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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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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현 작성일17-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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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감정의 수렁 속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더욱 깊이 빠져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유롭지 못함을 알면서도 왜 스스로 채운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수렁의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일까요. 포기하거나 변명하려는 원인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알고만 있다면 수렁에서 벗어나 푸른 하늘로 높이 솟아오를 수 있지요. 자아를 정복하는 문제는 위대한 업적을 성취하는 문제입니다.

  

실패의 괴로움과 좌절이 단지 기억이나 체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과거의 잔상 때문만은 아닙니다. 마음에 밝은 빛이 들어서지 못하는 수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마음의 본질을 이해할 때, 모든 어두움은 물러가고 수많은 삶의 도전은 오직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여러 스트레스에 혹은 삶의 무게에 억눌러 벗어나고 싶거나, 그로부터의 탈출에서 반복적으로 실패하고 있다면 새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소용없이 노력을 거듭하는 것은 모든 것을 점점 경직시킬 뿐입니다.

  

잠재된 자신의 힘을 과신하고, 생각에 생각을 더하면서, 그 잠재된 에너지를 실제화하려고 자신의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다면, 그리고 탈진될 때마다 일시적인 수단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채워가고 있다면, 에너지 소비자의 삶을 살 따름입니다. 잠재된 에너지는 소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에너지입니다. 자신 안에 잠재된 에너지의 영원하고 완전한 참된 근원을 알게 된다면, 소모와 충전의 반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세월의 낭비도 사라집니다.

 

왜곡되고 정체된 일상에서 벗어나 올바르고 활기찬 삶을 위하여 절대자의 은총이나 전능자의 은혜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은 소망만 간직한 채, 언제나 불완전한 현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전능자의 은혜와 은총이 숨겨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실수와 실망과 실패의 그림자는 다시는 의식을 지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발견할 수 없었던 그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당당하게 출발했던 고귀한 이상이, 불가능의 벽에 부딪혀 더 이상의 활로가 보이지 않을 때, 고통에서 벗어나라는 은밀한 유혹 때문에, 편안하고 행복한 길로 생각을 바꾸거나 다른 길로 인도하는 가르침에 이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점점 더 낮은 의식에서 위로를 찾는 퇴행적 관습으로 변하게 만듭니다.

 

진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의 참된 진리를 발견할 수 없을 때, 벽을 훌쩍 뛰어넘어 그 한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평으로 도약할 힘을 유란시아 계시가 주고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책을 읽었던 유란시아 독자로서, 책에 대하여 궁금해하시는 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댓글목록

코너킥님의 댓글

코너킥 작성일

자기 본분을 다하며 성실하게 사는 것이 최상의 삶이라고 알고, 남을 공경하면서 사회 질서를 지키는 것이 정의로운 세상을 이룩하고 그것으로 문명이 발전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지 세상에서의 진리이겠지요.  이러한 삶은 이상적인 삶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런 진리를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괴로움과 슬픔도 질서와 정의가 무너졌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으로 믿고 있지요.

이처럼 진리가 세속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현실이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 요즘에는 정의는 고사하고 질서마저도 지키는 게 어려울 정도가 되었지요. 세속적인 진리는 세상이 발전하기는커녕 날로 심해지는 갈등과 혼란을 해결하는 데에 급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겨우 해결하면, 내일은 새로운 문제가 또 부딪칩니다.

새로운 진리를 찾는 분들도, 절실한 마음으로 열심히 찾긴 하지만, 잘못된 현실을 바로 잡는 세속적 진리에 서로 다른 자신만의 해석을 하기 떄문에, 충돌이 사라지지 않고 근원적인 진리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유란시아 책에서 따르면, 사실 도덕성 회복이나 정의 구현에는 참된 진리가 필요 없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지능과 정상적인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사회도덕과 질서 의식의 회복은 충분히 성취될 수 있습니다. 정의의 구현마저도 양심과 도덕심으로 가능합니다. 굳이 참된 진리가 필요없고, 우주를 끌어 안는 하느님이 진리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유란시아 책을, 세속적인 도덕성 회복이나 정의 구현의 목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어떤 분은 초문명 세계를 이룩하는 데에, 유란시아 계시가 아주 결정적이라는 말까지 합니다. 세속적 의미의 초문명으로 개화된 우주 문명이나 신비한 외계 문명을 이상향으로 그리워하기도 하지요.

진리는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라는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이 갑니다.
진리는 현실의 악을 물리치거나 도덕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전혀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것이겠지요. 진리는 악이나, 괴로움이나 갈등과 혼란에서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과 전혀 관계없이 전혀 새로운 사실로 발견되는 것이지요.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더욱 참된 삶을 살거나 영원한 삶을 소망하기 때문에 진리를 찾거나 종교를 믿습니다. 서서히 자리를 잡는 신앙은 체험적인 것이라서 시간이 걸리는데, 그 과정에서 방황과 실망을 하기 마련입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심한 갈증이 없으면, 마음은 진화하려는 선천적 본성이 있기 때문에 더욱더 나은 것을 찾아서 움직입니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종교적 신앙이 진화적인 특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서, 계시마저도 계시로 이해하기보다는 진화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진화적인 마음을 소유한 자들로 하여금 진보되고 계시된 진리를 갑자기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것이다. 인간은 진화적인 창조체며 대체적으로 진화적인 기법에 의해서 자기 종교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92편]

네오님의 댓글

네오 작성일

도덕성 구현에 굳이 하느님의 진리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 공감이 갑니다. 참된 진리를 갈망하는 개인의 소망도 점점 늘어가고 있지만, 점점 어둠에 싸인 사회 분위기가 적은 진리마저도 빛을 발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절박함이 커지는게 아닐까요. 외국은 어떤지 몰라도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지, 고도로 위장된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여 세상을 휘젓는데도 아무도 나서지를 못하고 너나없이 방임하고 있습니다. 이미 어둠이 깔려 있다는 증거겠지요. 도덕성 퇴화는 물론이고, 근본과 사실을 직시하는 지능도 퇴행을 겪는 것이고요.

인간하고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엄청나고 신성하고 순수한 능력을 지닌 물질 아들의 후손도 에덴동산의 가라앉은 분위기 때문에, 영적 깨달음은 고사하고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어둠에 잠긴 사회에서 과연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분들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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