠 올릴 것이다.

 

과학의 발전으로 새로운 사실이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참된 진리가 시공간을 넘어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진리를 실감하게 된다. 진실이 감추어질 수 없다. 진실은 사람의 힘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힘으로 지키려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진실이 될 수 없다. 진실은 그 자체가 스스로를 지키는 법이다. 

 

악마와 관련되었다는 666 숫자의 성경 기록은 616 이라는 숫자였다면, 이것은 나아가 악마로 불리는 행성영주가 한때 반란을 일으킨, 그 이후에 예수님이 참된 진리를 남기시고 진리의 영을 부어주신, 우리 행성의 번호와도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이 영광의 행성에서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영적 혼란과 방황을 수많은 천사들이 온통 관심을 갖고 주의 깊게 살피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좀 더 자세하게 들으려고 한다면, 진리의 영이 이끄는 진리의 세계는 활짝 열리겠지만, 스스로 거부한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한시바삐 마음을 열고 두려움에서 깨어나, 참된 진리의 세계에서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과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기를 기원한다.  

댓글목록

자연인님의 댓글

자연인 작성일

많은 공감이 가는 글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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